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7박 35일 (2009)

7박 35일 - 49 이탈리아 베니스

좀좀이 2012. 1. 1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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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타는데 이탈리아 학생들 한 무리와 선생님 몇 명이 올라탔어요.


"오늘 잠 잘 자기는 글렀다."


침대칸이었기 때문에 아무 자리나 가서 앉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좌석에 가서 앉아 있다가 누워야 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표를 아침에 구입했어요. 기차에 올라타서 지정된 좌석에 가서 앉았어요.


"실례하지만 좌석 좀 바꾸어줄 수 있나요?"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좌석 좀 바꾸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어느 좌석과 바꾸어달라고 하는지 가서 보았어요. 바꾸어달라고 하는 객실에는 엄청난 체취를 풍기고 있는 인도인 가족 4명이 타고 있었어요. 문제는 우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체취도 문제였지만 인도인 가족의 짐이 너무 많았어요. 객실 한가운데에 정말 '산 처럼' 쌓아 놓았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짐은 배낭 2개, 캐리어 2개, 가방 1개였어요. 그런데 이것이 들어갈 공간이 아예 없었어요. 인도인들도 자기들 짐에 치여서 자리가 없어 아주 불편한 자세로 각잡고 앉아 있었어요. 이건 짐 자체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짐을 너저분하게 던져 놓아서 짐을 잘 정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어요.


웬만하면 자리를 바꾸어 주었겠지만 자리를 바꾸어줄 객실이 아니라서 안 바꾸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기차 승무원에게 달려갔고, 승무원은 다른 칸에서 동양인을 데려왔어요. 밖에서 중국어가 들렸어요.


동양인 세 명이 들어와서 제게 물어보았어요.


"Are you Chinese?"

"No, I'm Korean!"


단호히 잘라 말했어요. 우리를 중국인으로 본 것이 매우 불쾌한데다 아무리 국경심사가 없는 구간이라고 하더라도 중국인과 엮이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어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유럽여행에서 '중국인'으로 찍히는 순간 여행 난이도 급상승하는 건 시간 문제. 괜히 유난 떠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주로 중국인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신변 안전 문제까지 덩달아 급상승해요. 이건 단순히 상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기차 승무원이 쟤네들이 머무르는 방에 옮겨줄 수 없냐고 물어보자 단호히 싫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제가 산 좌석에 앉아 있다고 확실히 말했어요. 제가 단호히 자리를 옮기는 것을 거부하자 승무원은 가 버렸고, 선생님들도 더 이상 저희에게 자리를 옮겨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방으로 이탈리아 학생 두 명이 들어와 선생님들과 같이 놀기 시작했어요. 이탈리아어로 쉴 새 없이 떠들고 쉴 새 없이 먹어대었어요.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친구처럼 노는 것이 매우 신기했어요. 저희는 조용히 앉아 있었어요. 서로 말을 걸기 매우 어색해진 상황이라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배려하며 한 방에서 있었어요.


다른 객실도 상황은 마찬가지. 기차 전체가 아주 시끄러웠어요. 먹고 돌아다니고 떠들어댔어요. 지금까지 탄 기차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어요. 이렇게 시끄럽고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기차는 처음이었어요.


밤이 늦었는데도 이탈리아인들은 쉬지 않고 떠들고 돌아다녔어요. 저녁 10시가 넘어서자 이제 잠을 자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어요. 객실 안에서는 저희가 있든 없든 엄청나게 떠들어 대었는데 저희가 이제 자겠다고 하자 우리가 잠을 잘 수 있게 조용히 비켜주는 것이 매우 신기했어요.


눈을 떴을 때, 그 이탈리아인들은 없었어요. 후배 말로는 얼마 전에 내렸는데 그때도 장난 아니었다고 했어요. 엄청 우왕좌왕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했어요. 침대를 접고 화장실에서 세면을 한 후, 자리에 앉았어요.


