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위쑨나랏과 왓 아함은 사실상 한 절 같았어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탓 막모를 다시 한 번 보았어요.
왓 위쑨나랏 건물을 멀리서 사진을 찍었어요.
이제 왓 아함에 들어갈 차례. 왓 아함으로 갔어요.
표지판에 라오어로는 ວັດ ອາຮາມ 이라고 적혀 있었고, 라틴 문자로는 WAT AHAM 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이거 밧이 아니라 왓이다!"
라오스는 프랑스 통치를 받은 적이 있어서 라틴 문자 표기를 불어식으로 표기했어요. 예를 들어서 절이 라오어로는 ວັດ 인데, 이것의 발음은 '왓'이에요. 하지만 라틴 문자로 표기할 때는 wat 이 아니라 vat 이라고 표기해요. 불어에서는 w와 v 발음이 같거든요. 그런데 이 절은 또 혼자 vat 이 아니라 wat 으로 적혀 있었어요. 태국 치앙마이에서 왓을 하도 많이 가서 왓에 질려버린 친구의 표정을 보았어요. 친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었어요. 전날에만 해도 왓이 싫다고 해서 제가 '이것은 왓이 아니라 밧이다!'라고 외치며 라오스 절을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어제, 오늘 하도 절을 많이 돌아다니니 친구는 이제 왓이고 밧이고 나발이고 상태 같았어요. 희안한 것은 이렇게 불평을 하면서도 정작 절에 들어가면 저보다 더 열심히 삼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저는 적당히 삼배 생략하고 나올까 하기도 하는데 친구는 그런 거 없었어요. 게다가 제가 철푸덕 철푸덕거리며 절을 할 때 친구는 제대로 절을 하고 있었어요.
이것은 탑이구나.
탑은 탑인데 모양을 보면 우리나라 부도처럼 생겼어요. 탓 막모와 이 탑 중 누가 더 오래된 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른쪽 탑은 탓 막 모와 약간 비슷하게 생겼어요.
왓 아함은 불교 사원이지만 애니미즘 및 정령 숭배와도 관련이 있는 절이에요.
원래 왓 아함이 있던 자리에는 루앙프라방의 수호 정령이자 설화 속에서 최초의 인간들이라는 뿌 녀와 냐 녀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대요. 14세기, 이 사당은 앙코르에 위치한 크메르 왕조에서 자란 라오스의 파 응움 왕자가 건설했다고 해요. 그런데 16세기 들어서 란쌍 왕조의 포티싸랏 왕이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1527년부터 애니미즘 및 정령 숭배와 관련된 성지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절을 짓기 시작했어요. 이 뿌 녀와 냐 녀와 관련된 성지 역시 파괴되고 거기에 절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왓 아함이에요.
뿌 녀와 냐 녀의 사당이 파괴되고 그 위에 절이 건설된 이후, 루앙프라방에 온갖 나쁜 일이 다 일어났대요. 전설에 의하면 뿌 녀와 냐 녀의 사당이 파괴된 후 질병이 창궐하고 가뭄이 들고 농사는 폭삭 망해버렸대요. 사람들은 왓 아함에 와서 뿌 녀와 냐 녀 숭배를 계속 했고, 온갖 재앙이 발생하자 이것을 뿌 녀와 냐 녀 사당을 파괴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믿었다고 해요. 이후 싸이 쎗타티랏 왕이 1563년에 수도를 비엔티엔으로 천도한 후 왓 아함에 뿌 녀와 냐 녀 사당이 다시 건설되었고, 이 사당이 20세기 중반에 파괴되기 전까지 부처님과 루앙프라방 수호 정령인 뿌 녀와 냐 녀가 왓 아함 경지 내에서 같이 살았대요. 20세기 중반 뿌 녀와 냐 녀 사당이 파괴된 후에는 경지에 서 있던 커다란 두 보리수로 이 두 정령이 자리를 옮겨서 별 일이 없었다고 믿는대요.
참고로 이 뿌 녀와 냐 녀는 지금도 루앙프라방에서 새해 축제인 삐 마이 때 이 탈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녀요. (라오스 루앙프라방 4월 삐 마이 (설날) 풍습 - 뿌어와 야어 탈춤 : http://zomzom.tistory.com/1297)
현재의 왓 아함은 1817년부터 1836년까지 재위한 만타뚜랏 왕 재위 기간 전에 건설되었고, 현대 루앙프라방 양식으로 지어진 대법당인 씸은 1818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대요.
