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생존과 여행의 갈림길 (2019)

생존과 여행의 갈림길 - 03 제주도는 힐링하러 가는 곳 아니었나요

좀좀이 2019. 3. 16. 00:45
728x90

2월 26일. 비행기표를 예매했어요. 이제 끝이었어요. 여행은 확정되었어요. 무조건 가는 것이었어요. 복습의시간과 뭐라카네에게 제주도 간다고 이야기했어요.


'아, 걔한테 간다고 말은 해야겠구나!'


제 친구 중 우리나라 3대 악산이라는 설악산, 치악산, 월악산을 같이 갔다온 친구가 있어요. (설악산, 치악산, 월악산 여행기 : 삼대악산) 이 친구는 이하 '삼대악산'이라고 할 거에요.


삼대악산은 서울 올라올 때마다 제게 만나자고 연락을 해요. 그리고 제주도 언제 내려오냐고 종종 물어보는 친구에요. 제가 내려가면 같이 서바이벌 라이프를 즐겨보자고 하고 있어요.


얘는 이거 진심이다. 진짜 위험하다.


다른 친구들이 서바이벌 라이프나 와일드하고 하드코어한 여행을 해보자고 하면 그냥 웃어넘겨요. 왜냐하면 걔네들이 사용한 표현보다 훨씬 쉬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친구들은 힘들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아요. 정말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그렇게 매우 힘들지는 않았어요.


나 이래뵈도 좀좀이야.


35일간 여행하는 동안 오직 7일만 숙소에서 자고 나머지는 전부 야간이동하면서 여행해본 적도 있어요. 중랑천 시작지점부터 한강까지 걸어간 후 다시 의정부까지 돌아가는 61km 길을 밤새 걸어본 적도 있어요. 이거 두 개보다 힘든 일정은 아직 겪어본 적이 없어요. 이 두 개를 뛰어넘는 고생 가득한 여행길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별로 무섭거나 망설여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친구는 달라요. 원래 도전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하기는 했어요. 그래봐야 인라인 스케이트 타고 밴드부 들어가서 베이스 기타 치고 하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한동안 저와 같이 살았던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제가 그 친구 집에서 생활비와 방값 나누어 내며 같이 지냈던 적이 있어요. 이때 저와 같이 지내며 이 친구의 도전 정신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어요. 이후 이 친구는 하필이면 등산장비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제주도 내려가서 얌전히 살고 있지만, 한 번 불타오르기 시작한 도전정신은 꺼질 줄 모르고 오히려 더 타오르고 있었어요.


몰타 가기 전 이 친구네 자취방에 처음 갔을 때 제가 밥을 짓는 방법을 몰라서 2인분 물 부으라는 선까지 쌀을 붓고 물을 부었다가 밥통 터질 뻔 했어요. 어떻게 보면 이것부터 시작이었을 지 몰라요. 이 시절 같이 지내는 동안 아주 주옥같은 추억 많아요. 이태원 가서 인도 카레 먹고 맛있다고 가게 가서 인도 카레를 구입해 왔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서 대충 그림 보고 따라하다가 독가스처럼 독한 카레 냄새 때문에 질식해 죽는 줄 알았던 적도 있어요. 이 친구 및 이 친구의 동기 따라 피씨방 가서 놀다가 피씨방 한 달 최장시간 사용자 랭킹에 이름을 올린 적도 있어요. 이거 말고도 한둘이 아니에요. 하여간 별 찌질하고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같이 만들어갔던 친구에요.


제가 내려오기만을 벼르고 있었어요. 같이 하드코어한 서바이벌 라이프를 즐겨보자구요. 이건 진심이었어요. 그 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건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연락하기는 해야지.


제가 연락도 없이 제주도 놀러 갔다 올라왔다고 하면 엄청 섭섭해할 게 분명했어요. 삼대악산은 서울 올라올 때마다 어떻게든 시간 내서 저를 보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어요.


"나 3/3~3/7 제주도 간다."


메세지를 보내자마자 삼대악산은 흥분해서 제게 전화를 걸었어요.


"너 언제 올 건데?"

"3월 3일부터 3월 7일. 시간 되면 저녁에 잠깐 보자."

