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첫 걸음 (2007)

첫 걸음 - 05 튀니지 수스

좀좀이 2011. 12. 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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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간이 부은 고양이


01.25


오늘은 다른 일행분들이 공식일정을 수행하는 날이어서 저와 다른 일행 한 명만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일행분들은 둘이 알아서 적당히 놀라고 하시더군요. 불어가 잘 통한다는 사실이 저에게 준 하루의 자유시간이었습니다. 일행분들의 지시는 튀니스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놀고, 멀리 가더라도 '하마마트'라는 곳까지만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일행분들과 헤어져서 튀니스 시내로 나왔습니다. 튀니스 시내라고 해보았자 하비브 부르기바 거리 끝에 있는 시계탑부터 재래시장을 통과해 전날 갔었던 큰 거리까지가 전부였습니다. 일단은 전차를 타기로 했습니다. 전날 돌아다니면서 전차 타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 길을 따라 가다가 길을 물어보았습니다. 전차는 불어로도 tram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게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습니다.


"Ou est la station du tram(트람)?"

약 2초간의 침묵...다시 한 번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알아듣더군요.

"La station du tram? Ah! La gare!"


전차 정거장도 la gare라고 하나? 분명 la gare는 기차역을 뜻하는 말인데...새로운 불어를 배운 줄 알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차역도 la gare라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하나 배웠다는 뿌듯한 마음과 함께 가게 주인이 알려준 대로 길을 따라갔습니다. 알려준 길은 전차 길과 일치하더군요. 계속 걸어가는데 드디어 매표소가 나왔습니다. 표를 사려고 물어보니 조금 더 가라고 했습니다. 분명 전차 매표소가 맞았는데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튀니스 역 앞 전차 매표소


버스 매표소에서 알려준대로 갔더니 거대한 SNCFT(Societe nationale des chemins de fer tunisiens)소속의 La gare de Tunis 건물이 등장했습니다. 여기는 전차도 철도청에서 관리하나? 우리나라의 국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봤더니...어이쿠! 정말 기차역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분명 la gare는 기차역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튀니지에서 전차 정거장을 la gare라고 할 리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웠다고 좋아하던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어떻해야 하지? 함께 온 일행이 다행히 불어와 아랍어를 전혀 몰라서 이 쪽팔린 상황을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 축복 아닌 축복이었습니다. 문제는 지금이 아침 9시 반이라는 사실. 그냥 호텔 들어가서 한숨 푹 자고 싶어. 전차 찾다가 기차역으로 와버렸더니만 머리가 가볍게 어지러워. 왜 이런 상황에 닥쳤는지 잠시 사진을 찍으며 생각해보니 전차 표를 사야하는데 전차 노선을 몰라. 그딴 거 아무리 찾아보아도 안 붙어있어. 튀니지 관광정보라고는 눈꼽만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아는 것이라고는 튀니스와 수스, 스팍스, 아침에 들은 하마마트라는 정체불명의 지명과 여기가 카르타고의 나라라는 사실 뿐. 전차 매표소에서 '하마마트 2장'이라고 말했던 것까지 기억이 나. 우리나라로 하면 지하철 1호선 서울역 매표소에 가서 '청주 2장이요'라고 말한 꼴.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말하면 직원이 '외국인이 뭔가 잘 모르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어찌어찌 가면 기차역이 있어요'라고 말할 거야. 전차 정거장에 노선도도 없고 내가 말할 수 있는 정거장 이름과 근접한 단어라고는 '하마마트'와 '지중해' 뿐. 하지만 어떤 것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역에 들어간 순간 '하마마트'역이 기차 노선도에 버젓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고, 전차 매표소에서 '지중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나라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동해바다 2장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 없어...다른 일행은 나보다도 더 백지 상태. 


그래서 옆에서 살살 꼬셨습니다. 저기요...저, 실은 정말 카르타고 유적이 보고 싶어요. 한니발의 체취를 느껴보고 싶어요. 수스에 카르타고 유적이 있대요. 스팍스는 하루에 갔다올 수 없지만, 수스까지는 하루에 갔다올 수 있어요. 하마마트는 분명히 다른 일행이 나중에 함께 가자고 다시 말할 것이니 우리 수스에 가서 카르타고의 향기를 맡아보아요.


