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롯데리아가 있는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온몸을 포박했어요. 바로 다시 안으로 뛰쳐들어가고 싶었어요.
'편의점 가서 도시락이라도 하나 더 사먹을까?'
실내로 들어가고 싶다. 에어컨 바람도 더 쐬고 싶다. 게다가 롯데리아 햄버거 세트 하나로는 식사가 전혀 안 된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
한국에서도 롯데리아 가서 햄버거 세트 하나 먹고 식사가 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일본 롯데리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어요. 롯데리아는 한국과 일본 모두 양이 비슷했어요. 일본인들은 적게 먹는 편이라고 하니 일본인들에게 롯데리아 햄버거 세트 정도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양일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엄연한 한국인. 일본이라고는 아주 예전에 몰타 갈 때 잠깐 경유하며 몇 시간 있어봤던 것을 제외하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이 정도 양으로는 당연히 식사가 될 리 없었어요.
다시 안으로 뛰쳐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뭔가 더 먹고 싶다는 마음이 합체했어요. 이성은 사라졌어요. 본능이 몸을 지배했어요. 더위와 습기를 피하고 싶다는 욕구와 무언가 더 먹어서 배를 뽕뽕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구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어요. 두 눈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일본은 자판기의 나라, 그리고 편의점의 나라. 이렇게 크고 번화한 곳에 편의점이 없을 리 없었어요.
당연히 편의점이 있었어요. 바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어요. 편의점 안에 들어가서 내부를 쫙 둘러봤어요.
'어? 밥 먹는 자리 어디 있지?'
아무리 봐도 도시락 먹을 수 있는 자리가 보이지 않았어요. 무턱대고 도시락을 집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 같았어요. 점포 안에 쓰레기통조차 없었어요.
신경쓰인다. 쓰레기통 없는 게 신경쓰인다. 그냥 신경쓰이는 수준이 아니다. 트라우마급으로 신경쓰인다.
전날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캔 뽑아먹은 후 쓰레기통이 없어서 한참 동안 빈 깡통을 들고 길을 걸어야 했어요. 쓰레기통이 이 근처에 적은지 많은지 전혀 알 수 없었어요. 쓰레기통이 없다면 또 계속 들고 돌아다녀야 할 수 있었어요. 그나마 전날은 깜깜한 밤중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빈 캔을 들고 다녀도 그렇게 문제되지 않았어요. 사진을 거의 안 찍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달랐어요. 사진을 매우 많이 찍을 생각이었어요. 이제야 본격적으로 일정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빈 음료수 통을 들고 다닌다면 엄청나게 불편할 거였어요. 낮이니까 셔터스피드 확보는 충분히 되기 때문에 대충 한 손으로 들고 찍어도 되기는 해요. 그러나 그렇게 불편함을 감수하기에는 날이 너무 덥고 찐득했어요.
'일단 점원한테 물어보자.'
무턱대고 도시락을 집어들 것이 아니라 점원에게 먼저 물어본 후에 도시락을 고르기로 했어요. 점원에게 물어봤어요.
"여기에서 도시락 먹을 수 있나요?"
"아니요. 없어요."
정말 다행이었어요. 만약 본능이 온몸을 100% 지배하고 있었다면 도시락을 결제한 후에야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민했을 거에요. 아직 본능이 100% 몸을 지배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편의점 안을 둘러봤어요. 정말 먼저 물어보고 결정하기를 잘 했어요. 도시락 하나 더 먹는 것은 일단 포기하기로 했어요. 비록 포만감은 없지만 저녁 먹을 때까지 돌아다닐 열량은 충분히 획득했거든요. 게다가 우에노 공원 안에 편의점 하나 없을 것 같지 않았어요. 정말 배고프다면 이따 우에노 공원 안에서 편의점을 찾아서 들어가서 편의점 도시락이라도 하나 사서 먹으면 되었어요.
음료수 한 통만 사서 다시 밖으로 나왔어요.
길거리에서 일본 스님이 탁발하고 계셨어요. 한국 스님과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바로 승복이었어요. 한국에서 스님 승복을 보면 회색 장삼 위에 붉은 빛 가사를 두르는 경우가 많아요. 일본 스님은 갈색 장삼을 걸치고 계셨어요. 승복 모양도 한국 승복과 차이가 있었구요.
더워서 음료수를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어요. 빈 병이 남았어요.
'우에노 공원에 쓰레기통 하나는 있겠지?'
