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슬슬 출발한다."
야, 잠깐만!
친구가 이제 약속 장소인 동대문으로 출발하겠다고 메세지를 보내왔어요. 천만 다행으로 친구가 그 메세지를 보낸 지 약 3분여 만에 메세지를 확인했어요. 저는 아직 정릉골 다 보려면 한참 남았고, 친구는 준비 다 끝내고 집에서 나오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친구는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1호선 역으로 가서 바로 동대문으로 올 거였어요. 실제로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체감 속도로는 출발하자마자 도착한 거나 다름 없는 속도로 올 거였어요.
"7시 반에 보자."
"알았어. 시간 맞춰서 갈께."
이때 시각은 오후 6시 18분. 아무리 정릉골이 크다 해도 일단 7시까지면 어떻게 마지막 지점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7시에 정릉골 제일 끝에서 출발한다 치면 30분이면 동대문역까지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거였어요. 아직 정릉골 끝이 어디인지 잘 모르지만 대충 그렇지 않을까 싶었어요.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으로 돌아간 후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해서 동대문역으로 가면 되었거든요. 전철역에 도착하기만 하면 동대문역까지는 금방이었어요. 중요한 것은 성북구 달동네 정릉골의 끝이 대체 어디냐는 것이었어요. 지도에 정릉골 범위를 대충 표시해서 스크린샷이라도 남겨서 들고 왔다면 문제될 게 없었어요. 그런데 그냥 대충 가는 법만 적어놓은 것 하나만 복사해서 카카오톡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로 보내놓고 왔기 때문에 문제였어요.
부지런히 걸었어요. 가도 가도 계속 달동네가 이어졌어요.
달동네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어요.
정릉골 쌍둥이 슈퍼가 나왔어요.
'이거 넘어가도 왠지 또 있을 거 닮은데...'
여기에서 되돌아가도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직감적으로 이 뒤에 또 뭔가 있을 것 같았어요. 여기에서 발길을 되돌리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안 가도 상관은 없지만 왠지 가봐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머리를 지배했어요. 지금까지 모든 여행에서 이런 꺼름찍함을 거슬렀다 좋은 결과를 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왠지 더 가봐야 할 거 같은데 피곤하다느니 귀찮다느니 하며 안 간 경우, 항상 꼭 그 너머에 제일 좋은 게 숨어 있곤 했어요. 나중에야 무릎 탁 치며 아이고 저기 그때 가봐야 했는데 후회했구요. 그래서 허탕을 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이런 느낌이 들면 일단 더 가보는 편이에요. 이때가 바로 이랬어요. 아주 오랜만에 바로 그 더 이상 별 거 없을 거 같은데 왠지 여기에서 발길 돌리면 나중에 무릎 탁 치며 엄청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는 그 느낌을 강하게 느꼈어요. 그래서 일단 더 가보기로 했어요.
서울 성북구 달동네 정릉골은 1950년대 청계천과 북아현동 일대 무허가주택 주민들이 철거로 인해 옮겨와 형성한 무허가촌이에요. 이후 정릉골 주민들은 1996년 정부의 무허가주택 양성화 정책에 따라 국유지를 불하받아 법적으로 인정받는 자기 집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2003년에는 정릉골 일대가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되었어요.
2006년, 정릉골에 대해 제1종 지구단위계획이 확정되면서 재개발에 대한 기대감이 일었어요. 일단 외부에서 보면 자리는 좋아요. 정릉천이 흐르기 때문에 하천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생기기 좋고, 뒤로는 북한산이 있으니 경치도 좋구요. 그래서 정릉골은 재개발 소문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어요.
2009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는 성북구 정릉3동 757번지 일대 20만3965제곱미터 땅에 자연 친화형 재건축 단지를 조성하는 내용을 담은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안을 발표했어요. 일단 큰 내용을 보면 옛마을과 주변 산의 경관을 보존하는 방식이었어요. 정비구역 안 마을을 모두 철거하고 고층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마을 지형을 최대한 살려 산마을 풍경을 보존하는 방식이었어요.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고층 아파트가 아닌 지하2층, 지상 4층의 저층의 공동주택 1400여 가구를 건설하기로 했어요. 건물은 지형 특성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지을 예정이었구요. 경사가 완만한 지역에는 계단형 주택이나, 아랫집 지붕이 윗집 테라스와 마당이 되는 테라스형 주택이 들어서고, 경사가 급한 지역에는 중앙정원을 갖춘 중정형 주택을 지을 계획이었어요. 또한 이 일대를 친환경 주거단지로 조성하기 위해 옥상을 녹지 공간으로 꾸미고, 태양열을 난방과 조명에 활용할 방침이었대요. 도로는 빗물이 땅에 스며들 수 있는 투수형으로 포장하고, 생태연결 통로도 마련할 예정이었구요. 옛날 마을 풍경 보존을 위해 마을과 북악산을 연결하는 능선길 일부를 '풍경의 언덕길'로 꾸며 보존지역으로 조성하고, 정릉천변에는 산책길과 꽃담길도 만들 계획이었대요.
