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동대문역 창신동 쪽방촌을 돌아다닌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매우 늦어졌어요.
창신동 쪽방촌을 돌아보며 쪽방촌은 가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서울 도처에 쪽방촌의 다른 형태인 고시원이 매우 많이 있으니까요. 절대 학생이 머무를 리 없는 곳에, 가뜩이나 방음 하나도 안 되는 고시원인데 시끄러운 곳에서 흔히 보이는 낡고 허름한 고시원들. 쪽방촌과 대동소이한 곳들이에요. 약간의 차이는 존재할 거에요. 쪽방촌은 방 안에서 버너로 취사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고시원은 방 안에서 절대 취사금지에요. 대신 고시원은 대체로 밥, 김치 정도는 제공해주는 편이에요. 그거 말고는 사실 둘이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요즘은 고시원도 예전 같지 않은 곳이 많아졌다고 해요. 무려 샤워도 하고 용변도 볼 수 있는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지만 아직도 제가 고시원 살 때처럼 열악한 환경인 고시원들도 꽤 있을 거에요. 그리고 그런 곳들은 당연히 도시 빈민들이 들어가 살고 있겠죠. '고시원'이라는 이름 때문에 왠지 학생들이 주로 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도시 빈민들에게 쪽방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고시원도 상당히 많아요. 오히려 도시 빈민들에게 쪽방 역할을 하는 고시원이 더 많을 수도 있어요. 제가 고시원 살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살았던 고시원도 학생은 거의 없고 거주자 대부분이 도시 빈민들이었거든요.
열악한 도시 주거 환경에 대해 '지옥고'라는 표현을 많이 써요.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묶어서 지옥고라고 해요. 살아본 결과, 고시원은 저기 묶일 것이 아니에요. 고시원 살다가 반지하, 옥탑방 가면 인생 성공해서 럭셔리 펜트하우스 들어간 기분이에요. 최소한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강제로 무소유당할 수 밖에 없지는 않으니까요.
창신동 쪽방촌을 보고 놀라거나 충격받지 않았어요. 그저 예전 2년간 고시원 살 때를 다시 생생히 떠올리게 해줄 뿐이었어요.
'종로3가 쪽방촌 한 번 가볼까?'
그래도 나온 김에 종로3가 쪽방촌을 한 번 들렸다 귀가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으로 갔어요.
침침한 불빛,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길. 일용직, 막노동꾼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고 방을 찾아 들어가고 있었어요. 빨리 대충 둘러보고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였어요.
"방 찾아요?"
할머니의 목소리. 순간 깜짝 놀랐어요. 당연히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에서 1박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나쳐서 쪽방촌에서 빠져나왔어요.
쪽방촌에서 빠져나오자 식당들이 있고, 정장을 입은 남녀 회사원들이 식당 안팎에 있었어요. 갑자기 세계가 달라졌어요. 똑같은 밤시간이었지만 한쪽은 음침한 세계였고, 한쪽은 밝은 세계였어요.
집으로 돌아왔어요.
"종로3가 쪽방촌 한 번 가봐?"
쪽방촌은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종로3가 쪽방촌은 한 번, 딱 한 번만 가보고 싶었어요. 종로3가 쪽방촌은 대학생 때부터 꽤 많이 들어봤거든요.
'거기는 진짜 조심해야할텐데...'
창신동 쪽방촌은 벽화라도 있었어요. 벽화 보러 왔다고 할 수라도 있었어요. 그러나 종로3가 쪽방촌은 아니었어요. 거기는 벽화조차 없었어요. 낙후된 곳, 허름한 곳이라면 벽화조성사업이랍시고 벽화 떡칠을 해놨는데 거기는 그 '벽화'조차 없는 곳이었어요.
'간다면 언제 가야 할까?'
