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눈을 뜨자마자 방이 밝다는 것을 보았어요. 어제 몇 시에 잤더라? 기억이 없었어요. 하여간 엄청 깊게 잤어요. 미친듯이 잤어요. 시계를 보았어요. 아침 9시가 넘어 있었어요. 머리가 멍하지 않았지만 멍했어요. 컴퓨터를 켜놓고 가만히 놔두어서 새까맣게 모니터가 꺼져버린 상태 같았어요.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닌데 생각하기를 그만두어버린 상태였어요. 너무 피곤했어요.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몸을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오늘은 정말 일정이 별 거 없었거든요. 그렇게 6월 23일이 시작되었어요.
이렇게 여행중 침대에 쓰러져버린 것은 얼마만인지 몰라요. 7박 35일 여행 거의 마지막이었던 부다페스트에서 그렇게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던 것 이후 처음이었어요. 너무 피곤했어요. 근육은 바람에 휘날리고 뼈는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느낌이었어요. 침대에 계속 누워있고만 싶었어요. 육체 중 마음대로 되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어요. 두뇌조차 생각을 거부해버리고 있었으니까요. 이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널부러져 있는 것이었어요.
"일어나! 우리 이제 체크아웃 해야 해!"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저를 친구가 일으켜세웠어요.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어요. 진짜로 일어나야 했어요. 체크아웃 늦으면 돈 더 내야 하니까요. 그런 데에 돈을 더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따 돌아와서 침대에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슬리핑 버스 타러 가면 좋기야 하겠지만, 숙소 앞 탁자에 앉아 의자에 기대어 앉아도 딱히 나쁠 것은 없었어요. 슬리핑 버스에서 누워 있는 것이 편하지는 않으니 오히려 조금 피곤하고 졸린 상태에서 버스 안에서 기절하는 것도 나쁘다고 할 선택지는 아니었구요.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아랫배가 꾸룩거렸어요. 변기에 앉았어요. 고압분출되었어요.
'어제 덥다고 과일주스 들이켜서 이런가?'
전날 밤 마지막으로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너무 덥고 힘들었다는 것. 그래서 과일주스 4개를 한 번에 들이켰어요. 한 잔 사서 마셨는데 갈증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잔 또 사서 마셨어요. 갈증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조금 걷다 또 사서 마셨어요. 여전히 덥고 목이 말랐어요. 또 사서 마셨어요. 이렇게 차가운 과일주스 4잔을 연거푸 들이켰어요. 그게 문제 같았어요. 그거 말고는 딱히 속이 안 좋을 일이 없었어요.
샤워를 하고 짐을 꾸렸어요. 전날 밤에 짐을 꾸렸어야 했는데 자느라 못했어요. 비행기 타는 것이 아니라 가방에 대충 다 쑤셔박으면 되었어요. 짐은 금방 꾸렸어요. 짐을 꾸리는 것보다 혹시 방에 흘리고 가는 게 있나 확인하는 것이 시간이 몇 배 더 걸렸어요. 방을 몇 번이고 확인해봤어요. 혹시 흘린 것이 있으면 안 되니까요. 방에 흘린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키고 나서야 짐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어요.
짐을 맡기고 건물 밖으로 나왔어요. 마음이 하나도 급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뭘 어떻게 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어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일정 자체를 그렇게 짰으니까요. 어제 최대한 많이 보고 오늘은 최대한 많이 안 보는 것이 목표였어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고, 이 말을 어길 생각이 1나노그램도 없었어요. 오늘은 어떻게든 땀을 내지 않는 것이 목표였거든요.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세탁방이 보였어요.
'혹시 가방 수선 될 건가?'
원래 끈을 걸어야하는 곳이 떨어졌어요. 다행히 다른 곳에 끈을 묶어서 옆으로 메고 다닐 수는 있었지만 불편했어요. 미묘하게 뭔가 참 안 맞았어요. 돌아다닐 때마다 가방이 걸리적거렸어요. 여기에서는 세탁방이 있으니 지금 가방 맡기면 수선해주시지 않을까? 여기에서 가방 수선을 할 수 있다면 비엔티엔에서는 가방이 덜 걸리적거릴 것이었어요. 미싱으로 드르륵 박기만 하면 되는 거니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어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거 수선 가능한가요?"
가방끈 떨어진 것을 보여드렸어요. 아주머니께서는 가방 끈 떨어진 것을 보시더니 저녁때 손으로 일일이 바느질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냥 비엔티엔 가서 알아보자.'
저녁에 슬리핑 버스를 타러 가야 했기 때문에 가방 수선을 맡길 수 없었어요. 전날 물어볼 걸 후회가 되었어요. 한편으로는 앞으로 여행 다닐 때 순간접착제를 하나 들고 다녀야 하나 생각도 했어요. 베트남 여행때 가방끈이 떨어진 것을 길에서 베트남인이 끈과 순간접착제로 수선해준 적이 있었거든요. 순간접착제만 있다면 실로 감고 순간접착제로 굳혀서 응급조치를 하겠는데 정작 그 순간접착제가 없었어요.
11시 35분. 숙소에서 나왔어요.
