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출발해야 할 시간이 계속 다가오고 있었어요.
"너네도 며칠간은 좀 보지 말자."
제 방에는 책이 많아요. 무슨 다보탑, 석가탑처럼 책상으로 쓰는 앉은뱅이 탁자 양 옆에 책이 높이 쌓여 있어요. 그 옆에 또 첨성대마냥 책이 탑 하나 이루고 있고, 그거 말고도 여기저기 책이 쌓여 있어요. 그래서 제 방에 놀러온 사람들은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아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요. 제가 잠자는 자리 옆은 책으로 담을 쌓아놨거든요. 그래도 작년까지는 머리맡에만큼은 책이 없었어요. 저도 다니는 길이 하나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올해초부터 박스 안에 있던 책을 다시 꺼내 보기 시작하면서 이제 머리맡까지 책이 널부러져 있어요.
다른 책 쌓여 있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머리맡에 쌓여 있는 책은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어요. 단순히 기분탓이 아니라 이건 제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걸 정리하려고 해도 이것들은 자주 보려고 꺼내놓은 책이라 쌓아놓을 수도 없었어요.
이렇게 보기만 해도 사람 뭐부터 해야 할 지 감 못 잡고 멍하니 있게 만드는 책들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될 거였어요. 돌아오면 또 저를 정신없게 만들겠지만, 제주도 가 있는 동안 이 책들은 아예 잊어버릴 거에요.
3월 1일 삼일절. 전날 밤부터 블로그에 올릴 글을 쓰다 인터넷하며 놀다 하며 밤을 샜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3월 2일 첫 비행기를 타려면 3월 1일 밤에 집을 나서야 했거든요. 하지만 억지로 졸린 거 참아가며 억지로 버티지 않았어요. 그냥 재미있는 것 찾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냈어요. 놀면서 시간 보내면 하룻밤 새는 건 문제 없어요. 여행 준비도 해야 했지만 준비할 게 없었어요. 이 순간, 여행 준비하는 거라고는 방에서 옷 마르기를 기다리며 노는 것 뿐이었어요. 최대한 놀고 놀다가 졸리면 쓰러져 자면 되었어요. 그렇게 되었어요. 거의 정오 되어서야 잠들었어요.
"뭐야? 7시도 안 되었어?"
잠에서 깨어서 시계를 보았어요. 6시 45분이었어요. 기절한 듯 푹 잤는데 너무 일찍 일어나버렸어요.
다시 잘까? 이따 10시에는 무조건 씻고 나갈 준비 해야 하는데...지금 다시 잠들면 자정 넘어버리는 거 아니야? 자정 넘어버리면 무지 골치아파져. 이거 일어나야겠지? 딱 두 시간만 더 자고 일어났으면 좋았을 건데. 하여간 이럴 때는 이상하게 일찍 잠에서 깨어난단 말이야. 그냥 확 지금 준비하고 출발해버리고 싶다. 2시간 동안 마땅히 할 것도 없단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다시 자려고 하면 또 잘 수 있었어요. 다시 잠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다시 잠들었다가 일어나는 게 문제였어요. 이번에 잠들면 또 몇 시간 잠들어버릴 거였어요. 최저임금이 인상되면서 올해부터 의정부에서 종로5가까지 갈 수 있는 108번 버스 막차가 자정 조금 넘어서 끊겨버려요. 108번 버스 막차를 놓치면 여행 난이도가 갑자기 높아질 거에요. 비행기표를 취소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안 가요. 단지 의정부역에서 도봉산역까지 걸어가야 할 뿐이에요. 택시를 타고 가든가요. 도봉산역까지만 가면 거기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종로로 이동할 수 있어요.
나 종로2가에 있는 24시간 카페도 들려야 해.
의정부역에서 야심한 시각에 도봉산역까지 갈 수 있어요. 시간이 급하면 택시를 탈 거고, 막차를 막 놓친 시점이라면 걸어갈 거에요. 문제는 뭘 선택하든 간에 도봉산역에서 심야버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새벽 3시 반 정도에 종로2가에서 N26번 버스를 타야 했어요. 이걸 고려하면 막차를 놓치는 순간 종로2가에 있는 24시간 카페를 들르기 엄청 애매해져요. 택시 타고 의정부에서 종로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구요.
옷은 의정부에서 입던 대로 입고 간다. 제주도가 따뜻하더라도 외투는 한겨울에 입는 패딩 입는다. 캠핑해야 하니까 얇은 추리닝 바지 하나 챙긴다. 양말은 넉넉히 챙긴다. 팬티도 넉넉히 챙긴다. 디카에 들어가는 AA사이즈 배터리는 충전중이다. 메모리카드도 8GB 짜리로 바꿔서 끼워놨다. 짐 꾸리는 데에 예상 소요 시간 10분. 샤워하고 나와서 백팩에 양말, 팬티 쑤셔넣고 옆으로 메는 가방에는 노트북, 디카 집어넣는다. 이러면 완벽히 끝.
