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를 가기 위해 제가 세운 원칙을 또 버려야 했어요. 정말 어쩔 수 없이 침대칸에 탔어요. 지금까지는 계속 일반 객실에서 잠을 잤지만 이때 처음 침대칸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어요.
침대칸은 매우 특별할 줄 알았는데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었어요. 2등실 침대칸은 6명이 잠을 자는 방식. 침대칸은 짐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아야 했고, 그래서 방이 더욱 비좁았어요. 일반 객실 의자에 드러누워 자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어요. 말이 좋아 침대칸이지 일반 객실 의자 위에 누워 자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어요. 게다가 자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 같이 자서 다 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매우 불편했어요.
제가 잠에서 깨었을 때 기차는 프랑스 안을 달리고 있었어요. 방금 비가 멈춘 듯 하늘은 흐렸고 대지는 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어요. 정말 영화에서 보던 그 '프랑스의 들판'과 똑같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요.
객실 안 승객들 모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어요. 기차는 계속 달렸어요. 기차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돌아와 다시 침묵을 지켰어요.
기차가 역에 도착했어요. 기차에서 내렸어요. 책과 수업에서 질리도록 접했던 프랑스 파리였어요.
하지만 그다지 특별해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일단 숙소를 찾으러 돌아다녔어요. 역 주변에 숙소가 딱 하나 있었어요.
"하룻밤에 120유로라구요!"
제일 싼 방이 120유로였어요. 이때 환율로 하면 정말 엄청난 금액.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금액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호텔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혹시 인터넷에서 민박을 찾으면 민박집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래서 인터넷 카페에 가서 민박집을 찾아보았어요. 파리의 민박집은 거의 다 교외에 있었고, 교통도 좋지 않았어요. 확실히 땅값 때문에 그런 것 같았어요. 교통이 괜찮은 민박집 몇 개를 추려 민박집을 찾아 돌아다녔어요. 그러나 전부 실패했어요. 단속에 걸려서 영업 정지를 먹었거나 민박집이 이사를 갔다고 했어요.
'어떻하지...파리를 당일치기로 볼 수는 없고...숙소비는 너무 비싸고...'
파리는 하루에 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에요. 여기는 정말로 엄청나게 큰 도시. 게다가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처럼 파리에 와서 꼭 보고 싶었던 것들도 있었어요. 하루에 루브르, 오르세 이런 걸 다 본다? 가능은 하겠네요. 관람이 아니라 안에서 전력질주를 한다면요. 파리 와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하나 있기는 했어요. 그것은 바로 프낙. (Fnac) 가끔 불어 원서를 구입하던 인터넷 서점이었는데 얼마나 큰지 한 번 가서 보고 싶었어요. 노트르담 성당도 있고 에펠탑도 있고 개선문도 있고 보려고 하면 볼 게 너무 많은 도시가 바로 파리였어요. 이런 도시를 당일치기로? 이건 말도 안 되요. 서울을 당일치기로 다 보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어요. 서울도 적당히 명동에서 종로까지만 본다고 하면 하루에 충분히 다 보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라도 집어넣으면 하루에 보는 것이 절대 불가능해요.
하지만 숙박비는 현실적 문제. 파리도 위험하기로 소문난 도시에요. 밤에 노숙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동네. 우리나라야 새벽에 거리를 싸돌아다니든 뭘 하든 그렇게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여기는 달라요. 서울이 위험하다면 다른 유럽 도시들은 정말 뭐라 설명할 수가 없는 막장 무법지대에요. 우리에게는 서울 밤거리가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 밤거리와 비교하면 서울은 '안전 그 자체'에요.
이제 선택의 순간. 그냥 120유로 내고 호텔에서 자느냐, 아니면 밤차 타고 다시 베니스로 돌아가느냐. 후배도 파리에 와서 당일치기로 '대충'조차 보지 못하고 그냥 휙 떠나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서 호텔을 조금 더 찾아보기로 했어요.
