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잊혀진 어머니의 돌 (2022)

잊혀진 어머니의 돌 - 09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재래시장 도계 전두시장

좀좀이 2022. 10. 15.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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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역에서 사북역, 예미역, 영월역 등 서쪽으로 가서 청량리까지 가는 무궁화호 태백선 열차는 16시 3분에 도계역에 도착할 예정이었어요. 아직 오후 2시도 안 되었어요. 사북역으로 갈지 예미역으로 갈지 정하지 못했어요. 기차표를 끊지 않았어요. 다음 행선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건 아직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어요. 지금 중요한 것은 기차 시간까지 2시간 넘게 남았다는 사실이었어요.

 

일기예보는 왜 하필 이럴 때 잘 들어맞는단 말인가.

 

추세추종하라고 한 놈들 다 어디 갔습니까!

 

기상청이 일기예보 제대로 하는 꼴을 못 봤던 2022년 여름. 기상청은 일기예보는 고사하고 날씨 중계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었어요. 추세추종이라면 기상청이 일기예보 또 틀릴 거라고 믿고 움직이는 거였어요. 그런데 하필 이날은 무슨 검은 백조가 떼로 한국으로 날아왔는지 기상청 일기예보가 맞아버렸어요. 기상청 일기예보에서는 하루 종일 비가 세게 퍼부을 거라고 하고 있었어요. 오전에는 비가 그칠 수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보여줄 때도 있었어요. 그렇게 희망고문하던 날씨였어요. 하지만 밥 먹고 나와서 도계역 도착하니 이제 그런 희망고문조차 없었어요. 대놓고 오늘 하루 종일 비 엄청 퍼부을 거라고 비가 좍좍 내리고 있었어요.

 

저와 친구가 서로를 바라봤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았어요. 지금 기차역 들어가서 2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는 싫었어요. 어떻게 온 도계인데요. 저와 친구 모두 청량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어요. 청량리역까지 간 노력, 청량리역에서 도계역까지 온 고생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어요.

 

도계역은 서울에서 오기 매우 힘든 곳이에요. 서울에서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기차역인 도계역까지 가는 방법 자체는 쉬워요. 청량리역에서 기차 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요. 그러면 기차가 알아서 도계역까지 가요. 서울 청량리역에 직통 무궁화호 열차가 있기 때문에 가는 방법은 하나도 안 어려워요. 기차 타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안 어렵지만 쉽다고는 안 했어요. 청량리역에서 도계역까지 기차로 소요시간은 무려 4시간이었어요. 기차에 따라 3시간 47분 걸리는 것도 있고 4시간 9분 걸리는 것도 있어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시간이에요.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걸려요. 다른 기차 온다고 비켜주고 신호 때문에 정차하고 하다 보면 시간이 조금 더 걸려요. 게다가 무궁화호 열차라서 시설이 그렇게 좋지도 않아요. 기차 요금도 있구요.

 

"여기는 들어가 있을 만한 카페도 없네?"

 

원래는 도계읍 와서 탄광마을과 광산사택을 구경한 후 물닭갈비 먹고 카페 가서 쉴 계획이었어요. 여행 와서 마지막 최후의 1초까지 걸어다니며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주 예전에는 여행 한 번 가면 일정 내내 그렇게 전투적으로 돌아다녔어요. 예전에는 돈도 없었고 다시는 못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무조건 많이 보려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여행지에서 카페에서 쉬는 시간이 너무 아깝기만 했어요. 그래서 쉬지 않고 돌아다녔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여행 가면 옛날처럼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에요. 여행 가서 좋은 카페 가서 느긋하게 쉬는 것도 여행의 재미라는 사실을 알거든요. 예전에는 카페를 즐기는 것 자체를 몰랐어요. 제가 카페에 가기 시작한 건 2017년에 24시간 카페를 돌아다니면서부터였어요. 제가 저 혼자 제 돈 주고 처음으로 스타벅스 가본 건 무려 2018년이었구요. 카페에서 시간 보내고 즐기는 것 자체를 몰라서 여행 중 카페 가는 걸 안 좋아했고 1분 1초, 마지막 체력 한 방울까지 다 해서 돌아다니려고 했던 것도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여행지에 있는 카페에서 쉬는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거처럼 무조건 강행군으로 돌아다니지는 않아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 와서 좋은 카페가 있으면 가서 쉬면서 시간도 보내고 기념품으로 사갈 만한 것이 있으면 구입해서 지인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어요. 그러나 나름 도계읍 번화가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도계역까지 오는 동안 들어가서 시간을 보낼 카페도, 기념품 같은 거 판매하는 곳도 없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본 탄광촌 풍경만 매우 많이 보고 사진 찍고 머리 속에 저장해놨어요.

