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어요. 길이 좁아지면서 아주 좁은 샛길이 하나 나왔어요. 친구는 뒤에서 거리를 조금 멀찍이 두고 쫓아오고 있었어요.
'여기는 쟤가 못 가겠지?'
친구는 몸도 약하고 눈도 잘 안 보여요. 게다가 지금은 비가 와서 땅에 물 고인 곳도 여러 곳 있었고 진흙탕이 되어서 발이 푹 빠지는 곳도 여러 곳 있었어요. 이런 곳은 친구가 안 오는 것이 매우 좋았어요. 아까 물 고인 곳에 발이 빠졌을 때는 의외로 조용했지만, 이번에도 또 발이 진흙탕이나 물 웅덩이에 빠졌는데 조용할 거 같지 않았어요. 친구가 운 좋게 잘 피한다면 좋겠지만, 지금까지 친구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그러지 못할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어요.
'나 혼자 빨리 갔다가 나와야겠다.'
친구가 아직 뒤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어요. 저 혼자 매우 비좁고 포장 하나도 안 된 진흙밭 골목길에 들어가서 길이 있는지 살펴보고 나오기로 했어요.
진짜로 까맣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는 정말로 비가 오면 채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이 올라오는 지역이었습니다.
정말로 검었어요.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니었어요. 갤럭시노트10+ 카메라가 이상한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갤럭시노트10+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덜 검게 나왔어요. 실제로는 이 사진보다 훨씬 더 검었어요.
"야, 너 왜 따라왔어?"
"응?"
되돌아나가려는데 친구가 저를 따라 골목길 안으로 들어왔어요. 친구는 아무 생각 없이 제가 가니까 쫓아왔어요. 친구에게 왜 따라왔냐고 물어봤어요. 친구는 영혼이 빈 육체만 남아 있었어요. 저를 안광 없는 눈빛으로 쳐다봤어요.
친구가 뒤따라왔으니 그냥 가던 대로 가기로 했어요. 풀과 나무 때문에 매우 좁은 곳을 통과했어요. 풀과 나무에 맺힌 빗물이 몸에 묻었어요. 다행히 우비를 입고 있어서 빗물이 몸에 떨어져도 괜찮았어요. 옷은 안 젖고 우비 위로 빗물이 묻어서 떨어졌어요.
강원도 삼척시의 탄광 개발은 1937년 도계읍 상덕리의 도계1갱에서 출발해요. 도계읍 상덕리 북쪽에는 현재 블랙밸리CC 골프장이 있어요.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는 황조리고,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 기준으로 남서쪽에 상덕리가 있어요.
1937년 도계1갱이 개광한 후 흥전갱, 점리갱 등 흥전, 소달 구역에 갱도가 개설되었어요. 이때 개설된 갱도는 23개였어요. 삼척군 인구는 삼척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한 1936년부터 급증했어요. 삼척탄광이 개발되기 이전인 1935년에 삼척군 인구는 88,700명이었어요. 이후 탄광 개발이 한창 이루어지던 1940년, 삼척군 인구는 무려 125,081명으로 불어나 있었어요. 이 시기에 삼척군의 신규 산업은 석탄 산업이 유일했기 때문에 이 당시 삼척군 인구 증가의 원인은 삼척탄광 개발이라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어요.
1950년대가 되자 삼척탄전에 등록된 석탄광 광구는 100여개에 달했어요. 1950년대에 도계지역에서는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외에도 규모가 큰 광업소들이 운영중이었어요. 현재도 운영중인 경동광업소의 전신인 흥국탄광도 가동중이었고, 이 외에 상장탄광, 대방탄광, 삼마탄광 등이 가동중이었어요. 이렇게 규모가 큰 광업소들이 운영되면서 도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탄광촌으로 성장했어요.
탄광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이 퍼지자 전국에서 도계 지역으로 광부로 일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심포리와 늑구리는 탄광 노동자로 붐볐다고 해요. 도계 지역은 산간 계곡에 위치해 있어요. 이 좁다란 도계 지역에 오십천과 다른 하천 계곡을 따라 광업소와 사택, 민간 주택이 건설되고 자리잡았어요.
도계 지역이 탄광으로 흥하고 석탄생산이 급증하는 것에 비례해서 도계 지역 인구도 급증했어요. 도계 지역 인구는 1950년에서 1960년 사이에 인구 증가율이 300%를 넘었어요. 1952년 소달면 소재지로 승격된 도계리는 무려 11년만인 1963년에 도계읍으로 승격되었어요.
