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7화

좀좀이 2017. 8. 2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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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시원하지 않다. 부채질로 만든 바람조차 뜨겁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울까? 그래도 나는 실내에서 일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창밖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저 사람들은 정말 엄청나게 덥겠지? 이렇게 실내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더운데. 그래도 저 사람들보다는 내 처지가 낫다는 생각을 하며 참아보려 하지만 더운 것은 더운 거다. 지금 에드자에서 어디에 있든 다 덥겠지? 냇가에 있는 사람들은 덜 더울 건가?


 '새벽에 비라도 내릴 것이지.'


 비라도 한바탕 퍼부었으면 좋겠다. 비가 퍼붓고 나면 더위가 많이 사그라들텐데. 이왕이면 새벽에 말이야. 정확히는 서점 문 닫은 후부터 서점 문 열기 전까지 그 사이에 비가 한바탕 내렸으면 좋겠다. 서점 문 열려 있는 동안 비가 내리면 그거대로 문제니까. 낮에 비가 내리면 창문을 모두 닫아야 한다. 사람들이 들어올 때마다 서점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청소도 힘들어진다. 책 수거하러 갈 때 비가 내리면 정말 최악이다.


 '확 드러누워서 낮잠이나 잘까?'


 이고는 볼 일이 있다면서 내 근무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는데 아직도 안 오고 있다. 더워서 책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심심하기는 엄청나게 심심하다. 정말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축 늘어진다. 졸려서 낮잠을 자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드러눕고 쉬고 싶을 뿐이다. 어서 날이 저물어서 공기나 시원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턱을 괴고 책을 바라본다. 글자가 역시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덮고 의자에 기대었다.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더위 좀 사그라들어라. 더위, 너 때문에 내가 책을 볼 수 없잖아. 너는 내 정신을 녹이고 있어. 네가 녹인 나의 정신은 내 몸 밖으로 땀이 되어 쏟아져나오고 있어.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한 거 아냐? 날 좀 빨리 선선해졌으면 좋겠다.



 서점 문이 여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자세를 똑바로 하고 의자에 앉았다. 서점 문이 열렸다. 루즈카다.


 "안녕하세요."

 "안녕. 잘 지냈어?"

 "예."

 "방학인데 계속 일하느라 답답하지?"

 "아니요. 괜찮아요."


 아무리 봐도 믿기지가 않는다. 어떻게 저런 여자가 이고의 애인이지? 이고의 여자친구로는 너무 과분하다. 이고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고에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지. 이고와 루즈카를 보면 세상에 정말 기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둘이 사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둘이 차이가 나도 보통 차이가 나야 운좋게 만난 거라고 생각이라도 하지.


 "이고 어디 있어?"

 "이고는 잠깐 볼 일 있다고 나갔어요.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안 왔어요."

 "그래? 이 근방 지나가는 길에 잠깐 얼굴 보고 가려고 했는데..."

 "아마 곧 올 거에요.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잠깐 기다렸다 갈까."

 "예, 그러세요."


 의자를 들고 나와 그늘진 곳에 놓았다. 루즈카는 고맙다고 하며 의자에 앉았다. 루즈카는 가방 안에서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기 시작했다. 뛰어난 저주술사도 이런 더위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내가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지금 이 더위부터 어떻게 식혀보겠다. 인간의 상상력이 현실화되는 게 저주술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더위부터 시원해지게 만드는 상상을 하면 안 될까?


 "아, 루즈카, 혹시 치르치나 가본 적 있나요?"

 "치르치나? 거기는 몇 번 가보았어. 그런데 왜?"


 저주술로 더위를 식힐 방법이 없는지 떠올리는 순간 감비르가 치르치나로 순수한 저주술을 찾아 여행가겠다고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감비르가 치롤라까지는 우습게 볼 수 있어도 루즈카는 우습게 보지 못할 거다. 감비르가 루즈카를 알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루즈카는 대단한 저주술사라고 하니 감비르가 섣불리 나대면 제대로 혼내줄 수 있겠지. 그 이전에 루즈카는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확실히 대단한 저주술사라고 하니 치르치나에 대해 더 잘 알 거다.


 "친구가 치르치나로 저주술 수련을 하러 간대요."

 "치르치나? 왜 하필 거기로?"

 "거기에 순수한 저주술이 있대요. 거기 가면 순수한 진리와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나한테 농담하는 거니?"


 루즈카가 내 말에 되도 않는 농담은 하지도 말라는 투로 말했다.


 "농담 아니에요. 진짜에요. 제 친구 중 '감비르'라는 애가 있는데 걔가 말한 거에요. 조만간 순수한 진리와 자유, 저주술을 찾아서 치르치나로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맞는지 몰라서요."

 "걔 좀 이상한데? 거기 그다지 좋은 곳 아닌데."


 루즈카도 치르치나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대체 치르치나는 어떤 곳이길래 치롤라도 루즈카도 다 별로 안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하지?


