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5화

좀좀이 2017. 8. 18.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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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고가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거다. 이고가 세수하라고 물을 길어왔다. 이고가 갑자기 왜 이러지? 무슨 계시라도 받은 건가?


 "야, 시험 잘 봐라!"

 "고마워. 나 오늘 시험친다고 물까지 떠온 거야?"

 "어. 잠은 똑바로 깨고 시험쳐야 할 거 아냐? 전력을 다 해서 시험쳐도 될까 말까잖아."


 이고가 떠온 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잠기운이 조금 가신다. 오늘 시험 잘 치를 수 있을까? 아다비아도, 라키사도 모두 내가 간절히 믿고 노력하면 분명히 낙제만은 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렇게 시험을 치러 갈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다비아와 라키사 덕분이다. 아다비아가 거의 매일 서점에 와서 내 공부를 도와주었고, 라키사가 나와 같이 서점으로 가는 길에 그날 배운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주곤 했다. 이 도움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단어 몇 개 해석한 후 무슨 말인지 감을 못 잡고 넋놓고 앉아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겠지. 그리고 시험은 당연히 치러 가지 않았을 거다.


 세수를 하고 가방을 챙겼다. 아, 오늘 지금 시험 보러 가는 길이지! 가방을 챙겨서 들고 갈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학교로 가서 도착해서 책을 볼 시간이 몇 분 될 리도 없잖아? 주머니에 펜이나 집어넣고 가면 되지 않을까? 잉크병이나 챙기구. 그래도 가방을 안 들고 학교를 가지니 상당히 허전하다. 게다가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을 빠뜨린 느낌이 든다. 무엇을 빠뜨린 걸까? 가방에서 책을 빼는 순간 떠올랐다. 아다비아가 번역해준 답안지! 아직 완벽히 외우지는 못했다. 밤새도록 그 답안지를 외우다 잠들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외웠다. 답안지를 작성할 때 몇몇 부분 잘못 적는 것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리고 라키사가 봐준 답안지도 있다. 이것은 마딜어로 작성했기 때문에 내용만 똑바로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라키사가 이 정도 내용이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아직 어떤 것으로 답안지를 작성할지 정하지는 못했다. 일주일간 고민했지만 정작 아다비아 것으로 작성할지 라키사 것으로 작성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둘 다 적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거 한 숟갈 먹고 가!"

 "뭐야?"

 "뭐긴 뭐야? 꿀이지. 찐득하니까 찰싹 붙을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입학시험 쳐?"

 "그러면 떨어지라고 빌까?"

 "고마워."


 이고가 조그만 단지와 숟가락을 건네주었다. 단지 안에는 누르스름한 꿀이 들어있었다. 꿀 속에 석청이 생겨서 석청을 긁어서 한 숟갈 푹 떠서 먹었다. 이건 너무 달다. 목이 탄다. 물을 한 컵 벌컥이며 마셨다. 이고가 깔깔 웃는다. 내가 괴로워하는 거 보고 싶은데 건수 잡았다고 먹인 거 아니야? 그럴 리야 없겠지. 꿀 가격이 얼마인데. 이고에게 정말 고마웠다. 나 때문에 꿀을 산 것이 티가 났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누가 건드린 티가 없는 깔끔한 단지일 리가 없지.


 "야, 이건 시험 시작 직전에 입 안에 넣어."

 "이건 또 뭐야?"

 "보면 몰라? 애들 빨아먹는 사탕이잖아."


 이고가 엄지손톱 크기만한 사탕을 세 알 주었다.


 "이걸 왜 시험 시작 직전에 입 안에 넣어?"

 "단 거 먹어야 머리 잘 돌아가잖아. 너 머리도 나쁜데 그 머리조차 안 돌아가면 어떻게 하냐?"

 "아, 진짜! 그나저나 왜 세 알이야?"

 "아다비아랑 라키사한테도 한 알씩 주라고. 걔네들이 도와줘서 너 오늘 시험치러 가는 거 아냐? 이거 비싼 거야. 이거 사려고 어제 중앙학문연구소까지 다녀왔다구."