우에노 공원은 상당히 큰 공원이에요. 공원 안에 볼거리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구요. 우에노공원 또한 일본 도쿄 관광지로 유명한 곳 중 하나에요. 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쓰레기통 하나 쯤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일본 지하철 JR 우에노역 근처에 있는 우에노 공원 입구 쪽 길가에는 쓰레기통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만약 우에노 공원에 쓰레기통이 없다면 하루 종일 음료수통을 들고 돌아다녀야 했어요.
우에노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조형물이 하나 있었어요.
우에노역 쪽 사진을 찍고 계단을 올라가기로 했어요.
"사람 무지 많네."
사람이 모두 뒤돌아서 있거나 사람이 없는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있었어요. 카메라를 들고 가만히 기다리다보면 분명히 깔끔한 풍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 순간이 한 번 찾아오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찍은 사진을 보고 거기 참 사람 없다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 사람이 없어서 사진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거의 없는 깔끔한 풍경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순간을 노려서 찍은 사진들이에요.
혼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혼으로는 일본 도쿄 우에노에서 사람이 없는 순간을 찍을 자격이 없습니다. 더욱 분발하시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깔끔한 풍경을 찍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어요. 사진 한 장에 혼신의 힘을 다해 잇쇼켄메이 정신으로 몇 시간이고 기다린다면 아마 한 장 건질 수도 있을 거에요. 문제는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이었어요. 날은 덥고 습했고, 일정은 이제서야 시작했어요. 사진을 찍기 좋은 순간은 전혀 안 찾아왔어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속 돌아다녔어요. 사진에서 정말 보기 싫게 사람이 구석에 잘려서 찍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어요.
'잇쇼켄메이는 너나 열심히 외쳐라. 나는 대충 찍고 갈란다.'
우에노 거리 사진을 대충 찍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여기 코인락커 있네?"
우에노공원 입구 계단을 다 올라가자마자 맨 처음 발견한 것은 바로 코인락커였어요. 일본 도쿄에서 우에노역은 상당히 큰 역이에요. 이쪽으로 관광객들도 잘 오구요. 그래서 그런지 코인 락커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쓰레기통이다!"
쓰레기통이 있었어요. 바로 음료수 패트병을 버렸어요. 아주 귀한 일본의 길거리 쓰레기통이었거든요. 쓰레기통에 패트병을 버린 후 주변을 둘러봤어요.
"여기 흡연구역 있네?"
우에노공원 남쪽 입구에 흡연구역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즐겁게 흡연하고 있었어요.
개구리 분수가 있었어요.
폭포 조형물도 있었어요.
공원 안쪽을 향해 걸어갔어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이 나왔어요.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 사쓰마번 출신 유신지사에요.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에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더불어 유신삼걸로 불리고 있구요. 마지막에는 중앙정부와 정한론 문제로 대립해서 결국 귀향했고, 서남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배가 확실해질 즈음 자결한 인물이에요.
사이고 다카모리는 우리나라에는 정한론자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에요.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편이에요.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세의 지옥으로 전락해 더 망할 것도 안 남은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을 두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중앙정부와 대립했어요. 만약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자라면 메이지 유신 이후 수립된 일본 정부가 이때까지 정한론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되요. 반대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자가 아니라면 일본 정부 내에 정한론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 되구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특징으로는 보통 개가 같이 있다는 점이라고 해요. 이 동상도 보면 사이고 다카모리 옆에 개가 있어요.
우에노 공원 안쪽으로 계속 걸어들어갔어요.
조금 더 걸어가자 쇼기타이 묘소가 나왔어요.
쇼기타이는 에도 막부 시대에 막부군 중 하나였다고 해요. 1868년 5월 15일에 현재 우에노 공원 지역인 우에노산에서 우에노 전투가 발생했대요. 이 전투 이전에 우에노산에는 불교 절인 간에이지에 속하는 많은 법당 건물과 탑이 있었지만, 이 전투로 인해 거의 전부 파괴되었다고 해요. 이 무덤은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쇼기타이군 군인들을 위해 세운 묘소라고 해요.
'우리는 왜 세계사 시간에 일본 메이지 유신 과정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대충 배웠을까?'
세계사를 공부하든 국사를 공부하든 일본 메이지 유신은 상당히 중요해요. 좋아요, 일본이 고려시대까지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미개했다고 쳐요. 그러나 조선시대부터는 일본 에도 막부에 국력이 완전히 뒤쳐졌어요.
