여행-삼대악산 (2010)

삼대악산 - 23 지리산 (번외편)

좀좀이 2011. 11. 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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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함양 백무동 코스 입구에 도착했어요. 칠흑 같은 어둠...까지는 아니었어요. 가로등도 켜져 있었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내려서 랜턴을 켰기 때문에 그다지 어둡지도 않았어요. 버스가 계속 들어오는데 들어오는 버스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어요. 외롭고 무서운 새벽 산행이 아니라 북적대고 정신없는 새벽 산행이 되겠구나.


슬슬 속도를 내서 걸었어요. 여기도 비가 꽤 많이 왔다고 했어요. 한참 가다가 조금 쉬고 한참 가다가 조금 쉬고 하다 보니 어느새 선두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조금 가다보니 뭔가 보였어요. 읽어보니 백무동에서 세석으로 가는 길은 비가 많이 와 길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입장을 통제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바로 가는 길로 가야 했어요. 사람들이 이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궁금해 했어요. 그래서 표지판에 세석으로는 길이 유실되어서 통제되었다고 알려드리고 다시 산행을 계속했어요.


길 옆에서 계곡물이 불어서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하지만 보이지는 않았어요. 정말 어두웠어요. 랜턴으로 계곡을 비추어 보았지만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걸었어요.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랜턴 불빛에 의지해 길만 가니 확실히 속도가 빠른 것 같았어요. 앉아서 쉴 때마다 초코바와 소시지를 두 세 개씩 먹었어요. 그렇게 한참 올라갔어요. 드디어 랜턴을 안 켜도 앞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니 아침 7시였어요. 일단 도착 시간은 매우 좋았어요. 장터목 대피소 벽에는 등산 코스 지도가 붙어 있었어요.



나쁘지 않은 속도. 여기에서 라면이나 하나 사먹고 30분쯤 쉬다가 천왕봉에 올라갈 계획이었어요. 제 계획대로 장터목까지는 올라왔기 때문에 이제 제 계획대로 쉴 차례가 되었어요.


이런 반전이!


라면은 팔지만 끓이는 것은 너희 몫!


순간 비참해졌어요. 돈이 있는데 왜 라면을 못 먹니! 나는 패배자, 다른 사람들은 승자. 사람들이 도시락을 까먹고 라면을 끓여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안 좋아졌어요.


그냥 정상까지 달려버리자!”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 입구. 저 맛있는 냄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열심히 걸었어요. 라면을 못 사먹어 분한 마음이 들자 힘이 저절로 생겼어요.



그 유명한 지리산의 고사목! 너는 사진을 찍어주겠어! 지리산 고사목 사진을 찍고 계속 올라갔어요. 혹시나가 역시나였어요. 설악산, 치악산, 월악산 갔을 때에도 날씨가 안 좋아서 주변 풍경 본 것이 없는데 지리산도 날씨가 안 좋아서 주변 풍경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저에게 웅장하고 멋진 주변 풍경을 허락해준 산은 오직 한라산, 속리산, 남해 금산.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서 본 제주시와 제주시 앞바다, 남해 금산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이런 산을 타며 좋은 경관을 보는 재미는 이제 대과거가 되었어요. 어떻게 된 게 산에 갈 때마다 좋던 날씨도 나빠져서 제대로 된 경치를 보지 못해요. 치악산, 월악산은 그렇다 쳐요. 지리산도 그렇다 쳐요. 이 셋은 날씨가 안 좋은데 간 거니까요. 설악산 갈 때는 밤에 별이 초롱초롱 떴어요. 그러나 정상갔더니...



힘내자! 열심히 걸었어요. 예상 도착시간은 9시였지만 시간을 단축할 생각이었어요.



지리산 통천문. 저 문을 통과하면 천왕봉이다! 길이 가팔라졌지만 쉬지 않았어요. 모든 피로를 라면에 대한 분노로 이겨냈어요. 내가 후딱 내려가서 라면 하나 사먹고 만다. 산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같이 우루루 출발했는데 대부분은 장터목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어요. 오히려 편했어요. 왜냐하면 어두컴컴할 때 바짓가랑이가 찢어졌거든요. 그래서 쉴 때도 조신한 자세로 쉬고 올라갈 때도 바지가 찢어진 것이 티 나지 않도록 얌전히 올라갔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아주 신나게 성큼성큼 올라갔어요. 바짓가랑이가 찢어지니 바지가 다리에 들러붙어도 걸음을 방해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불타는 정신력으로 걸어서 아침 8.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어요.