 "치르치나 어떤 곳이에요?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요."

 "거기? 거기는 좀...그래."

 "예? 어떤데요? 치롤라가 거기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응. 거기는 그런 게 조금 있어."

 "어떤 거요?"


 내 질문에 루즈카는 눈을 가볍게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분위기가 다른 곳이랑 많이 달라. 나중에 네가 가보면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때 마침 블랑쉬블르가 서점에 들어왔다.


 "안녕! 어? 루즈카도 와 있었네!"

 "언니, 안녕하세요!"


 루즈카와 블랑쉬블르가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너 에드자 왔다면서 어떻게 나한테 한 번도 안 찾아올 수 있어? 내가 너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죄송해요. 조만간 찾아가려고 했어요. 정말 바빠서 쉴 틈이 없었어요."

 "아냐, 장난인데 왜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너 언제까지 에드자에 머무를 거야?"

 "저 에드자에 계속 있을 거에요."


 뭐지? 둘이 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친해보인다. 뒤에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장면들을 보면 둘이 원래 친한 사이 같다.


 "언니 아직도 오빠 못 살게 굴어요?"

 "아니야. 내가 네 남자친구를 왜 못살게 굴겠니?"


 저 새빨간 거짓말 봐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맨날 책 잔뜩 빌려간 다음에 반납 안해요. 그래서 이고가 책 수거하러 가면 한참 잡아놓아요."


 내 말에 루즈카가 블랑쉬블르를 살짝 흘겨보았다.


 "루즈카, 아니야. 타슈갈,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걔를 한참 잡아놓다니?"

 "맞잖아요."


 내 말에 블랑쉬블르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깔깔 웃었다.


 "나 걔 안 잡아. 애인도 있는 애를 내가 왜 잡고 늘어지니? 걔한테 물어볼 것이 몇 개 있는데 맨날 지가 대답 똑바로 안 해주고 시간 질질 끌어서 그런 거야."

 "뭘 물어보는데요?"

 "별 건 아니야. 그래도 이고랑 나랑 같은 나라 사람인데 이런 저런 이야기 좀 하자고 하는 거 뿐이야. 얘, 너 때문에 루즈카가 오해하겠다! 그리고 이고가 나랑 이야기하기 참 싫어하는 거 내가 모르겠니? 나도 여기에서 같은 나라 사람 중 그나마 친한 사람이 걔 뿐이라 그러는 거구."


 블랑쉬블르가 루즈카와 나를 번갈아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고는 나를 참 미워하는 것 같아."

 "오빠가요? 설마요. 오빠는 싫어하는 거 거들떠도 안 봐요."

 "알아, 장난이야."


 루즈카가 블랑쉬블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자 블랑쉬블르가 웃으며 장난이라고 말했다. 블랑쉬블르는 참 가볍게 사는 것 같다. 머리 속에 온통 장난칠 방법만 들어차 있나? 연기도 너무 잘한다. 진짜인줄 알고 깜짝 놀래키고는 혼자 재미있다고 깔깔 웃는다.


 그때 이고가 들어왔다. 이고는 루즈카를 보자 밝게 웃으려 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블랑쉬블르가 있는 것을 보자 얼굴이 딱 굳어버렸다. 이고랑 블랑쉬블르에게 장난 좀 쳐볼까? 그동안 이고와 블랑쉬블르가 걸어온 장난에 당하기만 했잖아. 마침 루즈카도 있으니 둘 다 골탕 좀 먹여봐야겠다. 당한 것을 한 번에 갚아줘야지.


 "이고, 블랑쉬블르랑 친해?"

 "아니! 절대 아니야."


 이고가 완강하게 거부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거 봐! 내가 말했잖아."


 블랑쉬블르가 깔깔 웃었다.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어서 깔깔 웃는 건가? 그런데 이고의 저 반응이 아무리 자기 말이 맞다는 증거라 해도 직접 들으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을 거 같은데. 어쨌든 자기 안 좋아한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블랑쉬블르는 이고의 반응에 좋다고 깔깔 웃고 있다. 블랑쉬블르가 속이 좋은 건가, 아니면 블랑쉬블르도 이고를 싫어하는 건가?


 "아예 친구가 아니야?"

 "그건 아니구. 친구이기는 하지만 아주 나쁜 친구지."

 "나한테 너는 아주 재미있는 친구인데?"

 "둘이 그만해요!"


 루즈카가 이고와 팔짱을 끼며 블랑쉬블르와 이고에게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라고 말했다.


 "너 지금 애인이라고 편들어주는 거야? 애인 없는 사람 억울해서 살겠나!"


 블랑쉬블르가 깔깔 웃으며 큰 소리로 루즈카에게 놀림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아, 타슈갈, 너 이 누나랑 사귈래? 쟤네들 자기들끼리 연인이라고 티내는 거 눈꼴시리지 않아? 누나가 잘 해줄께, 확 나랑 사귈래?"


