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해수욕장에 도착했어요.
"뭐야?"
이호해수욕장 심야시간 풍경 동영상을 촬영하려 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심지어 백사장조차 정돈중이었어요. 불빛도 침침해서 찍어도 뭐 나오게 생기지 않았어요. 파도소리라도 강하면 ASMR 이라고 촬영해볼텐데 파도소리도 매우 약했어요. 촬영할 것도, 촬영할 이유도 전혀 없었어요. 백사장을 따라 걸으며 촬영할 가치조차 없는 모습이었어요. 여름이 되면 모르겠지만 2월 밤에는 촬영할 게 없었어요.
'괜히 왔네.'
힘들게 왔는데 허탕쳤어요. 이제 이호해수욕장에서 소방서 근처에 있는 24시간 카페로 걸어가야 했어요.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걸어갔어요. '오도롱'이라고 새겨진 석비가 서 있는 곳까지 왔어요. 여기는 벽화마을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라고 했어요.
'이거라도 찍고 가자.'
지도를 확인했어요. 벽화마을을 전부 촬영하면 24시간 카페 가는 길이 매우 애매해졌어요. 벽화마을 끝지점에서 24시간 카페까지 바로 이어지는 길이 없었거든요. 길도 제대로 된 큰 길이 아니었어요. 지도 보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지도에 GPS까지 켜서 현재 위치를 계속 확인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어요.
그래도 이호해수욕장 촬영을 허탕쳤기 때문에 벽화마을이라도 촬영하고 가기로 했어요.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을 켜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어요.
'아니야, 여기도 촬영할 가치 없는 곳이야.'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올라가며 촬영하다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을 중단했어요. 여기도 별 볼 일 없는 곳이었어요. 차라리 슬레이트 지붕 단층 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라면 그래도 촬영할 만 했을 거에요. 그런 집은 별로 없었어요.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미 개발된 동네였어요. 그렇다고 해서 벽화가 선명하게 잘 찍히는 것도 아니었구요. 시간 낭비, 체력 낭비에 불과했어요. 스마트폰 배터리에 신경쓰이는 건 덤이었구요.
24시간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는 것이 사실상 이날 의정부 자취방 돌아갈 때까지의 마지막 스마트폰 충전이었어요. 제주국제공항에서 잠깐 충전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가능하다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제주도 풍경을 녹화하고 싶었어요. 그것까지 계산하면 이런 식으로 무의미한 것을 녹화하며 스마트폰 배터리를 낭비할 수 없었어요. 최대한 스마트폰 배터리를 완충시켜놓고 보조배터리도 충분히 충전시켜야 했어요. 제주민속오일시장 풍경 영상을 촬영하고 시간이 되면 서문시장까지 갈 생각이었거든요.
'카페나 가야겠다.'
발걸음을 질질 끌며 카페를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이호해수욕장에서 24시간 카페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어요. 비는 계속 오락가락했어요.
'여기가 그나마 빨리 가는 길이네.'
편의점이 보였어요. 지도를 보니 편의점 옆길로 쭉 가서 한참 올라가면 24시간 카페까지 갈 수 있었어요. 잠시 편의점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어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어요. 도시락과 캔커피를 구입했어요. 도시락을 먹고 캔커피를 마시며 조금 쉬었어요.
'다시 가야겠다.'
두 다리를 질질 끌며 천천히 24시간 카페를 향해 걸어갔어요. 지도를 따라 길을 걸으니 매우 으슥한 길이 나왔어요. 감귤밭이 나왔어요. 아주 시골이었어요. 2020년에서 1990년으로 이동한 것 같은 길이었어요.
'아, 나 여기 왔었다!'
순간 전에 이 길을 걸어본 기억이 떠올랐어요. 지난해 제주도 와서 오일장 갔다가 탐라도서관으로 갈 때 걸었던 길이었어요.
'여기 촬영할까?'
두 곳이나 허탕친 상황. 여기는 촬영할 가치가 있는 곳이었어요. 정확한 지명도 모르지만요. 지명 모르는 것은 그냥 '제주시 동구역 감귤밭 시골길 심야시간 풍경 영상'이라고 제목을 지으면 될 거였어요.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어요.
'아...그냥 말자.'