"너 캠핑 준비해와라."


이건 뭔 미친 소리야?


3월은 일단 봄이라고 해요. 하지만 캠핑할 날씨는 절대 아니에요. 친구한테 캠핑 장비가 있기는 하지만 그걸로 될 일이 아니었어요. 3월은 추워요. 똑같은 10도라 해도 걸을 때 10도와 잠잘 때 10도는 달라요. 솔직히 말이 좋아 캠핑이지, 노숙이에요. 밤새 걸어본 적도 많고, 첫차를 기다리며 밤새 앉아 졸아본 적도 있어요. 활동할 때 온도와 잠잘 때 온도는 달라요. 10도에서 자려고 하면 진짜 추워요.


"너 침낭 챙겨와. 나 휴가 날짜 봐야겠다."

"뭔 소리야? 이 날씨에 어떻게 캠핑을 해? 나 침낭 없어!"

"너 많이 약해졌다? 일단 휴가 날짜 좀 봐야지."


아...잊고 있었다...


삼대악산은 이런 것을 참 좋아해요. 하지만 결혼해서 애도 있어요. 애가 어려요. 캠핑을 할 래야 할 수가 없어요. 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제가 와야 제가 왔다는 구실로 캠핑하러 밖에 나갈 수 있거든요. 도전정신이 꾸준히 활동으로 좀 이어져야 가라앉을텐데, 얘는 그게 아니다보니 아주 욕구 불만이 머리 끝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그 와중에 제가 제주도 내려간다고 하니 바로 휴가까지 내고 저와 캠핑하러 가겠다는 것이었어요.


머리 꼭대기까지 달아오르는 게 아니라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어요. 머리 속이 복잡해졌어요. 저도 침낭이 있고 캠핑용으로 옷을 잘 가져가면 괜찮아요.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요. 저는 짐을 아주 최소화할 계획이었어요. 그래야만 했구요. 마지막날 밤 24시간 카페 세 곳을 걸어서 돌아다닐 계획이었으니까요. 짐을 다 싸짊어지고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짐을 줄여야 했어요. 친구가 제 침낭까지 마련해놓았을 것 같지는 않았어요.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남자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불문율이 하나 있지. 까치집 진 머리는 용서가 안 돼.


꾀죄죄한 옷차림일 수 있어요. 면도를 못해 수염이 덥수룩할 수도 있어요. 이런 건 해석의 여지가 많아요. 무슨 심란한 일을 겪고 있다든가 며칠씩 격무와 야근에 시달리고 있다든가요. 하지만 절대 용납이 안 되는 게 있어요. 머리에 까치집 진 거요. 이건 변명거리가 없어요. 그냥 위생개념이 형편없거나 게으르다는 것으로만 해석되요. 그런데 캠핑을 하면 당연히 머리가 엉망이 되어 있어요. 까치집 안 지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머리는 감아야 했어요. 그래야 그 다음날 일정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삼대악산은 이미 흥분했어요. 휴가 일정 알아본다는 것은 장난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진심이었어요. 의심의 여지, 부정할 수 있는 여지가 단 1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시간상 제가 이 친구와 같이 캠핑을 할 수 있는 날은 오직 딱 하루 뿐이었어요. 바로 3월 4일 밤이었어요. 3월 3일은 제가 이미 밤을 새고 내려온 상태라 절대 무리인데다, 복습의시간이 이날만 같이 많이 놀 수 있어요. 3월 5일 밤 또한 무리였어요. 3월 6일 밤에 24시간 카페를 돌아다녀야 했으니까요. 3월 5일 밤에 캠핑을 하면 3월 6일에 피로도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상태로 24시간 카페 돌아다니는 것을 해야 했어요. 자정까지 안 자고 버틸 수 있을 지가 의문이었어요. 낮에 목욕탕 가서 잠깐 눈 붙이는 것으로 피로가 풀릴지 의문이었어요. 설령 친구가 침낭을 제공해준다 하더라도 동태가 된 아침을 맞이할 것은 안 봐도 뻔했거든요.


3월 4일 밤 뿐이었어요. 나머지는 일정상 불가능했어요. 삼대악산에게 3월 4일만 된다고 하자 알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제게 어디에서 캠핑하고 싶은지 골라보라고 했어요.