당연히 이런 것이 잘 진행되었다면 제가 여기를 안 갔죠.
서울 성북구 정릉3동 757번지 일대 정릉골 친환경 주택재개발 정비사업 구역에 대한 아름다운 청사진은 계속 나왔어요. 청사진만 계속 나왔어요. 청사진 닳게 생겼어요. 그래도 나왔어요.
서울시가 발표한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안에는 매우 중요하고 커다란 쟁점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미실현 용적률에 대한 문제였어요.
산이라고 다 같은 산이 아니에요. 서울 시내에 있는 수많은 산은 다이너마이트, TNT로 싸그리 날려버려도 상관없어요. 문제는 이 서울 성북구 정릉3동 757번지 일대 정릉골 친환경 주택재개발 정비사업 구역과 엮여 있는 산은 그 따위 잡스러운 산이 아니에요. 바로 북한산 국립공원과 엮여 있었어요. 어디 관악산, 남산 따위와 비교할 레벨이 아니에요. 솔직히 국립공원과 엮여버리면 '답이 없다' 수준으로 골치아파져요. 정릉골이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설정되어 있는 땅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나, 북한산 국립공원 바로 앞에 있어요. 북한산 자락에 형성된 달동네에요. 그래서 정릉골은 경관관리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어요.
국토계획법 상 1종 일반주거지역에 대해서는 150%의 상한용적률을 적용할 수 있어요. 그러나 경관관리지역인 정릉3동 일대는 지역 특성상 이 용적률을 실현시키기 어려워요. 층고를 4층으로 제한하자 용적률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래서 서울시는 용적률을 높이기에는 공간 배치가 빽빽해지는 문제 때문에 충분한 확보가 어려워져서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안에서 용적률을 119%로 산정했어요. 이러자 문제가 발생했어요. 추가 확보가 어려운 나머지 용적률 30%에 대해 어떻게 지원해줄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어요.
성북구청은 정비기반시설에 대한 설치 비용을 지원하고 기존 기반 시설에 해당하는 만큼 국,공유지를 무상 양여하며 지난 6월 개정된 국토부 고시에 따라 임대주택을 건립하지 않도록하고 정비계획 수립비용과 건축 설계비를 지원하는 등 다각도의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어요.
그러나 이에 대해 정릉골 주민협의회는 구청의 미실현 용적률 확보 방안에 대해 법적으로 당연히 실행할 수 있는 사항을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사업구역에만 특별히 시행해 미실현 용적률을 확보해주는 것처럼 표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대했어요. 사실 이렇게 반발할 만 했어요. 제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묶여 있어서 다른 구역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용적률과 층고를 적용받는데 여기에 용적률이 150%가 아니라 120%로 낮아져버리면 사업성이 확 떨어져서 사업 자체가 어렵게 되거든요. 협의회는 기반시설 설치 면적을 최소화해서 택지 면적을 증가시키고, 최고 6~7층, 평균 5층으로 층고를 완화시키고, 주택규모별 건립비율도 완화해서 최소 평형을 33평으로 변경해 고급 주택을 건립할 수 있게 하며 주민편의시설 설치비 전액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어요.
이후 2011년 12월 7일, 서울시는 20차 도시계획위원회를 열어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구역 지정(안)을 통과시켰어요.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바로 위의 내용인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안 발표는 2009년 9월 28일에 발표되었다는 거에요. 정비사업안 발표나고 2년 넘어서 정비구역 지정안이 통과되었어요. 어쨌든 통과된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안 내용은 평균 4층, 최고 5층 규모로 총 1417가구가 신축될 예정이라는 것이었어요.
이건 무슨 아니 땐 굴뚝에 연기만 줄창 피어오르는 꼴이었어요. 거기 뜬다, 재개발된다 소리만 계속 나고 실제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오히려 들려온 소식은 서울시가 2016년 6월 1일, 제10차 도시계획위원회를 열어 정릉 스카이 연립이 포함된 성북구 정릉 제3, 8주택재개발 정비예정구역 해제 안건을 원안 가결했다는 소식이었어요. 성북구 정릉 제3, 8주택재개발 정비예정구역 해제는 사업 진척이 없는 정비예정구역을 직권해제할 수 있도록 3월24일 개정된 서울시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조례를 따른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것은 서울시의 정비예정구역 첫 직권해제 사례가 되었어요.