 "이거 막 축복이 깃든 사탕이야?"

 "그럴 리가 있냐? 그냥 비싼 사탕이야. 걔네들이라면 보면 알 거다. 멍청하게 내가 사줬다고 하지 말구."

 "고마워. 무슨 내 인생 최고로 중요한 시험 치러 가는 거 같네."

 "그러면 아니냐? 낙제냐 아니냐 고민하면서."


 이고가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탁 쳤다. 나도 웃으며 집에서 나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참 덥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9월에 또 이렇게 아침에 이 길을 걸을 일이 있을까? 오늘 시험을 최대한 잘 보아서 낙제만은 피해야 9월에 이렇게 걸을 텐데. 9월의 아침은 이렇게까지 덥지는 않겠지? 땀을 아무리 닦아도 계속 흘러내린다. 아침에 세수하고 머리감고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정신 못차리면서 이 길을 걸었을 거야. 그저 덥다고 짜증만 바락바락 내면서 걸었겠지.



 아다비아와 라키사가 말한 것이 시험에 나올까? 시험 준비는 정확히 아다비아와 라키사가 말해준 '의미는 완벽히 전달될 수 있는가'만 했다. 다른 문제가 나온다면 아예 답안지를 작성할 수 없다. 다른 문제가 나와도 답안지에는 의미가 완벽히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적고 나오겠지. 아다비아의 견해와 라키사의 견해 중 어떤 것을 택할지 정하기 이전에 일단 문제가 둘이 공통적으로 말했던 의미가 완벽히 전달될 수 있는지여야 한다. 그래야 선택의 문제가 조금이라도 중요해진다. 만약 문제가 그게 아니라면 어떤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낙제는 확정이다.


 그래도 믿자. 아다비아와 라키사가 똑같이 그 문제가 나올 거라고 했잖아. 1등과 2등이 문제에 대해서는 똑같이 말했다. 둘 다 그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준비할 거라고 말했다. 감비르가 시험 문제로 의미가 완벽히 전달될 수 있다고 말했다면 반신반의했을 거다. 감비르나 나나 아는 게 없으니까. 감비르가 이게 시험 문제로 나올 거라고 이야기했다면 또 대충 적당히 아무 거나 하나 찍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이것을 이야기한 것은 라키사와 아다비아다. 교수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인정한 우리 전공 1등과 2등의 예상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나올 확률이 아주 높다는 거다. 그래, 지금은 라키사와 아다비아의 말을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의미를 완벽히 전달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만 집중하자.



 아다비아가 작성을 도와준 답안을 쭉 읽으며 걸어갔다. 교문에 가까워졌을 때 아다비아와 라키사가 보였다. 아다비아가 작성을 도와준 답안지를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아다비아와 라키사는 사이좋게 웃으며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시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저렇게 밝고 가벼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을텐데.


 "아다비아, 라키사, 이 사탕 받아."

 "어머, 네가 이런 것도 알아?"


 아다비아가 신기한 행운이 일어나서 신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준 사탕을 받았다.


 "고마워. 잘 먹을께."


 라키사가 수줍게 미소지으며 사탕을 받아 어떻게 생긴 사탕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이거 네가 사온 거 맞아?"

 "응."

 "설마! 너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아다비아가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살짝 흘겨보며 계속 내가 사온 거 맞냐고 물어보았다. 이고가 알려준대로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다비아가 활짝 웃었다.


 "네가 이런 사탕을 사서 주다니 정말 안 믿겨! 이거 꽤 비싼 건데!"

 "그러니까. 나도 타슈갈이 이걸 우리한테 준다니 신기해. 이거 구하려면 중앙학문연구소쪽으로 나가야 할 텐데."