머리 속에 짐을 어떻게 꾸릴지 전부 정리되어 있었어요. 동선도 다 머리 속에 있었어요.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속옷을 걸친 채로 머리를 빗어요. 그 다음 비닐봉지 두 개를 꺼내요. 하나는 그냥 백팩에 쑤셔넣고 다른 하나에는 양말과 팬티를 집어넣어요. 그 위에 얇은 추리닝을 대충 개어서 쑤셔넣어요. 이러면 백팩은 다 꾸려요. 그 다음 노트북 가방에 노트북을 집어넣어요. 디지털 카메라를 집어넣어요. 충전기와 배터리를 집어넣으면 노트북 가방도 다 꾸려요. 그 다음 옷을 입고 가방 메고 바로 나가면 되요.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무조건 현지 조달. 외국 여행이 아니라 괜찮아요. 제주도는 백화점이 없는 대신 대형 마트가 꽤 커요. 제주시에는 이마트도 있고 롯데마트도 있어요. 정말 뭔가 꼭 사야 한다면 이마트나 롯데마트 가서 사면 되요. 당장 AA사이즈 충전지와 충전기는 이마트 가서 구입하기로 했구요. 이번에는 짐 다 들고 24시간 카페를 찾아 걸어가는 일정이 있었어요. 기동성이 중요했어요. 사실 외국 여행도 아니고 제주도 여행이라 뭘 바리바리 싸갈 필요 자체가 없기도 했구요.
'이번에는 동영상도 조금 찍어야지.'
제 스마트폰에 동영상을 촬영하면 6초까지 GIF 파일로 변환해주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어요. GIF 파일은 일반 사진 파일처럼 처리되요. 이 기능을 사용한다면 여행기 쓸 때 짧은 동영상도 넣을 수 있지어요. 귀찮게 무슨 업로드하고 뭐하고 할 거 없이 여행기에 사진 집어넣는 것과 똑같이 처리할 수 있어요. 제 여행기 보는 사람도 귀찮게 플레이 버튼 누르고 버퍼링 기다리고 할 필요 없어요. 바로 6초짜리 짧은 동영상이 뜨니까요.
그래서 구입한 것이 바로 듀얼 USB였어요. 동영상 찍다가 스마트폰 용량 부족해지면 안 되니까요.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간간이 찍을 계획이었어요. 듀얼 USB를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어요. 예전에 한 번 여행갈 때 디지털 카메라에 메모리 작은 것을 끼워놓은 것을 까먹고 그대로 카메라 들고 갔다가 메모리 부족해서 고생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짐 싸기 전에 이건 확실히 해놨어요.
인터넷 하고 카카오톡으로 친구들과 잡담하고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어요. 밤 10시 반이 되었어요.
'이제 씻고 나가야겠다.'
말만 봄이지 아직은 겨울. 온수로 몸을 충분히 덥히고 나가야 안 추워요. 온수를 틀고 뜨뜻한 물을 샤워기로 온몸에 오래 뿌려서 몸을 덥혀야 했어요. 샤워를 다 끝냈어요. 아주 따뜻했어요. 옷을 입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어요. 짐 꾸리는 데에 몇 분 안 걸렸어요. 짐을 꾸린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지경이었거든요. 양말과 팬티만 비닐 봉지에 넣어 백팩에 집어넣는 것으로 끝이었으니까요. 노트북 가방도 금방 다 꾸렸어요.
3월 1일 밤 11시 43분. 의정부역에 도착했어요. 서울 종로까지 가는 108번 버스 막차는 아직 널널했어요. 서울로 가는 108번 버스 막차는 대충 12시 10분쯤 의정부역 정류장을 통과하거든요.
'이렇게 서울 가는 거 대체 얼마만이냐.'
자정 즈음 108번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작년 한여름에 한 번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108번 버스를 타고 서울을 간 적이 있어요. 바로 종로2가에 있는 24시간 카페 가려구요. 그때 편의점에서 도시락 먹고 배 꺼트리려고 걷다가 이번에 갈 바로 그 24시간 카페를 안 가고 노원역에 있는 24시간 카페를 가기로 했어요. 결과적으로 심야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엉뚱한 신논현역에 있는 24시간 카페를 갔어요. 그 덕분에 작년에 24시간 카페 글 쓴 게 1개 있어요. 그 이후, 올해 1월에 모처럼 심야시간에 108번 버스 타고 24시간 카페 가려고 했지만 버스 막차 시간 바뀌는 바람에 막차를 놓쳤어요. 그러니 작년 여름 이후 처음이었어요.
의정부역을 건너가며 사진을 찍었어요. 다 망쳤어요. 사진이 흔들렸어요. 괜히 의정부역까지 가는 동안 시간만 더 많이 걸렸어요. 그냥 걸어갔으면 배터리도 아끼고 시간도 단축했을 거에요. 괜히 여행기 쓸 사진 찍어본다고 하다가 배터리만 날렸어요. 가뜩이나 다음날 쓸 수 있는 배터리는 카메라에 끼워넣은 배터리 뿐이었어요. 망친 사진을 지우고 의정부역을 향해 걸어가던 중 뭔가 떠올랐어요. 은행 볼 일이 하나 있었어요. 가던 길을 멈추고 길거리에 서서 스마트폰으로 은행 볼 일을 처리했어요.
의정부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밤 11시 50분이었어요.
의정부 버스정류장에는 술 냄새 풍기는 젊은 영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한독립만세 외치고 목 아파서 술 한 잔 걸쳤나 봐요. 술냄새 풍기는 사람들과 같이 버스를 기다렸어요. 밤바람은 조금 차가웠어요. 차가운 밤바람 속에 사람들이 뿜어내는 술냄새가 섞여 있었어요. 삼일절 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어요. 멀리 어둠 속에서 버스가 저를 향해 달려왔어요. 108번이었어요.
11시 56분. 108번 버스를 탔어요.
