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바람은 남서쪽으로 (2014)

바람은 남서쪽으로 - 04 인천국제공항에서 밤새기

좀좀이 2015. 1. 8.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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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너 비행기표 제대로 산 거 맞니?"

"예."

"비행기표 왜 그렇게 싸? 혹시 사기 당한 거 아니니?"

"아니에요. 제대로 산 거 맞아요."


어머니께 베트남 여행 간다고 전화드리고 비행기표를 43만원에 구입했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혹시 사기 당한 것 아니냐고 걱정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알아본 결과, 이 표는 그냥 평범한 비엣젯 항공의 표였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이것은 잘못 산 것도 아니고, 사기도 아니고 그냥 딱 제 값 주고 산 것이라고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서는 베트남이 좋으면 나중에 가족 여행으로 다녀오자고 하셨어요.


"너 비행기는 몇시니?"

"오전 11시 5분 출발이요."

"그러면 거기서 몇 시에 출발해야 해?"

"아마 첫 차 타야할 거에요."

"그러면 차라리 공항에서 밤을 보내는 게 낫지 않겠니? 아침에 꽤 추울 텐데..."


저 역시 공항에서 밤을 샐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제게 가장 힘든 것은 꼭두새벽에 일어나기. 지금까지 스스로 꼭두새벽에 제대로 일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면 초저녁에 잠을 자고 밤을 새버리곤 했지요. 어머니께서도 제가 한 번 잠이 들면 절대 못 일어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차라리 공항에 가서 밤을 새라고 권하셨어요. 더욱이 출발할 날인 12월 18일은 한파가 예정되어 있었구요. 베트남에 갈 건데 캐리어는 안 가져가서 수납공간은 부족했어요. 게다가 제가 가지고 있는 옷은 한파에서 밖에서 견딜 만큼 두꺼운 옷은 없었어요. 옷을 잘 사지 않는 것도 있었고, 두꺼운 옷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거든요. 어차피 겨울에는 거의 실내에서 있어요. 밖의 추운 거리를 돌아다닐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잠깐만 추위를 참으면 되었고, 그러다보니 굳이 두꺼운 옷을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은행에 가서 달러를 환전했어요. 이번에 준비해간 돈은 500달러. 여행 경비를 얼마나 준비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어요. 최소한 터키라면 넉넉잡아 하루 100달러로 계산했을 거에요. 하지만 이번에 가는 곳은 동남아시아. 그리고 물가가 저렴한 베트남. 하루 100달러를 준비해가면 너무 많을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하루 50달러씩 계산했다가 너무 적으면 그것도 문제일 것 같았어요. 여러 번의 여행 경험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어요.


너무 아끼려고 들면 오히려 돈을 더 쓰게 된다.


싼 것은 싼 이유가 있기 마련이에요. 게다가 여행은 시간과 체력의 문제이지, 돈 문제가 아니에요. 어차피 여행은 돈을 쓰러 가는 것이고, 뭔 짓을 하든 왕복 비행기표만큼의 돈을 아낄 수는 없어요. 참고로 저 돈에는 숙박비까지 포함되어 있었어요. 달러는 모두 빳빳한 것으로 챙겼어요. 개발도상국으로 갈 수록 낡은 달러에 대한 취급이 안 좋아지는 현상이 있거든요. 베트남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한 후에 '어이쿠' 하는 것보다 그냥 처음부터 빳빳한 새 것으로 챙겨가는 게 나으므로 환전할 때 빳빳한 달러로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환전을 하고 집에 가서 쉴까 고민하다 시간이 애매해서 바로 학원으로 갔어요.


"어...추워!"


학원 안은 난로를 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뜻했지만, 밖은 너무나 추웠어요. 다다음날 베트남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기쁘기는 했지만, 날이 더욱 추워진다는데 어떻게 새벽에 나가야할지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집에서 살고 있다면 그냥 새벽에 나가면 되겠지만, 혼자 자취를 하다보니 집에서 사는 경우와 달리 고려해야할 거리가 조금 더 있었거든요.