 얘들은 이 사탕 아나보네? 나는 그냥 평범한 사탕인줄 알았는데. 이고가 중앙학문연구소 쪽까지 가서 사왔다고 했을 때 무슨 사탕을 거기까지 가서 사오나 싶었다. 동네에 사탕을 파는 가게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멀리 떨어진 중앙학문연구소까지 갔다 와? 이고라면 분명히 거기까지 마차를 타고 다녀왔을 리가 없다. 이 싹싹 더운 날에 거기까지 꾸역꾸역 걸어갔다 돌아왔겠지. 좋은 사탕이라서 일부러 거기까지 가서 사온 건가? 사탕 한 알을 빨갛고 노랗고 초록색으로 여러 그림이 그려진 알록달록한 종이로 포장한 것으로 보아 비싸기는 한 것 같은데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다. 사탕이 사탕이지.


 "너는 안 먹어?"

 "내 것도 있어. 시험 전에 하나 먹으려고."

 "아, 단 거 먹으면 머리 잘 돌아간다고 구해왔구나! 우리 시험 전에 다 같이 입에 넣을까?"

 "그래. 타슈갈이 우리 시험 잘 보라고 구해온 거잖아."


 아다비아와 라키사가 웃으며 사탕을 계속 바라보았다. 둘 다 사탕이 매우 만족스러운가보다. 뭐가 특이한 사탕이지? 이따 집에 돌아가서 이고에게 무슨 사탕이냐고 물어봐야겠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강의실에 맨 앞에 네 자리가 비어 있다. 나머지 자리는 전부 다른 학생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셋이 나란히 앉았다. 남아 있는 공석 한 자리는 누구의 자리인지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감비르는 결국 시험에 안 들어오는구나. 생각해보면 감비르가 시험을 보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지. 그날 이후 수업을 한 번도 안 들어왔는데 시험은 쳐서 뭐해. 그렇다고 따로 혼자 독학을 한 것 같지도 않고. 감비르는 이 시각에 혼자 저주술 수련한답시고 뭔 헛짓거리를 하고 있겠지? 내가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감비르가 저주술 수련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시간을 형편없이 낭비하는 것일까? 아마 감비르겠지? 나는 분명히 이 시험을 통과할 거니까. 아니, 반드시 통과한다. 무조건 통과할 거다.


 "우리 이제 사탕 먹자."

 "그래."


 라키사가 사탕을 먹자고 말했다.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포장을 풀렀다. 사탕은 빨갛고 노롷고 파랗고 초록색이다. 여러 색이 뒤섞여 있다. 색이 화려한 것은 확실히 인상적이다. 마딜 땅에 이렇게 화려한 색깔을 가진 사탕이 있었나? 인파사에서도, 그리고 에드자에서 내가 돌아다녀본 곳에서도 이렇게 다채로운 색을 갖고 있는 사탕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먹는다고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예쁘기만 할 뿐. 대체 이까짓 사탕이 뭐가 대단하다고 아다비아와 라키사는 이 사탕을 받고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


 사탕을 입에 넣었다.


 '이거 좋은 사탕이 맞기는 하구나.'


 아다비아와 라키사는 사탕을 입에 넣더니 너무나 행복해한다. 생일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꽃을 선물받은 소녀처럼 밝게 미소짓는다. 저렇게까지 열광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좋은 사탕이 맞기는 하다. 색깔만큼 맛도 매우 다채롭다. 여러가지 과일향이 서로 엉켰다 풀렸다 하며 입안에서 흐름을 만들고 소용돌이를 만들어간다. 머리가 좋아질 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확실히 좋아진다. 그러나 아다비아와 라키사처럼 저렇게까지 행복해야할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맛이지만 저 정도로 열광할 것까지는 있을까? 맛있기야 하지만 말이야.



 교수가 들어왔다.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내게도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내게 종이를 주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겠지? 교수가 나를 끝까지 쫓아내지 않았잖아. 그리고 이렇게 종이까지 나누어주었고. 이것은 내가 이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는 좋은 징조다. 믿자. 아다비아와 라키사를 믿자. 나는 통과한다. 분명히 내게 좋은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시험을 통과할 거다. 그리고 다음 학기에 아다비아, 라키사와 함께 계속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거다.