이것은 나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야생 서바이벌을 전문으로 동영상 찍어서 유튜브 올리는 사람도 있고, 캠핑을 즐기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지금 그 목적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런 목적으로 갈 거라면 이런 어설픈 봄에 가는 게 아니라 최소한 날이 확실히 뜨거워서 이불 없이 자도 무방한 여름에 가죠. 5월도 밖에서 아무 것도 안 덮고 자려고 하면 자다가 쌀쌀하다고 잠에서 깨요.


바닷가로 가면 추워서 뒤진다.


사실 텐트 치고 놀고 자기에는 바닷가가 좋아요. 그쪽이 평지가 많고 바닥이 부드럽거든요. 산지로 갈 수록 땅이 울퉁불퉁하고 돌이 있어서 누우면 등이 불편하고 아프기 좋아요. 이건 돗자리 깔고 누워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지금은 어설픈 봄. 바닷가는 추워요. 일단 바닷가는 기본적으로 바람이 있어요. 텐트가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지만 밤바람은 차갑고, 바닷가 밤바람은 더욱 차가워요. 중산간은 고지대로 기온이 조금 낮을 수 있어요. 최대한 어설픈 곳을 찾아야 했어요.


일단 캠핑할 때 옷은 한겨울에 입는 오리털 패딩을 입으면 위는 어떻게 되요. 아래는 츄리닝 바지 하나 더 입으면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일단 영상 온도라면요. 어차피 밤에 캠핑한다고 하면 일찍 자야 해요. 날이 맑다면 별을 볼 수도 있겠지만 별 보는 것도 잠깐이에요. 야밤에 동네 대탐험할 것도 아니구요. 야밤에 동네 대탐험 하지도 못하는 게 깜깜한 시간에 돌아다니면 동네 개들 다 짖어대서 엄청난 민폐에요.


일정은 이제 도시 서바이벌처럼 되어버렸어요. 3일에 밤새고 내려가서 밤에 친구집에서 자고, 4일은 캠핑할 거고, 5일은 아침부터 돌아다니다 저녁에 친구집 가서 잘 거고, 6일은 밤새 24시간 카페를 돌아다녀야 했어요. 여행 전체에서 '방'이라는 곳에서 자는 곳은 딱 이틀. 제가 편하게 좀 놀고 오려고 하면 세상이 저를 가만 두지 않았어요. 그래도 중간에 하루씩 '방'이라는 인간 문화의 산물에서 잘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 여겼어요.


지도를 보았어요. 일단 바닷가는 절대 안 되고, 너무 고지대도 안 되었어요. 그나마 조금 만만해 보이는 곳을 골라야 했어요. 이것은 생존을 위한 발악이었어요.


아, 원당봉!


원당봉


원당봉은 한 오름에 절이 태고종 원당사, 조계종 불탑사, 천태종 문강사 - 이렇게 세 곳이나 있어요. 그렇게 큰 오름도 아닌데 절은 무려 세 곳이나 있는 특이한 오름이에요. 기운이 매우 강한 오름이래요. 지도로 원당봉을 살펴보았어요. 원당봉 분화구에 위치한 문강사부터 바닷가까지 직선 거리는 953m 정도였어요. 이 사이에 일단 아파트들이 있었어요. 아파트가 바닷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줄 거에요. 그리고 새벽 4시면 절에서 새벽 예불이 시작되요. 원당사, 불탑사, 문강사에서 새벽 예불을 새벽 3시에 하는지 4시에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새벽 예불이 시작되면 소리가 들릴 것이고, 그때 절을 가면 되요. 일단 새벽 4시에 시작될 거라 생각하구요.


근처에 목욕탕이 있는지 찾아보았어요. 목욕탕이 있었어요. 이러면 방법이 있었어요. 원당봉 근처에서 캠핑을 한 후, 잠을 일찍 청하고 새벽 4시에 근처 절로 새벽 예불을 보러 가요. 이후 새벽 5시 반 즈음 아침 일찍 여는 목욕탕에 가서 몸을 녹이고 아침 7시 정도에 제주시청에서 친구와 헤어지면 되요. 이러면 그나마 덜 떨고 덜 피곤한 밤을 보낼 수 있었어요. 아침에 깔끔하게 씻을 수도 있구요.