일단은 공부를 하려고 컴퓨터를 켰어요. 비록 3일간 학원을 결근할 것이기는 했지만 딱 애매한 때에 가는 것이라 크게 준비해놓고 할 것은 없었거든요. 역시 공부는 꼭 이럴 때에만 잘 되었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집중이 되지 않았는데, 정작 수업 들어가야할 시간이 다가오니 집중이 잘 되기 시작했어요. 저녁 6시가 되자 수업이 시작되었고, 매우 평온하게 학원 업무를 잘 마쳤어요.


"여행 잘 다녀오세요!"

"여행 잘 다녀올께요!"


학원 선생님들과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어요.


18일 새벽에 출발할 것인가, 17일 밤에 인천 공항으로 가서 밤을 새고 출국할 것인가?


고려해야할 것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첫째, 18일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가. 11시 5분 비행기였기 때문에 공항에는 늦어도 9시까지는 도착해야 했어요. 의정부에서 인천공항까지 덜 춥고 안정적으로 가는 방법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방법인데, 이 경우에는 2시간+a 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렇다면 일어나야하는 시각은 5시. 그리고 집에서 나가야하는 시간은 늦어도 6시.


두 번째 고려 사항은 바로 빨래. 특히 이번에는 8일간 집에 없을 것이었으므로 필히 이불 빨래를 하고 가야 했어요. 이렇게 장기간 비울 때가 아니라면 이불 빨래 할 시간이 거의 없거든요. 물론 손빨래로 하는 것은 아니고,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리기만 하는 것이라 빨래 자체는 아무 때에나 할 수 있었어요. 문제는 이불을 빨면 당장 바닥에 깔고 잘 것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다보니 평소에는 이불 빨래를 잘 할 수 없었어요. 특히 겨울에는요. 보일러를 아주 빵빵하게 틀고 하루 버티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면 밤에 바닥이 식을 때 추워서 결국 잠에서 깨고, 일어나면 몸이 찌뿌둥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불 빨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어요.


여기에 덤으로 한파까지 찾아왔어요. 18일 새벽 - 제가 지하철이든 버스든 공항 가기 위해 무언가를 타러 나가야할 때 기온은 영하 14도. 캐리어를 들고 갈 것도 아니고, 인천공항에 돈을 내고 옷을 맡길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옷을 얇게 입고 나가야 하는데, 옷을 얇게 입고 이때 밖에 나간다면 베트남 가기 전에 감기 걸릴 것 같았어요.


'진짜로 공항 가서 밤을 샐까? 그런데 공항가서 밤새기에는 시간이 너무 긴데...'


일단 몇 시에 잠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지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짐 싸는 거야 금방 싸는 것이고, 빨래야 어쨌든 세탁기가 해주는 것이니 2시간. 새벽까지 할 거 하다 늦게 자서 아주 늦게 일어난다면 공항 가서 밤 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당연히 잠은 매우 늦게 잤어요. 외국 친구들과 채팅하며 공부를 하다보니 결국 새벽 6시가 되어서야 잠을 자게 되었어요.


'딱 12시간만 자야지.'


새벽 6시에 잠들어서 12시간 자면 오후 6시. 일어나서 세탁기 돌리고 짐 싸고 씻고 준비하고 나가면 밤 9시. 공항 도착하면 밤 11시. 베트남은 한국과 2시간 시차가 있으니 베트남 현지 시각 오후 4시면 딱 기상한지 24시간. 그 전에 비행기에서 눈 좀 붙이면 야간 슬리핑 버스 탈 때까지는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잘 버틸 수 있을 것이고, 슬리핑 버스 타서 바로 골아떨어지면 다음날부터 나도 아침형 인간.