 교수가 칠판에 문제를 적었다.


 잠시만요! 그거 정말 이번 시험 문제 맞나요? 지금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 아니지요?


 시험 문제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교수는 아드라스어로 시험 문제를 적었다. 다행히 교수가 적은 아드라스어를 읽고 무슨 말인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히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시험 문제는 딱 한 문제. 그 문제는 바로 '완벽한 대화란 가능한가'였다. 이 문제라면 자신있어. 어떤 방법을 택할지 선택할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이 시험지에 빽빽하게 답변을 채워넣을 수 있다. 역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애들은 뭔가 다르구나! 분명히 나는 합격한다!


 그런데 누구 의견을 따라야할까?


 아다비아도, 라키사도 내가 작성한 답안지를 볼 수 없을 거다. 그러나 내가 작성하고 싶은대로 답안지를 작성하면 된다. 고민된다. 이고는 정 고민된다면 좋아하는 여자가 알려준 방법을 따라가라고 알려주었다. 사실 '라키사'와 '아다비아'라는 인물을 지우고 생각해보면 완벽한 의미 전달은 불가능하다고 마딜어로 적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는 하다. 아드라스어로 완벽한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고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 또한 매우 괜찮기는 하다. 단지 아다비아가 번역해준 아드라스어로 된 답안지에 사용된 수준의 아드라스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지.


 라키사가 조언해준 방법으로 답안지를 작성하려니 이고의 말 때문에 더욱 아다비아가 신경쓰인다. 아다비아는 지금까지 서점에 찾아와서 내 공부를 도와주었다. 말은 참 밉게 했지만. 라키사도 내게 과제물을 빌려주고 간간이 내 공부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아다비아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준 것은 아니다. 그간의 성의를 생각한다면 아다비아 말을 듣는 것이 맞겠지.


 라키사의 의견대로 완벽한 대화란 가능하지 않다고 적되 아다비아가 알려준 대로 아드라스어로 적으면 되잖아!


 그게 되었으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지. 순간 좋은 생각이라고 떠올랐지만 바로 스스로 어이없어서 속으로 웃어버렸다. 나 스스로 아드라스어로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잖아. 둘에게 도움받은 내용을 갖고 내 생각을 일필휘지로 답안지에 시원하게 쓰면 될텐데. 그게 안 되니까 이렇게 고민하는 거다. 내 능력만으로 아드라스어로 답안지를 작성할 수 없으니까. 아드라스어로 답안지를 작성하려면 아다비아의 의견대로 쓰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다비아의 의견대로 쓰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당장 말 때문에 우리 전공 학생들 사이에서 오해를 가장 많이 받고 미움도 많이 받는 게 아다비아잖아. 아다비아 본인이 완벽한 대화란 가능하다는 아다비아의 의견에 대한 반례다. 그거 썼다가 교수가 점수 확 깎아버리는 거 아니야? 아드라스어 틀린 부분도 많고 내용도 이건 아니라고 하면서? 아니야. 아다비아가 봐준 답지를 그대로 적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지이기는 해. 그런데 만약 내가 여기에서 아드라스어로 답안지를 훌륭하게 작성한다면 교수가 진짜 내가 문제를 풀었다고 인정해줄까? 아무리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고 해도 내 아드라스어 실력을 뻔히 알 텐데? 이 답지를 작성할 수준이 절대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거다. 솔직히 완벽히 외운 것도 아니라 학교로 오는 길에 계속 외우면서 왔잖아.


 '라키사 조언을 따라야겠다.'


