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촌 갈까, 이화동 국민주택단지 갈까?"
노원구 달동네 양지마을에서 나와 고민했어요. 양지마을에서 희망촌은 멀지 않았어요. 한 번에 다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어요. 문제는 시간이었어요. 너무 늦어버렸어요. 석양이 비추어 붉어지고 있었어요. 양지마을에서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구요. 원래대로라면 희망촌을 가야 했지만 조금 피곤한 데다 시간도 늦어버렸어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의욕을 꺾는 사실이 있었어요.
상계뉴타운 3지역 희망촌은 재개발 포기한 곳이야.
희망촌은 크지 않은 곳이었어요. 게다가 재개발을 포기한 곳이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마을박물관이나 갈까?'
서울 종로구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마을박물관은 이화동 달동네에 있어요. 충신동 위에 있는 달동네가 이화동이에요. 여기는 동대문까지 전철을 타고 간 후 낙산공원까지 가야 했어요. 서울 성곽 공원을 따라 올라가서 거의 꼭대기에 있는 곳이었어요.
'동대문까지 앉아서 가면 쉴 수 있잖아.'
당고개역은 4호선 종점이에요. 당고개역에서 못 앉아 갈 리가 없었어요. 아침 출근시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때는 퇴근시간이었어요. 당고개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 도심으로 나가는 사람이 그리 많을 때가 아니었어요. 당고개역에서 동대문역까지 4호선으로 한 번에 갈 수 있어요. 시간도 적당했어요. 전철에서 멍때리며 앉아서 쉬다가 동대문역으로 가서 낙산공원을 향해 올라가면 되었어요.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가자.'
희망촌을 향하던 발길을 돌려 당고개역으로 갔어요. 전철을 탔어요. 동대문역에 도착하자 전철에서 내렸어요.
'여기를 다시 오네.'
서울미래유산 중 하나인 종로구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마을박물관 가는 길은 종로구 충신동 달동네 가는 길과 똑같았어요. 충신동 달동네 가는 길에서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되었어요. 충신동 달동네 충신윗마을은 전에 다녀왔어요. 그때 이화동 달동네도 갈까 하다 귀찮아서 안 갔는데 결국 이렇게 또 가게 되었어요. 충신동 달동네 충신윗마을을 간 날은 2019년 5월 6일이었어요. 라마단 시작한 날이었어요. 이날은 2019년 6월 12일. 한 달 조금 넘어서 다시 왔어요.
서울 성곽 공원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갔어요.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자 서울미래유산인 종로구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마을박물관이 있는 곳이 나왔어요.
'꼭대기까지 갔다가 내려오면서 봐야지.'
이화동 달동네는 몇 번 가본 곳이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있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낙산공원까지 올라갔다가 걸어내려오면서 보기로 했어요.
"여기 사진 찍는 포인트다!"
앞에 컨테이너 조립식 건물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서울미래유산 중 하나인 종로구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마을박물관이에요. 공기가 깨끗해서 두타 건물, 남산타워까지 시원하게 잘 보였어요.
전혀 사진 찍는 포인트처럼 생기지 않은 곳에서 낙산 국민주택단지 사진을 찍은 후 조금 더 위로 올라갔어요.
맞은편 서울 성곽으로 갔어요.
맞은편 서울 창신동 달동네도 매우 깔끔하게 보였어요.
낙산공원까지 올라갔어요. 낙산공원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쉬었어요. 이왕 어정쩡해진 시간, 차라리 하늘이 어두워진 다음에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기로 했어요.
조금 기다리자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어요.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마을박물관쪽으로 내려갔어요.
"여기 잘 꾸며놨네?"
마을박물관 들어가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어요. 그래서 얌전히 국민주택단지만 둘러볼 생각이었어요. 확실히 잘 꾸며놨어요. 이 정도면 타이완 주펀과 비교해도 괜찮을 정도였어요.
아래로 내려가며 이화동 국민주택단지 달동네를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서울 종로구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는 2014년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어요.
종로구 이화동은 조선시대부터 사대문 안쪽인 도성에 속하던 곳이었어요. 조선시대에는 창경궁과 가깝고 풍경이 좋아 양반들이 놀던 대표적인 장소였다고 해요.
일본 강점기 당시 이화동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적산가옥이 많이 건축되었어요.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쪽에 판자집이 엄청나게 생겨났어요. 서울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과 중국의 천인공노할 반인륜적 패악질로 인해 두 차례 점령되었어요. 그리고 미군을 중심으로 결성된 UN군과 한국군이 두 차례 서울을 수복해 서울에 자유를 가져왔어요. 이 과정에서 서울은 엄청나게 많이 파괴되었어요. 가뜩이나 수많은 가옥이 전쟁의 화마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선경지명의 혜안을 갖고 자유를 찾아 월남한 피난민과 기회를 찾아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까지 몰려 서울은 극심한 주택난을 겪게 되었어요. 서울의 극심한 주택난은 서울 도처에 판잣집이 엄청나게 생기는 원인으로 작용했고, 이화동도 마찬가지였어요.
종로구 이화동에 국민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된 이유는 이와 같은 서울의 극심한 주택난과 더불어 이 근처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기거하던 이화장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이화장 부근 불량주택을 개선하기 위해 1958~1959년에 국민주택단지가 조성되었어요. 지대 경사가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경사지에 석축으로 정지작업을 한 후 그 위에 건설했어요.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는 시멘트 블럭을 재질로 사용했고, 시멘트 모르타르로 외부를 마감했으며, 슬레이트 기와를 얹었어요. 게다가 마루가 있는 전통적 주거 방식을 고려해 침실과 분리된 거실을 배치했어요. 여기에 실내에 화장실을 두었어요.
이화동 국민주택단지는 청량리 부흥주택단지보다 건설시기가 아주 조금 늦어요. 청량리 부흥주택단지는 1955년에 조성된 시흥주택과 1957년에 조성된 영단주택으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이화동 국민주택단지와 청량리 부흥주택단지는 지어진 시기가 비슷해요. 그래서 일본 건축 양식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 잘 나타나요.
하늘이 어정쩡하게 어두워서 어두운 곳은 까맣게 나왔어요.
동네 주민들과 마주쳤어요. 하도 관광객이 많이 와서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어요.
"여기에 나무전봇대 있었네?"
서울에 나무 전봇대가 남아 있는 곳이었어요.
위에서 얼핏 보면 단층 가옥이 일렬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조금 내려가서 보면 2층 건물이었어요.
이제 진짜 깜깜한 저녁이었어요. 몇 시인지 확인했어요. 2019년 6월 12일 20시 11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