입구 양 쪽 구석에는 인도 라마야나 전설의 라오스 버전인 빨락 빠람 Phra Lak Phra Ram 전설에 등장하는 수호 호랑이인 하누만과 라바나 상이 서 있었어요. 건물 전면부의 입구에 해당하는 ປະຕູທາງເຂົ້າ 빠뚜 탕카오의 박공인 ຈົ່ວ 쭈아, 박공 아래의 벌집 모양 장식인 항 펑 ຮັງເຜິ້ງ 은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치미와 망와에 해당하는 써 파 ຊໍ່ຟ້າ 는 하얀색이었어요. 빠뚜 탕카오 뒤에 있는 건물의 전면부는 루앙프라방의 다른 절들과 달리 아무 그림이 없었어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가자마자 먼저 삼배를 드린 후, 사진을 찍고 천천히 둘러보았어요.
법당 내부는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설화인 자카타 설화와 불교의 지옥을 그린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어요.
"아직 3시도 안 되었다."
법당에서 나와서 시계를 보니 2시 56분이었어요.
"어? 여기서 굳이 어제 갔던 길로 안 가도 숙소 돌아갈 수 있겠는데?"
지도를 보니 푸시산을 피해 남칸강과 메콩강 합류 지점으로 가지 않고도 숙소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어요. 그 길이 숙소로 더 빨리 갈 수 있었어요. 덥고 몸이 끈적거렸어요. 어서 숙소 돌아가서 샤워하고 싶었어요. 안 가본 길이 더 가깝다니 굳이 어제 갔던 길로 뺑 돌아서 갈 이유가 없었어요. 딱 제가 예상한 대로 3시에 오늘 계획 중 가장 큰 것이 끝났어요. 남은 일정은 숙소에서 멀지 않은 절 두 곳을 간 후, 푸시산을 올라가는 것 뿐이었어요.
오늘 대체 절을 몇 곳 가는 거지?
왓 빠폰파오, 왓 싸깸, 왓 푸 콰이, 왓 부파위빳나람, 왓 마노롬, 왓 위쑨나랏, 왓 아함을 갔어요. 벌써 7개 갔어요. 여기에 절 세 곳을 더 갈 예정이었어요. 이러면 오늘은 절 10개.
내가 지금 불교 고행 여행을 온 거야, 루앙프라방 구경을 하러 온 거야? 이거 완전 치앙마이 여행 시즌2잖아!
전날 이 계획을 짤 때부터 오늘 절을 많이 갈 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왓 아함까지 끝내고 오늘 하루 지금까지 간 절을 세어보니 절을 어지간히 많이 갔어요. 절의 법당 문이 열려 있으면 안에 들어가서 죄다 삼배를 드렸구요. 다른 것도 이것저것 보고 싶은데 정말 절 빼면 남는 게 없었어요. 누가 보면 불교 고행 여행을 떠난 줄 알 일정이었어요.
"저거 서점 아니야?"
여행사와 서점을 겸하는 가게였어요.
이름은 'Yensa Bai Books&Art' 였어요.
'혹시 연금술사 라오어판 있을까?'
라오어 책 자체가 없었어요. 중고서적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영어 원서 뿐이었어요. 영어 원서는 뭐든 간에 아무 필요 없었어요. 영어 원서를 구입해서 남은 며칠간의 라오스 일정 중 읽을 남아돌다 못해 버려야할 시간은 없었거든요. 가방에 넣고 들고다니던 '한눈에 보는 라오스 회화' 책을 다 떼고 선물받은 라오스의 라오어 교과서도 다 떼고 라오어 공부는 이제 다 끝났다고 할 정도가 된다면 혹시 남는 시간에 볼 거 없나 살펴보았을 거에요. 그러나 라오어 마스터는 고사하고 글자도 헤매고 있었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라오스 관련된 책 있나 찾아보았지만 가이드북 뿐이었어요. 나머지는 제게 무가치한 영문 소설이 대부분이었어요.
서점을 찾았다는 기쁨은 딱 5분 뿐이었어요. 여기에 라오스에서 출판된 책이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던 그 5분요. 그 5분이 지나가자 5년 동안 쉬지 않고 실망한 것 같은 깊은 실망이 찾아왔어요. 루앙프라방에서 책을 찾는 것은 포기였어요. 여기에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 짧은 5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무조건 비엔티엔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서점을 싹싹 뒤져야만 답이 나올까 말까였어요.