 어차피 내가 어떤 답안을 작성했는지는 교수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라키사가 조언한 대로 가자. 아다비아를 더 좋아하는지 라키사를 더 좋아하는지는 좀 더 뒤에 생각하자. 어차피 아다비아든 라키사든 나와 사귈 리 없잖아? 걔네들이 나와 사귀어줄 리도 없고, 내가 걔네들에게 고백할 리도 없지. 이고 말대로 생각해봐도 그래. 아무리 아다비아가 서점에 거의 매일 찾아와서 내 공부를 도와줬다고 하지만 아다비아가 나를 이성으로 좋아하겠어? 그냥 외롭고 심심해서 친구 하나 만드려고 그런 것이겠지. 아다비아에게는 약간 미안하지만 라키사 조언을 들어야겠다. 아다비아가 일일이 번역해주기는 했지만 이것을 완벽히 외우는 것 자체가 내 능력 밖이었다. 아다비아가 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다비아 덕분에 이렇게 마딜어로 답지를 작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잖아.


 라키사가 알려준 대로 답안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마딜어로 작성하는 것이라면 나도 자신있다. 내 모국어가 마딜어인데! 마딜어로 작성하는 것이라면 나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 내 생각이 듬뿍 담긴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다. 완벽한 대화란 불가능하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교실에 아다비아 있잖아요. 걔가 말 때문에 얼마나 오해를 많이 받는데요'라고 적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겠지. 미리 떠올린 사례들을 하나씩 적어나간다. 종이의 여백이 빠르게 줄어들어간다.


 '성공이야. 나는 분명히 이 시험 통과한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에서 나오는데 느낌이 좋았다. 교수가 다른 학생들처럼 내 답안지를 받아주었다. 마딜어로 작성해서 감점을 당하기야 하겠지. 그러나 이고, 아다비아, 라키사 모두 한결같이 내게 해준 조언이 있었다.


 나는 지금 낙제를 모면하는 것이 목표이지, 꼴찌를 탈출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야.


 되도 않는 헛된 꿈을 꾸지 말자. 이것은 현실이야. 될 수 있는 것을 바래야 해. 냉정히 현실을 직시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에 집중하자.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낙제를 면하는 것. 답안지는 잘 작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잘 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험은 끝났다. 이제 교수가 채점할 일만 남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합격이라고 믿는다. 분명히 합격한다.


 벤치에 앉았다. 드디어 첫 학기가 끝났다. 등받이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새파란 빛이 눈에 한가득 담긴다. 시원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쨌든 이제 마무리되었잖아? 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수업후 나 혼자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태운지도 꽤 되었다. 학기 초에는 감비르와 사이좋게 앉아서 신세한탄하며 같이 담배를 태웠는데.


 멀리 아다비아와 치롤라가 보인다. 둘이 매우 친해보인다. 저건 치롤라 머리가 좋은 건가? 아다비아의 뱅뱅 돌려 말하는 것 적응하기 엄청 어려울텐데. 그러고보면 아다비아 친구는 학교 안에서 치롤라와 라키사 뿐인 것 같다. 아다비아는 에드자에서 계속 살아왔다고 했으니 동네 친구나 친한 동창들 몇은 있겠지? 설마 없으려나? 왠지 없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아. 굳이 내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서점까지 찾아온 것으로 봐서는 말이야. 동네 친구가 있다면 학교 끝나고 귀가해서 동네 친구들과 놀았겠지.


 "타슈갈, 나 여기 앉아도 돼?"

 "응. 앉아도 돼. 갑자기 왜 나한테 허락을 물어봐?"


 라키사가 내 옆에 앉았다. 얘는 갑자기 왜 나한테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지? 내가 이 벤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라키사와 나란히 벤치에 앉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벤치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잖아.


 "너 시험 잘 봤어?"

 "최대한 노력했어. 도와줘서 고마워."

 "별로 도와준 것도 없는걸."


 라키사에게 네가 알려준 방법대로 답안지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말이 아다비아 귀에 들어간다면 아다비아가 절대 좋아할 리가 없겠지. 쓸 데 없는 말은 하지 말자.


 "이제 방학인데 너는 뭐 할 거야?"

 "나?"

 "응. 방학이잖아. 고향 안 내려가? 너는 방학이니까 내려가도 되잖아. 묄른이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도 않을텐데."

 "묄른에서 여기 오는 것도 힘들거든?"