1975년에 삼척군 인구는 무려 294,000명이었어요. 이 인구의 대부분은 당연히 석탄 산업 관련 근무자들과 이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석탄 산업은 도계읍, 장성읍, 황지읍 등 석탄 산업이 중심인 탄광촌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어요. 도계읍 인구가 가장 많았던 1979년에는 8,253가구에 44,543명이 도계읍에 거주했어요.
도계읍을 중심으로 한 석탄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삼척군 인구도 덩달아 급격히 증가했어요. 이 당시 삼척군은 오늘날 삼척시, 태백시와 동해시 남부 북평읍 지역이었어요. 이 중 오늘날 태백시 지역인 장성읍과 황지읍은 도계읍처럼 대규모 탄광촌이었어요. 장성읍과 황지읍 역시 석탄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인구가 폭증했어요.
석탄산업이 발전하면서 삼척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삼척군은 여러 도시로 분리되었어요. 1980년에 삼척군 북평군은 명주군 묵호읍과 합쳐서 동해시로 승격되었어요. 1981년에는 삼척군이 삼척시와 삼척군으로 분리되었어요. 삼척군의 기존 시내권을 중심으로 삼척시가 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삼척군이 되었어요. 이때 삼척군의 군청 소재지가 도계읍이었어요. 또한 1981년에 장성읍과 황지읍이 삼척군에서 분리되어서 태백시로 승격되었어요.
그러나 석탄합리화정책으로 인해 강원도 남부 탄광지역이 급격히 몰락하고 인구 유출이 엄청나게 심해지자 삼척군과 삼척시는 1995년에 다시 통합되어서 오늘날 삼척시가 되었어요.
비가 너무 많이 퍼부었어요. 우비를 써도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로 무섭게 퍼부어대었어요.
잠시 비를 피하려고 정자로 갔어요. 정자에 가서 사진을 봤어요. 이제는 사진에 빗방울 떨어지는 것이 찍히고 있었어요. 백주대낮에 빗방울 떨어지는 것 찍힐 정도면 비가 정말 많이 내리는 거에요.
정자 안을 들여다봤어요.
'도계역 근처에 탄광이 있다고 했는데...'
여행 가기 전에 준비를 거의 안 했어요. 그래도 대충 몇 가지 찾아보기는 했어요. 도계역 근처에 탄광이 있다고 했어요. 조금만 뒤져보면 탄광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문제는 날씨였어요. 날씨가 안 도와주는 수준이 아니었어요. 빨리 꺼지라고 하고 있었어요. 우비를 써도 비 때문에 돌아다니기 힘들었어요.
여기에 친구는 너가 가고 싶은 곳 하나 갔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가고 싶은 곳 하나 가야한다고 하고 있었어요. 솔직히 더 돌아다니려고 하면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우비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걷지 못할 정도로 바람만 안 불면 다닐 수 있었어요. 그러나 친구는 생각도 없고 영혼도 없이 저만 따라다니고 있었어요. 보나마나 자기가 가고 싶은 곳 가자고 할 거였어요. 전에 사북 가서 한 판 땡기는 거 어떠냐고 했으니 보나마나 사북 가서 땡기자고 할 거였어요.
도계에서 탄광 개발이 한창 이루어질 때 도계읍은 온통 탄가루가 날리는 곳이었어요. 오죽하면 '마누라는 없어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까지 있었어요.
도계역 앞에 있는 까막동네는 한때 100세대 넘게 살던 동네였어요. 까막동네는 사택촌은 아니에요. 원래 민가가 있던 지역이었어요. 까막동네는 바로 철길 건너에 탄광이 있고 저탄장까지 있었기 때문에 석탄 가루가 매우 심하게 날리는 동네였어요. 까막동네는 도계 지역에서 비교적 방값이 저렴한 곳이었기 때문에 빈 손으로 도계로 온 사람들이 많이 머물렀다고 해요. 이때 도계로 넘어온 사람들은 주로 월세, 전세 형태로 기거했고, 대부분이 1년 기준으로 일정액을 내는 월세로 거주했다고 해요.
예전에는 많은 남자들이 광산에서 근무했고, 상당수 동네 주부들은 탄광 컨베이어에서 나오는 원탄 중 돌과 폐석을 주워내는 광업소 선탄부에 근무했어요. 이 당시에는 상하수도가 설치되지 않았을 때라서 공동수도나 우물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와서 생활했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했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전두리 까막동네가 쇠락하게 된 원인은 다른 탄광촌과 마찬가지로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었어요.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걷다가 1993년 도계읍 늑구리 산194-5에 위치한 태정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동네'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주민 수가 감소해버렸어요.
까막동네가 이름이 까막동네인 이유는 도계탄광 저탄장에서 날아든 탄가루가 마을에 새까맣게 내려앉았기 때문이에요. 현재는 퇴직한 광부와 가족들이 모여살고 있다고 해요.