만약 사진을 찍을 거라면 당연히 쪽방촌 골목길에 사람들이 최대한 없을 시간을 골라서 가야 했어요. 쪽방촌 거주민이 도시 최하류층임을 떠올렸어요. 그들의 생활패턴을 다 알지는 못해요. 그렇지만 대충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너무 이른 새벽 시간은 안 좋아요. 인력시장에 나가는 사람들은 새벽 5시쯤 집에서 출발하거든요. 새벽 5시부터 9시 전까지 계속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추가적으로 쪽방촌은 숙박업 밀집구역이기도 해요. 일을 안 나가는 사람이라면 점심 즈음에 일어날 거에요. 그래야 무상 급식 타먹으니까요. 그 시각에 맞춰서 일어날 거에요. 괜히 일찍 일어나봐야 아침 못 먹어서 배고프기만 하거든요. 이 점을 고려한다면 가기 좋은 시간이 있었어요.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가 카메라 들고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 돌아다니기 가장 좋은 시간일 거라 추측했어요.
2019년 6월 1일 아침. 집에서 나왔어요. 종로3가역으로 갔어요.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 3번 출구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었어요.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은 규모가 크지 않아요. 30분 남짓이면 충분했어요.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 3번 출구는 서울에서 매우 희안한 곳 중 하나에요. 여기는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도 있고, 동성애자 거리 - 게이 거리도 있고, 익선동 한옥마을도 있는 곳이에요.
전날 길을 다 알아뒀기 때문에 쉽게 입구를 찾았어요. 카카오맵으로 위치를 찾을 경우, 종로3가역 3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보면 번지수가 빽빽하게 적힌 곳이 있어요. 바로 거기가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이에요.
돈의동 주민공동시설인 새뜰집 건물이 있었어요. 새뜰집은 2019년 4월 22일에 개관한 돈의동 쪽방촌 주민공동시설로 규모는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있어요. 세탁실, 샤워실, 공동주방, 보건실, 작업장, 텃밭 등이 있다고 해요.
새뜰집은 돈의동 쪽방촌이 박근혜 정부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실시한 새뜰마을사업 공모에 선정되어 건설된 주민공동시설이에요. 참고로 새뜰마을사업은 취약지역 주민의 기본적인 생활수준 보장을 위해 안전, 위생 등과 관련된 생활 인프라를 확충하고 노후한 주거환경을 개선하며, 주민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마을 조성 기반을 구축해 해당 지역의 지속 가능한 활력 창출 및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추진한 사업이에요. 이 새뜰집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업적이에요.
이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어요.
입구에는 철이슈퍼가 있었어요. 여기서부터 한쪽 끝까지 가서 다음 골목에서 다시 한쪽 끝까지 가는 식으로 계속 가면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을 다 돌아볼 수 있었어요. 전날 한 번 돌아봤기 때문에 길은 다 외우고 있었어요. 외우고 말고 할 것 없이 매우 간단한 구조였어요.
절대 사진 찍는다고 우두커니 서 있지 말 것.
계속 걷다시피하며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상당히 가파랐어요.
2층은 1층 건물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어요. 2층 면적이 1층보다 더 넓었어요.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 사창가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에요.
일제 시대에 종로2가부터 종로3가까지는 유흥가였어요. 원래 이 윤락가는 해방될 때만 해도 아주 소규모였어요. 그러나 1950~60년대에 급속도로 커지고 번창했어요. 이렇게 사창가가 엄청나게 커진 이유는 바로 한국전쟁 때문이었어요.
한국전쟁 이후 미망인들이 많아졌어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여자들이 매춘에 나서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전사회적으로 허무주의가 만연해 있었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종로2가부터 종로3가까지 좁은 골목들이 어어지는 거리에 있던 집들은 방이 여러 개라서 방 하나에 윤락녀 한 명이 자리잡고 장사하기 좋은 구조였어요. 이로 인해 전성기 시절에는 이쪽에 윤락녀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해요. 범위도 엄청나게 커서 탑골공원, 낙원동, 종로5가까지 이어지는 거의 1km에 달하는 구역이 사창가였어요.
중앙 정부와 서울시가 이 거대한 사창가를 그냥 방치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끊임없이 단속과 선도작업을 펼쳤어요. 그러나 매번 실패했어요. 이 당시 거대했던 사창가가 현재 서울 5대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과 거의 일치해요. 행정구역과 지명은 약간 바뀌었어요. 양동은 남대문로5가, 도동은 동자동이에요.
그러나 이 거대한 종로3가 사창가는 1968년 나비 작전으로 사라졌어요.