바스티유 광장 쪽으로 오자 별 한 개 짜리 호텔들이 여러 개 보였어요. 아까 120 유로 짜리는 별 3개, 이번에는 별 1개. 가격을 알아보았어요. 하룻밤에 80유로라고 했어요. 역시나 살인적인 가격. 더 싼 곳을 찾아다녀볼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별 한 개 짜리 호텔인데다 너무 욕심 부리다가는 하루 종일 방만 찾다가 끝날 것 같아서 여기에서 하룻밤 보내기로 했어요. 확실한 것은 바로 다음날 떠난다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어요. 하루에 80유로인데 이걸 2일 감당할 방법이 없었어요. 이때 80유로면 하루에 100달러가 넘는 돈이었어요. 진짜 왔으니 어쩔 수 없이 1박 하는 것이지 미리 알았더라면 차라리 우크라이나로 갔을 거에요. 기차값도 싸지 않았는데 숙박비에서...즉 시작부터 100달러 홀라당 날리고 시작이었어요. 여담이지만 발칸 유럽에서는 교통비를 포함한 모든 여비를 다 합해서 하루 여비가 50달러였어요. 이것도 쓰다가 남아서 환전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는 100달러? 그냥 시작부터 우습게 사라져 버렸어요.
당장 내일이면 떠나야했기 때문에 파리를 전투적으로 볼 필요가 매우 많았어요. 지금까지 거쳐온 도시 가운데 파리 보다 큰 도시는 단 한 곳도 없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몸은 나가는 것을 거부했어요. 침대에 드러누웠어요.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후배에게 12시에 제 방으로 건너오라고 했어요. 딱 12시까지만 쉴 생각이었어요. 이왕 80유로 낸 것, 호텔 시설을 마음껏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호텔 크기는 더도 덜도 말고 침대 2개 크기. 고시원 방 두어 개 합쳐놓은 크기였어요. 진짜 눈물나는 방이었어요. 이런 방이 무려 80유로라니! 일단 샤워를 했어요. 샤워를 하니 몸이 더 밖에 나가기 싫다고 외쳐대었어요. 한참 씻고 나서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한 후, 침대에 드러누웠어요. 잠이 살살 밀려왔어요.
"한숨 자고 나가야지."
그렇게 잠들었어요. 잠시후, 후배가 와서 저를 깨웠어요.
"우리 피곤한데 딱 2시간만 자고 나가요. 오후 2시에 출발해요."
"그래요. 저도 눈 좀 붙여야겠네요."
후배도 매우 피곤했는데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후배가 방에 돌아가자 다시 드러누웠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이번에는 생각만큼 야간이동을 길게 하지도 않았고, 침대칸에서 억지로 푹 자기도 했어요. 그래도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봐요. 침대에 누우니 하루 종일 잠만 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행도 즐기면서 해야지...그냥 여기서 하루 종일 잠이나 자고 내일 베니스로 돌아갈까?'
진짜 이 생각을 진지하게 했어요. 정말 긍정적 검토를 했어요.
"오빠, 일어나요!"
제가 2시에 절대 못 일어날 거 같아서 아예 후배에게 열쇠도 맡기고 방문을 걸어잠그고 잠을 자고 있었어요. 제 예상은 정확했어요. 후배가 와서 저를 사정없이 흔들어대서 겨우 일어났어요.
"언제까지 잘 거에요?"
"몇 시인데요?"
"2시요!"
후배의 재촉에 머리만 대충 감고 다시 나왔어요. 머리를 감으니 정신은 돌아왔어요. 문제는 몸이 아직도 잠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 일단은 밖으로 나왔어요.
바스티유 광장. 상당히 많이 본 이 기념비를 직접 보았어요.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어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씨벨로'도 보았어요.
뭔지는 몰라요. 그래도 뭔가 있어 보여서 들어가 보았어요.
또 걷기.
그냥 계속 걸었어요. 목적지 없이 걸었어요.
6.25 참전 기념비를 발견했어요. 이걸로 보면 우리나라는 영락없는 토끼.
뭔가 상당히 큰 건물이 나타났어요.
여기가 파리군요!