어차피 이곳에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일행분. 우리 둘 다 튀니지에 대해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즉 반대의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전혀 표출할 수 없는 상황. 제가 입을 다물어버리면 일행분에게 남은 선택이란 아침 9시 반부터 일행이 돌아올 오후 6시까지 하염없이 하비브 부르기바 거리와 마르세이유 거리만 왕복하다 호텔 들어가서 쉬는 것밖에 없어요. 물건도 못사요. 영어가 안 통하니까. 밥도 못 먹어요. 영어가 안 통하니까.


기차역 안내소에서 기차 시간표 두 장을 획득한 후, 기차표를 샀습니다. 기차표 사는 곳과 타는 곳 때문에 약간 헤맸지만, 다행히 튀니지 사람들이 도와주어서 무사히 기차를 탔습니다. 튀니지 사람들, 확실히 서비스 정신은 좋은 것 같아요. 낮과 밤이 다른 국가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낮에는 대체적으로 친절했습니다. 특히 튀니지 남자들은 짖궂은 시골청년같은 이미지였습니다. 일단 외국인이면 무한한 호기심을 보여요. 그래서 외국인과 어떻게든 대화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얼굴이 익숙해진다 싶으면 가벼운 장난을 치기도 하구요. 낮에는 상당히 밝고 경쾌한 튀니지였습니다. 튀니스 시내는 활기가 넘쳤습니다. 비록 할일없이 하루종일 카페에 앉아있는 튀니지 젊은이라 할지라도 표정이 밝아요. 표정이 밝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A+를 주고 싶었습니다.


기차에 탔는데 어떤 꼬마가 코란 구절이 적힌 종이를 팔더군요. 말이 판매이지, 사실은 구걸이었습니다. 근성의 어린이였습니다. 안 산다고, 돈이 없다고 그렇게 말해도 끝까지 팔려고 하더군요. 그러나 결국 제가 이겼습니다. 기차 떠날 시간까지 제가 버티자 꼬마는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수스로 가는 길. 공사중인 건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정말 튀니지 전체가 공사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사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갈수록 개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정말 개가 떼를 지어서 다니는 것도 수차례 보았습니다. 시골로 내려갈수록 프랑스의 색채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건조한 평원과 올리브 나무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수레와 사람들...정말 조용했습니다. 기차 안에는 베르베르 사람도 탔는데 눈빛이 정말 무서웠습니다. 예리하게 날을 세운 칼날의 끝처럼 날카로워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차마 찍을 수 없었습니다. 튀니지 전통의상을 입은 한 베르베르 할머니께서는 기차 객실 안에서 줄담배를 태우고 계셨습니다. 그래요. 여기는 골초의 천국 튀니지. 거리의 사람 하나가 굴뚝 하나입니다. 튀니스 시내의 대기오염 주범은 차량이 뿜어대는 매연과 사람들이 뿜어대는 담배연기가 1등 자리를 놓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거에요. 길을 걸으며 담배를 태우는 것은 기본. 식당이고 어디고 전부 흡연의 천국. 사람들이 그렇게 담배를 태우고 꽁초를 거리에 휙휙 버리는데도 거리가 매우 깨끗하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입니다. 어쨌든 기차 객실에서조차 당당하게 줄담배를 태우시는 베르베르 할머니...졌습니다. 저도 튀니지에 도착하면서부터 엄청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지만 기차 객실에서만큼은 차마 담배를 입에 물 수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기차 좌석 중 제대로 된 의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의자를 앉아도 쿠션이 빠져 있어요. 의자에 앉아서 등에 기대려고 엉덩이를 앞으로 가볍게 밀면 쿠션도 앞으로 따라오는 황당한 의자. 좌석은 마음대로 앉아요. 표를 보면 분명히 좌석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 아무 소용 없어요. 일단 먼저 앉는 사람이 왕입니다. 혼자 두 자리를 이용할 수도 있어요. 


질문 : 만약 여러 승객들이 좌석을 두 개씩 독점해서 좌석이 다 차면 어떻게 합니까?

대답 : 그냥 서서 가세요.


좌석에 누워가도 괜찮습니다. 누워 가든 엎드려 가든 먼저 타서 자리를 잡은 사람 마음대로 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늦게 탄 사람이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는 점. 우리나라라면 그런 모습을 보면 비켜라 일어나라 기차 전세내었냐 등등 온갖 말이 다 튀어나오겠지만 이네들은 그냥 방관. 좌석번호를 찍어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입석 시스템이 없어서 딱 정해진 수량만 팔기 위한 하나의 수단 같아요. 즉, 판매분량을 계산하는데 1,2,3...이렇게 세면 시스템이 너무 낙후된 것 같으니까 좌석 수로 2/01, 2/02, 2/03 이렇게 세는 것 같았습니다. 좌석 번호? 아~~무 의미 없어! 그냥 골라 앉으면 돼. 두 자리 다 차지하고 싶으면 두 자리 다 차지해서 드러누워 자면서 가도 돼.