드디어 올랐다!”


기념 사진을 부탁하고 싶은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간신히 부탁해서 매우 얌전하고 조신한 자세로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카메라로도 찍었고 핸드폰 사진으로도 찍었어요.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 누나들과 친구들에게 문자로 전송하고 바로 집에 전화를 걸었어요.


이 시각에 웬일이냐?”

저 지금 지리산 천왕봉이에요.”

?”


집에서는 제게 산에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결국 지리산 천왕봉에 와 버렸어요.


너 혼자 갔니?”

.”

어떻게 갔어? 버스 대절해서 가는 무리에 참여했니?”


산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께서 저를 걱정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제가 어떻게 갔는지 매우 궁금해 하셨어요. 어머니의 목표는 설악산 등산. 그러나 연세가 있으신 데다 요즘 한라산 등산을 안 하셔서 설악산 등산은 무리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 이른 아침에 아들이 천왕봉에 와 있다고 하자 매우 궁금해 하셨어요.


서울에서 야간 버스 타고 함양 백무동으로 가서 올라왔어요. 지리산 입구까지 버스 가더라구요. 이 정도면 어머니도 올라가실 수 있어요.”


솔직히 백무동에서 바로 장터목으로 올라오는 코스는 힘들지 않았어요. 한라산 관음사 코스보다 쉬웠어요. 한라산 관음사 코스를 올라갈 정도라면 백무동에서 바로 장터목으로 올라가는 코스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어요.


너 조심해서 내려가!”

여기 사람들 엄청 많아요. 아주 득시글해요. 내려가는 사람도 지금 엄청나게 많구요.”

조심해서 내려가라. 집에 들어가면 전화하구.”

.”


내려가는 길은 중산리 코스. 여기는 진주에서 들어가는 코스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법계사가 있는 코스에요. 함양 쪽으로 내려간다면 쉽겠지만 친구랑 진주에서 만나기로 한 것도 있고 원래 계획은 중산리 코스로 올라가는 것이었는 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 법계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중산리로 내려갔어요.



내려가다가 쉬기 좋은 곳이 있어서 바닥에 주저앉았어요. 여기에서는 풍경이 조금 보였어요. 이제 구름이 슬슬 걷히고 있었어요. 잠시 바닥에 드러누워 햇볕을 쬐다가 다시 내려가기 위해 일어났어요.


? 왜 여기 길이 막혀있지?”

그쪽 아니에요. 이쪽이에요.”


한 아저씨가 제가 가려는 쪽이 아니라고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열심히 갔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어요. 길이 엄청나게 험해지면서 계속 오르막길이 나왔어요.


고개 하나 넘어가나?’


그러나 이건 고개 하나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가도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는 것이었어요. 한참 가다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기요...여기서 중산리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하나요?”


충격적인 사실...저는 다시 천왕봉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이때부터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어요. 예전과 같은 속도는 아니었지만 열심히 달렸어요.



오전 1040. 법계사에 도착했어요. 여기서 완전 기진맥진했어요. 그래도 왔는데 한 번 들어가 보기는 하자는 마음에 법계사에 들어갔어요.


여담이지만 이 여행기를 작성하며 법계사 위치를 찾아보았어요. 그런데 백과사전에서는 1400m에 위치해 있다고 하고 다른 대부분의 인터넷 검색 결과에서는 1450m에 위치해 있다고 나왔어요. 그렇다면 약 50m 차이. 아무리 백과사전에서는 법계사 입구를 기준으로 잡고 대부분의 인터넷 검색 결과에서는 법계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건물 높이를 기준으로 잡았다고 해도 50m 차이라면 뭔가 큰 차이에요. 말이 50m이지 이 정도면 15층 건물 높이이고, 산에서 50m 차이면 어마어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차이. 하나가 맞고 하나가 틀렸다는 건가? 한 번 엉터리 계산을 해 보았어요. 일단 높이가 50m이니까...sin60이면 빗변이 57.7m이네? 그런데 경사각이 60도면 이건 건물을 세우는 게 아니라 아마 다 굴을 파놓아야겠지? 대웅전이 아니라 대웅굴, 삼신각이 아니라 삼신굴, 이런 식으로...sin30이면 빗변이 100m. 오차가 50m 나도 괜찮을 듯 하네요. 하여간 법계사의 정확한 해발고도는 여전히 미스테리.


