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시장에서 나와 동문로타리로 다시 돌아왔어요.
'이제 어디 가지?'
제주시청부터 시작해서 동문시장을 둘러보고 동문로타리까지 왔어요. 여기에서는 이제 더 갈 곳이 없었어요. 산지천 산책로를 따라 쭉 걸어가면 탑동이 나왔어요. 탑동도 제주시에서 유명한 곳 중 하나에요. 탑동은 제주시에 있는 매립지에요. 탑동 매립 후 공원으로 조성되었어요. 이쪽은 횟집이 많은 곳이에요. 사람들이 산책하러 잘 오는 곳이구요. 그리고 노숙자들이 집결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해요.
'굳이 탑동 가고 싶지는 않은데...'
탑동은 가봐야 별 거 없는 곳이었어요. 거기는 바다 보러 가는 곳이었어요. 바다를 일부러 찾아가서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날 탑동 가면 정말 휑하기 그지 없어요. 탑동 자체가 볼 것 있는 곳은 아니거든요. 탑동을 간 후도 문제였어요. 탑동은 산지천 끝에 있는 곳이고, 방파제 있는 바닷가에요. 여기에서 더 갈 곳이 없었어요. 정말 없었어요.
"산천단이나 가볼까?"
제주대학교 윗쪽에 산천단이 있어요. 산천단은 딱 한 번 가봤어요. 그때 촬영한 사진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컴퓨터 고장나고 교체하는 과정에서 사진을 날려먹을 거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하드디스크 용량이 부족해서 사진 정리하는 과정에서 지워버렸을 거구요. 산천단 가서 커다란 소나무를 봤던 기억이 났어요. 마땅히 갈 곳도 없는데 산천단이나 한 번 가볼까 고민했어요.
'제주대학교 쪽은 많이 변했을 건가?'
산천단 간 김에 제주대학교 주변도 조금 둘러보고 와도 괜찮아 보였어요. 제주대학교 쪽은 가본 적이 거의 없어요. 제 고향 친구들 중 제주대학교로 진학한 친구들이 매우 많아요. 그러나 제주대학교에 가볼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방학이 되어서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와 친구들을 만날 때 시청이나 신제주 제원사거리에서 만났거든요. 제가 제주대학교에 가야 할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것은 나중에 제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제주대학교는 갈 일이 아예 없었어요. 그래서 제주대학교 근처가 어떻게 생긴지 아예 몰랐어요.
아주 예전, 대학교 가기 전에 제주대학교를 가봤을 때는 그쪽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요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제주대학교 쪽에 카페도 생기고 식당도 생겼대요. 나름 대학가처럼 생겼대요. 제주대학교 쪽도 나름 놀 만 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그래서 그쪽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궁금해졌어요. 대학교 진학하기 전에 가본 제주대학교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겨울에 그쪽은 눈이 쌓인다는 것, 그리고 학교가 참 넓다는 것 뿐이었어요.
'뭐라카네한테 같이 가보자고 해야겠다.'
제주대학교는 버스 종점이 '제대'인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될 거였어요. 그러나 거기에서 산천단은 어떻게 가는지 몰랐어요. 제가 예전에 제주도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와 지금 버스 노선은 매우 많이 달라졌거든요. 이런 것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뭐라카네가 매우 잘 알고 있었어요. 더욱이 이날은 뭐라카네 집에서 하룻밤 신세지기로 한 날이었어요. 뭐라카네와 제주대학교 갔다가 밥 먹고 카페 갔다가 같이 뭐라카네 집으로 돌아가면 이날 하루도 그럭저럭 괜찮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뭐라카네에게 전화했어요.
"너 뭐 해?"
"집에 있어."
"우리 산천단 갈까?"
"나 오늘은 안 나갈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힘 없는 뭐라카네의 목소리. 몸 상태가 영 아닌 모양이었어요.
"그러면 사라봉이라도 같이 갈래? 나 지금 동문로타리인데..."
"아니. 나 오늘은 집에서 안 나갈래. 그냥 집에 있을래."
"아..."
네가 우리 집으로 오면 받아주겠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
뭐라카네의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어요. 정말 집에서 아예 나오지 않기로 작정한 목소리였어요. 사실 이 날은 밖에 안 나가는 게 맞기는 했어요. 저야 여행왔기 때문에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일 없는 사람이라면 안 나오는 게 좋은 날이었어요. 미세먼지가 엄청나게 심했거든요. 봄철 황사 정말 심한 날 수준으로 공기가 안 좋았어요. 조금만 멀어도 뿌옇게 보였거든요.