이번에는 약국이 나왔어요.
약국에서 파는 약을 대충 훑어보았어요. 라오어로 적힌 약도 있었지만, 대체로 태국산 같았어요. 약국에서 라오어가 인쇄되어 있는 약이 있는 것이 매우 신기했어요. 그래. 약이 음료수보다는 먼저야. 과자 안 먹어도 돼. 하지만 아프면 약 먹어야 해. 약을 만드는 것이 음료수, 과자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겠지만 이해해버렸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잘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보다 무조건 우선한다. 그러니 라오어로 인쇄된 약이 있는데 라오스 음료수, 과자가 안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시원한 길거리 간식을 사먹고 있었어요.
장사가 꽤 잘 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계속 와서 하나씩 사서 마셨어요.
"라오스 전통의상 정말 예쁜데 왜 이런 전통의상으로 만든 기념품은 안 보이지?"
길거리와 가게를 구경하다보니 다라 시장 ຕະຫຼາດ ດາລາ (딸랏 다라)까지 왔어요. 시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어요.
확실히 전통 의상은 여자 옷이 예뻐.
라오스 여성 전통 의상 중 씬이 참 예뻤어요. 색이 화려하고 무늬도 다양해서 하나씩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게다가 사진도 매우 예쁘게 나왔어요. 이렇게 매력적인 것을 소재로 왜 기념품을 만들 생각은 안 하지? 이틀간 돌아다니면서 라오스 여성 전통 의상을 소재로 만든 기념품은 거의 보지 못했어요. 제가 구입한 엽서와 인형 하나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너무 흔해서 그런가?
씬을 입고 돌아다니는 라오인들이 매우 많이 보였어요. 우리나라 한복과 달리 씬은 라오스 사람들에게 평상시에도 입는 아주 평범한 옷이었어요. 그래서 씬을 소재로 한 기념품 만들 생각을 못 하는 건가? 정작 매력적이고 라오스에서 매우 잘 보이면서 주변 태국, 베트남에서 안 보이는 독특한 것은 씬인데, 기념품은 대부분 라오스 소수민족을 소재로 한 것이었어요. 이 현상은 아무래도 라오인들에게 씬은 일상복이라 이것을 기념품으로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를 못 하는 데에 원인이 있는 것 아닐까 싶었어요.
시장에서 나와 다시 숙소를 향해 걸어갔어요.
"이 나라 사람들 살 타는 거 정말 싫어하네."
날이 푹푹 찌는데 라오인들은 긴팔에 긴 소매, 심지어 자전거를 타며 양산을 쓰고 있었어요. 시원하게 짧은 소매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외국인이었어요. 여기가 건조기후라면 저렇게 긴 소매를 입고 다니는 것이 이해가 되요. 그런데 여기는 건조 기후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어요. 게다가 이때는 건기가 아니라 우기였어요. 긴 소매 옷을 입을 이유라면 기껏해야 절에 가기 위해 긴 바지를 입는 것 정도. 그 외에는 딱히 긴 소매 옷을 입어야할 이유가 없는데 라오인들은 열심히 긴 옷을 입으며 살이 타는 것을 최대한 막고 있었어요.
거리에 불단에 바칠 꽃장식을 파는 상인이 보였어요. 저 상인도 날이 푹푹 찌는데 긴 소매 옷을 입고 살이 타는 것을 최대한 막고 있었어요.
숙소로 돌아왔어요. 돌아오자마자 찬물로 샤워부터 했어요. 물이 미지근했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끈적거리는 느낌이 사라졌어요. 몸을 다 씻고 정원 탁자 앞에 앉았어요.
잠이 온다. 잠이 자꾸 눈을 감기려 한다.
열심히 돌아다니고 삼배도 드리고 했기 때문에 이제 쉬다가 적당히 푸시산이나 올라갈까 했는데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가만히 쉬다가는 정작 푸시산 올라갈 때 정신 못 차릴 거 같았어요. 밤을 새고 아침부터 3시 넘어서까지 계속 뙤약볕을 그대로 다 쬐면서 돌아다녔어요. 아직 몸에 긴장감이 남아 있어서 바로 졸리지는 않았어요. 이 긴장감이 풀리는 만큼 졸음이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어요.