법계사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커피 자판기. 여기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비록 500원이었지만 충분히 수긍되는 가격. 한 잔 뽑아 계단에 주저앉아 절을 둘러보았어요. 이 절을 다 돌아다닐 필요가 있을까? 다리가 너무 아팠어요. 멍청하게 중산리 코스로 기어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바람에 이미 다 내려갔을 시간에 법계사에 도착했어요. 조용히 법계사 풍경을 음미하며 커피를 마셨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 평화로웠어요.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 하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웠어요.


가자.”


열심히 걸어 내려갔어요. 라면에 대한 분노는 잊었어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열심히 달렸지만 제가 타려고 했던 버스는 놓쳤어요. 그래서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이제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어요. 법계사에서 중산리 입구까지 가까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지도 않았어요.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는데 입구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계속 걸었어요. 어쨌든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 진주로 가야 했으니까요. 드디어 중산리 코스 입구에 도착했어요.


다 내려왔다!”


그런데 버스 타는 곳이 보이지 않았어요.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버스 타는 곳은 없었어요. 여기서 버스 타고 진주 가는 거 아닌가? 공원 관리소 직원분께 여쭈어 보았어요.


버스는 저쪽 길로 내려가셔야 해요.”


신발이 진흙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에 수돗가에 가서 신발의 흙을 닦아냈어요. 진흙을 쉽게 떼어 내라고 컴프레서가 비치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컴프레서로 진흙을 떼어내려는데 오히려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수돗가에서 물로 대충 씻어냈어요.


다시 걷기. 중산리 코스 입구에서부터 버스 정류장까지는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어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 걸어서 내려가야 했어요. 여전히 지리산의 정상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어요. 계곡을 바라보았어요. 거대한 바위도, 작은 바위도 모두 둥글둥글했어요. 날카롭고 힘이 느껴졌던 설악산의 계곡과는 전혀 달랐어요. 푸근한 인심을 보여주는 듯 했어요. 그런데 왜 나한테 정상에서 보는 장관은 안 보여주는데? 푸근한 인심 같이 부드러운 계곡의 바위들은 아무 말 없었어요. 다시 지리산을 바라보았어요. 확실히 설악산과는 달랐어요. 설악산이 날카롭고 힘이 넘치는 모습이라면 지리산은 왠지 푸근한 느낌.


중산리 코스로 내려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 다시 기어 올라가는 경험을 한 덕분에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되었어요. 지리산 천왕봉 당일치기 코스인 함양 백무동 코스와 산청 중산리 코스 (진주 중산리 코스) 가운데 확실히 백무동 코스가 쉬웠어요. 중산리 코스는 당일치기이기는 하나 매우 힘든 코스였어요. 백무동으로 오르는 등산객들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중산리로 오르는 등산객들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가득했어요. 둘 다 올라가 보았어요. 정상 거의 다 가서 내려왔으니까요. 만약 다시 지리산을 당일치기로 가게 된다면 그냥 백무동 코스로 갈 거에요.


버스 정거장까지 와서 버스를 타고 진주로 갔어요. 진주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에게 연락했어요. 친구는 여자친구와 어딘가에 있는데 혹시 제가 그쪽으로 올 수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됐다. 여자친구랑 재미있게 보내.”


일단 진주는 엄청나게 더웠어요. 역시 분지 지역. 그리고 다리가 아프고 너무 힘들어서 더 돌아다니는 게 무리였는데 진주 버스 노선은 당연히 몰랐어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돌아다녀 친구가 혹시 올 수 있냐고 물어본 곳까지 갈 힘이 남아있지 않았어요.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무리하게 내려오다가 생긴 다리의 통증 때문에 걷는 것은 할 수가 없었어요. 친구에게 여자친구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라고 한 후, 절룩거리며 표를 사고 버스에 올라탔어요. 버스는 교통 사정상 이상한 길로 들어가서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어요. 차가 엄청나게 막혀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어요.


버스 안에서 정신없이 잤어요. 한 번 눈을 감자 그제서야 피로가 올려왔어요. 함양 백무동행 버스표 구하는 순간부터 진주에서 서울 올라가는 버스에 오르기까지 제대로 쉬지를 못했어요. 항상 설렘과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그것들이 사라지자 그냥 잠이 쏟아졌어요.


집에 돌아왔어요. 샤워를 했어요. 다리가 아파서 파스를 붙였어요. 그리고 드러누웠어요. 깊이 잠들었어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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