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찻집 찾는 거 아마 엄청 어려울 거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찻집 찾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리들이야 차를 잘 마시지 않으니 찻집을 가서 차를 마신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달라요. 이 사람들에게 차란 그냥 물. 더욱이 이 지역에서 마시는 것은 홍차. 밀크티도 일단 홍차를 기본으로 해서 만드는데, 여기는 우유도, 홍차도 많이 마셔요. 이 지역에서 홍차는 우리나라에서 보리차, 옥수수차 같은 위치에요.
물론 터키, 아제르바이잔 등 아시아 대륙의 서부권에서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찻집이 참 없었어요. 있기는 있는데 말이 좋아 찻집이지 거의 식당이었어요. 위구르인의 땅에 들어와서 이들의 활동 지역에서 제대로 된 찻집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왜 찻집이 별로 없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즈베키스탄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여기도 찻집 찾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히 사람들이 찻집이라고 알려는 주는데, 막상 가보면 식당일 확률이 98%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찻집을 찾아야겠지?'
친구도 찻집을 찾아서 쉬자고 하고 있었어요. 과연 찻집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그거 말고는 마땅히 할 것이 없었어요.
강렬한 쿠차의 색채는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어요.
"우리 저 버스 타고 다른 곳 갔다와볼까?"
"그러기엔 늦었다. 막차 끊기면 어떡할래?"
친구가 다시 기운을 차리자 버스를 타고 다른 곳에 가보는 것 어떻냐고 물어보았어요. 이제 5시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버스를 타고 먼 곳을 가는 것까지야 가능하겠지만, 역까지 다시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어요. 막차가 끊기면 거기서 엄청나게 비싼 요금을 물고 택시를 타고 오거나 걸어와야 했거든요. 지금 이 구시가지에서 기차역까지만 해도 10km가 넘었어요. 아무리 누웠다 일어나서 다시 살아났다지만 이 10km가 짐을 메고 걷기에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어요.
일단 찻집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거슬러 가서 다리 너머로 한 번 가보기로 했어요.
다리를 건너자 멀리 감시 초소가 보였어요.
"저거 시장 아니야?"
시장 안에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시장에 식당이 있다면 거기서 딱 차 한 주전자만 시켜놓으면 되지 않을까? 다리를 건너 쭉 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이 길에 찻집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단 1나노그램도 들지 않았어요. 기적을 바라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이렇게 무턱대고 직진을 하다가는 중국인 거주지역까지 넘어가버릴 거였어요. 최대한 앞으로 더 안 가기 위해서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시장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시장 입구에는 보안검색대가 있었어요.
옆으로 지나가려고 하자 할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며 반드시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어요. 당연히 가방에서 삑삑 소리가 났어요. 할아버지는 가방을 열어보라고 시켰고, 지시에 따라 가방을 열었어요. 할아버지는 가방 안을 쓰윽 쳐다보았어요. 가방 안에는 옷가지와 책들만 보였어요. 갑자기 할아버지가 저와 친구가 카메라를 갖고 있는 것을 보더니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사진을 찍었더니 이번에는 사진을 현상해서 달라고 했어요. 현상해서 드릴까 생각했지만 저나 친구나 지금 당장 사진을 현상할 방법이 없었어요. 계속 사진을 자기에게 달라는 할아버지께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 현상하게 된다면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어요.
여기는 의류 시장이었어요.
다른 것 혹시 파는 것 있나 계속 둘러보았지만 거의 다 여성 의류점이었어요.
공기가 정말 안 좋았어요. 먼지가 많이 날렸어요. 얼굴에 먼지가 달라붙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만약 여기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처음 온 시장이라면 친구가 매우 재미있게 보았을 거에요. 그러나 이제 친구도 이런 위구르인의 여성 의류를 많이 보았어요. 시장을 둘러보더니 재미없어했어요. 혹시 식당이 있나 돌아다니며 유심히 여기저기 바라보았지만 식당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시장에서 나와서 보니 바로 근처에 공원이 있었어요.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동상이 있었어요.
공원 가운데에는 시계탑이 있었어요.
"우리 여기에서 다시 누울까?"
"여기 누울 자리가 없다."