기차가 베니스역에 들어왔어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베오그라드행 기차표를 알아보았어요. 돈은 엄청 쓰는데 빈곤하게 다니는 유로존에 머물고 싶지 않았어요. 지난번 류블라냐부터 베니스를 거쳐 파리를 찍고 돌아오니 너무 피곤했어요. 돈은 발칸 유럽보다 많이 들어가는데 먹는 것은 발칸 유럽보다 못했어요. 지출이 눈에 확 띄게 커졌다는 정신적 부담에 먹는 것이 부실해졌다는 육체적 부담이 가중되어서 빨리 발칸 유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저의 희망과 달리 베오그라드행 기차는 밤 기차 밖에 없었어요.


"여기 또 봐야겠네요."


짐을 수하물 보관소에 맡기고 나왔어요.



지난번 왔을 떄에는 날씨가 최악이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어요.



정말 날씨 하나 달라졌다고 분위기가 완벽히 달라졌어요. 곤돌라도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지난번에 길을 알아두었기 때문에 바로 산마르코 광장으로 갔어요. 산마르코 광장을 조금 둘러보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어요. 별 생각 없이 식당에 들어갔는데 중국인이 하는 식당이었어요. 종업원도 전부 중국인.




피자와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정말 맛이 없었어요. 원래는 그 빗속에서 우연히 발견해 들어간 식당에 다시 가려고 했지만 길을 잃고 헤매다 간 곳이고, 그 식당에서 나와서 다시 길을 헤맸기 때문에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었어요. 서비스도 안 좋았어요.


"쟤네들 자꾸 힐끔힐끔 우리 쳐다보는데요?"


맛없는 음식과 무성의한 서비스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사람 불쾌하게 만든 것은 우리 앞에 앉아서 쉬고 있는 중국인 종업원 두 명이 자꾸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본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를 자꾸 곁눈질로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하고 있었어요. 폼이 딱 사자가 밥을 다 먹기를 기다리는 대머리 독수리와 하이에나였어요.


"저것들 우리가 빨리 먹고 팁 놓고 가는 거 기다리고 있구만!"


자꾸 힐끔거리며 곁눈질로 쳐다보자 짜증이 났어요. 딱 봐도 둘이 노리는 것은 팁이었어요. 팁을 놓고 나가면 재빨리 자리로 달려와 팁을 챙겨가려고 자꾸 우리를 곁눈질로 쳐다보는 것이었어요.


"팁은 아무 때나 주는 줄 아나."


팁이 원래 의마와 달리 많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원래 팁은 서비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에요. 그런데 이것들 하는 짓을 보면 음식값도 아까울 지경이었어요. 귀찮다는 표정 지으면서 음식만 휙 던져주는 서비스야 그렇다고 치지만 최소한 밥은 편하게 먹게 해 줘야죠. 혹시 부족한 것이 있나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게 아니라 팁을 노리고 계속 곁눈질로 쳐다보는 게 보여서 매우 기분이 상했어요.


"이따위 서비스에 내가 팁을 왜 줘!"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산대에 가자마자 역시나 중국인 종업원 둘이 자리로 달려갔어요. 참고로 변질되어 버린 팁문화에서 팁을 안 준다는 것은 '너희 가게 음식과 서비스가 개판!'이라고 모욕을 주는 의미이기도 해요. 이 종업원들 하는 짓에는 팁으로 1센트 주는 것조차 아까웠어요.


점심을 망치고 밖으로 나왔어요.



길거리에 노점상도 많이 나와 있었고 관광객도 많았어요.



정말 넘쳐나는 관광객들.



그때 보았던 산마르코 광장과는 전혀 다른 산마르코 광장.





성당에 들어갈까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줄을 서 있어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이제 줄을 서면 30분은 기다려야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산마르코 광장에서 왼쪽으로 계속 걸어갔어요. 왼쪽으로 한참 걸어가니 일반인들이 사는 동네가 나왔어요. 이쪽은 운하도 보이지 않았어요. 마침 동네 장터가 열려 있었고 아이스크림 파는 아저씨도 있었어요.


