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6화

좀좀이 2017. 8. 1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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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학교를 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서점에서 일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방학이 시작되자 너무나 여유로운 아침도 같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방학이라는 건가! 모처럼 아침 늦게까지 잤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 컵을 마셨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부드럽게 어루어만지며 아래로 내려간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다. 다시 드러누워서 잠을 잘까? 안 일어나도 되잖아? 아직 내 일이 시작될 시간은 멀었다. 일어날 필요가 없다.


 드러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오늘부터 교수가 채점을 시작할까? 교수가 낙제만은 안 주었으면 좋겠는데. 시험 통과할 거야. 그건 이제 그만 생각하자. 천장의 나뭇결을 유심히 쳐다본다. 나뭇결이 나의 시각을 자극한다. 나뭇결은 천천히 여러 개의 선으로 분리되어 간다. 검은색과 누르스름한 갈색. 머리 속에서 나뭇결이 서서히 사라지고 하나하나 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나뭇결이 텅 빈 머리 속에 한 가닥의 색실이 되어 한 가닥씩 들어온다.


 "너는 방학이라고 벌써 게으름이냐?"


 문을 열고 이고가 들어왔다. 어차피 지금은 근무 시간도 아니잖아. 어제 이고가 아침에는 일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너 아침에 일한다고 돈 더 안 줄 거니까 아예 아침에는 서점 내부에 얼씬도 하지 마라. 괜히 나중에 아침에 일 도와줬는데 돈 이거만 주냐고 얼굴 붉히지 말구."


 너무나 깔끔한 이유. 괜히 서점 내부에서 알짱거리며 일 거들다가 나중에 일 도와주지 않았냐고 얼굴 붉히지 말고 아예 근무 시간 외에는 서점 내부로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 나한테 벌써 게으름피우냐고 한 마디 한다. 자기가 어제 한 말을 벌써 까먹었나? 자기가 먼저 아침에는 절대 일하지 말라고 해놓고서는. 할 거 없어서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무슨 게으름이라는 거야?


 "할 거 없어서 이러고 있는데 뭐?"

 "야, 좀 나가라. 너 몸에 곰팡이 피겠다. 네가 무슨 발효식품이냐? 햇볕도 안 쬐고 안에만 있게."

 "나가서 뭐해?"


 내 말에 이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나가! 나갔다가 이따 일할 때 들어와! 너 몸에 곰팡이 피겠다. 거리라도 좀 걷든가 에드자 구경이라도 좀 하든가. 너 여기 일 시작하고 나서 나가서 돌아다녀본 적 몇 번 있냐? 여기 어떻게 생긴 도시인지 뭐 알기는 해?"


 이고가 나를 강제로 일으켜서 목에 수건을 걸어주고 서점 밖으로 쫓아내었다.



 "갈 곳도 없는데 어디를 가라는 거야."


 일단 우물가로 갔다. 세수를 했다. 우물물은 확실히 집 안에 있는 물보다 시원하다. 잠이 좀 깬다. 바지를 걷어부치고 다리도 찬물을 끼얹었다. 찬물이 다리의 열기를 식혀준다. 옷을 홀라당 벗고 시원한 물을 온몸에 끼얹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백주대낮. 그렇게 했다가는 여기 사람들 모두 이상한 놈이 출현했다고 몽둥이 들고 나를 에워싸겠지.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다. 웃옷을 벗고 물을 뿌렸다. 확실히 시원하다. 우물가에서 이러면 안 되지만 솔직히 너무 덥다. 수건으로 상반신의 물기를 재빨리 닦아내고 옷을 후다닥 걸쳤다.


 '냇가 가서 목욕이나 할까. 근무 시간 전까지 냇물 속에 들어가서 쉬고 있을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야. 어렸을 때 너무 더운 여름날에는 친구들과 우물가에서 놀곤 했다. 속옷만 입고 서로 시원하게 물을 끼얹어주며 놀곤 했다. 그래도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몇 마디 할 뿐 크게 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러면 나이 먹은 놈이 우물가에서 대체 뭐하는 짓이냐며 엄청나게 혼날 거다. 냇가 가면 시원하게 물에 몸을 담그고 열을 식힐 수 있다. 단지 거기까지 가기 매우 귀찮을 뿐이다. 거기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다시 땀이 날 거고.