친구는 아침 7시 반에 자녀를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줘야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자기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요. 새벽 4시에 새벽 예불을 보고, 5시에서 5시 반에 목욕탕을 가서 씻은 후, 아침 7시에 제주 시청에서 헤어지면 딱이었어요. 친구에게 원당봉 근처에서 캠핑을 한 후, 근처 절에서 새벽 예불을 보고 목욕탕 가서 씻은 후 헤어지자고 했어요. 친구가 알겠다고 했어요.


이러면 흥분되지.


새벽 예불은 본 적이 없어요. 캠핑을 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절에 가서 새벽 예불을 본다는 것은 꽤 멋진 경험이에요. 새벽 예불 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거든요. 단순히 피로에 절어 헤어지는 것보다 새벽 예불을 보고 목욕탕 가서 깔끔하게 씻고 헤어지는 것이 훨씬 더 멋진 마지막이었어요. 이 정도라면 해볼 만 했어요. 물론 일정이 급격히 빡세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면 한 번은 해볼 만 한 경험이었어요.


일단 삼대악산과의 일정은 정했어요. 그 날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요. 삼대악산과의 일정을 정한 후 복습의시간에게 연락했어요. 3월 3일 밤만 복습의시간 집에서 신세지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복습의시간이 물어보았어요.


"나 주말에 잠깐 특강 있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거?"

"그때 너 방에서 잠깐 자면 안 될 건가?"

"그때 어머니 혼자 계셔서 어머니 불편해하실 거 같은데...일단 물어볼께."

"아니면 그냥 카페라도 가 있든가 혼자 놀고 있든가."


복습의시간은 제가 일요일에 오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토요일에 내려가는 것과 일요일 첫 비행기로 내려가는 것은 몇 만원 차이였거든요. 게다가 어차피 일기예보 보니 토요일은 비가 내릴 예정이었어요. 몇 만원 더 내고 비 내리는 토요일에 제주도 가서 복습의시간네 집에서 잡담하고 멍때리고 있기는 싫었어요. 복습의시간은 제가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내려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싶었어요. 그러나 복습의시간이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한들 우주의 기운이 모여 토요일 비행기표 가격이 떨이로 폭탄 세일 가격에 나올 리 없었어요.


"너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내려오면 어디 하루 놀러갔다 올 건데."

"어차피 그때 비 온다는데 뭘 놀러가."


그런데 잠깐...왜 친구들은 왜 나를 시골로 끌고가려는 것인가?


삼대악산도 그렇고 복습의시간도 그렇고 왜 다 나를 시골로 끌고 가려고 할까? 이번 제주도 여행은 원래 제주시 안에서만 돌아다닐 계획이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하나로 합치기 전의 제주시 - 그러니까 옛날 제주시 지역에 한정해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놀 생각이었어. 다른 힐링하러 제주도 가는 사람들처럼 느적느적 돌아다니며 예쁜 카페 있으면 들어가 보고 먹거리 있으면 먹어보기도 하고 말이야. 어렸을 적 내가 놀던 그 옛날 제주시가 어떻게 변했는지 구경도 하구.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서울에 가서 노는 것처럼 적당히 며칠 제주도에서 놀다 올 생각이었어. 딱 옛날 제주시에서 말이야. 멀리 가봐야 서쪽으로 하귀, 동쪽으로 함덕 정도나 가볼까 하고 있었다구. 그런데 내 계획과 정반대로 얘들은 나를 시골로 끌고가려고 하고 있어.


제주도 가서 저도 적당히 카페 가고 거리 돌아다니며 놀 계획이었어요. 다른 제주도로 가는 여행자들과 다른 점이라면 교외 경치 좋은 곳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올레길 따라 걸을 생각도 전혀 없었구요. 그런 건 제게 별 흥미 없어요. 바다는 바다고 한라산은 한라산이고 산방산은 산방산이고 오름은 오름이니까요. 예전에 제가 제주도 돌아다닐 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산책로 및 탐방로가 정비되었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힌 곳이 늘어났다는 것 정도였어요. 제가 제주도 오름 다 올라가보고 제주도 길을 다 가본 건 아니에요. 그러나 어지간히 보기는 했어요.