튀니지 기차 내부


수스역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은 휴가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튀니지 군인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탄띠를 매고 다닌다는 사실. 탄띠를 맨 군인을 보니 군인들이 왠지 무슨 작전 수행중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역에서 간단하게 과자와 음료수로 점심을 때우고 역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역 앞은 정말 조용했습니다. 하늘에는 약간의 구름이 껴 있었습니다. 문제는 수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 카르타고의 냄새 따위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한 시골에 내려온 느낌이었습니다. 나귀가 수레를 끌고 역 앞을 지나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여기 수스 맞지? Gare de Sousse. 분명 수스역이 맞아. 여기 튀니지에서는 엄청 큰 역이야. 튀니스, 수스, 스팍스-이 세 역은 튀니지에서 가장 큰 세 기차역이라구. 그런데 수스역은 우리나라의 시골역 수준. 간이역보다 살짝 큰 수준. 역 내부는 완전 작아요. 그리고 역 앞이 너무 한산해. 역이라면 사람이 붐벼야 정상이야.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는 택시들이 줄을 서요. 사람들도 그 시간만큼은 조금 모이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아무도 없어. 조용하다 못해 황량할 지경이야...


일단 무작정 수스역을 중심으로 걷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괜찮아보이는 정원 옆길을 따라 걷는데 무언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냄새도 났습니다. 상당히 익숙한 냄새였습니다. 바다다...바다다...바다다...


지중해다!






겨울이라서 한산한 지중해. 드디어 지중해 해변을 밟아보게 되었습니다. 모래가 정말 고왔습니다. 얼마나 고운지 물을 먹은 모래는 돌처럼 단단할 정도였습니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과 연인 몇 명, 바람 쐬는 한량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지중해 해변. 지금은 붐빌 시즌이 아니에요. 지금은 겨울. 바다에 들어가기에는 상당히 추워요. 튀니지가 아프리카이기는 하지만 위도상으로 우리나라보다 정말 남쪽에 위치한 지역은 아닙니다. 낮에는 10월 초 정도의 날씨. 그러나 밤에는 11월 중순의 날씨. 이런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뛰어들어서 해수욕을 즐길 사람이라면 아마 무쇠심장이 아닐까 의심해볼만 해요. 햇볕은 뜨거운데 날은 추워. 묘한 느낌. 그러나 아주 좋아. 너무 좋아.


문제는 한없이 바다만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다를 따라 걷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처음의 감동은 불과 20분만에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감동이 사라지자 지중해도 고향 바다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중해 바닷물을 마셔보는 것은 자살행위일 것 같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할 것이 없어요. 너무 심심해요. 모래성을 만들고 산책이나 하면서 3시간을 보내기엔 하루가 너무 아까워요. 그런 놀이라면 고향 바닷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여기에 온 것은 관광.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이든 많이 보기. 휴양이 목표라서 수스에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나 조용하고 평화로운지 도로표지판의 사람들도 여유롭게 길을 걸어요. 느긋하고 편안하게 길을 걷기도 하고, 페인트 칠해진 곳만 건너기 위해 깡충깡충 뛰어보기도 해요. 그러나 현실은...





무조건 달려야 합니다. 이곳 바다가 평화롭다고 여기가 튀니지가 아닌 '수스 왕국' 정도 되는 것은 아니에요. 여기 주민들은 아랍인. 튀니스 거주 아랍인들과 크게 다를 것 없어요. 여기의 차도 역시 무단횡단의 천국. 그리고 차는 사람이 길을 건넌다고 해서 절대 속도를 줄여주지 않아. 저렇게 여유 부리다가는 다음날 아침 병원에서 눈을 뜰 수도 있어. 가벼운 기억상실이 따를 수도 있고, 손발은 석고로 칭칭 감겨있을 수도 있어. 어쩌면 저승에서 돌아가신 조상님들과의 면담을 하고 있을 수도 있구요.


한없이 바다를 따라 걸어가는데 '올리브 박물관'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표지판을 따라가 보았더니...


음식점이야. 어이쿠...


'내 다시는 튀니지에서 박물관 표지판 보고 박물관 가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길을 걷다가 원래 가던 길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방향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기념품 가게가 죽 늘어선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기념품을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사진엽서를 발견했습니다.