아까 여기를 찾았더라 하더라도 아마 툴툴대었을 거에요. 돗자리를 깔고 누울 자리는 없었거든요. 만약 돗자리를 깔고 누울 자리가 이 공원에 있었다면 바로 돗자리를 깔고 다시 드러누웠을 거에요. 그러나 이 공원의 통로는 넓지 않아서 돗자리를 깔 수가 없었어요. 풀밭에는 스프링쿨러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스프링쿨러가 설치된 풀밭이니 바닥이 젖어 있을 확률이 높았고, 설령 바닥이 말라 있다 하더라도 언제 스프링쿨러를 가동할지도 알 수 없었어요.
위구르인 모녀상이 있었어요.
노트북 컴퓨터를 하는 위구르 소녀상이 있었어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어요. 어두운 현실이 검은 화살이 되어 심장에 꽂혔고, 그동안 속에 담아놓고만 있었던 생각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공원에 동상이 있는 것이 뭐가 이상한 것이겠어. 지나치게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잖아. 지금 이 감정은 이곳을 여행하며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지쳐서 일어난 오작동일 거야.
벽에는 거대한 선전화가 여러 폭 그려저 있었어요.
벽화 사진을 하나씩 찍으며 앉아서 쉴 만한 곳을 찾아 걸어갔어요.
당연히 중국 정부가 규정한 잘못된 믿음에 대한 벽화도 있었어요.
그리고 이 그림을 본 순간.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죽여 패서라도 공부를 잘 하게 만들어야 할까.
아마 내가 교사의 학생에 대한 체벌을 제대로 경험해본 거의 마지막 세대일 거다. 저 말만 보고 저런 건 불가능하다며 당연히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그런데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저렇게 해서 성적 올리는 거 된다. 아마 내가 학교 교사의 학생에 대한 어마무시한 체벌을 겪은 거의 마지막 세대일 거다.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이 애들 따귀를 때려대었고, 5학년 되자 어지간한 기합은 다 받아봤다. 원산폭격, 한강철교, 인간 바베큐 등등. 초등학교가 이 지경이었으니 중학교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거다. 어떻게 학교 교사가 학생들을 패고 그랬다는 옛날 쉰 내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쨌든 죽여 패서 공부 잘 하게 만드는 것이 실제로 매우 가능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제대로 사용하기도 어렵고 부작용도 상당히 심하지만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한 금단의 방법이랄까.
공부를 하다보면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것들이 침략자, 점령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사용된다는 것을 목격할 때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래도 낫다. 민주주의를 절대 진리, 절대선 마냥 받들여대고 빨아대는 사람들 외에는 그래도 그것 자체에 대해 여러 각도로 보는 것이 문제되지 않으니까. 현재까지 인류가 발명해낸 정치제도 중 민주주의가 가장 나은 것이기 때문에 그냥 제일 좋은 것이라 하는 것이지, 누군가 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정치제도를 발명해낸다면 그때 가서는 민주주의 옹호론자들이 개인 독재 찬양론자처럼 비난받을 거다. 그냥 민주주의는 언제나 옳다는 교조주의적 입장에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 물론 이렇게 교조주의에 빠진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인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으면 바로 도덕적인 비난이 날아와. 이것은 정말로 종교의 핵심교리 같은 거야. 이상하고 왠지 꺼려지는 것을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납득하도록 도와주며 차근차근 생각을 바꾸도록 유도해주면 되는데, 대부분은 바로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못을 박아버려. 마치 공부 못하는 아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학생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말이야. 사실 인권이라는 것도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그 의미와 적용범위가 확대되어온 것인데,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버려. 무시를 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벌써부터 퇴마의식 당하는 귀신 들린 사람처럼 입에 거품 물고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 분명히 있을 거다.