 일단 씻었으니 서점으로 돌아가야겠다. 서점에 수건을 걸어놓고 생각해야지. 서점을 향해 걸어간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쬔다. 이놈의 햇볕은 나를 바싹 말리고 구워버리려고 작정했구나. 우물에서 서점까지 절대 먼 거리가 아니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도 이렇게 괴롭다. 이렇게 뜨거운데 대체 어디를 돌아다니라는 거야? 돌아다니고 싶어도 도저히 돌아다닐 수가 없는 날씨인데.



 방으로 돌아와 수건을 걸어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어떤 곳도 가기 싫다. 이렇게 싹싹 덥고 뜨거운데 단 한 발짝도 걷기 싫다. 이고가 좀 나가라고 내쫓았으니 어딘가에 들어가 있기는 해야겠고.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까? 갑자기 자유로운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주어지자 대체 무엇을 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 찻집에서 시간이나 때워야겠다!"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책을 꺼냈다. 할 것이 하나 떠올랐다. 방학 동안 아드라스어, 대륙공통어 공부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지! 방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내가 지금 아드라스어, 대륙공통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순간 잊어버렸다. 낙제를 당해서 내년에야 다시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언어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을 집어들고 서점 바로 앞에 있는 찻집으로 갔다. 빈 자리가 많이 있다. 내가 원하는 자리를 골라서 앉을 수 있다. 어디 앉을까? 그래도 책을 보아야하니 어두침침한 안쪽보다는 밝은 길가쪽 좌석이 낫겠지? 길가쪽 좌석에 앉아 차를 한 주전자 주문했다. 천천히 아껴마시면 몇 시간 버틸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이 몰려와 빈 좌석이 없어지기 전까지 찻집에서 죽치고 앉아있어야겠다. 아마 점심 먹은 후에나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오기 시작하겠지.


 찻잔에 차를 한 잔 따랐다. 차가 아주 뜨겁다. 이 더운 날에도 김이 펄펄 올라온다. 이거 지금 마시면 더 덥겠는데? 아주 미지근해질 때까지 가만히 놔두어야겠다. 얼마나 뜨거운지 확인하기 위해 입술을 찻물에 대어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든다. 보기만 해도 뻔히 예상되는 결과인데 그것을 일부러 확인해보고 내 생각이 맞았다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잖아? 책을 펼쳤다. 한 글자씩 읽어본다. 집중이 정말 안 된다. 어차피 내일도 아침에 이럴 시간이 있잖아. 모레도 이럴 시간이 있구. 두 달간 이렇게 아침마다 여유가 있다. 절박함이 사라지니 책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단어를 외워야 하는데 그 어떤 단어도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단어들이 눈으로 달려든다. 그리고 내 눈에 부딪혀 튕겨져 나가 다시 책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내 눈으로 달려드는 글자들을 머리 속으로 집어넣으려 해도 단 한 글자도 잡을 수 없다.


 '이거 뒷장에는 뭐가 있지?'


 책장을 넘겨보았다. 뒷장에 있는 것은 글자들 뿐. 단어들과 문장들이지만 글자들로만 보인다. 집중을 하면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글자의 형태조차 깨져버리고 선과 점으로만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공부하기는 완벽히 그른 것 같다. 이럴 때 아다비아나 라키사가 와서 공부를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야, 언제까지 그 둘에게 의존만 할 수는 없잖아. 나도 이제 혼자 공부를 해야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을 본다. 한 글자라도 어떻게 머리 속에 집어넣기 위해 노력한다.


 "타슈갈, 뭐해!"

 "감비르! 어? 아다비아!"

 "안녕!"