 뭐? 이 누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갑자기 나한테 사귀자는 거야?


 "아...아니요."

 "장난이야, 너까지 왜 이래? 나 연하 취향 아니야!"


 블랑쉬블르가 내 반응이 너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어댄다. 진짜 블랑쉬블르는 사람 머리 아프게 하는 것에는 특이한 재주가 있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어떻게 사귀자는 말을 저렇게 장난으로라도 쉽게 이야기하지? 내가 '예'라고 대답해버리면 그 민망함을 어떻게 감당하려구? 그냥 생각이 없는 건가? 앞에 어떤 일이 발생할 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사나? 책도 열심히 읽으면서 그렇게 살 거 같지는 않은데 참 희안한 사람이다.


 "너네 여기는 왜 왔어?"

 "너랑 할 이야기 있어서."

 "오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나가서 이야기하자."


 이고가 블랑쉬블르와 루즈카에게 일단 서점에서 나가자고 이야기했다. 둘이 하는 이야기를 내가 듣는 것이 썩 내키지 않나 보다. 여기에서 셋이 떠들어도 별 상관은 없는데. 오히려 셋을 구경하며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둘을 데리고 나갈까? 사실 내가 못 알아듣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대륙공통어나 아드라스어로 대화를 나누면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블랑쉬블르와 이고가 대화를 나눌 때 둘은 아드라스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둘의 대화 내용은 거의 못 알아듣는다. 반면 루즈카와 이고가 대화를 나눌 때 둘은 마딜어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나도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루즈카는 대륙공통어는 모르겠지만 아드라스어는 알지 않을까?


 "내가 맛있는 케이크 파는 찻집 아는데 우리 거기로 가자. 거기 케이크 정말 부드럽고 촉촉해!"

 "언니가 맛있다고 하는 곳이면 정말 맛있는 곳이잖아요! 우리 거기로 가요."


 블랑쉬블르의 말에 루즈카가 기뻐하며 거기로 가자고 했다. 블랑쉬블르가 웃으며 이고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네가 사. 네가 나가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잖아!"


 블랑쉬블르가 이고와 루즈카를 데리고 서점 밖으로 나갔다. 이고 표정이 참 떨떠름한 표정이다. 그래도 아마 이고가 돈 내겠지? 케이크가 얼마나 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고가 그거 사줄 돈도 없지는 않을 테니까.


 "타슈갈, 너는 이 아름다운 누나랑 데이트하게 되면 그때는 내가 케이크 사줄께!"


 블랑쉬블르가 서점을 나가려다 뒤돌아서서 나를 보며 외쳤다. 그러지 마세요. 분명히 장난이겠지만 당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정말 당황스러워진다구요. 마음 같아서는 확 '예, 나중에 데이트해요!'라고 확 맞받아쳐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고가 아주 두고두고 놀려먹겠지. 블랑쉬블르도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구. 블랑쉬블르가 놀려먹는 거야 괜찮다. 어차피 서점에 그렇게까지 자주 오지는 않고 와도 책 빌리고 돌아가니까. 하지만 이고와는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한다. 도망갈 방법도 없다. 이고가 막 '야, 너 블랑쉬블르랑 데이트하고 싶대메? 내가 말해줄까?' 이렇게 놀려대면 정말 최악일 거다.



 이고는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서점으로 돌아왔다.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네?"

 "응."

 "이고, 루즈카랑 블랑쉬블르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어?"

 "걔네? 걔네 자기들끼리 잘 놀아."


 이고는 별로 이상할 것 없는 거라 신경쓸 필요도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블랑쉬블르가 너 진짜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런데 루즈카가 가만히 있어?"

 "뭐?"

 "그렇잖아. 툭하면 너 잡아놓고 한참 이야기하자고 하는 거 같은데. 서점에 너 보러 놀러오기도 하구."


 이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저게 진짜 웃는 걸로 보이냐?"

 "응?"

 "되었다. 나 책 수거하러 간다."


 이고는 도서 카드를 챙기고 지게를 짊어졌다.


 "블랑쉬블르는 그냥 마음 가는대로 즐겁게 행동하는 거 아니야?"

 "글쎄다. 뭐 그럴 수도 있구. 내가 걔 속을 어떻게 알겠냐? 하여간 사람 참 귀찮게 하는 데에는 아주 타고난 애야."


 이고가 지게를 짊어지고 밖으로 나갔다. 루즈카는 진짜 속도 좋아. 블랑쉬블르가 대놓고 이고한테 좋아하는 티 팍팍 내는 거 같은데 그걸 또 알면서 가만히 놔두네. 그나저나 블랑쉬블르는 진짜 세상 편하게 산다. 돈도 많은 거 같던데. 그래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도 막 하고 장난도 막 치면서 사는 건가? 블랑쉬블르는 여기가 한없이 재미있는 곳이겠지? 나도 저렇게 생각없이 신나게 살고 싶다. 그래서 이고가 블랑쉬블르를 더 싫어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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