강대국, 선진국이 약소민족, 후진국을 점령하고 착취할 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인권 신장'이다. 이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해도, 피압박민족이 해방을 원한다 해도 '우리는 이들의 인권을 신장시켜주고 있다'고 주장하면 마땅히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에 대해 거론하면 정말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60억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식민통치를 받던 그 35년. 일본이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미개하게 지내던 조선을 나름대로 근대화시켜놓았다. 그 목적이 수탈이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어느 정도 근대화시켜놓은 것은 맞지만 그 의도와 목적이 애초에 수탈이었기 때문에 고마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과연 조선 사람들이 제대로 된 자주적인 근대화의 의지와 역량이 있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고종과 명성황후가 증기 기관차도 발명하고 기관총도 발명하고 비행기도 발명하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논란이 있다고 치자. 일본의 여러 목적에 의해 조선 여성 인권이 신장된 것은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화학당이 있었다고 반박하려 드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이화학당도 결국은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이 1886년에 창설한 거다. 우리 민족 스스로 뭔가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근대에 한 것은 없다. 단연코 없다. 만약 일제 강점기가 없고 대한제국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면, 우리나라 여자들도 지금 다 장옷 뒤집어쓰고 '내 장옷이 패셔너블해, 네 장옷 아름다워, 이번 장옷 신상 너무 아름답지 않니' 이러고 있었을 거다. 진짜다. 왜냐하면 강제로 개화되기 이전에 '여성 인권 신장'이라는 개념이 없었거든. 고려 시대때는 남녀가 보다 평등했네 할 거라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때는 더욱 평등했다. '여성 인권 신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할 정도로 조선 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고, 조선보다는 당시 훨씬 여성 인권에 대한 개념이 있었던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면서 여성 인권이 그나마 향상된 거다. 물론 태평양 전쟁 터진 후 정신대, 위안부로 여성들을 끌고가 인권을 처참히 유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제 강점기 들어서 소수 여자들이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여자들이 서당에 다녔다는 기록이 있는가?
피지배민족 문제를 거론할 때 지배층이 여성 인권 신장 문제를 거론하면 반박할 방법이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인권 향상은 사회적 발전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만 해도 일제강점기 시절 '인권'에 대해서는 일본이 조선인을 열등한 민족으로 차별했다 하여 어찌 반박할 수 있지만 '조선 여성의 인권' 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발생한 정신대, 위안부 문제로 밖에 대응하지 못한다. 김활란, 노천명 등 친일 신여성은 잘 알려져 있는데 여성 독립운동가라면 유관순 누나 외에는 딱 떠오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슬람권에서 여성 인권 문제 심각하다. 아무리 이슬람에 대해 좋게 봐주려 해도 이건 어찌 옹호할 방법이 없다. 아주 속편하게 이건 이슬람 교리의 문제라고 간단히 입 나불대는 사람 많은데, 이것은 교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저발전 문제다. 그렇잖아도 실업자 득시글대고 제대로 된 일자리 별로 없는 그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여자에게 질 좋은 일자리가 돌아갈 거라 보는가. 몇몇 산유국 잘 산다고 무슨 이슬람권이 사회적 저발전이라 여성 인권 문제 심각하냐는 것들도 있는데, 석유와 천연가스는 증산한다고 고용인력 증가하지 않는다. 종교에 얽매여 저발전인 것이 아니라 저발전이기 때문에 종교에 얽매여 있는 거다. 인과관계는 분명히 확실하게 해야 한다.
분명 여성 인권 향상시켜야 한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 인권이 크게 침해받는 상태는 강대국들이 약한 민족들을 공격하기 위한 매우 좋은 구실을 제공한다. 사회적 저발전으로 여성 인권이 침해받는 상태라 강대국이 침공해 마음껏 학살하고 약탈해도 여학교 몇 개 지어주고 '우리 여성 인권 향상시켰어요'라고 하면 이들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져 버리거든. 분명 이에 대한 부작용은 엄청나게 크다. 그런 거 솔직히 누가 신경쓰나. 어쨌든 여성 인권이 향상된 것은 맞고, '파괴된 기존 규범들은 인권을 침해하던 것이었으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나쁜 것'인데.
공부 못하는 학생을 죽여 패서 공부 잘 하게 만드는 것과 똑같은 거다. 공부는 잘 하게 될 거야. 대신 나머지가 다 엉망이 되겠지.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각목으로 패고 발로 밟고 걷어차가며 공부시키는 것이나, 여성 인권이 침해받는다는 이유로 강제로 점령해 무력으로 히잡 뜯어 벗기고 여성 인권을 제외한 나머지 인권을 마구 침해해 전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이나 사실 그게 그거인 거다. 폭력 교사가 학생 성적도 올리고 일탈도 그만두게 했다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했던 것처럼, 여성 인권을 향상시켰다고 자신들의 폭압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어려운 문제다. 학생이 공부는 못하는데 시험은 코 앞인 경우인 것처럼. 시험이야 이번 시험은 어쩔 수 없고 다음 시험을 잘 보자고 할 수라도 있지. 여성 인권 심각하게 침해받는데 소녀에게 네가 죽을 때쯤 좋아지지 않을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단지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만약 진정으로 독립할 의지가 있다면,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알아서 여성 인권 향상에 많은 신경을 써야한다는 거다. 이런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 자체가 진정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제발 좀 여성 인권 좀 알아서 향상시켜!