 

'흥전리는 무리일 거야.'

 

친구 얼굴을 보며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만약 저 혼자 왔다면 어차피 어디 들어가 있을 곳도 마땅치 않으니 도계읍 남쪽 흥전리로 갔을 거에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흥전리에는 기찻길옆 벽화마을과 도계 유리나라가 있었어요. 도계역에서 흥전리 기찻길옆 벽화마을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km 였어요. 이 정도면 남은 시간 동안 다녀올 만 해 보였어요.

 

쓸 데 없는 말은 안 하는 게 답이다.

굳이 결과가 나쁠 거 뻔한데 할 필요 없다.

 

친구에게 흥전리 기찻길옆 벽화마을까지 갔다 오자고 하면 친구가 퍽이나 좋다고 할 거였어요. 친구는 밥 먹고 농담도 간간이 하고 있었지만 흥전리까지 다녀오자고 하면 일단 얼굴 표정이 가스불 위 마른 오징어처럼 우그러들 거였어요. 가는 내내 툴툴거릴 거고, 가서도 또 넋나간 사람처럼 굴 거고, 뭐 본 것도 없는데 기차 시간 촉박하다고 빨리 돌아가자고 재촉하고 징징거릴 거였어요. 친구에게 직접 너 이럴 거라고 하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 친구와 여행을 한 두 번 다녀본 게 아니에요. 안 봐도 뻔했어요. 흥전리는 깔끔히 단념해야 했어요.

 

그래도 어쨌든 흥전리 방향으로 가기는 해야 했어요. 기차역에서 2시간 멍때리고 있을 거 아니라면 도계읍에서 안 가본 곳은 도계역 남쪽 흥전리 방향이었어요. 반드시 흥전리를 간다고 하지 않고 적당히 남쪽으로 가다가 친구 반응과 상황 봐서 기차역으로 돌아오면 될 거였어요.

 

도계역에서 남쪽 흥전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앞에 시장이 하나 나왔어요.

 

 

'전두시장'이라는 곳이었어요. 전두시장 입구 양 옆에는 한우 실비 식당이 있었어요. 시장이니 한우 식육 실비 식당이 있는 것이 특이할 것은 없었어요. 시장에서 고기도 팔겠죠.

 

"시장 가보자."

"저기는 비 안 떨어질 건가?"

"지붕 다 해놨을 걸."

 

친구와 도계 전두시장을 돌아보기로 했어요. 길을 건너서 전두시장 안으로 들어갔어요.

 

 

고요해.

너무 고요해.

 

시장은 너무 조용했어요. 시장 입구에서 저와 친구를 반겨준 것은 말린 호박 쪼가리와 말린 풀떼기였어요. 누구에게 팔기 위해 말린 호박과 말린 채소가 수북히 쌓여 있는 게 아니라 한 줌 정도였어요.

 

'여기 망한 거 아냐?'

 

시장 입구에서부터 진열되어 있는 게 한 줌 조금 넘을 양의 말린 호박과 말린 풀. 지키는 사람도 없었어요. 이건 시장 풍경이 아니라 버려진 공간에 주변 할머니가 자기 먹을 거 널어놓고 말리는 모습이었어요.