 라키사가 나를 살짝 흘겨보았다. 묄른에서 에드자까지 오는 것이 뭐가 힘들다구. 강을 하나 건너기는 해야 하지만 힘든 것은 그 정도잖아? 거리상으로도 에드자에서 내 고향 인파사 가는 것보다 훨씬 가까울텐데. 에드자에서 남동쪽에 있는 묄른까지는 도로 상태도 매우 좋은 편이라고 들었다. 결정적으로 에드자에서 묄른 가는 길에는 산맥을 넘어야 할 일이 없다. 그래, 묄른도 에드자 바로 옆동네는 아니지.


 "그러면 방학때에도 계속 에드자에 머무를 거야?"

 "응. 나는 에드자에서 공부할 거야. 일자리 있는지도 계속 알아볼 거구.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서점에서 계속 일해야지. 그리고 인파사는 정말 멀어! 산맥도 넘어가야 한다구."

 "묄른도 멀어! 너 묄른 가본 적도 없잖아!"


 라키사가 묄른도 에드자에서 멀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누가 묄른이 에드자 옆동네래? 내 고향 인파사보다 훨씬 가기 쉽다는 거지.


 "타슈갈,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무슨 부탁?"


 라키사가 내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라키사가 알려준 방법대로 답안지를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내가 먼저 밥 한 번 사냐고 물어볼까 했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


 "그게...혹시 너희 서점에 일자리 하나 나면 알려줄 수 있어?"

 "내가 일하는 서점?"

 "응. 서점에 일자리 하나 생기면 꼭 알려줄 수 있어? 나도 서점에서 일하고 싶어."

 "그건 어렵지 않지만 서점에서 일하는 거 쉽지 않아. 일 없을 때야 참 쉽지만..."

 "괜찮아. 일해서 돈 벌고 싶어."

 "알았어. 만약 이고가 한 명 더 뽑겠다고 한다면 너부터 추천해줄께."

 "정말이지? 고마워! 꼭 나 추천해줘야해?"

 "당연하지. 너한테 받은 도움이 얼마인데."


 라키사에게 만약 이고가 일할 사람 한 명 더 찾는다고 한다면 꼭 너를 추천해주겠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라키사가 내가 추천해주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매우 기뻐했다. 이고가 일할 사람을 찾으면 라키사를 추천해줘야지. 그런데 과연 이고가 일할 사람을 하나 더 찾을까? 이고 혼자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도 서점에서 나와 이고가 쉬는 날이 있고 한 명이 쉬어도 서점이 별 무리없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굳이 한 명 더 안 뽑아도 될 것 같기는 한데...



 멀리서 치롤라와 아다비아가 갑자기 꺅 소리를 지르더니 정문으로 가는 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쟤들은 왜 손을 흔들지? 둘이 손을 흔드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감비르와 바하르다. 감비르 저 자식은 시험 다 끝나서야 학교에 오네. 학교 올 거면 일찍 와서 종이에 한 글자라도 적어서 제출하지. 감비르는 무조건 낙제다. 시험을 안 보았으니 저건 교수가 구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감비르와 바하르가 치롤라, 아다비아와 함께 나와 라키사가 앉아 있는 벤치로 왔다.


 "감비르, 야, 너 어쩌려구 시험 안 쳤어? 너 이제 낙제야! 지금이라도 교수한테 가서 싹싹 빌고 한 글자라도 적고 나와!"

 "나 이번 해는 버렸다니까? 걱정마."


 감비르는 별 것도 아닌데 유난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1년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흘러가는 것이 별 것 아닌 일이 아닐텐데? 참 속 편하네.


 "우리 중앙학문연구소로 놀러갈래? 아다비아랑 치롤라는 간대."

 "나는 되었어. 서점에 일하러 가야지."

 "나도 괜찮아. 오늘 일이 있거든."


 넷은 약간 아쉬워하더니 방학 잘 지내라고 인사를 하고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중앙학문연구소 한 번 가보지 그랬어?"