제가 궁금한 건 옛날 제주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요. 하도 많이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그런데 친구들은 제가 여행하러 내려온다고 하자 저를 시골로 끌고 가려 하고 있어요. 복습의시간은 어디 시골 마을로 가서 걸어다니며 사진 찍자고 하고 있고, 삼대악산은 캠핑하자고 하고 있어요. 도시 번화가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만 가려 하고 있어요. 이해해요. 얘네들은 지금 제주시에서 살고 있으니 거기를 벗어나는 게 노는 거에요. 그리고 평소 하고 싶은데 같이 할 사람 없어서 참아 왔던 욕망을 제가 온 김에 분출하고 싶어해요.


일정을 다시 정리해 보았어요.


3월 2일 (카페에서 밤샘)

- 밤 11시 반 정도에 집에서 나가서 종로2가 24시간 카페 가기.


3월 3일 (복습의시간 집에서 1박)

- 새벽 6시 20분 비행기로 제주도 내려가서 복습의시간과 만남.

- 복습의시간 잠깐 일하러 갔을 때 눈 좀 붙임.

- 복습의시간 돌아오면 같이 저녁 먹고 잠깐 놀기.


3월 4일 (원당봉에서 캠핑)

- 아침에 복습의시간과 시간 보냄.

- 점심 넘어서 삼대악산 만남.

- 삼대악산 RC카, 양궁 체험하고 원당봉에서 캠핑.


3월 5일 (뭐라카네 집에서 1박)

- 이른 새벽에 목욕탕 갔다가 제주시청에서 헤어짐.

- 뭐라카네한테 연락해도 될 시간까지 혼자 시간 보냄 (점심 즈음까지)

- 점심 즈음 뭐라카네에게 연락하고 같이 놀기.

- 저녁에 뭐라카네 집에서 쉬기.


3월 6일 (카페에서 밤샘)

- 뭐라카네 집에서 최대한 푹 쉬며 잘 수 있을 만큼 죽어라 잠. 최대한 늦게 일어나기.

- 자정 즈음 제주시청행.


3월 7일

- 제주시 24시간 카페 돌아다니기.

- 오일장 갔다가 시간 되면 다른 곳 하나 더 갈 수도 있음.

- 오후 1시 비행기로 서울행.


여행 초기 계획


나는 지금 도시 서바이벌 하러 간다.


며칠간 정확히 옛날 제주시 지역에서 오랜만에 고교 동창 친구들도 만나고 느적느적 돌아다니고 쉬며 힐링하려고 했어요. 그래요. 저도 '놀멍 쉬멍' 제주도에 있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건 아무리 봐도 힐링이 아니었어요. '놀멍'은 있어요. '쉬멍'은 아예 없어요. 이건 힐링에서 아예 벗어났어요. 도시 서바이벌이에요. 그래도 뭐라카네는 격하게 활동하며 노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3월 5일 낮부터 3월 6일 오후까지는 쉴 수 있을 거에요. 아니, 그때 반드시 쉬어야 했어요.


제주시 24시간 카페 경로


이런 길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일단 3월 7일 새벽에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이 8.89km 였어요.


하지만 오일장까지 간다고 하면 걸어야할 거리가 더 늘어났어요. 여기에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어요. 바로 탐라도서관이었어요.


제주시 경로


탐라도서관까지는 시간이 될 지 알 수 없었어요.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려면 11시에는 신제주에서 버스를 타야 했거든요. 만약 3월 7일에 오일장 들려서 탐라도서관까지 걸어간다면 이날 자정 너머부터 공항 가기 전까지 걸어야 하는 거리는 총 14.17km 였어요. 이것은 이론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많이 걷게 될 것이었어요. 대충 15km 잡으면 될 것 같았어요.


걸으면 걸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게 분명해요.


이 길을 걸을 때 평소보다 더 쉽게 걸을 수 있는 점이라면 딱 하나 있었어요. 바로 트래킹화를 신고 걷는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트래킹화를 안 신고 구두만 신고 돌아다닌 게 벌써 2년은 되었기 때문에 트래킹화 신었다고 발이 편할지 오히려 불편할지 미지수였어요.


