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은 멀쩡한 길이 아니라 수풀로 이어졌어요. 수풀을 뚫고 나오자 또 다시 장관이 나타났어요.
"이거 지역카드 우도 사진이다!"
2000년 8월,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지역카드가 발행되었어요. 지역카드란 공중전화카드 중 정식으로 각 지역에서만 발행했던 카드를 말해요. 이 마지막 지역카드들은 발행매수가 1만장으로 터무니없이 적었어요. 이 가운데 가장 마지막 번호가 바로 '제주우도' 라는 지역카드였어요. 제주도에서 발행되었고,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지역카드 311종 가운데 311번째 지역카드로, 발행번호는 MO0008217 이었어요. 액면가는 3천원.
이때 우도 지역카드 그림을 보고 우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상태였지만 왜 이게 우도인지 매우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제주도에서 우도가 관광지로 유명했던 이유는 전에 말한 대로 검은 모래 해수욕장과 산호사 해수욕장 때문이었어요. 우도가 전화카드 도안으로 실린다면 하늘에서 찍은 우도가 나오거나 검은 모래 해수욕장, 또는 산호사 해수욕장이 나올 거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정작 제주우도 전화카드에 인쇄된 사진은 전혀 엉뚱한 풍경이었어요. 이것을 보고 이게 왜 우도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이곳은 우도봉에서 비와사 폭포와 톨칸이가 있는 쪽이었어요. 우도에 비가 많이 내리면 우도봉 근처 빗물이 흘러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데 이것을 '비와사 폭포'라고 부른대요. 그리고 톨칸이는 소의 여물통이라는 뜻으로 '촐까니'라고도 하는데, '촐'은 '꼴' 또는 '건초'라는 뜻으로 소나 말에게 먹이는 풀을 말하며, 우도에서는 소나 말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을 '까니'라고 불렀다고 해요. '톨칸이'는 '촐까니'가 와전된 말로 '소의 여물통'이라는 뜻이며,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인 우도에서 우도봉은 소의 머리이고, 툭 튀어나온 기암절벽은 소 얼굴의 공대뼈, 그리고 사진 속 성산읍 오조리 식산봉을 '촐눌' (건초를 쌓아올린 더미)라고 보았다고 해요.
참고로 저 사진 속 툭 튀어나온 봉우리는 그냥 우도봉이지 톨칸이 - 즉 식산봉이 아니에요. 식산봉은 제주도 본섬에 있어요.
바도가 청록빛 그라데이션을 만들고 있었어요. 이 풍경을 잠시 감상하다 계속 올레길을 따라갔어요.
"여기도 고인돌이 있네?"
얼핏 보면 그냥 납작하고 큰 돌이지만 이것은 고인돌이에요. 가파도에 매우 많이 있지요.
조금 더 가자 돌탑을 많이 만들어놓은 길이 나왔어요. 여기에 설치된 설명판에는 갈대화석에 대해 나와 있었어요.
계속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이제는 우도 서쪽을 걷고 있었어요. 우도 서쪽은 제주도 본섬과 마주하고 있는 쪽이지요.
뒤를 돌아보니 우도봉이 누워있었어요.
"성산일출봉은 우도에서 봐야 멋있구나!"
우도에서 보는 성산일출봉은 꽤 멋있었어요. 그리고 무언가 제주도 본섬에서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이 있었어요. 하지만 성산일출봉을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1mg조차 없었어요. 성산일출봉이 올라갈 가치가 없는 오름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오름이기도 하고, 제주도 오름 중 매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오름이기도 하지요. 분화구도 시원하고 화끈한 모양이구요. 올라가며 뒤돌아서서 보는 풍경도 매우 좋아요. 그래서 성산일출봉은 한 번은 꼭 올라가보라고 권하는 오름이에요. 그러나 제게 또 올라가라고 하면 절대 올라가고 싶지 않은 오름이에요. 그 이유는 올라가는 길이 계속 뙤약볕 아래로 걸어올라가는 길인데다 경사도 급한 편이거든요. 게다가 저는 성산일출봉을 여러 번 올라갔었어요. 초등학교 때 현장학습으로 성산일출봉을 올라간 적도 있고,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올라간 적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올라간 적도 있고, 친척들 내려왔을 때 친척들 따라 올라간 적도 있어요. 송악산과 더불어 학교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여러 번 갔던 오름인데다, 그나마 송악산은 학교에서만 갔는데 여기는 그 외에도 여러 번 갔던 곳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제게 성산일출봉은 그저 바라볼 때에만 좋은 오름이 되어 버렸어요.
천진항이 나왔어요.
"어? 천진항이 왜 숫자가 적지?"
순간 우리 가족 모두 무언가 이상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분명 올레길을 제대로 걸은 것은 맞았는데, 번호가 무언가 이상했어요. 천진항을 넘어가자 오히려 번호가 확 커져버렸어요. 분명 올레길 이정표를 잘 따라가고 있었는데 숫자는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 일단 올레길 이정표를 따라걸어가며 왜 이렇게 되었나 가족들끼리 논의한 결과, 우도 올레길의 시작은 천진항으로 되어 있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하우목동항에서 내린 데에다 시계방향으로 돌고 있었어요. 어쨌든 하우목동항까지 가면 우도 올레길 완주는 하게 되겠지만, 걸으라는 방향과 전혀 반대방향으로, 그리고 시작점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우리 비양도 안 갔어요."