"우리 더운데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먹을까요?"

"예!"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겠다고 하자 후배가 너무 좋아했어요. 저는 주황색 빛깔의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이것이 바로 맛! 맛! 맛!


황홀한 맛이었어요. 정말 멜론을 먹는 맛이었어요. 아이스크림은 입에서 부드럽게 녹으며 입안에 진한 멜론맛을 남기고 사라졌어요. 너무 맛있어서 후배에게 한 입 먹어보라고 했어요. 후배도 먹더니


이것이 바로 멜론 맛! 맛! 맛!


후배도 감동했어요. 그래서 후딱 다 먹고 하나 더 사서 근처 공원에 앉아 먹었어요. 따스한 햇볕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주물주물 마사지해주고 있었고 아이스크림은 입안에 진한 멜론의 향긋한 향기를 심어주고 있었어요.


"이래서 베니스 가면 꼭 아이스크림 사먹으라고 했구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햇볕을 쬐었어요. 오늘 일정을 강행군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지난번 빗속을 헤치며 다 본 도시인데다 특별히 보고 싶은 것도 마땅히 없었어요. 그저 이 아이스크림 맛만 즐기고 싶을 뿐이었어요.


공원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며 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산마르코 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길을 걷는데 날이 너무 더웠어요. 불과 3일 전만 해도 으슬으슬 춥고 비가 내렸던 베네치아였어요. 고작 3일 지났을 뿐인데 날씨가 180도 바뀌었어요.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날은 덥고 아까 먹은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아이스크림 또 먹어요."

"그래요!"


그래서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가 보이자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어요. 저는 당연히 멜론맛 아이스크림이었고, 후배는 다른 맛을 먹겠다고 해서 제가 주문했어요. 주인 아저씨는 후배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마구 퍼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요. 여기는 이탈리아. 여자에게만 정열적인 이탈리아. 아저씨는 멜론맛 아이스크림은 엄청 많이 퍼주고 다른 맛 아이스크림은 진짜 딱 정량대로 한 스쿱만 떠 주었어요. 딱 봐도 양이 2배는 차이났어요. 실제로는 3배 차이. 왜냐하면 멜론맛은 마구 꾹꾹 눌러 담아주었고 다른 맛 아이스크림은 대충 한 스쿱 떠서 올려주었거든요.


그런데 멜론맛은 내 껀데?


여자에게 정열적이고 상냥한 우리의 이탈리아인 아이스크림 장수 아저씨...죄송해요. 하지만 멜론 아이스크림은 제가 먹는 것이었어요. 아저씨께서 후배에게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시고 제게 다른 맛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셨어요. 우리는 '당연히' 아이스크림을 바꾸어 들었어요. 이건 당연한 거에요. 저는 멜론맛을 먹기로 했고, 후배는 다른 맛을 먹기로 했거든요. 우리가 아이스크림을 바꾸어들자 아저씨의 표정이 어두워졌어요.


아이스크림을 빨아먹으며 후배와 아이스크림 주문에 대해 논의를 했어요. 이탈리아에서 여자 꺼는 왕창 퍼주고 남자 꺼는 정량으로 퍼준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게 진짜일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왕창 퍼줘봐야 대충 푼 한 스쿱 더 올려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보니 대충 푼 한 스쿱이 아니라 아주 스쿱에 아이스크림 꽉꽉 담아서 콘에 꽉꽉 채워넣어 주었어요.


"이번에는 후배가 주문해봐요. 제가 제 꺼부터 말해서 착각한 거 아닐까요?"