반면 평소보다 더 어려울 이유는 몇 가지 되었어요.


먼저 제주도는 바람이 항상 불어요. 이게 등바람이면 괜찮은데 맞바람이나 측풍이면 걸을 때 훨씬 더 피곤해요. 바람이 없을 수 없었어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당연히 바람은 있을 거에요. 단지 그게 등바람인지 맞바람인지 측풍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에요.


두 번째로 이 길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여기저기 있어요. 절대 곱게 평탄한 길이 아니에요. 과격한 오르막과 내리막까지는 없는 길이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나와요. 지금까지 중랑천 걸었던 거나 24시간 카페 돌아다니느라 걸었던 것, 또는 동대문에서 홍대까지 걸어가던 것보다 더 힘든 길이에요.


세 번째로 이날은 제 여행 마지막날이기 때문에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걸어야 해요. 중랑천 걸을 때에는 사실상 맨몸으로 덜렁덜렁 걸어갔고, 24시간 카페 돌아다닐 때에는 노트북 들어 있는 가방 하나 메고 걸어갔어요. 그러나 이날은 가볍든 무겁든 간에 가방을 다 짊어메고 걸어야 했어요.


뭐라카네 집에서 쉴 수 있는 한 최대한 쉬어야 했어요. 이게 이 여행의 제1 목표인 제주시내 24시간 카페 모두 돌아보기에서 제일 중요한 변수였어요.


정수리가 뜨끈뜨끈했어요. 그때 여자친구가 카카오톡 메시지로 뭐 하냐고 물어보았어요. 그제서야 스타벅스에 제주도 한정 음료가 뭐가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어? 5개나 있잖아!'


제주 까망 라떼, 제주 한라봉 눈꽃 라떼, 제주 호지샷 라떼, 제주 말차샷 크림 프라푸치노, 제주 호지샷 크림 프라푸치노가 있었어요. 3월 3일부터 7일까지 제주도에 있을 거니까 하루에 한 개씩 마시면 7일날 간신히 다 마시고 올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러면 7일 아침에 시간이 없었어요. 삼대악산과 만나는 4일에 스타벅스에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어요. 이거 다 마시고 오는 것도 빠듯한 일이었어요.


"스타벅스에 제주도 한정 음료 5개나 있어."

"많다니까."


스타벅스 제주 먹거리


"이것도 먹어야지! 당근 현무암 무시?"

"내가 무슨 스타벅스 메니아도 아니고."

"저 4개가 제주도 한정이래."


그래, 저 정도면 괜찮아. 여기에서 안 해 본 짓 제주도 가서 해보지, 뭐. 원래 그런 게 여행이잖아. 여기에서는 카페 가서 음료에 디저트까지 시키는 일이 없지만 여행이니까. 나도 한 번 스타벅스에서 음료에 케이크 시키는 거 해보는 거야. 출근도장도 한 번 찍어보구. 4개면 음료 마시러 스타벅스 다섯 번 가야 하니까 음료 시킬 때마다 하나씩 주문하면 어떻게 되겠네.


제주 스타벅스 샌드위치


"흑돼지! 당근!"


어?


스타벅스 옥고감


"옥고감도 끼워넣기."

"야!"


여자친구가 스타벅스에서 옥고감 판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뭐 저런 걸 다 파나 했어요. 그런데 여자친구 말로는 옥고감이 꽤 인기 좋은 메뉴라고 했어요. 엄청 놀랐어요. 뭔가 특별한 건 줄 알았는데 진짜 옥수수, 감자, 고구마였거든요. 여자친구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스타벅스 매장에 아이들을 데려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옥고감을 사서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주곤 한대요. 그래서 스타벅스는 제게 여러 음료가 존재하는 카페보다 '옥고감 파는 곳'으로 더 기억되고 있어요. 여자친구는 스타벅스 홈페이지 들어가서 제주도 스타벅스에서만 판매하는 메뉴를 찾아 제게 알려주다 옥고감도 슬쩍 끼워넣었어요. 하마터면 속을 뻔 했어요. 제주도도 옥수수, 감자, 고구마 재배하거든요.