1968년 9월26일, 김현옥 서울시장이 종로에 건설중이던 세운상가 공사 현장을 찾아갔을 때였어요. 갑자기 어떤 여자가 예지동 뒷골목으로 가고 있던 김현옥 서울시장을 붙잡고는 '아저씨 놀다가세요'라고 호객행위를 했어요. 이 여자는 당연히 종로3가 윤락녀였어요.
김현옥 시장은 이 일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머리 끝까지 분노해 바로 종로구청으로 들어가 관계자를 소집했어요. 그리고 당장 종로3가 사창가인 '종삼' 소탕작전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어요. 여기에서 이름도 바로 정해버렸어요. 그 이름은 바로 '나비 작전'이었어요.
그동안 사창가를 없애기 위한 단속과 선도 작업이 실패한 이유는 꾸준히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어요. 그래서 아예 수요를 절멸시켜서 사창가를 없애버리자는 것이 바로 나비 작전의 핵심이었어요. '꽃'인 윤락녀를 아무리 단속하고 선도해봐야 사창가를 찾아드는 남성 '나비'가 있으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에 '나비'를 박멸시켜버리기로 한 것이었어요.
나비 작전 전략은 다음과 같았어요.
- 1968년 10월1일부터 종로3가 사창가 일대를 출입하는 자를 적발해 명단 공개.
- 포주에 대한 채무관계 일체 무효화, 불응시 구속.
전략을 세우자마자 바로 TV, 라디오에서 대대적으로 나비작전에 대해 방송하게 했어요.
바로 다음 날인 1968년 9월 27일. 모든 신문에 나비 작전이 크게 보도되었어요. 낮에는 한전 직원을 총동원해 종로3가 사창가 골목 입구에 100W짜리 전구를 수도 없이 매달아놓았어요. 이유는 간단했어요. 종로3가 사창가로 놀러 오는 남성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어요.
저녁이 되어 남자들이 종로3가 사창가로 접근해 오면 골목 어귀에 있던 서울시청, 종로구청 공무원, 사복 경찰들이 몰려가서 이름과 직업, 주소를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당연히 다 도망갔고, 그쪽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어요. 그 결과 손님이 완전히 끊겨버린 종로3가 사창가는 1주일만에 사라졌어요. 여기에 있던 포주와 여성들은 전국으로 흩어졌고, 서울에서 새로운 홍등가를 만들었어요.
이후 종로3가 사창가였던 곳은 통금 시간이 있던 시절에 통금에 걸린 사람들이 숙소로 잘 사용했다고 해요. 그리고 저렴한 숙박비로 인해 차차 도시 최하류층 빈민들이 모여들어 오늘날 쪽방촌이 되었구요.
골목을 조심스럽게 계속 돌아다녔어요.
큰 길 건너서는 서울의 핫플레이스라는 익선동 한옥거리. 익선동 한옥거리로 가는 사람들은 바로 큰 길 건너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할 거에요.
창신동 쪽방촌에 비해 훨씬 더 열악해 보였어요. '벽화조차 없는 곳'이었어요.
비좁은 골목, 가파른 계단, 1층보다 더 큰 2층.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의 특징이었어요. 딱 봐도 안에 있는 방이 엄청 좁을 게 짐작되었어요.
빨리 돌아다녔어요.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에서 빠져나왔어요. 이 옆은 바로 식당이에요. 정장 입은 남녀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에요. 쪽방촌과 아예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거리 바로 옆에 돈의동 쪽방촌이 있지만 얼핏 봐서는 거기 쪽방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어요. 돈의동 쪽방촌 입구는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어요.
다시 돈의동 쪽방촌 안으로 들어갔어요.
쪽방촌에서 나왔어요.
종로3가 3번출구 앞 길로 걸어갔어요.
종로3가쪽에 동성애자 거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마침 이날은 퀴어 축제가 있던 6월 1일이었어요. 현수막이 여기가 게이 거리임을 알려주고 있었어요.
익선동 한옥마을을 지나 낙원상가로 갔어요. 낙원상가로 가서 주변을 내려다 보았어요.
아래 사진에서 은행나무 뒷편이 바로 돈의동 쪽방촌이에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길이 동성애자 거리구요.