뭐라카네는 집 근처조차도 안 나가겠다고 단호히 이야기했어요. 전화를 끊었어요.
'어떻게 하지?'
혼자서 산천단 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어요. 버스 타고 한참 올라가서 제주대까지 가야 했어요. 제주대학교 너머 더 올라가야 산천단이었어요. 혼자 간다면 정말 재미없을 것이 뻔했어요. 시간도 애매했어요. 하늘이 정말 흐렸어요. 하늘이 흐리고 미세먼지가 심했기 때문에 사진 찍고 놀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어요. 어떻게 봐도 참 애매했어요.
'사라봉이나 가자.'
산지천 산책로를 따라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다가 사라봉으로 가기로 했어요. 사라봉 가서 산지등대 보고 내려와서 뭐라카네에게 다시 연락해 어떻게 할 지 이야기해보기로 했어요. 지금은 뭐라카네가 집 밖으로 나올 확률이 0이었어요. 그렇다고 바로 뭐라카네네 집으로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어요.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에 같이 밥 먹고 카페 가자고 이야기해보든가 해야 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산지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어요.
산지천은 밤에는 걷기 매우 나쁜 곳이에요. 제주시의 악명 높은 우범 지역 중 하나거든요. 사진에서 산지천 너머 뒷편에서는 여관바리 영업이 이뤄지고 있어요. 밤에 산지천 가보면 호객꾼 아주머니들이 '총각, 연애하고 가', '총각, 놀다 가' 등등 멘트를 날리며 접근해와요. 과거 청량리처럼 옷깃을 꽉 잡고 안 놔주는 것은 아니라 그냥 거부하고 지나가면 되지만 유쾌하게 지나갈 분위기는 아니에요. 여기에 이쪽은 노숙자들이 득시글한 곳이기도 해요.
예전에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여기를 '쌍지촌', '쌈지촌'이라고도 불렀어요. '산지천' 발음이 바뀐 거였어요. 산지천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윤락가였어요. 지금도 여관바리 방식으로 암암리에 영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구요. 제주도에는 소위 '패드립'이라 하는 상대방 부모 욕하는 말 중 산지천과 엮어서 하는 말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너네 엄마 산지천'이라고 하면 '너네 엄마는 산지천에서 일하는 창녀'라는 말이에요. 지금도 제주도에서 이런 욕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산지천은 낮에 경험하는 공간과 밤에 경험하는 공간이 매우 크게 차이나는 곳이에요. 낮에는 평화롭고 예쁘게 정비된 산책로지만, 밤에는 으슥한 뒷골목 느낌이에요.
산지천 복원사업 전에 동문로타리는 해병대 탑을 중심으로 차가 원을 그리며 지나가는 로타리 형태였어요. 그러나 산지천 복원작업이 끝나면서 로타리 형태는 사라졌어요. 그래도 여전히 '동문로타리'라고 불러요. 산지천 복원사업이 완료되면서 동문로타리의 버스 정류장 위치가 바뀌었어요. 그리고 주변 풍경도 조금 바뀌었구요.
비둘기가 뒤뚱뒤뚱 걸어다니고 있었어요. 이 비둘기들은 1984년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제주도에서 개최되었을 때 개회식에서 사용된 비둘기들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어요. 비둘기, 까치는 제주도에 원래 없던 새에요.
산지천을 따라 계속 걸어갔어요.
"어? 저거 소철 아냐?"
자세히 쳐다봤어요. 소철이 아니라 야자수였어요.
"저게 왜 저기에 있어?"
조경을 위해 일부러 심어놓은 야자수 같아보이지는 않았어요. 저건 어찌 하다보니 저기에서 스스로 자라나게 된 야자수 같아보였어요. 저 야자수가 왜 산지천 냇가에서 자라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어요. 아무리 봐도 누가 일부러 심어놓은 건 아니었어요. 저기에 흙이 얼마나 있다고 저기에다 야자수를 심어놓겠어요. 누가 장난으로 야자수 잎 하나를 꽂아놨는데 저렇게 자랐을 수는 있겠네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제주도에서 살 때 누가 심어놓은 소철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본 적은 여러 번 있었어요. 그건 누가 일부러 심어놓은 소철이었어요. 제주도 기후상 소철 같은 것이 잘 자라기는 하는데...저런 곳에 소철 심어놓고 야자수 심어놓는 사람은 없어요. 누가 저기에 나무를 심어요. 저기에 흙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다구요. 저 야생 야자수만 보면 여기가 태국이라고 해도 믿을 상황이었어요.
이번에는 석상이 하나 나왔어요.