조선은 한민족 최악의 시대로 쓸 데 없이 성리학 명분이나 놓고 당파싸움이나 하면서 한민족 자체가 퇴화하고 열등해져간 시대에요. 조선은 치욕스러운 망국의 역사 수준을 넘어 옹호해줄 부분이 하나도 없는 망민족의 역사에요. 이건 당장 국사책에 나오는 유물, 유적 사진들만 비교해봐도 뻔히 보이는 거에요. 자본주의 맹아론이니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하는 걸 떠나서 국사책 건성으로 페이지 후르륵 넘겨가며 사진만 봐도 드러나요. 그 누구도 조선 달항아리 백자와 고려청자, 신라금관 비교해서 조선 달항아리 백자가 고려청자, 신라금관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고 하지 않아요. 조선 시대에 대한 옹호는 날조와 왜곡 그 자체에요.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어요. 이 때문에 강화도조약부터 현재까지 한민족의 역사에서 일본을 제외할 수 없게 되었어요. 오히려 일본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해 현대까지의 일본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역사가 되었어요. 그런데 일본 메이지 유신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는 엄청나게 대충 다뤄지고 있어요. 분명히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부분도 많고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부분도 많은 역사인데요.
의문을 뒤로 하고 일단 벤치에 앉았어요.
"까마귀 참 흉악스럽게 생겼네."
까마귀가 매우 컸어요. 한국에서 보던 까마귀보다 더 커 보였어요. 게다가 머리깃이 세워진 머리는 정말 참 흉악스럽게 생겼어요. 저 정도라면 새 공포증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할 만 했어요.
일본 우에노공원 키요미즈 관음당 입구가 나왔어요.
한쪽에 손 씻는 방법이 그림과 글로 적혀 있는 팻말이 서 있었어요.
왼손을 씻고 오른손을 씻은 후 왼손으로 물을 받아 입을 헹구라고 되어 있었어요.
팻말에 적혀 있는 대로 왼손을 씨고 오른손을 씻은 후 왼손으로 물을 받아 입을 닦았어요. 이제 슬슬 키요미즈 관음당을 둘러볼 차례였어요.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안에 있는 키요미즈 관음당은 1625년에 막부와 만민의 무사평안을 기원하는 절로 자안대사 뎅카이 대승정에 의해 창건된 불교 절 도에이잔 간에이지의 부속 건물이에요.
키요미즈 관음당은 清水観音堂 이라고 써요. 한국어로 읽으면 청수관음당이에요. 키요미즈 칸논도는 1631년에 덴카이 대승정이 수리바치야마 위에 건립한 건물이에요. 1694년경에 현재 위치인 사쿠라가오카로 옮겨졌다고 해요. 키요미즈 관음당은 교토 히가시야마의 키요미즈데라를 본떠 만든 무대 구조의 건축물이에요. 법당 안에 안치되어 있는 천수관세음보살은 헤이안 시대의 히에이잔 고승 에신소즈의 작품이라고 해요.
법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어요.
법당 옆에는 동전을 넣으면 인형극을 보여주는 기계가 있었어요.
줄기를 원형으로 굽힌 소나무가 있었어요. 소나무 줄기로 만든 원형 너머로 우에노 공원의 또다른 입구가 보였어요.
아직 시간적 여유가 많았어요. 하늘은 다시 흐려졌어요. 정말 일기예보대로 오늘중으로 비가 내릴 것 같았어요. 하늘을 보면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았지만 일정을 보면 전혀 급하게 다녀야할 이유가 없었어요. 이제 오후 1시 반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거든요. 일정이라고는 우에노 공원 및 그 근방만 돌아보는 것이 전부였구요. 그래서 매우 느긋하게 키요미즈 관음당을 둘러봤어요.
키요미즈 관음당에서도 불상 앞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절을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어요.
키요미즈 관음당을 다 보고 나왔어요. 계속 우에노 공원 안을 돌아다녔어요.
"가나 사람들이네?"
아프리카 가나 사람들이 NGO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었어요.
"공원 꽤 큰데?"