까막동네에서 나와서 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갔어요. 오십천 너머로 가옥들이 보였어요.
"저거 까치발 건물이다!"
다리 위에서 오십천 주변 건물을 보다 보니 축대 위로 건물이 삐져나와 있고 하부를 가늘은 철제 기둥으로 지탱시켜놓은 건물들이 보였어요. 여행 오기 전에 자료 찾을 때 읽었던 글에서 본 까치발 건물이었어요.
석탄 산업이 흥할 때, 도계 지역은 주택이 매우 부족했어요. 탄광이 개발되면서 유입 인구가 폭증해서 인구가 갑자기 급격히 증가했어요. 탄광이 개발되기 전에는 조그만 시골 동네였기 때문에 갑자기 물밀듯 쏟아져들어오는 인구를 감당할 주택이 충분히 있을 리 없었어요. 그래서 탄광촌은 도계 뿐만 아니라 모두 공통적으로 주택난이 매우 심각했어요.
탄광촌은 주택난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많은 광부들이 셋방을 얻거나 무허가로 집을 지었어요. 토지는 대부분 광업소 소유였고, 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하겠다고 몰려왔는데 정작 광업소에서는 이들에게 제공할 사택이 없으니 산이나 개울가에 무허가로 판잣집을 짓는 것을 막지 못했어요. 이렇게 탄광촌에는 무허가 가옥이 우후죽순으로 건설되었어요.
탄광촌은 산비탈마다 무질서하게 판잣집이 들어섰어요. 판잣집을 지어 사는 광부들은 탄광에서 나온 폐갱목을 주워다가 집 바깥에 덧대어 조금이라도 공간을 넓히려 했어요. 그래서 바깥에 보면 움막 같았다고 해요. 심지어 토굴을 파서 가마니나 거적을 덮고 거주하는 광부도 있었다고 해요. 광부들이 산비탈에 움막을 지을 때는 산에서 기둥과 서까래로 쓸 만한 나무를 베어 와서 엮은 후, 주위에 흔한 솔가지, 산죽, 수숫대, 싸리나무 등을 엮어서 지붕을 이고, 벽으로 붙이고 흙을 발랐다고 해요. 이렇게 급조한 벽이나 지붕은 루핑이라고 하는 콜타르를 입힌 종이로 덮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슬레이트로 덮었다고 해요.
주택 문제가 극심하자 나중에는 3일 만에 판잣집을 지어서 판매하는 일도 성행했다고 해요. 이들은 평일에는 판잣집 짓는 것을 읍사무소 직원들이 단속하고 짓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부수어버렸기 때문에 공사를 주말에 했대요. 읍사무소 직원들이 퇴근한 금요일 오후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해서 일요일이 완성했다고 해요. 판잣집이 완성되고 일단 사람이 들어가서 살면 읍사무소 직원들이 부술 수 없었어요. 집을 짓는 사람들은 판잣집에 사람이 들어가서 살면 읍사무소 직원들이 못 부순다는 점을 노리고 미리 가재도구를 준비해 두었다가 가져다 넣고 들어가 살았대요. 이렇게 3일 만에 급조해 지은 판잣집에 들어가서 살다가 조금 자리가 잡히면 다른 사람에게 팔았고, 판잣집을 매입해서 들어간 사람은 거기에 다시 방과 부엌을 덧대어 넓혔대요. 이와 같은 판잣집 건설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중반에 사택으로 아파트가 건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해요.
탄광촌은 대부분 산지에 형성되었어요. 깊은 산속에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규모가 큰 탄광촌은 주로 유속이 느린 곡류 근처에 형성되었어요.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가옥이 부족한 것은 둘째치고 평지 자체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없는 토지를 조금이라도 더 활용하고 건물 세우기 부족한 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천 축대쪽에 기둥을 세워서 판잣집을 짓기도 하고 철근 등으로 기둥을 세워 증축하기도 했어요. 이런 건물들을 까치발 건물, 까치발 집이라고 해요. 하천변에 세운 기둥이 까치 다리 닮았다고 그렇게 부른다고 해요.
서울의 여러 달동네를 돌아다녀본 제게는 매우 익숙하면서 매우 신기한 풍경이었어요. 탄광촌에서 판자촌 형성 과정을 보면 이 문제는 도시화 문제를 겪은 곳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이에요. 서울도 마찬가지였어요. 지금은 재개발로 보기 어려워졌지만 아직도 서울에 남아 있는 달동네를 다녀보면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서울에서 돌아다니며 본 달동네와 뭔가 확실히 달라 보였어요. 단순히 비올 때 검은색이 올라오는 풍경 뿐만이 아니었어요. 뭐라고 딱 집어서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히 크게 다른 뭔가가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