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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소설을 매우 좋아했어요.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에 주인공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구입하는 장면이었어요. 끝까지 안 팔겠다는 미국인에게 현금 뭉치를 턱 보여주며 한 방에 미국인을 무너트리는 장면이 압권이었어요. 해외여행을 하며 이 소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이유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일행이 동쪽으로 여행을 진행하거든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것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피곤하고 시차 적응도 어려워요. 그 절정은 바로 날이 밝을 때. TV에서 보면 필름을 빨리 돌려서 동이 트는 장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그것을 현실로 보는 기분이에요.
비행기에 타자마자 맥주캔 3개를 연달아 마셨어요. 빨리 취해서 골아떨어져 버리는 것이 제 나름의 해외 여행에서의 국제선 비행기 탈 때 노하우.
비행기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좌석에 누워서 갔어요.
인천에 도착했어요. 역시나 시차 때문에 엄청나게 피곤했어요. 에스컬레이터를 타는데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불친절하고 흔들리고 빨리 휙휙 달리는 동유럽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다 친절하고 흔들림 없는 대신 속 터지게 느린 한국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니 너무 답답했어요.
전철 안을 조화로 장식해 놓았어요.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이것은 오랜 기간 외국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학교를다니며 전철을 많이 탔지만 이렇게 꾸며놓은 전철은 본 적이 없었어요.
7박 35일의 시작은 3월 11일이에요. 그러나 그 이전부터 어쩌면 여행이 시작했는지도 몰라요.
바로 여기, 두바이에서부터요.
항상 영어나 현지어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것이 익숙해져서 한국에서 한국어로 물어보는 것도 어색했어요.
당장 내일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야할 것 같았어요. 날이 저물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멀리 떠나야하고, 내일이면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꽉 차 있는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뜰 것 같았어요. 그러나 잔인한 현실이었어요. 야간 이동을 할 일도 없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똑같이 우리나라, 제 방이었어요.
떠나고 싶지만 당분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 중 구입한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었어요.
언젠가는 이 책들을 다 읽어야지.
책을 넘겨보다 집어넣고 눈을 감았어요.
머리 속에서 저는 다시 여행을 다니고 있었어요. 나무에 걸린 새집을 보며 드러눕고 싶다고 생각했던 프라하에서의 아침이 떠올랐어요.
짐을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벨리코 터르노보에 가는 길이었어요.
그저 웃음만 나왔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매우 무모한 여행이었어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평소 알고 있던 몇 가지 상식만 가지고 훌쩍 떠난 여행. 침대에 누워 잠을 자지 않고 여행하겠다는 무모한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어요. 만족스러웠어요. 비록 35일 내내 야간 이동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못 했지만 이 정도면 A+은 아니더라도 A0는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긴 여행이 남긴 습관이 거의 다 사라져갈 무렵, 후배로부터 메일 한 통이 날아왔어요. 후배가 처음 해외여행하는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갔는데 정말 고생 많이 했다면서 그때 제가 왜 그렇게 여행 말기에 짜증을 많이 냈는지 이해가 되더라는 내용이었어요.
답장을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 그냥 고생했으니 푹 쉬라고 쓰고 메일을 전송했어요.
그날밤. 여행에서 돌아와 던져놓았던 작은 사전들을 꺼내 뒤적이며 여행을 회상하다 잠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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