눈으로 보는 풍경은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스마트폰이 보는 풍경은 암흑 그 자체였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스마트폰보다 컴퓨터에서 보는 영상이 보다 어두운 점을 감안하면 이건 컴퓨터로 봤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시커먼 화면만 계속 나올 거였어요. 제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나 조금 들릴 거구요. 그나마 밝아보이는 곳도 찍히는 것이 어둠 뿐이었기 때문에 단념했어요.
시골길에서 나와 개발된 곳 도로로 올라왔어요. 힘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틀 연속 무리했어요. 그래도 어디 주저앉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걸었어요.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고 있었거든요.
2020년 2월 12일 새벽. 드디어 24시간 카페에 도착했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한 후 역시나 시럽을 마구 짜서 넣었어요. 파워포션을 제조해 자리로 가서 앉았어요.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스마트폰에 있는 동영상을 노트북 컴퓨터로 옮겼어요. 유튜브에 이날 촬영한 제주도 제주시 심야시간 풍경 영상을 업로드하기 시작했어요.
카페에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주 야심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이제야 카페 와서 잡담하고 노는 사람도 있었어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하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거 여행기 쓸까?'
이때까지만 해도 여행기 쓸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영상만 촬영해서 유튜브에 쭉 올려놓을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거 완전 심야시간 여행이잖아.'
태어나서 최초로 해보는 야간 여행이었어요. 주간 여행은 많이 해봤어요. 모두들 다 하는 주간 여행이라면 저도 적지 않게 해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밤에 숙소 들어와서 잠자는 여행요. 그러나 이건 그 반대였어요. 저녁에 일정을 시작해 밤새 돌아다니고 아침부터 낮까지 쉬고 자는 여행이었어요. 이렇게 낮밤 바뀐 여행은 제가 아마 사상 최초일 거에요. 무수히 많은 여행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지만 낮밤 바꿔서 여행하는 여행 컨텐츠는 본 적 없거든요. 낮에 시작한 일정이 길어져서 밤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아요. 그러나 대놓고 낮밤을 바꿔서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주고 낮에는 잠자는 여행은 없어요.
'여행기 새로 늘리면 더 골치아프잖아.'
그러나 망설여졌어요. 2014년 베트남 여행 다녀온 것도 여행기로 써야 하고, 작년에 제주도 다녀온 것도 여행기로 써야 했어요. 밀린 여행기가 2개나 있었어요. 이것 완결짓는 것도 까마득한데 새로운 여행기를 늘릴 엄두가 전혀 안 났어요.
'촬영 노트 식으로 가볍게 쓰면 되지 않을까?'
그 전까지 여행을 갈 때는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을 세세히 남긴 후 돌아와서 여행기를 썼어요. 그러나 이번은 동영상 촬영이 주목적이었어요. 구경하고 배우는 것에는 전혀 관심없었구요. 제주도는 제 고향인데 뭘 또 구경하고 새로운 것을 체험하고 배워요. 서귀포시라면 저도 별로 안 가본 곳이라 모르겠지만 여기는 제가 자라고 살았던 제주시 동구역이었어요. 더욱이 작년에도 왔기 때문에 감흥 따위 전혀 없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 노트 식으로 여행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어요. 다른 여행기 구성은 사진과 글이지만, 이 여행기는 사진과 글에 동영상까지 추가되요. 애초에 목적이 제주도 제주시 동지역 심야시간 야경 풍경 동영상 촬영이었으니 거기에 맞춰서 쓰면 될 거였어요.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기를 쓴다면 부담될 거싱 하나도 없었어요. 귀찮은 숙제 하나 더 늘어나는 정도였어요.
'사진 지우지 말 걸.'
아까 이호해수욕장, 오도롱 마을 사진을 지워버린 것이 후회되었어요. 사진부터 찍은 후 동영상 촬영하려다 동영상 촬영 접고 바로 사진까지 싹 지워버렸거든요. 사진이 남아 있었다면 여행기 쓸 때 꽤 큰 도움이 되었을 거에요. 그러나 이미 삭제해버린 사진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어요.
'그나저나 진짜 웃기네. 야간 여행이라니.'
