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정릉골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달동네로, 창덕초등학교 및 국민대학교 근처까지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요. 처음 정릉골에 대해 조사할 때에는 이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정릉골을 둘러본 후 국민대학교 쪽으로 내려온 후, 다시 또 다른 성북구 달동네인 북정마을을 보러 가거나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날은 늦게 출발해서 북정마을까지 둘러볼 시간이 아예 안 되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전에 가는 방법 및 정릉골 범위를 알아볼 때 지도에 표시하고 스크린샷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출발했어요. 그저 전에 적어놓은 정릉골 가는 방법만 보고 갔어요.
"나 정릉골 왔어."
친구들에게 제가 지금 북한산보국문역부터 국민대학교 근처까지 이어지는 달동네인 정릉골 돌아다니고 있다고 메세지를 보냈어요.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오늘은 정릉골 돌아다니냐고 말하며 혹시 다 둘러보고 시간 되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어요. 시간을 확인해 보았어요. 이제 2019년 5월 3일 저녁 5시 57분이었어요. 욕심내서 종로구 달동네까지 돌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아직 정릉골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곧 다 돌아보겠지 싶었어요. 그래서 친구에게 저녁 같이 먹자고 했어요.
'얼른 다 둘러보고 내려가야지.'
이때까지만 해도 정릉골 규모가 별로 안 크고 거의 다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에게 느긋하게 씻고 다시 연락하라고 했어요.
달동네에 석양이 비추고 있었어요. 어차피 날이 곧 저물 거라 빨리 둘러보고 내려가야 했어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 없느냐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진이야 시꺼멓게 나오더라도 일단 찍으면 되요. 그런 사진은 집에 돌아와서 밝기와 대비 보정만 해주면 어떻게든 살려낼 수 있거든요. 게다가 캐논 SX70HS는 손떨림 방지 기능이 꽤 강력해서 정말 잘만 하면 삼각대 없는 상태에서 1초까지 흔들리지 않은 사진을 건질 수 있구요.
문제는 가끔 가다 개 키우는 집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집 앞을 지나갈 때면 개가 미친듯이 짖어대었어요. 이렇게 개가 짖어대면 엄청난 동네 민폐에요. 낮에야 개가 짖어도 별 상관없지만 어둠이 내리깔린 후부터는 엄청난 실례에요. 제가 아무리 조용히 걸어도 개가 짖어대면 동네 엄청 시끄러워져요. 밤에 달동네에 사진 찍으러 가는 것을 극히 자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아무리 본인이 조용히 돌아다니고 흔적없이 돌아다니려 노력해봤자 개가 한 번 짖어대면 동네 개들 따라짖어대기 시작하면서 엄청 시끄러워지거든요.
노을 때문에 붉은 빛이 낀 정릉골은 흙빛 가까워졌어요.
'저기는 또 언제 다 돌지?'
멀리 우리슈퍼가 보였어요.
일단 여기에서 반대쪽으로 내려가야 했어요. 반대쪽으로 내려가서 골짜기를 따라 저쪽으로 내려간 후 다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으로 돌아가면 될 거 같았어요.
계단을 내려왔어요. 이제 우리슈퍼쪽으로 갈 차례였어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우리슈퍼 쪽으로 나올까?'
북한산 쪽으로 더 깊이 계속 정릉골이 이어지고 있었어요. 친구에게 아주 천천히 준비하라고 했고, 이제 끝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았어요. 후딱 갔다 오면 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슈퍼가 아니라 정릉골 더 깊숙히 일단 가보기로 했어요.
새마을 슈퍼가 있었어요.
새마을 슈퍼 앞에는 누가 먹고 남기고 간 소주병이 놓여 있었어요. 새마을과 술병. 미래 사회는 경제파탄 주정뱅이 천지 지옥이란 건가요. '새마을'이라는 단어와 빈 소주병이 같이 있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어요.
갈림길이 나왔어요.
이 계단 너머로도 정릉골은 이어지고 있었어요. 여기에서 되돌아나가면 우리슈퍼로 갈 수 있었어요. 저는 일단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기로 했어요.
보라색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어요.
뒤를 돌아보았어요. 제가 걸어온 길이 보였어요.
다시 걸어갔어요.
앞으로 마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어요.
서울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곳은 어디일까?