"어라? 오래된 건물이 있네?"


목표물을 찾았습니다. 오래된 건물이 수스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진엽서들을 보니 방향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도착했던 바닷가로 돌아가서 우리가 갔던 반대방향으로 가면 될 것 같았습니다. 오래된 건물 사진이 실린 사진엽서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우리가 갔던 방향 반대방향에 있을 듯한 항구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 의외로 그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일단 큰 길을 따라가다가 바다가 있는 쪽 길로 꺾어 들어가면 해결될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쉽게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바다로 돌아가서 반대쪽으로 가는데 오래된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가게 주인에게 길을 물어보았습니다.


"Est-ce qu'il y a une patrimoine ici?"

"엥?"


저의 불어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내 불어 발음이 너무 형편없어서 이 사람이 못 알아듣나? 그래서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물어보았습니다.


"Est-ce qu'il y a une patrimoine ici?"

"엥?"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정확히 딱딱 끊어서 물어보았습니다.


"Est-ce qu'il y a une patrimoine ici?"

"Est-ce qu'il?"


정말 답답했습니다. Est-ce qu'il 고지를 넘어가니 patrimoine이라는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오래된 건물의 이름이 뭔지 알면 바로 Ou est...로 물어버리면 되는데 문제는 그 오래된 건물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그래도 오래되고 관광지이니 patrimoine(유적)이라고 물어보았는데 가게 주인이 'patrimoine'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저와 가게 주인의 횡설수설의 시작. 둘이 실컷 횡설수설 하다가 제가 일행에게 영어로 물어봐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일행이 영어로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영어는 먹통. 영어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patrimoine가 안 통하자 heritage도 써보고 아랍어로 물어보기도 했지만 하나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저와 가게 주인의 횡설수설...머리가 어지러워. 점점 불어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물어보았습니다. 이 말마저 통하지 않으면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계속 돌아다닐 생각이었습니다.


"Il y a un batiment ancien tunisien ici?"

"Ah! La medina!"


이런 기적같은 일이! 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던진 마지막 말이 통한 것이었습니다.


"Oui! C'est ca! C'est ca! La medina!"

이 친절하신 가게주인, 저의 la medina 발음도 수정해 주셨습니다. 자기 입을 보라고 하더니 또박또박 발음해 주더군요.


"La medina!"


알았어요. 튀니지나 모로코에서 La medina를 발음할 때는 입을 옆으로 쫙쫙 찢어주세요. 아,에,이,아- 이 la medina를 구성하는 네 모음 모두 입을 옆으로 쫙쫙 찢어서 발음해 주세요. 드디어 제가 가지고 있는 불한사전에 나오지 않은 불어 단어 하나 배웠습니다.


medina(f) [medina]
튀니지나 모로코에서 구시가지를 일컫는 말. 어원은 아랍어의 [madi:na].

튀니지나 모로코에 가서 어느 한 도시를 구경하게 되었을 때, 택시를 타고 'a la medina'라고 말하면 반드시 구시가지로 데려다 줍니다. 길을 물을 때에도 'Ou est la medina?'라고 물어보면 반드시 구시가지를 알려줍니다. 구시가지로 가면 반드시 재래시장이 있고, 대부분 오래된 성이 있습니다. 성이 없고 성문만 남아있다든지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la medina'라면 옛날에 성이 있던 자리입니다.


어쨌든 새로운 불어 하나 배우고 la medina로 갔습니다. la medina로 가는 길. 앉은뱅이 거지가 휠체어를 타고 구걸을 하는데 저를 보자마자 'ku:riya!"라고 소리치더군요. 튀니지와서부터 계속 듣던 'chinois'대신 'ku:riya!'를 듣자 돈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00밀림을 주었습니다. 100밀림을 주자 거지가 신이 나서 큰 소리로 고맙다고 하면서 저의 축복을 빌어주더군요. 기분은 좋은데 주변 사람들이 전부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참고로 1000밀림이 1디나르입니다. 적선을 너무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작은 경험이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la medina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la medina 옆에는 수스항이 있었습니다. 이제 수스에서 보아야할 세 가지를 다 본 거에요. 지중해 해변, 구시가지, 수스항. 이 세 가지를 다 보았습니다.