물론 정릉골 주택재개발 정비사업구역은 정릉 제3, 8주택재개발 정비예정구역이 아니에요. 정릉 제3, 8주택재개발 정비예정구역은 고려대학교 사대부고 길 건너편이거든요. 정릉골 남쪽에 서울창덕초등학교가 있고, 서울창덕초등학교 남쪽에 고려대학교 사대부고가 있고, 고려대학교 사대부고 남쪽에 정릉 제3, 8주택재개발 정비예정구역이 있어요. 아주 딱 붙어 있는 곳은 아니나 직선 거리로 보면 꽤 가까운 곳이에요.
그리고 2017년 6월 13일. 정릉골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조합은 성북구청으로부터 재개발 조합설립인가를 받았다고 발표했어요. 그 동안 정릉골에서는 사업이 지연되며 빈집이 100가구 넘게 발생하고 슬럼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어요.
정릉골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조합은 조합 설립 인가가 통과했기 때문에 사업 추진을 서둘러 2017년 말까지 건축심의, 2018년 상반기까지 사업시행인가를 받을 계획이라 밝혔어요. 이후 시공사 선정을 거쳐 2020년 착공 및 분양에 들어가고, 2022년 10월 정도에 입주 시작 예정이구요. 4∼5층 높이의 타운하우스(연립주택 단지)로 총 건립 가구수 1417가구를 짓기로 했대요. 왜냐하면 정릉골은 여전히 북한산 자락의 자연경관지구여서 건폐율이 41%, 용적률이 109%로 제한되기 때문이었어요.
2018년 9월 27일, 성북구청은 정릉골 주택재개발사업에 대해 서울특별시 성북구 고시 제2018-125호 정릉3동 제1종지구단위계획 결정(변경)과 정릉골 주택재개발정비구역 (변경)지정 및 지형도면고시를 고시했어요. 이에 따르면 당초 세대수 1417세대에서 1442세대로 25세대 증가했고, 임대주택은 조성되지 않는다고 해요.
이후 또 감감무소식이에요. 아직까지는 부동산에서 열심히 연기 피우려고 나무토막 열심히 비벼보고 노력할 뿐, 그 외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어요. 실제 제가 돌아다녔을 때 재개발 관련 벽보나 현수막은 딱히 못 봤어요.
사실 여기는 빽이 너무 좋아요. 다시 말하지만 바로 뒤가 북한산 국립공원이에요. 저는 부동산 전문가도 아니고 지리학 전공자도 아니에요. 제가 집을 사기 위해 막 열심히 알아보는 것도 아니구요. 그러나 이것만은 저도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제주도 출신이거든요. 제주도도 한가운데에 아주 튼튼하고 강력한 빽이 있어요. 한라산 국립공원이요. 제주시 개발과정을 봐왔고 경험해왔기 때문에 국립공원이 얼마나 초강력한 존재인지는 알아요. 아무리 난개발하고 여기저기 들쑤셔놓는다 해도 국립공원만큼은 못 건드려요. 그 주변도 알짱거리지 않구요. 아마 그래서 더욱 여기는 그 흔한 연기조차 제대로 피어오르지 않고 있지 않나 싶어요.
'길 또 있네?'
벌써 6시 32분이었어요. 점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길은 또 있었어요. 이제 친구와의 약속시간까지 한 시간 채 안 남았어요. 부지런히 위로 기어올라갔어요.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어요.
"헉!"
눈 앞에 펼쳐진 광경. 놀라웠어요. 제 예감이 맞았어요.
3단으로 만든 옹벽 아래에 굽은 개천을 따라 조그마한 판자촌이 있었어요.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향했어요.
정말 '산너머 그곳'이었어요.
이렇게 깊숙한 곳에 개천을 따라 굽은 모양으로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동네 안으로 들어갔어요.
지금까지 봐온 정릉골도 낙후된 동네라 생각했는데 여기는 그 윗동네보다 더 낙후된 곳이었어요. 판자촌에 가까운 모습이었어요. 게다가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이 마을 끄트머리에는 절이 있었어요. 성불사였어요. 지도를 보았어요. 바로 여기가 정릉골 끄트머리 마지막 지점이라 봐도 되는 곳이었어요.
'정릉골 진짜 크구나.'
그제서야 정릉골이 꽤 크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도를 보며 마지막에 성불사까지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떠올랐구요.
성불사는 이렇게 생겼어요.
성불사 대웅전 문은 열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밖만 보고 다시 정릉골 판자촌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진짜 돌아가도 될 때가 되었어요.
정릉천을 따라 내리막길을 쭉 걸어갔어요. 빠른 걸음으로 열심히 걸었어요. 정말 다행히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서 2분 늦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