 "별로. 거기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아."

 "왜?"

 "그냥.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해. 나 먼저 갈께."


 라키사가 벤치에서 일어나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서점을 향해 걸어간다. 이제 방학이구나. 파란만장한 한 학기를 잘 마무리했다. 최종 성적 발표는 7월 14일. 그때까지는 조마조마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날 필요도 한동안 없다. 방학이라고 이고가 일을 더 하라고 할 리는 없을 테니까.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해야겠다. 그래야 낙제를 모면했을 때 2학기 수업을 무리없이 잘 듣지. 그렇게 기다렸던 방학이야. 잠을 푹 잘 수 있어!


 어제의 햇살과 지금 이 햇살이 다르게 느껴진다. 이 뜨거운 열기를 전해주는 햇볕이 이렇게 기분좋게 느껴질 수가 있다니! 내일부터는 강의실에서 유령 취급 당하지 않아도 돼! 낙제를 모면하든 말든 그 지긋지긋한 소외감과는 끝이다. 내년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과 수업을 같이 듣게 되더라도 교수가 또 유령 취급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 공부를 열심히 할 거구. 두 달이면 실력이 많이 늘지 않을까?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고가 책을 읽고 있다. 아, 아까 그 사탕 물어봐야지!


 "이고, 아까 아침에 준 사탕 말이야."

 "응."


 이고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뭘 대수롭지 않은 것을 물어보냐는 듯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거 얼마짜리야?"

 "그건 갑자기 왜? 막 맛있어? 또 먹고 싶냐?"


 이고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고도 아다비아 말투에 오염되었나, 왜 저렇게 말하지?


 "아니. 아다비아랑 라키사가 그 사탕 받고 엄청 좋아하길래."

 "아마 그랬을 거야."


 이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무슨 사탕이길래 둘이 그렇게 좋아해?


 "그거 무슨 사탕인데? 얼마짜리야? 꽤 비싼 거 같던데."

 "그거 알아서 뭐하게?"

 "궁금하니까 그러지!"


 이고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내가 물어본 것에 대답했다.


 "그거 한 알에 1주므아짜리야."

 "1주므아!"


 1주므아면 나와 이고가 평소에 식당에서 사먹는 30마르라 짜리 저녁 식사를 세 번 사먹고도 10마르라가 남는다. 철로 된 동전인 마르라와는 벌써 단위와 재질부터 달라진다. 주므아는 구리로 만든 동전이고 100마르라가 1주므아니까. 사탕 한 알이 보통 3마르라 정도 하는데 1주므아? 진짜로 비싼 사탕이었잖아! 내가 맨정신으로는 절대 구입하지 못할 사탕이다. 이런 사탕을 맨정신으로 사온 이고도 참 대단하다. 아예 100주므아짜리 은화인 1나르 짜리나 10나르짜리 금화인 1이슈티라키 짜리 사탕을 구해오지 그랬어? 이렇게 비싼 사탕을 나를 위해 세 알이나 사온 것이 매우 고맙기는 하지만 황당하기도 하다.


 "대체 무슨 사탕이길래 1주므아나 해?"

 "그거? 그거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수입해온 사탕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수입했다고 그렇게 비싸?"


 이고가 내 말이 너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그 사탕 얼마나 수입해올 거 같냐? 그거 등짐 지고 여기까지 날라오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탕 한 알에 1주므아는 너무하잖아?"

 "억울하면 네가 남아드라스 공화국 가서 사탕 사오든가."


 아무리 질 좋은 수입 사탕이라 해도 그렇지, 1주므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했다.


 "그리고 선물 줄 거면 확실히 좋은 걸로 줘. 네가 아직도 무슨 동네 꼬맹이인 줄 아냐?"

 "아..."

 "여기 에드자야. 1주므아 짜리 사탕보다 더 기가 막힌 것도 많아."


 지금까지 고향과 에드자가 그렇게까지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고가 아침에 준 사탕 덕분에 고향과 에드자가 상당히 많이 다른 곳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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