'사진 촬영권을 판매하면 어떨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벽화 마을 조성 사업은 부작용도 상당히 심해요. 주민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벽화만 남아 있거든요. 게다가 이걸 관광지처럼 홍보해서 사람들이 벽화 보고 사진 찍으러 가요. 그것 때문에 주민들은 스트레스를 상당히 크게 받아요. 이화동 벽화마을, 창신동 쪽방촌이 대표적인 사례에요.
빈곤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이 생겨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요. 벽화를 그려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춰 주는 것 다 쓸모없는 짓이에요. 굶어죽는 사람 옆에 가서 초상화 그려주고 노래 불러주고 춤춰주면 그게 그 사람 도와주는 건가요? 안녕히 죽으세요 고사 지내는 거죠.
관광지화되어 몸살을 앓는 동네는 전국적으로 매우 많아요. 벽화조성사업으로 동네 담벼락에 벽화 그려놓고 관광지처럼 홍보해서 문제가 생긴 경우도 있고, 여행사에서 여행경비 절약해 돈 더 벌려고 무료인 곳에 단체관광객을 풀어놔서 문제가 생긴 경우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여기에 대해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거에요.
기껏해야 나온 대책이 길을 막고 입장 제한하고 입장료를 받자는 것인데, 이건 도로를 막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가 상당히 커요. 그 동네를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그 동네 거주중인 지인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더욱이 도로는 국가 땅이지 개인 땅도 아니구요. 함부로 길을 막을 수 없어요.
요즘은 누구나 사진을 찍어요. 굳이 카메라가 없다 해도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 찍어요.
낡고 허름한 동네에 벽화를 제작했다면, 그것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사진 촬영권을 판매하는 것도 한 방법일 거에요. 사진 촬영권을 판매해 거둔 수익은 주민, 거주자들에게 분배해주고, 사진 촬영권을 구매하는 사람에게 집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사람을 찍을 때에는 반드시 허락 맡고 찍으라는 것 같은 기본 예절도 이야기해주고요. 그러면 사진 찍고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은 사진 촬영권을 구입해서 돌아다닐 거에요.
사진 촬영권 구입 안 하고 얌체처럼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는 주민들이 당당히 한 마디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사진 촬영권 구입비가 주민들의 생활 수준 개선을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면 알아서들 구입할 거에요. 빈민가에 사진 찍으러 가는 사람들이 나쁜 목적을 갖고 사진 찍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도덕적으로 돌아다녔음을 인증하기 위해서라도 구입할 거에요. 도시 빈민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 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방법이 될 거구요.
빈곤 포르노니 어쩌니 하며 도덕 들먹이는 건 아무 도움 안 되요. 가난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 수 있게 해줘야 해요. 왜냐하면 돈이 없으니까 가난하고 빈곤한 것이니까요. 돈을 건드리지 않고 가난과 빈곤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멍청하고 쓰레기 같은 짓이에요. 파상풍 걸려 죽겠다는 사람에게 빨간 피부 소독약만 잔뜩 떡칠해주는 것과 똑같아요.
물론 이 방법에도 또 문제점이 있을 거에요.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토대로 발전시킨다면 벽에 벽화만 그리고 끝내는 짓거리보다는 백만배 나을 거에요. 이런 거 연구하라고 정치인이 있는 거고 시민단체가 있는 거죠.
외국 여행 가보면 입장료와 별개로 촬영비를 또 따로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완벽하게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거에요. 여기저기 열심히 벽화 떡칠해놓은 열정의 반의 반만 들여도 이 모델은 꽤 발전할 거에요. 꽤 구체적으로 발전한 모델을 도시 최하층 빈민들이 거주하는 곳 몇 곳 후보로 골라서 하고 싶다는 동네에만 시범적으로 적용해볼 수도 있을 거에요.
길을 막고 통행에 제한을 두는 건 불가능해요. 그렇지만 만약 사진 촬영권을 판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이기 때문에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볼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낙원상가에서 나와 종로3가를 떠났어요.
p.s.
2019년 11월. 돈의동 쪽방촌을 다시 갔어요.
위 영상은 2019년 11월에 촬영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3가역 새뜰마을 쪽방촌 심야시간 풍경 영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