여자친구가 알려준 것을 정리해 보았어요.


스타벅스 제주 한정 메뉴


1. 케이크 - 4종류

당근 현무암 케이크, 몽한라 아일랜드, 제주 녹차 티라미수 아일랜드, 티라미수 아일랜드


2. 빵 - 6종류

한라봉 스콘, 감귤잼 바게트, 거문 오름 크루아상, 제주 녹차 베이컨 치즈 베이글, 제주 당근 크림치즈 샌드위치, 제주 흑돼지 초리조 먹물 샌드위치


3. 음료 - 5종류

제주 까망 라떼, 제주 한라봉 눈꽃 라떼, 제주 호지샷 라떼, 제주 말차샷 크림 프라푸치노, 제주 호지샷 크림 프라푸치노


이걸 뭔 수로 다 먹어!


갑자기 여자친구가 사진을 계속 보내기 시작했어요.


"어? 어? 어!"


아, 이건 아니야. 죽어도 아니야. 내가 무슨 스타벅스 광신도도 아니고. 나 스타벅스 회원 가입도 안 했어! 별 모은다는 게 뭔지도 몰라!


여자친구는 스타벅스 홈페이지에서 제주도 스타벅스에서만 파는 메뉴를 계속 찾아 카카오톡으로 전송하고 있었어요. 카카오톡 메시지로 사진이 두두두두 올라왔어요. 하나 올라올 때마다 한 번씩 정신이 멍해졌어요. 정신이 돌아오면 또 사진이 하나 올라왔아요. 또 정신이 돌아오면 또 사진이 하나 올라왔어요. 드디어 사진 올라오는 것이 끝났어요.


스타벅스 제주 한정 메뉴


1. 케이크 - 4종류

당근 현무암 케이크, 몽한라 아일랜드, 제주 녹차 티라미수 아일랜드, 티라미수 아일랜드


2. 빵 - 14종류

한라봉 스콘, 감귤잼 바게트, 거문 오름 크루아상, 제주 녹차 베이컨 치즈 베이글, 제주 당근 크림치즈 샌드위치, 제주 흑돼지 초리조 먹물 샌드위치, 에그 베이컨 치즈 백년초 베이글, 현무암 크로크무슈, 한라봉 모닝샌드위치, 녹차머핀, 제주 감귤 머핀, 우도 땅콩 데니쉬롤, 현무암 포카치아, 한라산 치즈볼케이노


3. 음료 - 5종류

제주 까망 라떼, 제주 한라봉 눈꽃 라떼, 제주 호지샷 라떼, 제주 말차샷 크림 프라푸치노, 제주 호지샷 크림 프라푸치노


아 몰라. 그냥 포기할래.


제주도 스타벅스 한정 메뉴를 다 먹고 오려는 최초의 계획은 그냥 포기했어요. 만약 이 계획을 달성하려면 내려가서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스타벅스 가서 빵을 뜯어먹어야 했어요. 이건 스타벅스 광신도라도 못할 거에요. 이 계획까지 달성하려면 아침, 점심, 저녁 다 스타벅스에서 해결해야 될까 말까인데 복습의시간, 삼대악산과 만나서 놀아야 하는 시간도 있었어요. 당연히 친구들과 최소 밥 한 끼는 같이 먹겠죠. 제주도 스타벅스 한정 메뉴까지 다 먹고 오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린다면 이 일정 중 정말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아닌 건 아니었어요. 이건 과감히 포기해야 했어요.


"나 그냥 음료만 다 마시고 올래."


사실 음료만 다 마시고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혼자 가서 혼자 시간 보낸다면 매일 간간이 카페 가고 싶을 때 스타벅스 가서 한 잔씩 해치우면 되요. 그래도 하루가 부족하기 때문에 한 번은 두 종류를 끝내야 해요. 좋아요. 케이크까지 그렇다 쳐요. 케이크야 4종류니까요. 그런데 빵 14종류? 이건 아니었어요. 이건 단기에 해치울 성질의 것이 아예 아니었어요. 스타벅스 별 모으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어지간한 스타벅스 매니아도 안 할 짓을 하며 여행 내내 스타벅스 먹거리만 조지고 오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무슨 카페 차리려고 카페 먹거리들 조사하러 가는 것도 아니구요.