의도하고 오기는 했지만 진짜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흔히 생각하는 국내 여행의 반대는 외국 여행이 아니라 야간 여행. 여행 다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이걸 깨달았어요. 진작 깨달았다면 보다 더 재미있게 여행기를 쓰려고 사진도 많이 찍고 기록도 잘 남겼을 거에요. 그러나 이걸 이제서야 깨달아버렸어요.
창밖을 봤어요. 비가 좍좍 퍼붓고 있었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왕창 쏟아부은 파워포션을 마시며 비 내리는 제주시를 감상했어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어요. 저렇게 비가 내리는 아침, 학교 가려면 진심 짜증나고 불쾌했어요. 비 오는 우중충한 날 자체를 원래 싫어해요. 그런데 학교까지 가려고 하면 가는 동안 옷과 신발이 다 젖어버려서 하루 종일 꿉꿉한 상태로 지내야 했어요. 비 내리는 날 특유의 축 처진 교실 분위기도 매우 싫었구요.
아침 8시가 되었어요. 빗줄기가 가늘어졌어요. 밖으로 나왔어요. 오일장으로 가는 길에 잠시 비가 와서 우산을 썼지만 곧 그쳤어요. 우산을 다시 가방끈에 묶어 매달았어요.
하천을 내려다봤어요. 하천에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어요.
'저거 태풍 왔을 때 바위 떠내려간 자리인가 보네.'
아마 저 자리에는 원래 커다란 바위가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태풍이 오고 폭우가 내려서 거친 물살에 바위가 떠내려가서 그 자리가 저렇게 웅덩이로 남았겠죠. 제주도에서 이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니에요. 몇 년에 한 번 정도 있는 일이에요. 탐라계곡도 제가 처음 갔을 때는 집채만한 바위가 많았지만 이후 폭우 내리고 그 집채만한 바위도 떠내려가버린 적 있거든요. 구덩이 모양을 보니 딱 그런 모양이었어요.
"매화 폈네."
제주도는 2월 20일인데 벌써 매화가 개화해 있었어요. 올 겨울이 너무 안 추워서 매화도 일찍 개화했어요.
"와, 대박이네."
한라봉을 노지 재배하고 있었어요. 한라봉은 원래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과일이에요. 한라봉이 전국적으로 매우 인기 좋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온 천지가 한라봉 재배로 바뀌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한라봉은 비닐하우스 재배를 해야 해서 돈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제주도 사람들도 한라봉 인기가 예전 광풍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감귤보다 훨씬 좋다는 거 잘 알아요. 그러나 비닐하우스 재배를 해야 해서 감귤 밀고 한라봉이 도배되지 않는 거에요.
서귀포도 아니고 제주시 - 그것도 제주시 동지역에서 한라봉 노지 재배하는 건 정말 신기했어요.
2020년 2월 20일 오전 9시 15분. 힘든 주간 일정의 정점인 제주시 민속오일시장에 도착했어요.
'아...이거 촬영하고 나서 주간이동으로 의정부까지 돌아가야하네.'
힘든 주간이동도 남아 있었지만 그런 고민은 다 뒤로 미루기로 했어요. 그건 제가 공항 갈 때부터 걱정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전날 새벽 심야시간에 왔을 때 제가 보고 돌아다닌 제주민속오일시장은 이랬어요. 아래 동영상이 바로 그때 촬영한 제주민속오일시장 심야시간 풍경 영상이에요.
공포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어요.
그러나 장날 아침.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제주도 감자가 판매되고 있었어요. 제주도 감자는 강원도 감자와 맛이 달라요. 그리고 출하되는 시기도 다르구요. 예전에는 제주도 감자 중 주로 고산 감자가 많았는데 박스를 보니 이것은 구좌 감자였어요. 고산, 구좌 모두 제주도 내에 있는 지명이에요.
생선을 판매하는 곳으로 갔어요.
그때 그 밤 풍경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어요.
시장에서는 어떤 분이 상인들에게 중국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조심하라고 마스크를 나눠주고 있었어요.
아래는 이때 촬영한 제주도 제주시 제주민속오일시장 장날 아침 풍경이에요.
의정부 자취방에서 나올 때 세웠던 마지막 계획인 제주도 제주시 제주민속오일시장 장날 아침을 구경하는 것까지 끝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