 가까스로 집중해서 단어 하나를 머리 속에 집어넣었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니 감비르와 아다비아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너 아침부터 찻집에서 뭐해? 너 스스로 공부하는 거야?"

 "응. 열심히 해야지."

 "우와, 멋있어! 나랑 감비르 여기 같이 앉아도 돼?"

 "응. 앉아."


 아다비아는 내가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자 의외로 좋은 모습을 보았다는 듯 감탄했다. 네가 도와주기 이전에도 공부는 열심히 하려고 했어.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항상 진도를 못 쫓아갔을 뿐이지. 아다비아가 감비르와 같이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합석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환영이다. 억지로 공부하는 것보다 이 둘과 이야기하며 노는 것이 훨씬 낫지. 감비르의 모습은 여전히 해괴하지만 아다비아와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이 아주 나가지는 않은 것 같다. 정신이 아주 나갔다면 아다비아가 독하게 뭐라고 이야기했겠지. 아니면 아예 피해서 도망가버렸거나. 일단 둘이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감비르와도 정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 같다. 저주술을 수련하든 말든 미치지만 않는다면야 별 상관은 없겠지.


 "어제 너도 중앙학문연구소 같이 구경하러 갔으면 참 좋았을텐데..."

 "나?"

 "응! 거기 너무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거 있지! 너도 거기 같이 갔으면 너무 좋아했을텐데..."

 "나 어제 일해야 했잖아. 감비르랑 바하르가 너 잘 모시고 다녔을 거구."

 "그건 그거구!"


 아다비아 얘는 또 사람 약올리려고 하네. 나도 중앙학문연구소는 한 번쯤 구경을 가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기는 했다. 에드자에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니니 거기를 반드시 기회가 생겼을 때 꼭 가야겠다는 절박함이 없었을 뿐이다. 나도 어제 같이 놀러가고 싶었다. 그런데 서점에서 일해야 해서 못 가는 것을 어떻게 해. 미리 알려주었다면 이고에게 말해서 하루 빠지면 안 되겠냐고 이야기라도 해보았겠지만 말이야.


 그보다 아다비아는 에드자 사람 아니야? 에드자에서 계속 살았으면서 중앙학문연구소 한 번도 안 가보았어? 중앙학문연구소가 아다비아 사는 곳에서 얼마나 먼 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어쨌든 에드자에서 계속 살았으니 한 번 정도는 갈 기회가 있었을 거 아냐. 마음만 먹으면 종종 가보았을텐데 왜 거기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좋아하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 지금까지 전혀 관심없어서 안 가보다가 어제 막상 가보니까 멋있어서 좋다는 건가?


 "너 에드자에서 계속 살았잖아. 그런데 중앙학문연구소 한 번도 안 가봤어?"

 "중앙학문연구소는 일반인에게 출입이 금지된 곳이야. 거기 근무하는 사람들과 거기 학생들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어제는 바하르 덕분에 특별히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야."


 아다비아가 왜 나랑 같이 못 가서 아쉬워하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에드자 사람인 아다비아도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못 들어가본 중앙학문연구소라 어제 모처럼 그 안에 들어가볼 기회가 생겨서 엄청 신났나보다. 그리고 그런 어쩌다 한 번 찾아오는 기회를 잡지 못한 내가 안타까워보이는 것이겠지. 하지만 바하르는 계속 거기 다닐 거 아냐? 바하르하고 친하니까 언젠가 한 번 들어가볼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어제 거기서 뭐했어?"

 "이거 봐! 나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이런 거 샀어!"


 아다비아가 가방에서 지갑과 펜, 향수를 꺼내었다.


 "이것들 너무 예쁘지?"

 "어! 이것들 진짜 좋아보이는데?"

 "맞아, 맞아! 이것들 정말 구하기 힘든 것들이야. 이 지갑은 우르간 왕국에서 만든 거야. 이 곱고 기품있는 검은색 봐! 가죽에 이렇게 섬세하고 화려한 색실로 자수도 놓았어. 이거 정말 예쁘지?"