아무 이유 없이 다리를 건넜어요. 다리 아래 흐르는 하천이 바로 그 유명한 센 강.
역시나 뭔지 알 수 없는 건물.
파리를 많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파리가 아름답다'라고 말은 못하겠어요. 물론 '파리는 별 거 없다'라고도 말은 못하겠어요. 단순히 제가 본 것만 가지고 판단하기에 파리는 '낡은' 느낌이 있었어요. 분명히 지금껏 본 도시들과는 아주 크게 다른 무언가가 있었어요. 건물들과 거리에서 뿜어내는 느낌이 다른 도시들과는 전혀 달랐어요. 솔직히 '세련되었다'는 것은 잘 느낄 수 없었어요. '진짜 여기는 오래되고 역사가 깊은 도시구나'라는 것은 확실히 느껴지는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읽은 '세련된 도시 파리'를 느끼지는 못했어요. 거리의 건물들은 질리도록 들었던 '프랑스 풍의' 건물들이었어요. 단지 특정 몇 곳만 그런 건물이 아니라 정말 질리도록 듣고 읽은 '프랑스 풍의' 건물들이었어요. 중부 유럽과 발칸 유럽에서 많은 도시를 보아왔지만...어쩌면 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확실히 프랑스 파리의 건물들은 다른 도시들과 달랐어요. 하지만 이게 세련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중요한 것은 저 역시 본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뭐라고 확실히 딱 잘라서 말은 못한다는 거에요. 단지 제가 본 지역이 오래된 건물이 밀집해있는 곳일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제가 본 파리는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도시이기는 했지만 세련된 도시라고 하기엔...글쎄요...
"아까 그 큰 건물 노트르담 성당 맞았구나!"
앞에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렸어요.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2시간만 일찍 나왔더라도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갔을 거에요. 그러나 매우 늦은 시각에 나왔고, 여기까지 걸어왔기 때문에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면 오늘 일정은 바로 끝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밖에서 사진만 잔뜩 찍었어요.
앉아서 쉴 곳 조차 없어요. 왼쪽 구석에는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물통에 물을 받아가고 있었어요. 이때까지는 왜 관광객들이 물을 열심히 받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노트르담 성당 사진을 실컷 찍고 나니 왠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어요.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아이스크림 먹기 좋은 날이었어요.
"우리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가요."
후배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고 저도 먹으려고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에 갔어요.
"한 스쿱 4유로?!"
한 스쿱 올려주는 아이스크림 콘이 4유로라고 했어요.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였어요. 류블라냐에서 1유로라고 비싸다고 욕을 해대었고, 베니스에서는 2유로라고 터무니없는 가격이라고 했는데 여기는 4유로...정말 미친 가격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아이스크림 맛 때문도 아니고 아이스크림 가격 때문에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하나씩 사 먹었어요.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 그제서야 왜 관광객들이 노트르담 성당 옆 음수대에서 물을 그리 열심히 퍼가는지 보였어요. 담배 한 갑 8유로였고, 나머지 물가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숙소비만 비싼 것이 아니라 모든 게 다 비쌌어요. 물가가 비싼 곳에 가면 돈이 주머니에서 줄줄 샌다고 하는데 이건 줄줄 새는 정도가 아니라 콸콸 쏟아져 나가는 곳이었어요. 다행히 저나 후배나 돈을 별로 쓰지 않고 식사는 대충 때워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었지, 만약 밥은 반드시 식당에서 제대로 먹어야 하고 이것 저것 기념품 사고 선물도 사고 그랬다면 둘이서 100달러로 하루...? 택도 없었을 거에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는데 서점이 보였어요.
새 책과 헌 책이 섞여 있는 서점이었어요. 여기는 한 건물에 다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가게가 몇 개로 나뉘어 있었어요. 우리가 들어간 곳은 '언어 및 문학' 서점이었어요.
세계 경영 하는 놈들은 다르구나!
저 한 문장으로 이 서점을 본 소감을 정리할게요. 다른 말이 필요 없었어요. 정말 무엇이 세계경영인지 보여주는 곳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