버스 안에는 사람이 많았어요. 많이 타고 많이 내렸어요. 이 버스가 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새벽 1시쯤 될 거에요. 예전에는 새벽 2시까지 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버스정류장에 가면 의정부로 가는 108번 버스가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종로에서 의정부로 버스 타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1시 정도에 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버스 정류장에 가 있어야 해요. 최저임금 폭등으로 대중교통 이용이 더 나빠졌어요. 108번, 심야버스는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게 외쳐대는 '서민'인 대리운전 기사나 밤 늦게 일하러 가는 사람, 야심한 시간에 귀가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대중교통수단인데요.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버스 안에 대리운전 기사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 버스에 탄 사람 중 많은 수가 동대문 버스 정류장에서 내릴 거에요. 동대문 야시장 가는 사람들도 이 버스를 잘 이용하거든요. 3월 1일은 금요일. 서울 지역 야시장이 모두 쉬는 날은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새벽이에요. 이 밤에 동대문은 신새벽까지 북적거릴 거에요. 물건 사는 사람들과 물건 나르는 사람들로 바글거릴 거에요.
'동대문 야시장도 잠깐 들려볼까?'
동대문 야시장은 여러 번 가봤어요. 올해 들어서는 아직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이왕 한밤중에 출발한 거, 가는 길에 동대문 야시장을 한 번 쓱 둘러보고 가도 괜찮을 거 같았어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어요. 64GB 짜리 듀얼 USB가 있었어요. 스마트폰 용량은 걱정할 필요 없었어요. 108번 버스는 동대문 정류장에서도 정차하고, 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정류장에서도 정차해요. 동대문에서 내린 후 종로6가부터 종로2가까지 걸어갈지, 종로5가에서 내려서 종로2가까지 걸어갈지 고민되었어요.
'일단 내려서 결정해야지.'
버스 내부 사진을 조금 더 찍고 싶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 타고 내렸고, 버스는 흔들렸어요. 내부도 그렇게 밝지 않았어요.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기에는 무리였어요. 이럴 때에는 확실히 스마트폰 카메라가 훨씬 나아요. 카메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어요.
'너는 대체 잘 하는 게 뭐냐?'
사진을 넓게 찍어주기는 했지만 그것 뿐이었어요. 이거 사용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이 카메라 색감 특징을 감도 못 잡고 있었어요. AA배터리 4개가 들어가서 무거웠고, 가볍게 들고 다닐 크기도 아니었어요. 밤에 사진 찍을 때 이제는 제 스마트폰인 갤럭시노트5에도 밀려요. 기술이 정말 많이 발전했어요. 어지간한 디지털 카메라는 이제 스마트폰에 거의 다 따라잡혔으니까요.
'내일은 복습의시간이랑 뭐하지?'
복습의시간은 자기 차 타고 시골로 가자고 했어요. 모처럼 출사 가자고 했어요. 복습의시간은 밤에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운전을 안 한다고 했어요. 아침에 갔다가 날 저물기 전에 돌아올 곳 중에서 하나 찾아야 했어요. 일기예보를 보면 오후에 비가 올 거라고 했어요.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어요. 제주도에서 정말 아름다운 곳? 사진 찍으며 놀기 좋은 곳? 숨겨진 비경 같은 곳은 없어요. 제주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들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었어요. 그 다음 괜찮은 곳들도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에는 다 관광지가 되었어요. 제가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간 후에는 동네 산책하는 곳 같은 곳조차 다 관광지가 되었어요. 물론 숨겨진 비경 비스무리한 곳이 있기는 해요. 문제는 그런 곳은 일단 날이 풀리고 하늘이 맑아야 해요. 복습의시간이 날 저물 때부터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운전을 못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일단 해 떠 있는 시간이 길어야 해요.
'비양도나 가자고 할까?'
제주도에서 손꼽히게 예쁜 해변 중 항상 최고를 놓고 다투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협재해수욕장이에요. 협재해수욕장 바로 앞에는 섬 하나가 있어요. 바로 비양도에요. 복습의시간 집이 신제주에 있었기 때문에 비양도 정도는 무리하지 않고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중요한 것은 뱃시간이었어요. 비양도는 섬이에요. 제주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가야 해요. 비양도 가는 배 시간이 맞으면 비양도 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못 가요.
비양도 말고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어요. 풍경 좋기로는 가파도도 좋아요. 그런데 가파도는 배가 별로 없고, 제주도를 종단해야 해요. 우도는 무조건 날 어두워진 후에 운전할 각오 하고 가야 해요. 우도는 섬 자체가 작지 않거든요. 우도가 있는 성산, 가파도와 산방산이 있는 모슬포 쪽은 가볍게 다녀오기에는 거리가 조금 있었어요. 결정적으로 모슬포는 제주도 남부, 성산은 제주도 동부 끄트머리였어요. 가볍게 다녀오려면 제주도 서북부에서 결정해야 하는데, 제주도 서북부에서 떠오르는 곳이라고는 비양도 뿐이었어요. 비양도는 저도 안 가봤기 때문에 궁금했어요.
제주도 내려가자마자 복습의시간과 뭐 할지는 고사하고 동대문 야시장을 들렸다 종로2가 24시간 카페를 갈 지, 바로 종로2가 24시간 카페를 갈 지도 결정 못했어요. 그런데 버스는 어느새 다음 정거장이 동대문이었어요.
'일단 내려야겠다.'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했어요. 일단 내려서 생각하기로 했어요. 동대문 야시장을 가든 말든 버스에서 내리는 게 우선이었어요. 마음이 변해 동대문 야시장을 안 가도 괜찮아요. 종로6가에서 종로5가까지는 금방 가니까요. 하지만 종로5가에서 내려서 동대문 야시장을 가고 싶어지면 종로6가 길을 걸어갔다 다시 24시간 카페를 가기 위해 되돌아와야 했어요. 내려야 했어요. 내려서 동대문 보며 어떻게 할 지 결정해도 충분했어요. 그러나 종로5가 버스 정류장 가면 무조건 종로2가 24시간 카페로 가야 했어요.