금방 맞은편 끝자락으로 도착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끝자락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예상보다 몇 배나 더 큰 공원이었어요. '일본'이라고 하면 '작다는 것'만 하도 강조해서 우에노 공원도 별로 안 클 줄 알았어요. 게다가 여기는 아무리 잃어버린 30년이라 해도 여전히 땅값 비싸다는 도쿄였어요. 그래서 당연히 우에노 공원은 길어야 30분이면 다 둘러볼 공원이라 예상했어요. 하지만 안에 야구장도 있었고, 면적 자체도 꽤 컸어요.
"저거 뭐야?"
입간판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요. 공룡 화석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어요.
일본 도쿄 국립 과학관 공룡 특별 전시회 포스터였어요. 포스터를 자세히 살펴봤어요.
일본어로 恐竜博 2019라고 적혀 있었어요. 영어로는 THE DINOSAUR EXPO 라고 적혀 있었어요.
"공룡!"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일본 공룡 연구사상 최대의 발견'이라는 홍보 문구가 붙어 있는 화석을 공개한다는 점이었어요. 무려 전신의 약 80%가 남아 있는 화석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이거 꼭 봐야 해!"
갑자기 흥분되었어요.
우에노 공원 들어와서 흥분할 거리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나 도쿄 국립 과학 박물관 공룡 특별전 포스터를 보는 순간 달라졌어요. 이건 한국에서 정말 못 보는 거였어요. 한국에서 무슨 공룡 전시회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삼엽충 화석, 암모나이트 화석에 무슨 공룡뼈 부서진 거 몇 조각, 계란껍질 깨진 것같은 알조각 부스러기 몇 개 정도에요. 여기에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화석 사진 몇 개 걸려 있을 거구요. 제대로 된 공룡 화석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요.
"우리 공룡 보러 가자!"
친구는 반응이 시큰둥했어요.
"야, 저건 내가 입장료 내줄께! 우리 어차피 도쿄 국립 과학 박물관 갈 거잖아!"
반응이 시큰둥한 친구에게 입장료를 제가 내주겠다고 했어요. 얼마라도 좋았어요. 이것은 이번 여행에 온 이유와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어요. 일본의 특별전은 과연 한국의 특별전과 얼마나 다를지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일본 여행 계획 중 이런 특별전 관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일본 도쿄에서 지금 무슨 특별전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몰랐거든요.
이런 특별전은 국력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는 행사에요. 돈을 발라놓고 쏟아부을 수록 전시물과 수준이 굉장해지거든요. 게다가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행사이기 때문에 밑바탕이 되는 힘의 차이도 가늠해볼 수 있는 자리에요. 일본이라고 공룡뼈가 쏟아져나올 것 같지는 않았어요. 공룡뼈 쏟아져 나오는 곳은 몽골과 미국 같은 곳이죠. 그래서 더욱 기대되었어요.
포스터 하단을 보니 협찬이 NHK와 아사히신문사였어요. NHK와 아사히신문은 웬만한 한국인들 다 들어본 일본의 거대 언론사에요. '세계 최초 공개'라고 큼지막하게 적어 놓은 것은 일본 특유의 과장일 수도 있었어요. 언어 표현의 참신성은 일본과 북한이 세계 최강을 놓고 다투고 있는 상황. 이 중 일본의 특징이라면 하여간 휘황찬란하게 말을 참 잘 만들어요. 한국의 이종격투기 선수인 최홍만 선수가 K-1에서 활동할 때 한국에서는 그냥 평범하게 '최홍만 선수의 니킥'이라고 부르는 것을 일본 방송에서는 무려 '내장파열니킥'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했어요. 그러므로 저 문구 하나 믿고 갔다가는 어느 정도 실망할 각오를 하기는 해야 했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이렇게 특별전 둘러보며 국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가 얼떨결에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거든요.
도쿄 국립 과학 박물관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어요. 빨리 보고 싶었어요. 가는 길에 국립 서양 미술관이 있었어요.
일본 도쿄 국립 서양 미술관도 특별전이 진행중이었어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특별전이었어요. 정확히는 국립서양미술관 개관 60주년 기념 마츠카타 컬렉션전이었어요. 여기도 무려 진품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고 했어요. 일본 도쿄 국립 서양 미술관은 건물부터 근대 건축의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이었어요. 이쪽도 유혹이 매우 컸어요. 그러나 일단 공룡부터 보고 오기로 했어요. 공룡이 더 중요했어요.
'시간 남으면 저거도 가서 봐야겠다.'
2019년 8월 27일 오후 1시 41분. 일본 도쿄 국립 과학 박물관 공룡 엑스포 특별 전시회 입구에 도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