하늘이 참 우중충했어요. 햇볕이 내리쬐지 않아 전날보다 덜 더웠어요. 루앙프라방이 제게 잘 가라고 오늘은 햇볕을 강하게 내리쬐지 않고 있었어요.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갔어요.
루앙프라방이 큰 도시가 아니라 소수민족 전통공예 및 민속학 박물관에 도착하니 11시 43분이었어요.
'직원이 영어 안다!'
남자 직원이 영어를 알았어요. 대학교를 갓 졸업한 것 같았어요. 혹시 페이스북 연락처 교환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연락처를 교환했어요.
'영어를 아는 라오인 페이스북 친구 한 명 만들었다!'
루앙프라방 돌아다니며 해결해야 했던 문제 하나의 일부를 해결한 기분이 들었어요. 라오스에 올 때 가장 큰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라오인 친구 만들기'였어요. 라오어를 공부하고 싶은데 책은 성조가 죄다 이상하게 나와 있고, 음성파일을 들어봐도 성조가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었어요. 게다가 라오어를 잘 설명한 책이 없었어요. 한국에서 내렸던 최종 결론은 '라오어는 라오인 없이 학습불가'였어요. 그래서 라오스 입국하는 순간부터 어떻게든 라오인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문제는 라오인들이 제 예상보다 훨씬 영어를 못 한다는 것. 저도 영어 참 못하는데 여기에서는 양키 코쟁이급이었어요. 대화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라오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하려면 라오어가 필요했어요. 즉 풀 수 없는 문제였어요. 라오어를 공부하기 위해 라오인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라오인과 친구가 되려면 라오어를 알고 있어야한다는 무한 순환이니까요.
박물관은 작은 2개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가방은 맡기고 들어가야 하고 플래시는 터트리면 안 되었어요. 그리고 옷에 입장료 낸 사람이라고 스티커를 붙여주었어요.
박물관 관람을 시작했어요. 안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소수민족 의상이었어요.
이 소수 민족 의상은 몽족의 옷이라고 해요. 몽족은 영어로 HMONG 이라고 쓰는데, '흐몽족'이 아니라 '몽족'이에요. 몽족은 라오스 및 베트남 북부에 살고 있어요.
이것은 아카족의 전통의상이에요.
이것은 큼무족의 전통의상이에요.
이것은 타이루족 것이에요.
이것은 큼무족이 베를 짜는 방이래요. 이 방에서 천을 짜는데, 하루에 1미터에서 1.5미터 정도 짠대요.
이것은 굳이 설명을 보지 않아도 물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박물관을 쭉 둘러보았어요.
"라오스 소수민족들은 이런 문화를 갖고 있구나."
박물관에 전시된 것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어요.
벽에 라오스 문화에 대한 설명도 있었어요.
이것은 민간신앙. 설명을 보면 영혼 숭배는 라오스의 모든 삶의 영역과 관련이 있대요. 불교를 믿는 라오인 사이에서 여성들은 새벽이 오기 전 스님들에게 공양을 드리고, 일부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날에 판매할 물건을 만들곤 한대요. 그리고 절에 갈 때 어깨에 두를 숄을 짜기도 하구요.
애니미즘 및 다신교 숭배자들은 샤먼이 그들 믿음의 중심에 있대요. 샤먼들은 영에 의해 선택되는데, 영에게 선택되면 몸이 심하게 아프게 되고, 영의 부름을 받아들였을 때에야 그 아픔이 낫는대요. 우리나라 무속 신앙의 무병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한편 일부 타이 댕 민족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목에 탯줄이 걸려 있으면 무당이 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라 믿는대요. 무당들은 돌과 물소 뿔 등을 이용해 영혼들과 소통한대요. 일반인들은 무당을 통해 영혼에 바칠 술, 삶은 달걀, 양초 등을 준비하곤 한대요.
또한 샤먼들은 환자를 치료할 때 과거 방식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약품과 의학을 활용하는 방법도 이용한대요.
박물관에는 기념품점도 있었어요. 기념품점에서는 이것저것 판매하고 있었어요. 가격은 비싼 편이었지만 질은 확실히 야시장에서 팔던 것보다 좋았어요. 물론 비싸다고 해봐야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보다 조금 저렴한 가격이기는 했어요.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 바깥쪽에 있는 카페로 갔어요. 라오스 커피를 주문했어요. 가격은 1만낍이었어요.
이 카페는 박물관 바깥에 있는데 사람들이 참 없었어요. 주변이 이렇게 생겼거든요.
하지만 커피 맛은 참 좋았어요. 여기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만약 진작에 여기 카페가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카페에 하루에 한 번씩 왔을 거에요.
천장에는 나무를 가늘게 잘라 짜서 만든 개구리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어요.
너무 여유로웠어요.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쉬었어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려 노력하며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었어요. 전날 이 시각,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어요. 극단적으로 다른 두 날의 같은 시각이었어요. 친구가 아주 좋아했어요. 하지만 친구도 알고 있었어요. 오늘이라고 왓을 안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설마 어제 기껏 쌓은 부처님 마일리지 포인트 이걸로 다 써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징크스라면 징크스이기에 오늘도 역시 절에 갈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무조건 꼭 삼배를 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어요. 아무리 미신이고 징크스라지만 훼이싸이 국경에서 루앙프라방 오는 길은 절대 잊을 수 없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