 아다비아가 지갑을 돌려가며 자랑한다. 이건 확실히 비싸보이는데? 마딜 땅에서 저렇게 번쩍이지 않는 광택을 자랑하는 검은 가죽과 섬세하고 화려한 색실로 자수를 놓은 장식은 보기 정말 어렵다. 내 고향 인파사에서는 본 적이 없다. 에드자 와서도 거의 보지 못했다. 블랑쉬블르가 들고 다니는 지갑보다는 조금 저렴해보이지만 저것도 분명히 엄청나게 비쌀 거다.


 "이 펜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도 고급 펜이라고 인정받는 펜이래. 손으로 잡으면 손에 딱 맞아. 손에 어딘가 비거나 투박해서 찌르는 느낌이 전혀 없어. 어제 이것으로 글씨 써보았는데 너무 부드럽게 잘 써지는 거 있지! 이거 여러 자루 많이 사올 걸 그랬어! 너 이 펜으로 글씨 한 번 써볼래?"


 아다비아가 펜을 건네주었다. 손으로 쥐는 순간 아다비아의 설명이 정확하다는 것을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촉이 증명해준다. 이 펜은 내 손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너무나 부드럽다. 글씨를 써 보았다. 내가 펜으로 종이 위에 글씨를 쓴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매끈하고 빛나는 빙판 위를 발로 쭉쭉 밀며 앞으로 나갈 때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걸리거나 막히는 것이 없다. 잉크도 일정하게 나온다. 이 펜 정말 좋은데? 이 펜으로 공부하면 오늘 이 책을 다 베껴적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휩싸이겠다.


 아다비아에게 펜을 돌려주었다. 아다비아는 내게 손을 내밀어보라고 했다. 아다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다비아는 내 팔목에 향수 한 방울을 발라주었다.


 "이 향 너무 매력적이야! 이 향수만 있으면 1년 내내 봄의 여신님이 된 기분을 느낄 거야! 그지?"


 아다비아가 팔목에 발라준 향수의 향기를 맡아본다. 향기가 코를 살살 어루어만진다. 봄날의 향기. 파릇파릇한 새싹의 냄새들 속에서 타오르는 정렬의 장미. 그 주변을 에워싸며 춤추는 자스민 향기. 이런 향수가 이 세계에 존재했다구?


 "이거 향기 진짜 좋다!"

 "응! 이 향수 너무 좋아! 이거는 셀베티아 왕국에서 만든 향수래. 나중에 졸업하고 셀베티아 왕국 가면 이 향수 많이 많이 살 거야!"


 아다비아가 어제 중앙학문연구소에서 구입했다는 지갑, 펜, 향수 모두 마딜 공화국에서는 죽어도 만들 수 없는 수준이다. 이건 내가 늙어 죽고, 내 자식이 늙어 죽고, 내 자식의 자식이 늙어 죽을 정도에나 만들 수 있을까? 그래도 어려울 거 같다. 이건 그냥 신세계다. 이런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마딜 공화국에 있기나 한가? 아니, 이런 물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우리 나라에 있기나 할까? 연체료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블랑쉬블르 정도라면 이런 물건을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이것들 자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세계까지는 아닌 것이 블랑쉬블르는 이런 것을 쓰거든. 블랑쉬블르가 서점에 왔을 때, 그리고 몇 번 블랑쉬블르 집에 책 수거를 하러 갔을 때 이 정도 되는 물건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나저나 얘 이것들 무슨 돈으로 샀지? 이것들 엄청 비쌀텐데?


 "그런데 너 이것들 다 무슨 돈으로 샀어? 이것들 엄청 비쌀 거 같은데..."

 "중앙학문연구소 안에 커다란 매장이 있는데, 거기서는 이런 진귀한 것들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팔아. 나 정말 그 매장에서 나오기 싫어서 혼났어. 그냥 그 매장에서 평생 그 물건들 사용하며 살고 싶었어."