그때 여자친구가 파스쿠찌에서도 제주 전용 음료 3종류를 출시했다고 알려주었어요.


파스쿠찌는 나중에. 이건 진짜 시간 없어.


4박 5일 일정에 카페 5번 가는 것도 많이 가는 거에요. 저 원래 카페 그렇게 많이 가지 않아요. 매일 카페를 가는 것 자체가 제게는 엄청난 일이에요. 그런데 파스쿠찌까지 더하면 설령 스타벅스 제주 특화 음료만 끝낸다 해도 총 8번. 이건 아니에요. 이러면 무조건 하루에 한 번은 스타벅스, 한 번은 파스쿠찌 가야 한다는 소리에요. 그냥 시간이 안 되었어요. 스타벅스와 파스쿠찌 제주 한정 음료를 적당히 몇 종류만 마시고 오든가, 아니면 둘 중 하나만 확실히 끝내고 오든가 해야 했어요.


나는 하나만 완벽히 끝낼 거야.


욕심부리지 않았어요. 맨날 둘 다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하루에 없는 시간 쪼개 두 번씩 카페 가느니 차라리 하나를 포기하는 게 나았어요. 처음 목표는 스타벅스 제주 한정 음료 끝내기. 그러므로 그것만 하기로 했어요. 그것도 4박 5일에 5종류 가야 하니 널널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것만 해내도 저 자신에게 잘 했다고 칭찬하고 싶을 거에요. 스타벅스에서는 아무 것도 안 주겠지만요. 아무 것도 안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저는 스타벅스 멤버십 가입 안 해서 별이니 뭐니 하는 것도 아예 없어요.


"빵 중에 뭐가 제일 궁금해?"

"당근 현무암 케이크!"

"왜?"

"현무암! 현무암!"


그래, 기회 되면 당근 현무암 케이크 하나 먹고 오자.


여자친구에게 음료 말고 나머지 것에서 가장 궁금한 게 뭐냐고 물어보았어요. 여자친구는 당근 현무암 케이크라고 대답했어요. 이유를 물어보자 현무암 때문이라고 했어요. 만약 가능하다면 당근 현무암 케이크는 먹고 오기로 결심했어요. 사진을 보니 진짜 위에 올라간 시꺼먼 것이 현무암 같아보였어요. 크런치나 쿠키 같은 게 맨 위에 올라가 있는 것 닮아보였어요. 왜 저 현무암 사이에 당근이 박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무슨 '이 당근을 뽑는 자, 제주도 농업을 지배할 것이다'라는 당근칼리버도 아니구요. 저건 아무리 봐도 제주도 해안가에 흔해빠진 바위투성이 해변 모습이었어요. 거기 왜 당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아직 '강냉이 파괴자 당근 현무암 케이크'라는 소리가 없으니 괜찮겠지.


상식적으로 진짜 돌 같은 것을 올려놓았을 확률은 아예 없어. 현무암 느낌 낸다고 딱딱한 거 올렸을 수는 있어. 사진 보면 왠지 그랬을 거 닮긴 해. 하지만 아직까지 강냉이 파괴자 스타벅스 제주 당근 현무암 케이크 소리가 없는 걸로 보아서 이 아프게 단단한 걸 저 케이크 위에 올려놓지는 않았을 거야.


대충 여행 일정은 결정되었어요. 뭘 하고 올지 목표도 정했어요. 제주도는 힐링하러 가는 곳 아니었나요. 어째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런 계획이 세워져 버렸는지 몰라요. 왠지 돌아오면 몸살과 스타벅스 5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가봤다는 기억만 남을 것 같은 계획. 스타벅스 가는 게 이렇게 비장한 각오로 가야 하는 건 줄 몰랐어요. 제주도 가면서 이렇게 긴장해본 적 처음이에요. 뭔가 바보같고 뭔가 어이없고 뭔가 긴장되요. 괜찮아요. 수어사이딩은 아니잖아요. 일정이 길지는 않지만 저의 육체와 정신에 근성을 다시 집어넣는 가벼운 주사 정도는 될 거에요.


이제 여행 준비를 시작해야 했어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