수스 구시가지의 성채





위에서 말한대로 구시가지에는 반드시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성벽 주위에도 재래시장이 있고



성 지하에도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성 지하의 재래시장에서는 과일과 생선, 야채를 팔고 있었습니다. 과일가게에서 저의 눈을 확 잡아끈 것은 바로 코코넛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코코넛을 먹어본 사람들의 말로는 코코넛이 매우 맛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향기롭고 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 샀습니다. 가져가서 먹으라고 가게주인이 말했지만, 이 자리에서 먹어야한다고 끝까지 박박 우기자 한 튀니지 남자가 와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가게주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코코넛을 칼로 잘라서 즙을 컵에 담아주었습니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코코넛 맛있기는 개뿔!


즙은 신 맛이 너무 강했습니다. 향기부터 매우 이상하더니만 즙에서는 시고 살짝 떫은 맛이 났습니다.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 한 입에 다 털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과육을 먹을 차례. 저를 도와준 튀니지 사람은 저에게 코코넛을 먹으면 힘이 강해진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과육은 생밤 맛이었습니다. 아주 질긴 생밤 맛이었는데, 계속 씹으면 고소한 맛이 났습니다. 코코넛 과육을 씹어먹으며 수스항을 구경했습니다. 그때는 배가 고프고 처음 먹는 것이라 그럭저럭 맛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 맛을 생각해보면 완전 좌절의 맛. 거저 줘도 안 먹을 거에요.



수스항이 아름답다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특색이라면 구시가지의 성과 조화가 잘 이루어졌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수스항 근처는 수스역보다 사람이 훨씬 많이 붐볐습니다. 차도 많았습니다. 역으로 돌아가려는데 문제는 방향을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습니다. 솔직히 다리도 조금 많이 아팠습니다. 코코넛을 먹으면 힘이 강해진다는데 힘이 강해지기는...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택시를 타고 수스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기차는 오후 4시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까 갔던 길과 반대쪽-즉 바다 반대쪽으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바다 반대쪽은 조용한 주택가였습니다. 정말 한적했습니다.



이렇게 집에서 키우는 닭이 산책을 하고,



멀리 깔끔하게 흰색과 초록색으로 칠한 말리키 학파 양식의 첨탑도 보였습니다.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부는 공사중.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교회 맞은편에는 철로가 있고, 철로의 끝이 바로 수스항이었습니다.


정말 조용하고 평화로워요. 정말 조용하고 평화로워요. 그냥 거리에 누워 낮잠을 자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너!



이 고양이...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아요. 이 고양이 뿐만이 아닙니다. 튀니지의 모든 고양이들이 사람 알기를 무슨 지나가는 벼룩 알듯이 합니다. 전혀 관심이 없어요.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관심이 없습니다. 손으로 고양이를 낚아채려고 해야 그제서야 어슬렁어슬렁 몸을 움직입니다.



아주 쌍으로 자빠져 있어. 아무리 다가가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요.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야 '뭐야? 이 귀찮은 자식'이라는 눈빛으로 한 번 흘겨보고 다시 잡니다. 고양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이건 거의 무시 수준. '고양이를 괴롭혀서 고양이에게 사람의 무서움을 가르쳐줄까?' 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 같지 않아서 그만두었습니다. 하여긴 이 나라의 고양이, 사람 절대 안 무서워해요. 고양이를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튀니지의 고양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매우 궁금해 했지만 가까이서 관찰한 결과...


한국의 도둑고양이와 다를 것 전혀 없어.


똑같아요. 한국의 고양이와 생긴 것이나 하는 짓이나 다른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란에 가면 도둑고양이도 페르시안 고양이이고, 에티오피아에 가면 도둑고양이도 아비시니안 고양이이고 태국에 가면 도둑고양이도 샴고양이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튀니지의 고양이는 어떤 고양이일까 많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한국의 도둑고양이와 아주 비슷. 해부를 해 보면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해부 따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런다고 고양이에 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져서 눈으로 보자마자 이 고양이는 한국의 도둑고양이와 어떤 점에서 뭐가 몇 % 다르기 때문에 튀니지 특산 고양이이다...라고 말할 정도인 것도 아니에요. 귀가 지나치게 크거나 털이 마포걸레처럼 바닥을 다 쓸고 다닐 정도로 길거나 해야 그제서야 '이 고양이는 우리나라 도둑고양이와 좀 다르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하는 수준. 이런 수준으로 보았을 때, 튀니지의 도둑고양이는 한국의 도둑고양이와 다른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튀니지의 기차에게 연착이란 없는 것인지 예정시각에 딱 맞추어서 도착했습니다. 도착하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서 스팍스까지도 가보고 싶었지만, 스팍스는 당일치기가 불가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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