석상 앞뒤로 한자가 새겨져 있었어요. 앞에는 조천 朝天 이라고 새겨져 있었어요. 뒤에도 한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이것은 잘 보이지 않았어요. 이 석상이 어떤 석상인지 아무 설명이 없었어요. 아마 오래된 석상이 맞기는 할 거에요. 제주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각 지역들 곳곳에 있는 하천 냇가에 여러 형태의 석상이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요.
제 추측으로는 저 석상은 아마 토속신앙과 관련있을 거에요. 산지천 복개공사 때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가 산지천 복원사업 후에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 것 같았어요. 새로 조각상을 만들어 세웠다기 보다는 원래 여기 있던 것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여기로 옮겨놓은 것 같아보였어요.
"오늘 날씨 왜 이러지?"
공기는 엄청나게 안 좋았어요. 카메라 문제가 아니라 진짜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부터는 매우 멀리 떨어진 곳처럼 뿌옇게 보였어요. 여기에 기온은 엄청나게 높았어요. 가뜩이나 철에 맞지 않게 한겨울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어서 멀쩡한 기온이라 해도 더운데 이날 기온은 이상할 정도로 많이 따뜻했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뭉툭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어요.
계단 옆에는 표지석이 하나 있었어요.
여기가 제주도 북성 홍문터래요. 역사를 보니 뭘 세워도 홍수가 나서 결국에는 홍문만 남겨놨는데 이 홍문조차도 결국 1927년 대홍수때 무너져버렸대요.
아, 충분히 그럴만해.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다우지 중 하나에요. 제대로 폭우가 내리면 물이 갑자기 크게 불어나서 집채만한 바위도 떠내려가요. 건천에 갑자기 흙탕물이 불어나 거의 인도까지 물이 올라온 것도 여러 번 봤어요. 1년에 최소 한 번은 이렇게 물이 무섭게 불어나는 것을 보곤 했어요. 물길에 있는 곳이었다고 하니 큰 비가 내리면 툭하면 쓸려내려갔을 거에요.
제주도 제주시 금산수원지생태원이 나왔어요. 큰 특징은 없었어요. 조그만 공터 같은 곳이었어요.
어선이 정박해 있는 포구를 지나 사라봉 쪽을 향해 걸어갔어요.
"저건 무슨 초가집이지?"
초가집이 있었어요.
"여기는 초가집 있을 자리가 아닌데?"
제주시에는 아직도 초가집이 몇 채 남아 있어요. 그러나 여기는 초가집이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었어요. 오래된 집은 있을 수 있는 자리였어요. 그러나 오래된 집이라 해도 슬레이트 지붕이어야지, 초가집이 있을 곳은 아니었어요.
"저거 뭐야?"
바닷가를 따라 걷다가 초가집이 보이자 무슨 초가집인지 한 번 보고 가기로 했어요. 길을 건너 초가집으로 갔어요.
앞에는 표지석 2기가 있었어요. 표지석에는 각각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어요.
산지항 유물 출토 터
중국 한대의 거울과 칼, 화폐 등이 다량 출토되었던 자리다.
이들 유물은 1928년 산지항 축항공사를 위한 암석 채취 중 한 동굴에서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당시 탐라 (건입포)가 한반도와 중국, 일본과의 고대 교역에 징검다리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 건입포 터
건입포는 육지를 오가는 관문으로 교역과 어로활동의 중심지였다. 특히 건입포 주민들은 20여척의 중선을 보유, 봄이면 전북 군산-연평도-해주-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력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항했다.
중선은 돗대 2개로 운항하던 풍선이었다.
초가집은 제주도 김만덕 객주를 재현해놓은 것이었어요.
제주항 연안 여객터미널이 나왔어요.
조금 더 걸어가자 건입동 지도가 나왔어요. 제가 걸어온 길은 올레길 18코스였대요.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육지 사람들에게는 이런 풍경이 신기하게 보일 거에요. 그러나 제게 이런 풍경은 매우 낯익고 익숙한 풍경이었어요. 신제주에서 벗어나면 이런 풍경은 흔하디 흔한 풍경이었거든요.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어요. 요즘은 '도둑고양이'라는 말보다 '길고양이'라는 말을 훨씬 많이 사용해요. 그러나 저는 '길고양이'라는 말보다 '도둑고양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고 좋아요.
사라봉이 가까워질 수록 길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했어요. 점점 고지대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2019년 3월 5일 오후 4시 3분. 멀리 바다를 바라봤어요. 미세먼지 때문에 제주항이 더욱 먼 곳처럼 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