 

 

도계 전두시장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할머니들이 계셨어요.

 

 

공공기관에서 재래시장 살리기로 정말 잘 한 것이 하나 있다.

재래시장 길 위에 천장 만들어서 비 피할 수 있게 한 것은 정말 잘 했다.

 

공공기관에서 재래시장 살리려고 여러 가지 노력했어요. 이 중에서 가장 잘 한 것은 재래시장 길 위에 지붕을 설치해놓은 거에요. 예전에는 비 오면 재래시장은 피해가야 하는 장소였어요. 그렇지 않아도 좁은 길에 사람들이 우산 쓰고 돌아다녀서 사람에 부대끼는 거에 더해서 다른 사람의 우산까지 조심해야 했어요. 시장 좌판 위 상품 위로 빗물 튀기는 건 당연했구요.

 

언젠가부터 공공기관에서 전국 각지 재래시장을 정비하면서 재래시장 길 위에 지붕을 씌웠어요. 이때부터 재래시장은 비 오면 기피하는 장소에서 비 오면 오히려 가기 좋은 장소로 바뀌었어요. 지붕을 씌워놔서 잠시 비 피하기 좋아졌어요.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을 때 근처에 재래시장이 있으면 비 피하려고 재래시장으로 들어가곤 해요. 비도 피하고 시장 구경도 하고 시장 온 김에 간단한 간식 먹을 거 있으면 먹고, 살 만한 거 있으면 구입하기도 해요.

 

친구와 도계 전두시장으로 들어온 이유도 잠시나마 비를 피하자는 목적도 있었어요. 만약 도계 전두시장에 지붕이 없어서 비가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피해갔을 수도 있어요. 지붕 없는 재래시장에서 우산 쓰고 돌아다니려고 하면 사람 없어도 피곤하고 사람 조금만 있으면 사람에 우산에 신경쓸 것 더 생겨서 진짜로 피곤하거든요.

 

 

도계 전두시장은 손님으로 온 사람은 거의 안 보였어요. 아예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손님이 없었어요. 돌아다니고 계신 할머니들도 물건 사러 손님으로 온 건지 상인과 놀려고 놀러온 건지 다른 상점 상인이 돌아다니는 건지 분간이 안 되었어요.

 

 

 

친구와 말없이 시장을 걸었어요.

 

 

도계 전두시장 고객지원센터가 나왔어요.

 

 

삼척시 도계 도시 재생현장 지원센터도 전두시장 안에 있었어요.

 

 

"이거 아이디어 좋은데?"

 

 

연탄재 8개를 일렬로 세워놓고 '삼척시', '도계', '도시', '재생', '현장', '지원', '센터', '541-7723'이라고 적어놨어요. 연탄재마다 물감으로 알록달록하게 그림을 그려놨어요. 석탄 주요 생산지이자 탄광 마을다웠어요.

 

'여기 시장 규모 꽤 큰데?'

 

도계에는 기차역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요. 도계읍 행정복지센터도 있고,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 기숙사도 있어요. 사람이 별로 안 보이는 쇠락한 탄광촌이라고 하지만 규모가 꽤 있는 곳이었어요. 규모가 큰데 과거 여기에서 살던 사람들 대다수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휑해진 지역이에요. 이런 점을 감안해도 도계 전두시장은 규모가 꽤 큰 편이었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바로 옆은 태백시에요. 도계역에서 태백역까지 기차로 30분 채 안 걸려요. 아무리 과거에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고 해도 바로 옆이 태백시인 점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크게 물건을 사러 태백으로 많이 갈 거 같았어요. 이처럼 도계읍과 태백시는 교통적으로 보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데 도계 전두시장은 상당히 큰 편이었어요. 도계읍 규모에 걸맞지 않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규모가 있는 재래시장이었어요. 그래서 더욱 휑해보이는 것도 있었어요.