마침 벤치 두 개가 비어 있었어요.
"우리 잠깐 벤치에 누웠다 가자."
친구에게 벤치에 누워서 잠시 쉬다 가자고 말한 후, 등에 맨 가방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고 의자에 드러누웠어요.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걸어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편했어요. 가슴이 답답했어요. 앞에 맨 가방에는 제 귀중품이 전부 들어 있어서 똑바로 누워 꼭 껴안고 있었거든요. 왜 저 그림을 보고 저 소녀상을 보면서 화가 치솟았을까. 잠시 두 눈을 감았어요.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했어요. 잠시라도 생각 자체를 꺼버리고 싶었어요. 사실 이 지역 상황은 저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여기는 그냥 여행으로 온 것 뿐. 제 인생에서 위구르 지역과 위구르인이 엮일 일은 아마 앞으로 계속 없을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이 지역에서 눈을 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엄청난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이런 문제를 워낙 많이 접해왔기 때문일 거에요. 지금도 외국인 무슬림 친구들이 있으니 이 문제에서 아주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구요.
20분 정도 누워 있었어요. 벤치에서 일어난 이유는 개미 때문이었어요. 누워서 눈 감고 조용히 쉬고 있는데 개미가 자꾸 몸 위로 기어올라왔어요.
"거기는 벌레 없어?"
"여기도 계속 개미 기어올라온다."
"우리 그만 가자."
"어디로?"
"찻집 가자. 찻집 가서 좀 쉬다가 저녁 먹게."
친구가 먼저 일어나서 다시 찻집을 찾아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저기 무슨 오래된 집이랑 모스크 있다는데 한 번 가보자."
"나 화장실 가고 싶어."
"모스크 안에 화장실 있어. 거기 갔다와."
이런 것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는 건가? 그냥 들어가자고 했다면 분명히 친구가 또 모스크 싫다고 입이 삐죽 나왔을 거에요. 그런데 아주 딱 좋은 순간에 친구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했어요. 화장실 가고 싶다고? 그러면 모스크에 있는 화장실 이용하면 돼! 친구가 모스크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동안 저는 모스크를 구경하면 되요. 이러면 둘 다 아무 문제 없어요.
게다가 모스크는 이 철문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었어요. 이 철문에서 왼쪽으로 살짝 돌아가면 모스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이 모스크의 이름은 삭삭 모스크 saqsaq meschit 였어요. 사전을 찾아보았지만 '삭삭'의 뜻을 찾지 못했어요. 표지판을 보면 이 동네 이름이 '삭삭'이래요.
"별 볼 일 없는 모스크네."
친구가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는 동안 모스크를 대충 살펴보았어요. 굳이 안에 들어가보지 않아도 될 거 같았어요. 여기에서 조금 더 가면 무슨 오래된 가옥이 한 채 있다고 했으니 그거 보고 나가서 다시 찻집을 찾아보면 될 거였어요.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야?"
"예?"
얼굴이 딱 굳은 위구르인이 저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았어요. 처음에는 중국어로 이야기했어요. 얼굴을 보니 위구르인이라서 우즈베크어로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여기 왜 들어왔어?"
"지금 여행중인데 구경하러 들어왔어요. 친구가 안에서 세수하고 있어요. 친구 나오면 갈께요."
위구르인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모스크를 대충 훑어본 후 본당 정면을 사진으로 찍으려고 하는 순간 왔기 때문에 모스크 본당 사진은 아직 찍지 못한 상태. 이 상황에서 모스크 본당 사진 찍으면 안 될 거 같았어요. 게다가 조금 전 공안 초소 사진이 카메라 메모리 카드 안에 있었어요. 공안 초소 사진을 찍고 나서 사진을 30장 정도 더 찍기는 했지만 버튼 꾹꾹 눌러서 보면 30장 정도는 금방 넘겨볼 수 있었어요. 공안 초소 사진을 찍은 게 걸리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어요. 괜히 모스크 사진 찍어도 물어보았다가 일을 크게 만들 바에는 그냥 이 모스크 사진을 안 찍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어요.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모스크였으니까요.
'여기 모스크 관리인인가? 여기 모스크 엄청 깐깐하게 관리하네.'