"나가자."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다시 절을 가야 했어요. 일단 저녁을 먹고 그 칼로리로 푸시산까지 올라갔다 돌아오기로 했어요.
밖으로 나와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우체국이 나왔어요. 이틀간 우체국 문은 닫혀 있었어요.
'여기 오늘은 열었을 건가?'
겉으로 봐서는 '우체국 이전했습니다' 팻말이 붙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건물. 일단 문은 열려 있었어요. 안으로 들어갔어요.
우체국 문이 열려 있었어요. 지난 이틀간은 주말이라 문을 닫았나봐요. 내부는 매우 수수하고 단순했어요. 딱히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공간이었어요.
라오스에서 해외로 보내는 우편물의 요금 체계가 붙어 있었어요.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제1지역, 제2지역은 아시아, 제3지역은 오세아니아, 제4지역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요금이 가장 비싼 제5지역은 아메리카였어요. 라오스에서 외국으로 화물을 보낸다면 우리나라보다 아프리카로 보내기 확실히 편할 거에요. 대신 라오스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위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태평양 넘는 거리가 우리보다 엄청나게 길 거구요.
"오! 이 우체국에서 EMS도 부칠 수 있어!"
외관과 다르게 이 우체국에서 EMS도 부칠 수 있었어요. EMS 사무실 뒤로 매우 흥미로운 것이 보였어요. 조그만 서랍이 빼곡히 들어찬 연초록색 장농들이 있었어요.
"여기는 아직도 사서함 제도 있나 보네?"
보자마자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요. 우편 사서함이었어요. 우리나라도 우체국에서 지금까지 우편 사서함을 운영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널리 사용하지는 않는 편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우체국 가도 사서함 보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는 우체국 안에서 사서함을 쉽게 찾을 수 있었어요.
거리에서 라오스 음식인 카우 삥을 파는 사람이 보였어요. 하나 사서 먹어보았어요.
'설탕 찍어먹고 싶다.'
단맛이 없었어요. 딱히 큰 인상을 주는 맛 자체가 거의 없었어요. 굳이 의의를 두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찰밥을 구워먹는 일이 없기 때문에 신기하다는 것 정도였어요.
"저녁 뭐 먹을까?"
"쌀국수 먹자."
친구에게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물어보자 친구가 쌀국수를 먹자고 했어요.
가게에서 라오인들이 쌀국수를 먹고 있었어요. 저와 친구도 쌀국수를 주문했어요.
이 쌀국수는 카우삐약 쎈이었어요. 담백하고 시원했어요. 역시 현지인들이 와서 먹는 집이 맛있는 집이었어요.
쌀국수를 먹고 다음 절인 왓 탓으로 갔어요.
이 절 이름은 왓 프라마하탓이에요. 그런데 줄여서 '왓 탓'이라고 부르고, 가이드북에도 '왓 탓'이라고 나와 있었어요. 표지판을 보니 라틴문자로는 Vat Phramahathat, 라오어로는 ວັດ ພຣະມະຫາທາຕ 라고 적혀 있었어요.
나가 뱀으로 장식된 계단을 올라갔어요. 대법전인 씸이 보였어요.
왓 탓은 1548년 란쌍 왕조 쎗타티랏 왕 재위 시절에 세워진 절이에요. 1900년에 몰아닥친 태풍으로 절 대부분이 파괴되었대요. 1910년에 재건했고, 1963년에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실시했대요. 중국 흑기군의 패악질에 파괴된 것도 아니고 대자연의 힘에 의해 파괴되어버린 절이었어요.
삐 마이가 되면 루앙프라방에서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절들인 왓 마이, 왓 씨엥통, 왓 아함, 왓 위쑨나랏과 이 왓 탓으로 높은 사람들이 가마를 타고 와서 방문했다고 해요. 또한 이 절에는 라오인들이 반신반인 같은 마법 같은 힘을 가진 존재로 믿었고 1945년 일본 패망 후 라오스 독립을 공표한 펫싸랏 왕자, 라오스 독립 후 초대 총리를 지낸 쑤완나 푸마 왕자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재가 경내에 모셔져 있다고 해요.
대법전의 지붕은 2단 지붕이었어요.
절 안에는 오래된 쩨디가 있었어요.