완벽한 시나리오였어요. 여행 시작 전에 공항에서 긴 시간 버텨야하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어차피 친구가 숙소 예약을 다 해놓았기 때문에 숙소를 찾으러 헤맬 필요가 없다보니 첫날 좀 찝찝하기는 하더라도 후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부터 하면 될 일이었어요.


아무리 많이 잔다 해도 24시간 잘 일은 없을 테니 마음 놓고 잠들었어요.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오후 2시.


부우웅 부우웅


모든 것은 핸드폰 진동 때문에 어그러졌어요. 어머니께서 여행 전날이라 전화하셨는데 이 전화 때문에 잠을 깨어버렸어요.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정신은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어요. 전화를 끊고 나자 잠이 완벽히 깨었어요. 다시 자려고 누웠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어요. 잠을 자기 위해 일부러 옆으로 누워 컴퓨터를 하고, 책도 보았지만 눈만 아프고 오라는 잠은 오지 않았어요.


"아...망했다..."


공항에서 장시간 대기하며 밤을 샌다는 것은 피곤한 일. 여행 시작에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제가 아침형 인간이었다면, 그리고 한파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새벽에 일어나서 씻고 나가는 쪽을 택했을 거에요. 단지 그게 안 되니까, 한파가 찾아왔으니까 공항에서 밤을 새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오후 2시에 잠이 완벽히 깨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어그러져버렸다는 것이 바로 계산되었어요. 이 시각에 일어났고, 자려고 이렇게 노력해도 잠은 오지 않으니 결국 평소와 마찬가지로 새벽까지 정신은 말똥말똥.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어요. 정작 씻고 나가야할 새벽에는 미친 듯이 졸릴 테고, 이때 잠깐 눈이라도 감았다가는 비엣젯 항공 비행기는 바이바이.


결국 일어나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노트북 가져갈까?'


긴 밤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트북이라도 가져가서 시간을 버티는 것이 나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노트북이 고장나거나 분실해버린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일단 노트북은 보류하고 다른 짐부터 꾸렸어요. 겨울 외투에서 안감을 떼어냈어요. 일단 베트남 현지에서는 가을 외투를 입고 돌아다닐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한파가 찾아왔는데 가을 외투만 입고 공항 가는 것은 무리라서 속에 겨울 외투 안감을 입고 가기로 했어요. 겨울 외투 안감은 잘 접어서 비닐 봉지에 넣고 공기만 요령껏 잘 빼내면 부피가 티셔츠 수준으로 줄어들거든요. 마치 이불을 짐으로 부치기 위해 쌀 때 비닐봉지에 넣고 청소기로 바람을 빼서 부피를 확 줄여버리는 것처럼요.


그 다음 해야할 일은 대청소. 방 전체를 싹싹 쓸고 닦고 치웠어요. 이렇게 치운 후 화장실 청소를 했고, 마지막으로 세탁기를 돌렸어요.


빨래가 다 끝난 후, 시계를 보니 오후 7시였어요. 공항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각. 밖에 나가서 저녁을 사 먹고 올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 외출복 다 빨아버렸지!


그래서 책이나 조금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역시나 떠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공부가 미친 듯이 잘 되었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해석이 되지 않던 문장들도 보자마자 그 구조가 딱 눈에 띄었고, 인터넷은 왜 이렇게 잘 되어서 사전 검색하는 게 빨리 빨리 잘 되는지 신기방기할 정도였어요.


결국 방에서 밍기적거리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인천공항을 향해 출발했어요.



안 돼!


간발의 차이로 지하철을 놓쳐버렸어요. 집에서 5분만 일찍 나왔다면 충분히 탈 수 있는 지하철이었는데 그 5분의 차이로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딛는 순간 지하철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어요. 다음 열차는 얼추 10시 30분 도착. 하지만 이 열차는 스믈스믈 기어오고 있었어요.


"아, 왜 안 와!"