속으로 툴툴대고 있는데 이번에는 몽둥이를 든 공안이 와서 제게 중국어로 뭐라고 물어보았어요. 당연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못 알아듣고 멍하니 있는 것을 보더니 자기들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다시 제게 중국어로 무언가를 물어보았어요. 이번에도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제가 아무 말도 못 알아듣고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친구가 마침 세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어요.
"야, 무슨 일?"
"몰라. 이 사람들이 우리한테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더니 계속 중국어로 뭐라고 말하는데?"
그때 사복을 입은 사람이 하나 더 오더니 친구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카드 한 장을 보여주었어요.
公安
아주 선명하게 '공안'이라고 인쇄된 증이었어요. 친구는 유심히 그 카드를 살펴보았어요. 공안을 만나본 경험이 있는 친구는 이 증을 보여준 사람과 중국어로 말하더니 제게 여권을 이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했어요.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건가? 이제 벌금 왕창 물어야 하는 건가?'
순간 '아, 돈 엄청 날리겠네' 라고 생각하며 저와 친구의 여권을 사복을 입은 공안에게 건네주었어요. 공안은 비자를 확인하더니 여권 첫 페이지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고는 친구에게 중국어로 뭐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리고는 여권을 다시 돌려주었어요. 친구와 공안이 무언가 이야기하더니 친구가 여권에 있는 기차표를 공안에게 보여주었어요.
"야, 가자!"
친구가 짜증을 버럭 내었어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복 입은 공안이 여권 첫 페이지 사진을 찍어갔다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니었어요. 일단 친구를 따라 모스크에서 빠져나왔어요.
"내가 모스크 가지 말자고 했지?"
"뭔 일인데?"
"내일부터 라마단이니 절대 모스크 들어가지 말래. 모스크 위험하대. 그리고 혹시 우리에게 문제 터지면 자기가 우리 여권 사진 갖고 있으니 그거 갖고 추적해서 도움줄 거래."
뭐라 할까.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는 기분이었어요. 지금껏 가본 모스크가 아마 100개는 될 텐데 이렇게 모스크가 위험하다면서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경찰이 여권 사진까지 찍어가는 것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쿠차가 유독 감시가 심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냥 계속 기분이 영 찜찜하고 안 좋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겪으니 느낌이 확 달라졌어요.
"우리 빨리 찻집 찾아서 들어가게."
"찻집이 없잖아. 나라고 안 가고 싶겠냐."
"나 배터리도 별로 없어."
친구는 아주 물 만난 고기마냥 빨리 모스크에서 벗어나 찻집이나 가자고 안달이었어요. 친구의 핸드폰 배터리는 정말로 별로 남아있지 않았어요. 다음날 일정을 생각하면 반드시 많이 충전해놓아야만 했어요. 친구가 아까 그 공안에게 찻집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공안은 길 건너 쭉 걸어가면 찻집이 하나 있을 거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나 찻집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냥 적당히 허름한 식당 들어가서 차만 파냐고 물어봐야겠다."
다시 힘들고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이제는 '친구의 핸드폰 충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길 가는 사람을 잡고 찻집이 어디 있냐고 물어볼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는 대답, 아니면 차를 파는 일반적인 가게를 알려줄 뿐이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앉아서 우려낸 찻물을 마시는 그런 찻집은 없었어요. 이 상황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차만 파냐고 물어보는 것.
"차만은 안 팔아요."
아예 메뉴에 '차'가 없었어요. 식당에 들어가서 차만 마시고 나오는 것 역시 실패.
"이 안에는 뭔가 있지 않을까?"
안으로 들어가보았어요.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과 슈퍼마켓이 있었어요. 그나마도 거의 다 문을 닫은 상태였어요.
"식당 가서 밥 먹으면서 충전하자."
이제 저녁 6시 25분이었어요. 찻집 찾아 삼만리 할 시간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어요. 여기 태양의 일주운동에 따른 신장 시각으로는 저녁 먹기에 이른 시각이었지만 베이징 시각으로 본다면 저녁을 먹어도 되는 시각이었어요. 더 걸어봐야 아무 것도 없어보였어요. 육체적으로 지쳐가고 있었어요. 아까 식당을 보아둔 곳이 한 곳 있었는데, 거기도 여기에서 가깝지 않았어요. 그 식당은 아까 벤치에 누워서 잠시 쉬었던 그 공원 근처였거든요. 그 식당으로 가기로 한 이유는 그 곳에서 '따판지'를 팔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