 

과거 도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걸까.

도계의 옛날 모습이 궁금하다.

 

이 정도로 큰 규모의 시장이 있으려면 사람들이 꽤 많이 살아야 했어요. 여기에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가 있다고 해도 그 정도로 될 시장 규모가 아니었어요. 도계 전두시장 규모를 보면 과거 한창 석탄 산업이 잘 나갈 때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전두시장길 20일원에 위치한 도계 전두시장은 1951년 5월에 개설된 시장이에요. 도계 전두시장은 현재 직영 점포 60곳과 임대 점포 1곳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요. 도계 전두시장 시장 규모는 대지 8,560제곱미터, 건물연면적 7,830제곱미터, 매장면적 7,830제곱미터라고 해요. 건물 구조는 단층 목조 슬레이트 건물이에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 전두시장은 아침 8시부터 저녁 20시까지 영업한다고 해요. 단, 시골 장터이기 때문에 영업 시간은 그때그때 다를 수 있어요. 가게 문 열고 닫는 것은 상인들 마음이니까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 전두시장은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1951년에 전두리 83번지 자리에 라이터 돌을 파는 상점을 시작으로 작업복, 장화, 허리띠 등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노점을 펼치면서 시장으로 발전했어요. 도계 전두시장이 시작된 정확한 위치는 도계 전두시장 입구 무진식육점 자리에요. 이 글에서 도계시장 입구 사진을 보면 입구 양옆에 한우 실비 식육 식당 두 곳이 있어요. 그 중 왼쪽 식육 식당이에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은 한국 전쟁이 진행중이던 1951년에도 탄광이 운영되고 있는 탄광촌이었어요. 이 당시 탄광에서는 안전등이 아닌 '간드레'라는 등을 사용했어요. 간드레는 칸델라 CANDEL (CANDELA)라는 옛날 등잔이에요. 간드레는 카바이드(탄산 칼슘)가 물을 만나면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발생하는 아세틸렌 가스에 불을 붙여서 어둠을 밝히는 조명기구였어요.

 

간드레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라이터가 반드시 있어야 했어요. 이 때문에 광부들이 라이터돌을 구입하기 위해 도계광업소 정문 근처였던 전두리 83번지쪽으로 모여들었어요. 여기에 도계에 있는 탄광에서 일하기 위해 타지역에서 도계로 넘어온 이방인들도 탄광에서 작업할 때 필요한 각종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전두리 83번지 도계광업소 정문 부근으로 모여들어서 여러 물건을 거래하며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어요.

 

이와 더불어서 사택을 구하기 전까지 하숙집에서 거주하던 광부들의 생활권을 중심으로 선술집과 식당이 하나 둘 늘어났어요. 유명한 곳으로는 역전에 중국인이 운영하던 중국음식점인 대흥관, 시장 안쪽에서 찐빵, 만두, 중화요리를 팔던 영춘옥이 있다고 해요.

 

 

 

석탄 산업이 잘 나갈 때 도계 전두시장은 전성기 서울 명동만큼 엄청나게 붐볐다고 해요. 특히 월급날이 되면 옷, 식품, 생선, 밀가루, 그릇, 채소 등 생필품을 거래하던 시장 거리는 인산인해였다고 해요.

 

도계읍 규모가 커지고 발전하면서 현재 도계시장 앞 자동차 도로변 상부에는 정육점, 철물점, 여관, 영신 상회, 재새당약국, 병원, 광산 기기류, 문방구, 태백장, 유정, 한약방, 막걸리 도매점, 고물상 등이 들어서며 오늘날의 도계 전두시장 및 일대 거리가 되었다고 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이 급격히 쇠락하게 된 이유는 석탄산업의 쇠퇴와 석탄합리화 정책 시행 때문이에요.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인해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국의 석탄산업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어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청정에너지 보급이 정책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무연탄 수요가 급감하기 시작했어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환경규제를 강화했어요. 1986년에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같은 직할시급 이상의 대도시에 있는 신축 아파트를 비롯해 학교, 병원, 식당, 숙박업계 등 대중 이용시설에 대해 연탄 사용을 규제하는 조치가 시행되었어요.