전광판에 뜬 1호선 일반 열차는 결국 K1301 인천 급행 열차에게 추월당했어요.


'그래도 급행이라 다행이다.'


다행이기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


이 1호선 소요산발 K1301 인천 급행 열차는 구로까지는 일반 열차와 똑같이 달리는 열차. 지하철역에서 10분 넘게 벌벌 떨며 탑승한 10시 38분 인천 급행은 말이 좋아 인천 급행이지, 저는 진짜 인천을 가는 게 아니었으므로 일반 지하철을 탄 것이나 다름 없었어요. 뭔가 일이 제대로 망했다는 예감이 들어서 하철이 어플을 켜서 서울역 공항철도 시간을 확인해 보았어요.


23시 38분 공항철도 인천국제공항 막차


이것을 놓치면 답이 없어지는 상황. 만약 이것을 놓쳐버린다면 의정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정말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릴 것이었어요. 차선책을 알아보니 서울역에서 인천공항 가는 심야 버스가 하나 있기는 했어요. 23시 38분 공항철도 인천국제공항 막차를 놓쳤을 경우 대처 방법을 떠올려보고 찾아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어요.


1번. 남대문 야시장 구경하다 새벽에 심야 버스 타고 이동. 심야 리무진이 새벽 1시 20분에 있다고 함.

2번. 5호선으로 갈아타고 김포공항 쪽으로 최대한 달라붙은 후, 피씨방 가서 밤을 새고 새벽에 김포공항 가서 이동.


아...강제 남대문 야시장 구경하게 생겼네...


우리의 서울 지하철 1호선은 아주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어요. 수호지 양산박 같은 1호선은 통이 큰 영웅호걸처럼 여유롭고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고, 이날 따라 유독 신호대기에 지하철로 돌진하는 영웅호걸들 덕분에 문도 한 방에 닫지 못하고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정시 도착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어요. 한파만 아니라면 남대문 야시장 구경 하고 인천 공항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겠지만, 지금은 한파.


'5분만에 환승해야 한다!'


예전 친구와 남해군 갈 때 고속버스터미널역 환승보다 더 힘든 일이었어요. 서울역에서 1호선-공항철도 환승은 서울역을 완벽히 관통해야 하고, 1호선 서울역을 완벽히 빠져나가는 것과 공항철도 서울역 땅굴을 기어들어가는 것 모두 해야 했거든요.


역시나 1호선은 연착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상 도착시간보다 2분 늦었다는 것이었어요. 예상 소요 시간이 52분인데, 54분 걸렸어요.


하철이 어플이 알려준 대로 1호선 1번칸 2번문에 서 있다가 지하철이 멈추자마자 열심히 뛰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시간이 늦어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뛰어가기에 나쁘지 않았어요. 서울역 들어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빠르게 뛰어올라간 후, 서울역 안으로 들어가서 절반쯤 달리니 숨이 찼어요.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어요. 다시 에스컬레이터가 나오자 여기부터는 빠르게 걸어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정신없이 달리고 빨리 걸은 덕분에 공항철도 서울역 플랫폼에 섰을 때 시각은 11시 37분. 플랫폼에 도착하자 마자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방송이 역사 안에 울려퍼졌어요.


"아...내가 해냈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시간 딱 맞추어서 지하철을 타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2014년 12월 18일 밤 12시 36분.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어요.


- 인천 공항 사진 보여줄 수 있어?


이라크인 친구가 전에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지하철역을 빠져나가며 사진을 하나씩 찍으려 했지만 막차이다보니 역무원이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몰아내었어요. 지하철역 내부는 문을 닫기 위해 불도 하나씩 끄고 있어서 어두침침했어요.


'여기는 나중에 귀국해서 사진으로 찍든가 해야겠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니 인천공항이었어요. 밖으로 나갈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옷이 한파에 비해 얇았지만 춥지는 않았어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어요. 저처럼 공항에서 밤을 새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어요. 하지만 워낙 수가 적어서 실상 아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이런 곳도 있었나?