 "얼마나 싸길래?"

 "너 이것들 다 해서 얼마일거 같아?"

 "글쎄...아무리 싸게 판다고 해도 5나르는 줘야 할 거 같은데?"

 "나 이거 다 해서 30주므아에 샀어!"

 "뭐? 30주므아?"


 중앙학문연구소가 정말 좋기는 좋은 곳이구나.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더니 대우도 너무 좋은데? 솔직히 아다비아가 구입했다는 것들을 길거리에서 구하려고 하면 대체 얼마를 줘야 할 지 감도 안 온다. 일단 내가 그런 것을 파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못해도 물건 하나에 5나르는 주어야 할 거 같다. 그런데 고작 30주므아? 거기는 진짜 장난 아니구나. 우리랑 완전 다른 세계인데?


 "응! 향수가 10주므아, 지갑이 17주므아, 이 펜이 3주므아. 너도 갔으면 이것저것 많이 샀을 거야!"

 "어...아마도..."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저 정도면 물건을 안 사고 배기지 못했을 거다. 저것들 되팔면 도대체 돈을 얼마나 남겨먹을 수 있을까? 3배씩 불러도 무조건 팔릴 거다.


 "그거 막 몇 개씩 사올 수 있어?"

 "그건 아니구, 바하르가 물건 구입 허가증 남아돈다고 우리 줬어. 바하르 정말 부러워! 걔는 매달 물건 구입 허가증 몇 장씩 받는다던데...그리고 그 매장 말이야, 정말 신기하다? 거기는 우리가 물건을 고르잖아, 그러면 바로 돈 내고 물건을 받는 게 아니야. 물건을 고르면 상품명과 가격을 쪽지에 적어서 도장을 찍어줘. 그러면 그 쪽지를 가지고 계산대에 가서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한 후 영수증을 받아서 다시 판매대로 가는 거야. 판매대에 가서 영수증을 보여주면 그제서야 물건을 인도받을 수 있어. 신기하지?"

 "응. 그런데 뭐 그렇게 쓸 데 없이 복잡해?"

 "그건 나도 모르겠어. 거기는 그래야만 한대."


 워낙 물건을 싸게 팔아서 그런가? 참 희안한 시스템이다.


 "나 공부 다시 열심히 해서 중앙학문연구소 들어갈까? 나 정말 거기에서 공부하고 싶어!"

 "거기에서 뭐 전공하게? 거기에는 우리가 전공할만한 것이 없지 않아?"

 "뭐가 되든! 내가 노력하면 못할 거 같아?"


 아다비아가 갑자기 인상을 쓴다. 중앙학문연구소에 우리가 전공할 만한 과목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는 얼핏 보면 실생활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들을 공부하고 배운다. 애초에 그런 거 공부하고 연구할 학생들 키우는 곳이기도 하구. 설마 거기 들어가려고 저주술 연구하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거기에서 배우는 것들 가지고는 일자리 구하기 어렵잖아. 너 셀베티아 왕국 가고 싶다면서? 아니면 너 군인될 거야?"

 "그건 그래. 거기에 셀베티아어 전공이 있다면 지금부터 죽기살기로 공부해서 내년에 거기 입학할텐데..."


 아다비아가 아쉬워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해. 아다비아는 여자니까 장교가 되기 엄청 어려울 거고, 다른 전공들은 일상생활에서 전혀 쓸모가 없지. 아, 가능한 거 하나 있구나! 거기도 저주술 전공이 있으니까. 아다비아가 저주술 전공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다비아는 머리도 좋고 성실하니까 그 거지 같은 마딜인의 망신 저주술 책도 어찌어찌 보고 이해해낼 거 같은데. 그런데 아다비아는 저주술을 참 싫어하지. 너는 거기 들어갈 방법이 없다.


 "네가 거기 다니면 참 좋을텐데...그 전에 내가 셀베티아 왕국의 공주로 다시 태어나는 게 더 빠르겠지?"