 

정부가 정책적으로 청정에너지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연탄 사용가구가 급격히 감소했어요. 석탄산업 합리화사업 시행 전이었던 1987년에 한국 연탄 사용 가구는 81.8%에 달했어요. 그러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이 시작된 1989년에는 한국 연탄 사용 가구가 71.2%로 감소했고, 1991년에는 한국 연탄 사용 가구가 무려 52.4%로 급감했어요.

 

 

사족으로, 이처럼 1990년대 들어서 연탄 사용 가구가 급감하면서 사람들의 추억에도 세대차가 발생했어요. 1990년대 초반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연탄, 연탄 보일러, 연탄재에 대한 추억이 매우 보편적인 기억이며 가난과 관련된 특별한 이미지는 별로 없어요.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연탄이란 가난, 빈곤의 상징이에요. 과거에 겨울이 되면 어디를 가나 흔히 맡을 수 있었던 연탄 타는 냄새와 연탄재 냄새가 1990년대 후반부, 더 나아가 2000년대 들어서는 가난한 동네의 냄새로 바뀌었어요.

 

 

화무십일홍.

 

아니야. 그 정도로는 표현이 되지 않아.

 

갑자기 화려하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확 사라져버린 꽃.

선인장처럼.

 

 

석탄 사용이 급감하면서 재고탄이 출하되지 않고 쌓이기 시작했어요. 석탄이 잘 팔리지 않고 재고탄으로 쌓여가자 영세탄광의 경영은 악화되었어요.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석탄산업의 사양화 단계라 파악해 비경제성 탄광을 폐광하도록 유도하고, 경제성 있는 탄광을 육성하겠다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했어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위해 1986년 9월에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설립 준비 사무국이 설치되었어요. 1987년 1월에는 동자부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설립위원회가 발족했어요. 1987년 4월에는 사업단 창립이사회 및 설립 등기, 1988년 12월에는 석탄산업합리화방안의 산업정책심의회의 의결 과정이 있었어요.

 

 

1989년,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했어요. 원래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은 단계적으로 탄광을 폐광하려고 계획했어요. 그러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이 시행된 1989년에만 당시 한국에 있던 363개 탄광 중 112개 탄광이 폐광을 신청했어요. 이 112개 탄광에서 근무하던 노동자 수는 무려 11,172명에 달했어요. 이 해 정부에서 사업비로 책정한 예산은 123만톤 감산이었어요. 그러나 현실은 달랐어요. 폐광을 신청한 탄광의 생산규모는 정부가 사업비로 책정한 123만톤 감산의 3배나 많은 465만톤 생산규모였어요.

 

폐광을 희망하는 광업소와 탄광 노동자들은 정부에 폐광 대책비를 요구했어요. 정부는 이를 수용해서 폐광 지원 범위를 더 확장했어요. 정부는 탄광 노동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협의를 하면 신청기간과 상관없이 폐광할 수 있도록 허가했어요. 이를 통해 1993년 들어서는 어떤 탄광이든 폐광할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었어요.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은 1993년부터는 어떤 탄광이든 폐광할 수 있도록 바뀌었어요. 이러자 무수히 많은 탄광이 자진 폐광했어요. 경영주와 탄광 노동자들은 폐광 보상금을 받기 위해 폐광을 원했어요.