지하철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마 딱 한 번 타본 적이 있었을 거에요. 예전에 친구가 필리핀으로 어학연수 간다고 했을 때 배웅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인천공항 갈 때 지하철을 타고 간 것은 이번이 처음. 집으로 돌아갈 때 그냥 스쳐가며 보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출발을 위해 온 것이라 하나하나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살펴보았어요.



아직도 비행기가 뜨는구나!


비행기 수속, 탑승을 알려주는 전광판에는 아침 9시대까지만 나와 있었어요. 제가 타고 가야 하는 비행기는 11시 5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직 여기에 뜨지 않았어요. 전광판을 보는 순간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요.


'여기에서 밤을 샐까?'


주변을 둘러보니 밤을 새도 괜찮게 생기기는 했어요. 그러나 플러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어요. 긴긴밤을 보내려면 플러그는 필수였어요. 일단 아침에 같이 가는 친구와 연락을 해야 했어요. 긴 밤을 멍때리며 보내기 싫어서 노트북을 들고 왔는데, 이 역시 플러그가 있어야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었어요. 이와 같은 플러그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여기가 인천공항이라는 것은 확실한데 뭔가 매우 어색했어요. 지금껏 전혀 보지 못한 곳이었어요.


'내일 수속하기 편하게 여객 터미널 가서 있어야지.'


바로 위로 올라가면 인천공항 여객 터미널이 나오겠지? 위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여객 터미널은 없고, 여객 터미널로 가는 길이라는 표시만 있었어요. 그렇게 표시를 따라가다보니...



'인천 공항에 이런 것도 있었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중에 새로 늘여놓은 건가?'


인천 공항 처음 와 본 사람처럼 어리둥절. 인천 공항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를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


이 통로를 보자 갑자기 확 떠오르는 것이 있었어요.


http://zomzom.tistory.com/125


몰타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때였어요. 몰타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로마에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으로 하루 만에 이동을 하고 샤를 드골 공항에서 밤을 새어야 했었어요. 샤를 드골 공항에서 내려서 짐을 찾고, 아시아행 비행기를 타는 터미널로 이동할 때 이런 통로를 통과했었어요. 그때는 정말 피곤하고 졸리고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면서 아시아행 비행기를 타는 터미널로 이동했어요. 이동하면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이 큰 공항이라더니 정말로 매우 크구나!'라고 감탄했었어요. 확실히 크기는 크더라구요.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해외여행을 하고 싶으면 영어 공부를 하라고 하시면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 가면 쉴 새 없이 비행기 안내 방송 나오는데 영어 못 알아들으면 너 비행기 못 찾아서 비행기 못 타'라고 말씀하셨었어요. 그 말씀이 떠올랐던 그 밤.


그 때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차이라면 그때는 한국 귀국길이었고, 지금은 한국 출국길. 하지만 밤을 샌다는 것은 공통점. 공항에 사람이 없다는 것도 공통점. 두 경험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원소가 두 개는 있구나.


통로를 빠져나오니 드디어 제가 알고 있던 그 인천 공항 모습이 나왔어요.



인천 공항에서 크리스마스라고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무대만 덜렁 있을 뿐이었어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귀국장은 정말로 한산했어요. 이쪽에서는 밤을 새는 사람들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그나마 귀국장이 있는 층에서 사람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라면 흡연실 정도였어요. 이쪽에서 밤을 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했지만 왠지 추울 것 같았어요. 의자도 등받이가 없어서 불편해 보였구요. 출국장 쪽 자리가 없다면 여기에서 밤을 보내겠지만, 출국장 쪽에 자리가 있다면 출국장 쪽에서 밤을 보내고 싶었어요.


밥이라도 먹을까?