새벽 1시. 동대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어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진을 한 장 찍었어요.
'여기도 진짜 추억의 장소이지.'
복습의시간에게 여기 사진 찍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새벽 1시였어요. 이 시간에는 어지간해서는 메시지를 보내면 안 되는 시간이에요. 이 시각에 확실히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요.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군대 전역하고 복학해서 고시원에서 살던 시절 이야기. 복습의시간이 내가 사는 고시원에서 살기로 했어. 어느 날, 복습의시간은 중고로 디카를 구입했다고 내게 보여줬어. 그게 니콘 D50이었어. 야심한 시각에 복습의시간과 고시원에서 나와 동대문까지 걸어갔어. 동대문 도착했을 때 시각은 새벽 5시 30분. 그때 복습의시간한테 D50 카메라를 받아들어 사진을 한 장 찍었지. 그게 바로 이 사진이야.
2006년 5월 8일 월요일 새벽 5시 34분 58초. 내 인생에서 역사적인 순간. 이 사진이 바로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야. 바로 저 사진을 찍은 장소가 지금 108번 버스가 정차하는 동대문 정류장이야. 내가 디지털카메라를 만진 첫 순간. 2006년 5월 8일이 이후 정확히 하루 뒤인 2006년 5월 9일, 내 인생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인 소니 W1을 구입했어. 이것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 날짜 정보 보면 알 수 있거든.
동대문 대각선 맞은편 횡단보도로 내려왔어요.
동대문 앞은 새벽 1시가 넘었는데도 차가 씽씽 달리고 있었어요.
'동영상 한 번 찍어볼까?'
듀얼 USB를 구입한 이유는 동영상 촬영을 위해서였어요.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한 후 GIF로 변환시켰어요.
"이거 괜찮은데?"
여자친구는 제가 걱정되어서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여자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흥인지문 야경 GIF 파일을 전송했어요. 어떻냐고 물어보았어요. 여자친구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요.
나 그런데 사진 몇 장 찍어야 해?
종로2가 24시간 카페 글 쓰기 위해 한 장, 여행기 쓰기 위해 한 장. 하나는 스마트폰으로 찍고 하나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을 거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게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또 따로 정리해서 다른 글을 쓰려면 그 경우를 대비해 사진을 똑같이 한 장 더 찍어야 했거든요. 이때부터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요. 일단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으로 한 장 찍고 디지털카메라로 한 장 찍어요. 필요하면 동영상도 하나 찍구요. 그 이후가 문제였어요.
이번 여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뭐라카네가 출판사를 차리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 거기에서 순간 영감이 떠오른 것이 있었어요. 이 영감은 '왜 ebook은 아직도 대중화되지 못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서 출발해요. ebook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제 조만간 종이로 인쇄된 책은 곧 사라질 거라 했어요. 그렇지만 ebook 성장은 여전히 더디고, 종이책은 꾸준히 인쇄되고 있어요. 대체 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만 하는 문제였어요.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더 떠오른 의문이 있었어요. 앞으로 글은 어떻게 바뀔 거냐는 거였어요.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였어요. 특히 여행기를 쓰는 저한테는요. 이제 긴 글을 쓸 줄 아는 사람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어요. 긴 글을 못 읽는 사람도 수두룩해요. 동영상 사이트인 유투브는 이제 정보검색 및 포털로 진화하고 있어요. 그러면 글은 과연 망할 것인가? 아니면 글은 독자적인 영역을 새로이 구축해나갈 것인가? 중요한 문제였어요.
이 문제를 풀려면 저도 뭔가 새로운 것을 해봐야 했어요. 그런데 그걸 고려해서 사진을 찍으려 하자 대체 같은 것을 몇 장 찍어야할지 헷갈렸어요.
시각을 확인했어요. 1시를 넘겼어요. 김포공항에 가기 위해서는 새벽 3시 30분경에 N26번 버스를 타야 했어요. 종로2가까지 가는 시간, 카페에서 음료 마시고 글 쓰는 시간을 고려하면 아주 널널하게 시간이 남은 건 아니었어요. 동대문 야시장을 간다면 빨리 둘러보고 나온다 해도 30분은 걸릴 거에요. 동대문 야시장은 번잡하고 규모도 크거든요. 여기에 사진까지 찍으며 돌아다닌다면 더 늦어질 거구요.
'그냥 카페 가야겠다.'
종로6가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종로 거리 중 종로6가의 특징은 동대문 상권과 연결되어 있어서 동대문 시장 느낌이 상당히 강하다는 점이에요. 낮에는 정신없이 짐을 날랐을 오토바이가 길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 옆 차도에서는 차가 쌩쌩 달리고 있었어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어둡고 배터리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빨리 걸어갔어요. 어차피 이 정도 어둠 속에서 맨손으로 사진을 찍으면 사진이 안 흔들릴 수 없어요. 예전에 여행 다닐 때에는 감도 올려서 찍는 법이 익숙하지 않아서 날이 어두우면 사진 찍는 걸 그냥 포기하곤 했어요. 그래도 이제 정 안 되면 감도를 올려서 일단 찍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종로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어요. 종로5가라는 것을 알려주는 광장시장이 나타났어요.