 

매우 눈여겨볼 만한 사실은 석탄합리화 정책 과정에서 폐광 여부를 놓고 탄광 경영자와 정부, 또는 탄광 경영자와 노종다 간에 갈등적 요소조차 없었다는 점이에요. 정부에서 석탄합리화 정책 기간에 폐광하면 노동자와 경영자에게 폐광 보상금을 지급했기 때문이었어요. 폐광 보상금은 탄광이 폐광하면 석탄생산 톤당 일정금액을 광업시설의 이전 또는 폐기를 위한 지원금으로 지급되었어요. 또한, 광산 노동자들에게는 퇴직금의 75%, 2개월분 임금, 1개월분 위로금과 더불어 생활안정금과 구직활동비를 지불했어요.

 

정부에서 탄광 경영자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폐광 보상금은 광산 경영자와 광산 노동자가 아무 마찰없이 폐광에 합의하는 수준을 넘어서 서로 앞다투어 폐광하도록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탄광 노동자와 탄광 경영자들은 석탄합리화 정책 기간 안에 폐광을 신청하지 못하면 훗날 폐광하더라도 보상금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어요.

 

 

1989년부터 1996년까지 334 탄광이 폐광했어요. 폐광대책비로는 총 3,876억원이 지급되었어요. 폐광대책비 3,876억원 중 58.4%인 2,263억원은 탄광 노동자에게 지급되었고, 26.7%인 1,034억원은 폐기지원비로 지급되었어요. 그리고 14.9%인 579억원은 산림 훼손 복구 및 광해 방지비로 지급되었어요.

 

 

석탄합리화 정책이 진행되며 석탄합리화 정책 이전에 68,500명이었던 탄광 노동자는 2000년 들어서 8,200명을 남기고 모두 탄광을 떠났어요. 석탄 산업이 잘 나갈 때 탄광촌 구성원 거의 전부가 이주민들이었어요. 이들은 탄광촌에 돈 벌려고 왔을 뿐, 정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탄광이 폐광하자 이들은 모두 다른 일을 찾아서 타지역으로 이동했고, 많은 탄광촌이 쇠락을 넘어 지역 사회 붕괴 위기에 빠졌어요.

 

많은 광산의 폐광이 매우 빠르게 이뤄졌고, 광산 노동자들이 급격히 타지역으로 이주하며 탄광 지역 사회는 급격히 붕괴했어요. 그러나 정부는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인한 지역 붕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없었어요. 생산성 있는 탄광을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런 것 없고 생산성 있는 탄광들조차 싸그리 폐광했어요. 탄광이 폐광하면 지역 사회가 붕괴될 게 자명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없었어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나온 대책이라는 게 사북 고한 강원랜드와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 정도에요. 여기에 골프장 같은 거 몇 곳 있구요.

 

이러한 당시 주민 구성 특징으로 인해 석탄 광산 지역에서 정부에 지역 사회 붕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한 행동의 중심은 지역 상인들이었어요. 그러나 정부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강원도 남부 탄광 일대에 거주하던 많은 광산 노동자 및 그 가족들이 애향심이 없는 이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탄광 지역 사회 붕괴를 막기 위해 크게 노력한 게 없는 것 아닌가 싶어요. 탄광 때문에 수용 가능한 인구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 환경이 매우 열악했고, 광산 노동자 대부분이 그저 돈 벌러 왔을 뿐 정착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폐광 후 지역사회 붕괴에 대해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폐광되면 폐광 지원금 받고 아무 미련없이 떠나버렸어요. 그러니 정부에서도 광산 노동자들을 폐광 후 억지로 그 지역에 계속 눌러앉힐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탄광 지역 사회 붕괴에 대해 그렇게 신경 많이 안 쓴 것 아닌가 싶어요.

 

 

전두시장은 앞쪽은 상가이고 뒷편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인 상점들도 여러 곳 있었어요.

 

참고로 도계 5일장은 전두시장에서 열리지 않아요. 매월 4일과 9일에 열리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5일장은 전두시장에서 8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도계읍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열린다고 해요.

 

 

전두시장에서 나왔어요. 기찻길 너머 가옥들 뒷편으로는 검은 망이 높이 쳐져 있었어요. 검은 망 뒤에 있는 건물에는 '대한석탄공사'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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