생각해보니 긴 밤을 보내야 하는데 먹은 것이 거의 없었어요. 플러그를 사용할 수 있는 자리를 잡아야하는데, 만약 그런 자리가 많이 없다면 한 번 앉으면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앉아서 글을 쓰든 졸든 간에 일단 무언가 먹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햄버거를 먹으러 갔어요. 햄버거 가게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야간에 커피, 햄버거를 사러 온 인천 공항 직원들도 있었고, 햄버거 가게 안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저는 햄버거 가게 안에서 밤을 샐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햄버거만 빨리 먹고 출국장으로 올라갔어요.


인천 공항에는 플러그 자체는 상당히 흔했어요. 입국장 층에도 있었고, 출국장 층에도 있었어요. 출국장은 각 부스 사이 좌석들에 플러그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여기서 밤 새는 사람들 은근 있네?"


자리가 모두 찬 것은 아니었지만, 플러그가 있는 쪽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이날, 인천 공항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인들이었고, 한국인들도 있었어요.



플러그를 사용할 수 있는 자리는 딱 한 자리 있었어요. 자리를 잡자마자 플러그에 노트북과 핸드폰을 꽂았어요.


무엇을 할까?


컴퓨터로 카카오톡과 라인을 켰어요. 일단 밤에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대화하기. 마침 후에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잠을 자고 있지 않아서 대화하기 시작했어요.


- 베트남에서 흥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워낙 '베트남에서 흥정을 해야 한다, 베트남 사람들이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 같은 말을 많이 듣고 읽어서 친구에게 물어보았어요.


- 상인이 부른 가격의 50% 가격이 적정가야. 그런데 너는 외국인이니 60-70% 정도에 살 수 있을 거야.


뻔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친구에게 한 가지 더 물어보았어요.


- 흥정할 때 베트남어 해야 해?

- 응! 흥정할 때 아는 베트남어 최대한 많이 이야기해야 해. 그래야 상인이 네가 베트남에서 지낸 시간이 조금 되어서 시세를 안다고 생각하거든.


아...그러고보니 나 베트남어 숫자 몰라...


1학년 1학기 베트남어 교과서에 베트남어 숫자는 나오지 않았어요. 딱 1,2,3까지만 알았어요. 못, 하이, 바...이것으로는 절대 흥정 불가. 어차피 여행을 위한 것이니 숫자만 알면 나머지는 어찌어찌 될 거야. 하지만 외워야하는 숫자는 외우지 않고 그 시간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여행기를 썼어요.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못 올릴 것이니 예약 발행을 많이 걸어두었어요.


이때 제가 사는 곳인 의정부의 기온



정말 공항 와서 밤을 새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온도였어요. 인천 공항 내부는 따뜻해서 밖이 얼마나 추운지 잘 알 수 없었어요. 밖에 나간다면 얼마나 추운지 잘 알 수 있었겠지만, 굳이 나가서 찬 바람을 맞고 싶지는 않았어요.


조용한 공항. 하지만 뒷자리에서 누군가 크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어요. 누가 이렇게 우렁차게 코를 고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 남아시아 사람 하나가 의자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었어요.


뒷 자리 남아시아인이 코 고는 소리를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시간은 매우 잘 흘러갔어요. 공항에 사람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어요. 조용했던 공항은 북적이기 시작했고, 어느덧 아침 8시가 되었어요.



어둠이 사라지고 찬란한 햇볕이 인천 공항을 비추고 있었어요. 드디어 떠날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구나! 공항 사진을 찍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가니 꽤 많이 추웠어요. 하지만 괜찮았어요. 공항 밖에 오래 머무를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이제 곧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 그저 기쁘기만 했거든요. 오히려 이렇게 추울 때에 따뜻한 남쪽의 나라로 떠난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운 추위가 오히려 저를 기쁘게 만들었어요.


잠시 후. 친구가 공항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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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고로 열차 시간표는 http://www.seoulmetro.co.kr/ 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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