광장시장은 왜 유명한지 모르겠어요. 여기는 원래 한복 파는 시장으로 유명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먹거리 야시장으로 유명해졌어요. 동대문 쪽에 게스트하우스가 많이 몰려있고, 동대문 자체가 동대문 야시장 때문에 밤 늦게까지 뭔가 할 게 있기는 해요. 하지만 왜 광장시장이 서울 관광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로 크게 떴는지 아직도 궁금해요. 심지어 동대문 쪽에서 일해본 적도 있는데 말이에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어요. 종로3가 24시간 카페인 할리스커피 종로3가점이 나왔어요.
(종로3가 24시간 카페 할리스커피 종로3가점 리뷰 : https://zomzom.tistory.com/2684)
할리스커피 종로3가점은 여기를 자기 사무실인 양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갔던 2017년 초겨울만 해도 매장 내부에 '본 매장은 "구매고객"을 위한 공간입니다. 자신의 사무실처럼 매장을 이용하는 분, 부동산, 브로커 등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 통제합니다. 매장관리자 및 직원의 퇴점 요구 시 즉시 퇴점 하여야 함.'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어요. 아예 대놓고 여기 사진 찍고 자기 사무실이라고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종로 상권이 많이 죽기는 했지만, 아마 지금도 종로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람에 치여서 힘들 거에요. 특히 야간에는 취객, 노숙자들 때문에요.
2019년 3월 2일 새벽 1시 26분. 길 건너편에 제가 가기로 한 종로2가 24시간 카페인 할리스커피 종로본점이 보였어요. 여기는 제가 24시간 카페를 찾아다니던 2017년에는 없었어요. 그 이후에 생긴 곳이에요. 여기도 24시간 카페에요.
'인사동이나 조금 보고 올까?'
아직 여유가 있었어요. 인사동은 바로 근방에 있었어요. 오밤중 인사동 풍경도 한 번은 볼 만 해요. 지금은 인사동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인사동 전성기 시절에는 낮에 한국인, 외국인 가릴 것 없이 바글거렸어요. 그렇게 화려한 낮 풍경을 보다 오밤중 및 새벽에 인사동을 가면 깜짝 놀랄 풍경이 나타나곤 했어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도처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거든요. 무슨 '공주님의 은밀한 사생활'이라 이름 붙여도 될 정도로 낮과 정반대 모습이었어요.
종로에서 인사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낙원상가가 있는 길로 가야 해요. 이 길로 가다 보면 아주 작은 골목이 있어요. '피맛골 주점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좁고 짧은 골목이에요.
인사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계속 걸어갔어요.
"인사동도 완전 망했구나."
쓰레기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쓰레기를 줄이는 노력을 해서 줄어든 게 아니라 여기 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방증이죠. 예전에는 세상에 이렇게 지저분한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밤이 되면 쓰레기가 여기저기 산을 이루고 있었어요. 이제는 그냥 평범한 번화가 중에서도 나름 깨끗한 편에 가까웠어요. DDP를 마지막으로 종로는 시간이 멈춰버렸어요. 시간이 멈추면서 사람들도 강남으로 다 떠나버렸어요.
한때 인사동의 명물이었던 한글로 '스타벅스'라 적힌 간판이 달린 스타벅스. 스타벅스가 인사동에 입점하려하자 어찌 감히 미국 카페 스타벅스가 인사동에 들어오려 하냐고 시끄러웠었어요. 인사동은 모든 간판을 한글로 써서 달아야 한다는 규제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구요. 이때는 우리나라에 반미 분위기가 꽤 있던 시기였어요. 스타벅스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은 디자인의 간판을 쓰는데, 그 콧대 높은 스타벅스가 어떻게 할 지 흥미거리였어요. 놀랍게도 스타벅스는 인사동 입점을 위해 한글로 된 스타벅스 간판을 달았어요. 그 후 한동안 인사동의 이 한글로 '스타벅스'라 적힌 간판은 인사동 명물이 되었어요. 이제는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에요. 그때에 비해 지금은 스타벅스가 엄청나게 대중화되었어요. 이제는 스타벅스 자주 간다고 해서 허영과 사치에 쩔은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도 없어요. 물론 아직도 스타벅스가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요.
인사동 야경을 동영상으로 찍은 후 GIF 파일로 변환했어요. 여자친구에게 보여주었어요. 반응이 아주 안 좋았어요. 너무 어지럽다고 했어요. 확실히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사진을 촬영하는 것과 엄청나게 많이 달랐어요. 구도 잡고 촬영영역 잡는 것까지 다 달랐어요. 게다가 속도도 신경써야 했어요. 이건 연습이 필요했고 요령도 필요했어요. 그냥 새로운 것을 익힌다고 생각하고 접근할 것이었어요.
인사동을 더 볼 필요는 없었어요. 간간이 차만 쌩 달려가고 사람 하나 없는 거리. 사람이 없어져서 쓰레기도 줄어든 길. 종로2가 24시간 카페인 할리스커피 종로본점으로 갔어요.
카페 안으로 들어갔어요. 3층은 청소중이라 1층과 2층만 이용할 수 있다고 했어요. 음료를 주문해 2층으로 올라갔어요. 노트북에 전원 케이블을 연결해 콘센트에 꽂았어요. 노트북을 켜고 스마트폰을 연결했어요. 스마트폰 배터리도 충전해야 했거든요. 이따 저녁에 복습의시간 집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 전기를 아껴 써야 했어요. 스마트폰 보조배터리 2개를 챙겨오기는 했지만, 제일 좋은 것은 어쨌든 전기를 아껴써서 보조배터리 전력을 최대한 조금 소비하는 것이었어요.
스마트폰에서 노트북으로 사진을 옮겼어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노트북으로 옮겼어요.
"뭐 이렇게 정신없어?"