이 쩨디는 란나 양식으로 지어진 쩨디라고 해요. 란나 양식은 태국 치앙마이쪽 문화였어요. 이 쩨디는 16세기에 지어졌어요. 이 쩨디는 루앙프라방에서 왓 탓 루앙에 있는 쩨디 다음으로 가장 상징적인 종교 유물 - 즉 루앙프라방에서 두 번째로 상징적인 종교 유물이라고 해요.
절 한쪽에는 왕자의 유해를 모신 것 같아보이는 탑이 있었어요.
일단 대법전부터 보기로 했어요.
문이 닫혀 있었어요.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올라갔어요. 안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문을 살짝 밀었어요. 문이 열렸어요. 불경 외우는 소리가 아주 선명히 들렸어요. 문틈으로 내부를 빼꼼히 들여보았어요. 예불시간이었어요.
안에 들어가서 절을 드리고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어요. 스님들이 한두 분 계신 것도 아니었어요. 조용히 문을 닫고 발걸음을 돌렸어요.
계단을 내려가 길을 따라 푸시산 쪽으로 걸어가자 얼마 안 가서 또 야트막한 둔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어요.
지도를 보면 이 위치가 아니었지만 딱 봐도 절로 가는 계단이었어요. 지도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대충은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단을 올라갔어요.
"역시 여기 맞았네"
우리나라 절로 치면 일주문에 해당하는 문 위에 라오어로 ວັດ ຫໍສຽງ 라고 적혀 있었고, 라틴 문자로는 WAT HOSIAN 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다음 절인 왓 호씨앙 맞았어요.
나중에 여행기 쓰면서 알게 되었지만 문 위에 적힌 라오어는 글자 하나가 잘못 적혀 있었어요. 문 위에는 ວັດຫໍສຽງ 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원래는 ວັດຫົວຊຽງ 이었어요. '왓 허씨양'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원래는 '왓 후아씨양'이라는 거에요. 가이드북에도 '왓 호씨앙'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구글에서 검색해보아도 ວັດຫົວຊຽງ '왓 호씨앙'은 검색되는 게 없고 ວັດຫົວຊຽງ '왓 후아씨양'으로 검색하면 가이드북에 '왓 호씨앙'이라고 설명된 절이 나와요. 보기 편해서 한국의 가이드북을 들고 가기는 했지만, 한국 가이드북은 솔직히 안 좋아요. 틀린 것도 많고 빠진 것도 많구요.
'왓 후아씨양'이라는 명칭은 1548년 쎗타티랏 왕이 왓 탓의 대법전 위치를 결정할 때 처음 언급되었다고 해요. 그 후 1705년에 이 절이 세워졌어요. 왓 호씨앙은 개보수를 꽤 많이 겪은 절이에요. 1823년 다시 지어졌고, 1900년 4월 태풍 때 왓 탓과 같이 파괴된 후 1923년에 재건되었어요. 1923년 재건될 때 현관과 법당으로 구성된 단순한 건물 구조로 재건되었대요. 이 당시 사원 전면부와 후면부를 떠받치는 기둥은 흰색의 사각 기둥이었다고 해요. 이후 1952년 측면 베란다가 추가하고, 법당의 전면부와 후면부인 북동쪽과 남동쪽에 사원 건물의 베란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는 빠뚜 탕카오 및 박공벽을 떠받치는 8각 기둥을 추가해 '베란다로 둘러싸인 법당'이라는 특징을 가진 법당 건물이 되었대요. 이후 1973년 복원 공사 때 빠뚜 탕카오의 8각 기둥을 금박으로 장식하면서 오늘날 형태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요. 1990년과 2005년에는 사원 외관의 금박 장식들을 새롭게 단장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대요.
아무리 봐도 고양이 귀신처럼 생긴 석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어요.
법당 건물인 씸으로 갔어요.
안에서는 예불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다행히 왓 탓처럼 스님들만 열심히 경을 외우고 있지 않고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도 예불에 참석중이었어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삼배를 드리고 나왔어요. 나중에야 뒤에 앉아계신 흰 옷을 입은 여성 네 분이 비구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법당 입구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어요. 그림을 보면 불교의 지옥을 묘사하고 있었어요.
왓 호씨앙 관람까지 마치자 오후 5시 38분이었어요.
"이제 등산하러 가자!"
등산을 매우 싫어하는 친구에게 외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