아이스크림을 먹고 산마르코 광장을 지나 역을 향해 걷는데 아이스크림이 또 먹고 싶었어요. 이 천상의 멜론맛에 꽂혀 버렸어요. 산마르코 광장을 봐도 느낌은 '멜론맛 아이스크림'. 운하를 봐도 '멜론맛 아이스크림'. 온통 멜론맛 아이스크림 생각 밖에 없었어요. 아이스크림이 2유로 해도 괜찮아요. 이런 맛은 배터질 때까지 먹고 싶었어요. 밤새 주륵주륵 설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다시 먹고 싶었어요.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이자 아이스크림을 또 먹자고 했어요. 후배는 알았다고 했어요.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로 후배가 주문하고, 후배 꺼부터 주문했어요. 제가 먹을 멜론 아이스크림은 후배 꺼를 말한 후 말했어요.


멜론맛만 마구 퍼서 꾹꾹 눌러주시는 아저씨!


아저씨는 멜론맛 아이스크림만 완전 지극 정성 무슨 임금님 수라상 차리듯 정성껏 박박 퍼서 꾹꾹 눌러 담아주셨어요. 그리고 다른 맛 - 즉 후배가 먹을 아이스크림은 완전 대충 건성 무슨 팔기 귀찮은데 억지로 파는 듯 대충 퍼서 툭 올려 주었어요.


멜론맛 내 꺼라구!


이건 아까보다 더 심했어요. 진짜 인증샷을 남기지 못한 게 한이에요. 이번에는 멜론맛은 꾹꾹 눌러 담는 것도 모자라 1스쿱 짜리 시켰는데 2스쿱 올려주셨어요. 그리고 다른 맛 아이스크림은...할 말이 없네요. 아주 후 불면 날아갈 정도로 대충 퍼서 툭 올려놓은 게 딱 보였어요. 둘 다 2유로 짜리 아이스크림이었는데 실제는 멜론맛은 4유로, 나머지 맛은 덤으로 끼워주는 1+1 보너스 행사 짜리도 안 되는 떨이용 아이스크림 같아 보였어요. 


하지만 역시나 멜론맛은 제 것. 후배와 아이스크림을 바꿔 들어서 먹기 시작하자 아저씨께서는 아주 흙 한 뚝배기 하신 얼굴이셨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고의적으로 아저씨 열받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이건 아저씨가 알 수 없는 추리를 하셔서 하신 것이었어요. 저희는 오직 한 스쿱 짜리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했을 뿐, 더 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아쉬운 것은 이렇게 푸짐한 멜론 아이스크림을 두 번이나 먹었지만 그 두 번 모두 제가 찾던 맛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어요. 그 천상의 멜론맛...입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지며 진한 멜론맛만 남기는 그 맛이 아니었어요. 두 번 다 우리나라 멜론향 아이스크림보다 좀 더 깔끔한 맛 정도였어요.


정말 그 맛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딱 한 번만 더 먹으면 베니스에서 해야 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룬 기분일텐데 그 한 번이 없었어요. 길을 가는데 또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어요.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또요?"

"예."

"오빠 혼자 먹어요."


후배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어요.


"아이스크림 많이 좋아하잖아요. 여기서 실컷 먹고 가요."

"오빠, 저 오늘 아이스크림 너무 많이 먹었어요. 하루에 3개 먹는 것도 매우 많이 먹는 거에요."


후배는 더 먹으면 속이 매우 안 좋아질 것 같으니 혼자 사먹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또 사먹었어요. 그러나 그 맛이 아니었어요. 길을 계속 가는데 아이스크림 장수가 보였어요. 그래서 또 멜론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어요. 역시나 그 맛이 아니었어요.


천상의 멜론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그 맛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무려 5개나 더 사먹었지만 5개 모두 그 맛이 아니었어요. 그 장수를 찾아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아아...사랑하는 나의 멜론맛 아이스크림은 따스한 봄 햇살 아래에서 진한 추억과 향기를 남기고 사라져 갔어요. 뒤늦게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멜론맛 아이스크림은 사라져버린 뒤였어요. 진한 멜론향만 머리에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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