동영상은 다른 폴더에 저장되어 있었고, GIF 변환시킨 동영상은 또 다른 폴더에 저장되어 있었어요. 여기에 사진도 중복으로 찍은 게 있었어요. 이것들이 한 자리에 다 모이자 아주 난리였어요. 아까부터 계속 사진과 동영상을 몇 개씩 남겨야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걸 보니 더 어지러워졌어요. 가뜩이나 동영상 촬영을 어느 순간에 어떻게 하고 이걸 어찌 활용할지 머리가 복잡하던 차였어요.
"아, 그냥 편한대로 할래."
이게 머리 속에 틀이 한 번 잡히면 편해요. 그런데 지금 이 틀 자체가 없었어요. 사진을 난사하는 것과 동영상을 난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어요. 사진 활용과 동영상 활용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기준이 안 잡혀 있었어요. 사진은 사진만의 특징과 기능이 있고 동영상은 동영상만의 특징과 기능이 있어요. 이걸 제 기준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이 기준이 확실히 잡혀서 몸에 익어야 자연스럽게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수 있어요. 무조건 난사한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하나도 안 되어 있었어요.
동영상과 사진 특징과 활용 기준도 안 잡혀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앞으로 뭘 어떻게 할 지에 대한 것도 없었어요. 여행기만 쓸 건지, 여행기 외에 별도로 몇 개 더 글을 쓸 건지, 출판사 차린다는 친구한테 글 써서 넘기기까지 할 건지 정해놓은 것도 없었어요. 더 혼란이었어요. 사진은 그나마 쉬워요. 넉넉하게 같은 사진 몇 장 찍어버리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영상은 달라요. 게다가 배터리 소모 및 저장매체 용량 문제까지 있었어요.
GIF 파일 크기를 확인했어요. 파일 용량이 작지 않았어요. 이것도 문제였어요. 만약 GIF 파일을 글에 많이 집어넣으면 글이 무거워질 거에요. 글이 무거워지면 당장 테더링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제가 제 글 보기 고약해져요.
미리 뭘 어찌할지 예측하고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하다가는 진짜 아무 것도 안 될 거 같았어요.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은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안 될 게 뻔했어요. 그동안 여행하며 배터리 문제, 저장 매체 용량 문제에 안 시달려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촬영하면 시간까지 문제가 되요. 사진 한 장 찍는 데에 길어야 몇 초에요. 하지만 가다 서다 가다 서다하면 걷는 속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같은 거리를 걸어도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려요.
결론은 간단했어요.
욕심 버려. 다 가지려고 하다가는 그냥 폭삭 망해. 그러면 최악의 결과만 손에 쥘 뿐이야.
어린아이 떼쓰고 징징거리듯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면 돌아오는 건 이도 저도 아닌 최악의 결과물 뿐이에요. 하나를 얻고 싶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해요. 이미 여행은 시작되었어요. 이것저것 고민하며 다 가지려고 하다가는 여행기에 쓸 사진도 제대로 못 건질 수 있어요. 그 이전에 계속 시간에 쫓길 수 있어요. 회사 가기 싫고 돈 못 버는 것도 싫다고 둘 다 욕심부리면 몸은 몸대로 상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상하고 징징이 밖에 안 되요. 회사를 가서 돈을 벌든가, 돈 못 버는 거 감수하고 회사를 때려치든가 하나는 선택해야 해요.
이것도 마찬가지였어요. 여행기를 똑바로 쓰고 싶다면 새로운 시도는 일단 보류해야 했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고 싶다면 여행기를 포기할 각오를 해야 했어요. 제가 택한 건 전자였어요. 일단 그간 써왔던 대로 여행기 쓸 생각으로 사진 찍고 여행 즐길 거에요. 간혹 새로운 시도가 이런 거다 느낌이 오면 그때 잠깐 시도해볼 거에요. 동영상도 많이 찍겠다고 64GB 듀얼 USB도 구입했지만 그것까지 쓸 일은 아예 없게 되었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외장하드 수명 거의 다 되어서 백업할 것 하나 사야 했거든요.
카페에서 글 하나를 다 썼어요. 새벽 3시가 되었어요. 직원이 이제 2층 청소해야 하니 3층으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부탁했어요. 3층으로 올라갔어요. 3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제가 김포공항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타야 하는 N26번 심야버스 위치를 확인했어요.
"뭐지?"
N26번 버스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다음이고 네이버고 똑같았어요. N26번 모든 차가 다 제자리에서 세월아 네월아 가만히 있었어요.
'이거 이상한데? 설마 차 놓치는 거 아냐?'
다음 뉴스에도, 네이버 뉴스에도 서울 종로에서 거대한 사고가 발생해 도로가 전면통제되었다는 뉴스 따위는 없었어요. 동묘에 있는 버스가 거기에 그대로 몇 분이고 가만히 있으려면 흥인지문 사거리에서 뭔가 큰 사건이 터져야 해요. 버스가 아예 멈춰버릴 정도면 뉴스에 뜨고 인터넷이 엄청 시끄러워져야 정상이에요. 그러나 뉴스는 조용했어요. N26번 버스는 계속 동묘앞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중랑차고지에 있는 버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냥 N26번 버스가 인터넷상에서는 전부 멈춰 있었어요.
"인터넷 먹통인가?"
노트북으로 F5를 연타하고 스마트폰은 모바일 데이터를 껐다 켰다 하며 N26번 버스 위치를 계속 확인했어요. N26번은 동묘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중랑공영차고지에 있는 N26번 버스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데 N26번 위치는 시간이 정지해 있었어요. 스마트폰, 노트북 시계는 1분이 흘러갈 때마다 숫자가 바뀌어갔어요. N26번 버스는 시간이 가든 말든 계속 그 자리 그대로였어요. 나를 만나고 싶으면 동묘앞으로 걸어오라고 했어요.