 "아..."


 무슨 말이냐고 따지려 했지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어서 말이 나오려다 막혀버렸다.


 "감비르, 너 시험 안 치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차피 우리 올해 망한 건 확정인데 그건 신경 왜 써?"

 "나는 시험 쳤어! 낙제 면할 수도 있다구!"

 "그건 안 될 걸?"


 감비르 이 자식도 사람 열받게 말하네. 얘가 내가 답안지를 얼마나 가득 채워서 제출했는지 봐야 해.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교수에게 같이 가자고 하고 싶다. 내가 쓴 답안지 좀 얘에게 보여주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말을 말아야지.


 "나 치르치나로 여행 다녀올 거야."

 "치르치나? 왜 하필 거기야?"

 "거기에서 순수한 저주술을 수련할 거야."


 감비르 말에 아다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감비르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네가 스스로 저주술에 소질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주술은 아무나 쓰는 거니? 그리고 저주술을 어떻게 일상생활에 써먹을 수 있는데? 너 저주술 공부해서 앞으로 뭐 먹고 살 거야?"


 아다비아의 말에 감비르가 발끈했다. 잘못한 어린이를 따끔하게 혼내는 선생님의 일그러진 얼굴로 아다비아의 말에 반박했다.


 "저주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아? 저주술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야! 그것은 진정한 자유의 힘이고 깨달음이라구! 나는 더 이상 인생에 아무 의미 없는 셀베티아어 따위는 공부 안 할 거야! 순수한 진리와 자유 앞에서 그깟 셀베티아어 따위를 공부할 시간이 있어?"

 "뭐라구?"


 감비르 저 놈 진짜 미쳤구나. 어제 다른 애들과 중앙학문연구소도 다녀오고 오늘은 아다비아랑 같이 찻집에 들어오길래 정신이 돌아왔나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저건 내가 전에 만났을 때보다 왠지 더 미친 것 같다. 대체 저주술이 무슨 순수한 진리고 자유라는 거야? 그 말 자체도 이해 못하겠고, 그걸 왜 자꾸 강조해대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그래도 내년에는 다시 공부하겠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전공을 아예 때려치겠다고 하고 있다. 저거 정말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면 저주술 수련해서 중앙학문연구소 들어갈 생각인가? 어제 같이 놀러가서 아다비아보다 더 중앙학문연구소에 반한 건가?


 "너희들 여기 있었어?"

 "치롤라!"

 "안녕!"

 "치롤라, 여기 와봐. 나 너에게 물어볼 거 있어."


 아다비아가 치롤라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치롤라가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하며 테이블로 왔다.


 "아다비아, 무슨 일이야? 너 왜 그렇게 다급해해?"

 "치롤라, 아니, 글쎄 감비르가 순수한 저주술을 수련한다고 치르치나에 가겠대. 이제 전공도 그만둘 거래. 너 이거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응? 저주술 자체야 누구든 쓸 수 있는데...왜 하필 치르치나야?"

 "몰라! 감비르가 순수한 저주술 수련하러 치르치나 간대. 아, 속터져!"


 치롤라는 감비르를 쳐다보았다. 감비르의 표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감비르의 눈에는 오만한 기운이 돈다. '이 무지한 것들, 불쌍한 것들, 영원히 순수한 자유와 진리를 모르는 채로 속터져하며 살거라. 나는 순수한 자유와 진리를 깨닫는 방법을 알아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너희들은 답답해하고 나는 이렇게 태연한 것이지.' 이런 말을 눈빛으로 전달하고 있다. 나야 지난 번에 한 번 당해보아서 조금 적응이 되었지만 아다비아는 이게 처음이라 정말 당황해하고 답답해한다. 감비르는 내가 처음 당했을 때보다 확실히 더 미쳤지. 대체 순수한 진리와 자유는 뭔 헛소리야?


 "감비르, 왜 하필 치르치나로 저주술 수련을 하러 가니?"