처음 디지털 카메라를 사서 엄청나게 많이 돌아다녀보기 전까지는 저도 서울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못했어요. 그저 제가 사는 동네, 그리고 대학교 가는 길, 여기에 종로, 남대문시장, 여의도 정도가 제가 아는 서울의 전부였어요. 디지털 카메라를 사서 돌아다니기 전에는 심지어 동대문도 그렇게 많이 가보지 않았어요.
이 당시 제게 성북구 이미지는 지지리 못 사는 동네였어요. 제가 자주 찾아갔던 이문동은 동대문구인데, 한국외국어대학교 옆에 있는 달동네, 그리고 그 너머 천장산을 넘어서는 성북구에요. 외대 옆 달동네도 충격적이었지만 장위동, 월곡동도 뭐 만만치 않았어요. 대한민국 땅에, 그것도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에 이렇게 후진 동네들이 존재한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서울 사람들에게는 그게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극심한 빈곤이 집에 절절히 뭍어나오는 것은 지방 출신인 제게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어요.
게다가 성북구는 국어 시간에 배우는 '성북동 비둘기' 시와 자연스럽게 연관되어 더 가난한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록 집값 떨어지는 건 부동산에 관심있어서 아는 게 아니라 아무리 어린이라 해도 언덕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면 힘들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아는 거에요. 게다가 이 시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면 채석장, 구공탄 연기가 있어요. 이 단어들은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어요. 채석장 사장, 연탄공장 사장이 아니라 채석장 그 자체, 구공탄 연기는 연탄 가스잖아요.
지금은 그런 기사가 보도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가끔 우리나라 최고 부자들, 대기업 회장들이 서울 어디에서 사는지 기사가 나오곤 했어요. 그때 기사를 보면 성북구도 있었어요. 그 기사를 볼 때마다 이거 거짓말 아닌가 했어요. 제가 보던 성북구는 '저런 데에 진짜 사람이 살아?'라는 생각이 들던 낙후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동네였거든요. 서울 달동네를 처음 가본 사람들 반응은 다 똑같았어요. '저런 곳이 아직도 있어?', '정말 여기에 사람 살아?' 하나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둘 다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여간 서울 달동네를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고, 제가 본 성북구는 엄청난 동네였어요.
그래서 성북구에 대재벌 회장이 살고 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저거 거짓말 아니냐고 했어요. 대재벌이면 당연히 강남 살아야지 왜 성북구 사냐구요.
어느 날. 밤에 친구와 함께 걷다가 성북구로 흘러들어가게 되었어요. 아침이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카카오맵 같은 것이 없었어요. 스마트폰 자체가 없었고, 다음 지도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여기 뭐지?'
으리으리한 대저택들. 저택 앞에 차렷 자세로 서 있는 기사들. 드라마와 영화에서만 보던 그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어요. 차도 전부 삐까뻔쩍한 차였어요. 아무리 제가 운전면허증도 없고 차에 관심이 없다 해도 '저건 무지 비싼 차'라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차였어요. 서울에 진짜 이런 엄청난 동네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요. 그 전까지 본 부자 동네라고는 기껏해봐야 목동 아파트 단지, 여의도, 강남 아파트 단지 정도였거든요. 그런 동네를 '그딴 동네'로 만드는 굉장함에 놀랐어요. 솔직히 아파트 단지에 아침부터 기사가 차렷 자세로 각 잡고 서 있지는 않잖아요. 높은 담장 너머를 볼 수 없었지만 마당도 엄청 넓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어요. 드라마에서나 보던 넓은 정원이 있고 그 안에 테이블과 파라솔, 의자가 있는 집. 그런 집들이 쭈르르 모여 있는 곳이 실제 있었어요.
바로 그 동네가 또 성북구였어요.
사진으로 한 방에 빈부격차를 표현하기에는 구룡마을이 가장 좋아요. 낡은 판자집과 타워팰리스, 래미안 블레스티지 아파트가 사진 한 장에 다 나오니까요. 그러나 실제 빈부격차 가장 극심한 동네를 이야기해보라면 저는 성북구를 이야기할 거에요. 단 한 번에 빈부격차를 확실히 느끼기는 어려운 동네지만 돌아다녀보면 여기만큼 빈부격차가 어마어마한 동네도 없었어요.
무당집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붉은 깃밝과 흰 깃발이 매달린 장대가 보였어요.
'이제 끝인가?'
그러나 정릉골 길은 끝나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