"비양도? 얘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여기 비양도가 왜 있니?"
어머니께 우리가 비양도를 가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서 한림에 있는 비양도가 여기 왜 있냐고 하셨어요.
"그 한림에 있는 비양도 말고, 여기도 비양도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까 올레길 따라서 걷는 중에 비양도 가는 길 그냥 지나쳐 버렸어요."
"그래?"
우도에도 비양도가 있어요. 제주도가 섬이고, 우도가 섬 속의 섬이라면 비양도는 섬 속의 섬 속의 섬.
어머니께서는 섬 속의 섬 속의 섬 비양도를 가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것을 너무 아쉬워하셨어요. 하지만 돌아가서 비양도로 가자니 이것은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였어요.
천진항은 하우목동항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여기가 과연 지금도 사용하는 항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진도 찍지 않고 왜 천진항에서 올레길이 시작되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진항도 지금까지 엄연히 잘 사용하고 있는 항구였어요.
올레길은 천진항을 넘어서자 섬 안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어요.
일단 올레길을 마저 완주하기 위해 계속 걸었어요.
이제 남은 것은 산호사 해수욕장. 현재는 홍조단괴 해수욕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이 해수욕장만 보면 우도에 있는 해수욕장 3개를 전부 다 보는 것이었고, 그 유명한 산호 모래 해수욕장도 보게 되는 것이었어요.
물은 다 마셨고, 목은 말랐고, 날은 더웠어요. 그래도 열심히 걸었어요.
드디어 산호사 해수욕장에 도착했어요. 이곳의 현재 공식 명칭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홍조단괴 해수욕장. 이름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간단해요. 처음에는 이곳 모래가 산호가 부서져서 만들어진 줄 알았대요. 그래서 모두가 산호 모래 해수욕장, 산호사 해수욕장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이것은 산호가 부서진 것이 아니라 홍조단괴가 부서져서 생긴 모래였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과학적 진실에 맞게 홍조단괴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아직도 여기는 산호 모래 해수욕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아무래도 '산호'가 '홍조단괴'보다 우아한 이미지인데다 더 친숙한 단어이기도 하니까요. 참고로 이 해수욕장은 천연기념물 438호에요.
다행히 여기도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라 가게가 있었어요. 가족들 모두 음료수와 물을 사 마셨어요. 뭔가 마시고 나니 정말 살 것 같고,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겼어요.
홍조단괴가 부서져서 만들어진 모래 사장은 자갈밭을 걷는 느낌이었어요. 걸을 때마다 부스슥, 버서석, 바사삭 소리가 났어요.
이쪽 모래는 이렇게 생겼어요. 꽤 커다란 홍조단괴도 굴러다니고 있었어요.
다시 하우목동항으로 돌아왔어요.
대체 우도초등학교, 우도중학교는 어디 있는 거지?
어머니께서는 섬 속의 섬 속의 섬 비양도를 못 걸으신 것 때문에 너무 아쉬워하셨고, 비양도도 올레길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셨어요. 어머니께서 들고 계시던 팸플릿 속 지도에는 비양도가 올레길에 들어가 있지 않은데다 어머니께서는 비양도가 섬이라는 사실을 모르셨기 때문에 그냥 팸플릿에 나와 있는 올레길대로 가시며 지나치신 것이었어요. 팸플릿 속 지도에는 비양도가 섬처럼 나와 있지도 않았구요. 그냥 우도의 한 지명이 '비양도'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나와 있었고, 이게 하나의 섬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림이었어요. 이런 일이 발생한 결정적 원인은 우도 올레길이 맨 처음 올레길이 그대로 있던 게 아니라 바뀌었고, 우도 올레길이 바뀌면서 비양도도 올레길에 포함되었다는 것이었어요. 하우목동항 입구에 걸려있는 지도에는 비양도까지 우도 올레길이 들어가 있었어요. 하지만 하우목동항에서 비양도를 한 시간 안에 걸어갔다오는 것은 절대 무리.
저는 우도초등학교, 우도중학교를 꼭 보고 싶었는데 이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어요. 올레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우도초등학교와 우도중학교를 들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올레길을 따라서 하우목동항으로 돌아왔지만 학교를 전혀 보지 못했어요. 본 것이라고는 멀찍이 우도 파출소를 본 것이 전부였어요.
마지막 배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이제 방법은...
무조건 버스를 탄다.
하우목동항에서 우도 마을버스 100번을 탔어요.
요금은 성인 천원이었어요.
이미 어머니께서 가고 싶어하시던 비양도도, 제가 가보고 싶어하던 우도초등학교, 우도중학교도 가기는 글렀어요. 이제 개 아니면 도. 버스가 순환노선이었기 때문에 이 버스를 타고 멀찍이서라도 비양도를 보고 우도초등학교, 우도중학교를 보고 가는 수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버스는 우리 가족이 걸은 그 길을 거의 그대로 따라갔어요. 우리 가족이 걸은 길과 다른 구간이 있다면 우도봉 기슭에서 천진항으로 쭉 달려갔다는 것 뿐이었어요.
버스가 하우목동항에 도착하자마자 성산행 배에 올라탔어요.
성산항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아서 배는 금방 차량와 사람을 꽉 싣고 출항했어요.
우도봉과 성산일출봉은 마주보고 있었어요.
우도봉
성산일출봉
배는 금방 성산항에 도착했어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 땅콩 아이스크림!
우도를 돌아다니며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우도는 너무나 멀어져 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