'어디서 물귀신 놀이 하고 있어?'
당연히 이건 N26번 위치 서비스 오류였어요. 무턱대고 나가서 동묘앞으로 가면 거기 N26번 버스가 있을 리 없어요. 무슨 물귀신이 여기로 오라고 사람 홀려서 물에 빠뜨리려는 것처럼 N26번은 계속 동묘앞에 정차해 있으며 자기를 타고 싶으면 동묘앞으로 오라고 하고 있었어요.
"이거 지금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N26번 버스 위치는 완전 깜깜이였어요. 이 버스가 대체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어요. 버스 위치 확인 서비스에서는 계속 동묘앞에 있고 중랑차고지에 있다고만 나오고 있었거든요. 이건 그냥 찍어야 했어요. 어지간하면 버스 오는 시간에 맞춰서 나가고 싶었어요. 바깥 공기는 아직 쌀쌀했거든요. 그러나 모든 걸 운에 맡겨야 했어요. 일단 동묘앞에 있는 버스는 분명히 놓쳤을 거에요. 동묘앞에서 종로2가까지 버스로 얼마나 걸린다구요. 게다가 이건 심야버스에요. 교통체증 걸릴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중요한 건 중랑공영차고지에서 출발하는 버스였어요. 그걸 잡아타야 했어요. 이게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승부사로써 모험을 할 것인가?
그딴 거 몰라요. 무슨 영하 20도도 아니고 나가서 조금 있어도 안 얼어죽어요. 그냥 쌀쌀한 초봄 밤공기 쐬며 움츠리며 서 있을 뿐이죠. 쓸 데 없이 도박을 할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찬 바람 덜 쐬려고 되도 않는 승부사로써의 모험 걸었다가 버스 놓치면 진짜로 두개골 쪼개져 두뇌가 반으로 딱 갈라지는 상황 발생해요. 택시로 김포공항까지 가든가, 비행기표 날려먹든가 해야 하거든요.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할 필요 없었어요. 그냥 나가서 버스를 기다리면 되었어요.
새벽 3시 21분. 할리스커피 종로본점에서 나와 종로2가 버스 정류장으로 갔어요.
"아놔..."
새벽 3시 23분. 버스 알람 전광판에 N26번 버스는 종로2가 버스정류장에 16분 이후에 도착할 거라고 떠 있었어요. 정류장 도착했을 때 버스 위치 알림에서 멈춰있던 N26번 버스들이 축지법을 써서 움직였어요. N26번 버스 하나는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간발의 차이로 놓쳤어요. 그래도 16분만 기다리면 다음 버스가 오니 다행이었어요. 그 정도라면 이 날씨에 밖에서 그냥 기다리며 서 있을 만 했어요.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이 시각에 심야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저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신기했어요.
'시간 널널한데 종로 거리 야경이나 찍어야지.'
버스 정류장 제일 끝으로 걸어갔어요.
도로변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어요. 아마 거의 다 공칠 거에요.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요즘은 종로 거리에서 밤 늦게까지 노는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요. 심야버스도 있구요. 심지어 차도 별로 없었어요. 큰 길 뒷쪽은 술집들 모여 있는 거리니까 불빛은 화려해요. 불빛만 화려해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서울 번화가 중 하나가 종로라 하지만 간간이 쌩쌩 질주하는 차 외에는 고요했어요.
시계를 보았어요. 이제 슬슬 버스 올 시간이 되었어요.
"버스 사진이나 찍을까?"
버스 정류장 끄트머리로 다시 걸어갔어요. 멀리 파란색 버스가 보였어요.
"저거 내가 탈 버스잖아!"
사진을 찍고 확인해보니 N26번 버스였어요. 제가 반드시 타야 할 버스였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를 놓치는 멍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저거 놓치면 그 다음 버스는 한참 뒤에 있었어요. 송정역에서 김포공항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릴 지도 몰랐구요. 버스가 신호 대기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뒤돌아 걸어갈 때였어요. 신호가 바뀌었어요.
신호가 바뀌자마자 버스는 야성이 폭발한 야생마처럼 도로를 질주해 버스 정류장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어요.
"저거 사진 찍어야지."
카메라는 집어넣고 스마트폰을 꺼냈어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버스를 향해 뛰어갔어요. 버스 문이 닫히려고 했어요. 간신히 올라탔어요. 3월 2일 3시 37분. 드디어 김포공항을 향해 출발했어요.
버스 안에 빈 좌석이 몇 자리 있었어요. 자리에 앉았어요. 버스에는 계속 사람이 탔다 내렸다 했어요. 버스 안은 조용했어요. 모두가 잠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정신이 아주 맑았어요.
'이거 내 계획대로 잘 가겠지?'
김포공항에서 새벽 6시 2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새벽 5시 20분까지는 김포공항에 도착해야 했어요. 제일 이상적인 것은 새벽 5시 김포공항 도착. 밤을 질주하는 N26번 버스를 처음 타보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게 송정역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전혀 알 수 없었어요. 송정역에서 김포공항까지 한 번도 안 걸어가봤어요. 송정역에서 김포공항까지 걸어서 몇 분 걸리는지 몰랐어요.
버스는 막힘 없이 질주했어요. 3시 57분에는 합정역에 도착했어요. 종로2가에서 종각, 광화문 다 지나가고 신촌, 이대, 홍대까지 다 들려서 20분만에 합정에 도착한 것이었어요.