 "거기에 순수한 저주술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 순수한 저주술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유와 진리잖아."


 치롤라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얘가 뭘 잘못 먹어서 이런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치르치나에 그런 것이 있다니 무슨 말이야?"

 "치르치나에 있어."

 "내가 치르치나에서 별로 멀지 않은 티타카스에서 올라왔는데 무슨 소리니? 나는 티타카스에서 그런 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그리고 치르치나는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곳이야. 우리 티타카스 사람들도 치르치나 갈 때는 정말 조심한다구!"


 치롤라가 소리쳤다. 치롤라도 답답하겠지. 나와 아다비아야 치르치나에서 멀리 떨어진 곳 출신이라 치르치나를 잘 모르지만 치롤라는 치르치나에서 그리 멀지 않은 티타카스 출신이니까. 게다가 티타카스에서 올라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아마 우리보다 속이 더 터질 거다. 감비르는 치롤라의 말에 비웃으며 응수했다.


 "보석은 갖고 있으면 소중한 줄 모르는 법이야. 어쨌든 나는 치르치나로 저주술 수련을 위한 여행을 갈 거야."


 치롤라는 이게 뭔 헛소리냐고, 그리고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하는지 이 상황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묵이 이 테이블을 지배하고 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 오만한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보는 감비르, 황당한 소리에 생각이 멈추어버린 듯한 아다비아와 치롤라, 그리고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바꾸어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나.


 "나 이만 가볼께. 여행 준비 해야 해서."


 감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찻집을 나갔다. 잠시 후 치롤라도 찻집에서 나갔다. 아다비아와 둘만 남았다.



 계속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방학 첫날 아침부터 이건 무슨 난리야? 나는 아무 것도 안 했다. 이고에게 서점에서 쫓겨나서 찻집에서 공부 좀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오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갔다. 아다비아는 아예 생각이 멈추어버렸나 보다. 너도 앉아 있다가 가라. 다시 책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책을 보려는데 갑자기 아다비아가 내 등을 세게 때렸다.


 "왜 때려?"

 "야, 너 감비르 친구면 말려야하는 거 아냐?"

 "저걸 어떻게 말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 같은데...나도 전에 말렸어! 그런데 더 미쳐서 돌아왔잖아!"


 아다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기도 답답하겠지. 그래도 나름 나와 감비르와 친해지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많이 했는데 감비르가 저러고 앉았으니 말이다.


 "너도 저주술 수련할 거야? 그런 멍청한 짓 할 거야?"

 "내가 그걸 왜 해? 나는 이 나라 떠나는 게 목표라니까!"


 아다비아가 안도가 되었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타슈갈, 정말 잘 생각했어. 너는 저렇게 되면 안 돼?"

 "진짜! 내가 왜 저렇게 돼? 아주 악담을 퍼부어라."

 "악담 아니야! 진짜 저주술 수련 따위는 하는 거 아니냐?"

 "안 한다구! 너까지 왜 그래?"

 "왜, 화났어?"

 "화 안 났어! 너까지 자꾸 나한테 저주술 저주술 그러니까 짜증나서 그렇지."

 "너도 저렇게 될까봐 자꾸 걱정되니까 그렇지."

 "뭘 저렇게 돼? 그럴 거면 내가 시험을 왜 쳐?"

 "맞아. 너 시험 안 치고 도망갈 거 같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너랑 약속했잖아. 반드시 시험은 치를 거라구."


 내 말에 아다비아가 웃으며 좋아했다. 얘는 분명히 중앙학문연구소 다니는 바하르 좋아할텐데 왜 자꾸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절대 저주술 수련 따위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해도 계속 하지 말라고 하고 내가 안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꼭 들으려 한다. 확 그냥 저주술 수련 한다고 말해버릴까 보다. 진짜 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일부러 얘한테만 저주술 수련 시작했다고 거짓말하면 어떻게 될까? 아다비아가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구경하게 될 건가? 아니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반응할까? 방학 시작부터 참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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