'어? 이거 내 예상보다 너무 빠른데?'
합정역을 넘어가면 번화가라고 할 게 없어요. 그냥 달리는 거에요. 아주 빠라바라바라밤 오빠 달려 수준으로 질주할 거에요. N26번 노선에서 합정역을 지나가면 그나마 막힐 만한 곳이 당산역 하나 뿐이었어요. 당산역도 이 시각에는 막힐 리 없었어요. 당산역도 나름 교통의 요지이기는 하지만 종로, 광화문, 신촌, 이대, 홍대, 합정까지 쾌속의 적토마처럼 통과해버리는 이 버스 앞에 당산역이란 존재감이 너무 없는 정류장이었어요. 당산역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 거침없는 질주를 막아세울 만한 곳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합정역을 3시 57분에 통과해버리자 이제 머리 속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거 공항 앞에서 문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 아냐?'
이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송정역 내리자마자 부지런히 걸어야 5시에 김포공항 도착하는 거 아닌가 했어요. 이 계산은 완벽히 틀렸어요. 버스 전용차로 질주하는 N26번 버스를 막아세울 게 존재하지 않았어요. 간간이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이 버스의 질주를 막을 수 없었어요. 이제는 계산과 달리 너무 일찍 김포공항에 도착해 그 앞에서 쭈그려 앉아 문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김포공항까지 5시 전에 도착할 게 확실했어요. 당산역 주변에 술집이 많기는 하지만 이 버스를 가로막을 정도는 아니거든요. 이미 홍대조차 이 버스의 질주를 가로막지 못했는데 당산 정도가 상대가 될 리 없었어요.
버스는 순식간에 지하철 5호선 마곡역까지 왔어요. 마곡역은 만들어놓기만 옛날에 만들어놓고 한동안 문 닫아놓은 역이었어요. 발산역에서 김포공항역으로 지하철 타고 갈 때마다 불 꺼진 마곡역을 보곤 했어요. 아주 으스스했어요. 이 마곡역 위로 올라가면 서울의 마지막 논이 존재하는 마곡 지구가 있었어요. 지금은 많이 개발되어서 논이 없어지고 마곡역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역이 되었어요. 마곡역에 왔다는 것은 송정역까지 이제 다 왔다는 것이었어요.
'마곡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어둠에 잠긴 마곡 사진을 찍으려 했어요. 하지만 너무 어둡고 버스는 계속 달렸기 때문에 스마트폰 카메라로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요.
새벽 4시 25분. 송정역에 도착했어요. 제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버렸어요.
"와, 진짜 되네?"
그 누구도 N26번 버스를 이용하면 김포공항 근처 롯데몰 영화관이나 송정역 PC방에서 밤 새지 않고도 김포공항 6시대 비행기를 타러 갈 수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어요. 제가 찾은 방법은 완벽히 맞았어요. 제가 탄 종로2가 3시 38분 N26번 버스 다음 차를 타도 새벽 6시대 비행기는 탈 수 있을 거였어요. 배차시간이 약 30분이라고 하는데 새벽 4시 25분에 도착한 거에 30분 더해주면 새벽 4시 55분이거든요. 하지만 다음 차를 탔다면 조금 빠듯할 수도 있었을 거에요. 수속 밟고 짐 부치고 해야 하니까요.
송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쭉 걸어가자 사거리가 나왔어요. 횡단보도를 건너 도로 섬으로 갔어요. 작은 횡단보도를 건넜어요.
"아, 맞다! 여기 길 건너 맞은편으로 가야 하지!"
송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길 맞은편으로 건너가야 했어요. N26번 버스에서 내린 정류장에서 길을 안 건너가고 계속 쭉 걸어가면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까지 한참 돌아가야 했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맞은편으로 건너가서 걸어가면 주차장을 통과해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까지 바로 갈 수 있어요. 만약 길을 안 건너간다면 롯데몰까지 걸어간 후 5호선 김포공항역을 통해 길을 건너가서 또 열심히 걸어가야 했어요. 한 순간 선택의 실수가 1km를 더 걷게 만드는 것이었어요.
길을 건너 제가 내린 송정역 버스정류장 맞은편으로 갔어요. 연무가 껴 있었어요. 공기는 조금 습했어요. 이게 연무인지 중국발 미세먼지 구름인지 애매했어요. 둘이 섞인 게 아마 맞을 거에요. 김포공항쪽은 미세먼지 심한 쪽이거든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셔터 스피드가 너무 느리게 나왔어요. 사진을 도저히 찍을 수 없었어요. 찍는 족족 다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흔들렸어요.
주차장 앞까지 도착했어요. 사람들 몇몇이 김포공항으로 가고 있었어요.
'저쪽에 횡단보도 있나?'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갔어요. 횡단보도가 없었어요.
"저기 있잖아!"
그냥 쭉 걸어갔으면 될 걸 괜히 쓸 데 없이 돌아갔어요.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갔어요. 초록불이 들어왔어요. 열심히 달려서 횡단보도를 건넜어요.
"김포공항이다!"
드디어 김포공항이 보였어요. 김포공항 전 층에 불이 켜져 있었어요. 공항 앞에서 쭈그려 앉아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어요.
새벽 4시 34분. 드디어 김포공항에 도착했어요. 제가 타고 가야 할 이스타항공 비행기는 새벽 6시 20분이었어요. 일찍 도착하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일찍 도착한 것은 아니었어요. 비행기표 발권받고 짐도 부치고 해야 했거든요. 한 시간 정도는 김포공항 돌아다니다보면 금방 지나갈 거였어요.
여행 시작이 매우 좋았어요. 계획대로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