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시간을 뒤섞어 (2014)

시간을 뒤섞어 - 13 에필로그

좀좀이 2014. 9. 2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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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반성문.


여행기를 쓰면서 반성을 하기로 했어요. 가이드 여행을 어떻게 즐겨야하는지 깨달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기에는 민망했어요. 이미 알고 있었고, 항상 여행가기 전에 하던 것이었으니까요. 처음 계획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가이드 뒤만 졸졸 따라다니자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가서 보니 가이드가 대동하는 패키지 여행도 여행이었어요.


가이드가 대동하는 패키지 여행에 대한 부정적인 말은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어요. 자유가 없고 남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무슨 여행이냐고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번 대만 여행은 분명 자유도가 높았어요. 화리엔과 예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이드 아주머니께서 주어진 시간 중 절반 정도는 설명해주시며 데리고 다니셨고, 나머지 절반은 알아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집결 시간에 모이라고 하셨어요. 화리엔은 정말로 빡빡한 일정에 흔히 말하는 그 '가이드 대동 패키지 여행'이었고, 예류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시간이었어요. 이것은 가이드 아주머니께서 노련하신 것도 있고, 타이완이 치안이 좋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해요. 만약 정말 치안이 안 좋은 곳이라면 이렇게 자유로이 여행객들을 풀어놓을 수는 없었겠지요.


시간을 무한정 자유롭게 누릴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어요. 그 대신 좋은 점도 있었어요. 평소 여행 같았다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것들도 가이드 아주머니의 도움 덕택에 꼼꼼하게 볼 수 있었어요. 사실 배낭여행을 하다보면 궁금하기는 한데 그냥 '그러려나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많아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은 자세이지만, 이왕 궁금한 것에 대해 알게 되면 더 좋지요. 그리고 구경에서 적당히 완급조절을 하게 해서 일단 중간 정도 수준의 관람은 보장이 되요. 개인의 선호도 중요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들의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한데, 처음 가보는 곳에서 이런 완급조절을 잘 해내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아요. 사람이라도 없으면 냅다 달리듯 대충 한 번 보고 다시 한 번 돌아가며 완급조절하며 보는 방법도 있지만, 사람 많은 관광지에서는 한 번 보는 것이 끝인 경우가 많아요. 현장에서 이것저것 잘 듣고 배울 수도 있구요. 그리고 나름 절제의 묘미도 있어요. 제한된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때 최대한 만족을 즐기기 위해 계속 머리를 굴릴 필요가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가이드 대동 패키지 여행을 즐겁고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은 딱 두 가지에요. 첫 번째는 여행 가기 전에 이것 저것 찾아보며 가이드에게 물어볼 질문 3개만 준비하는 것. 정치적인 질문은 상대가 매우 껄끄러워할 수 있으므로 정치적인 질문은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좋아요. 직설적인 정치적 질문은 대답하기 매우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요즘 여기 물가에 사람들이 만족해하냐' 등등 우회적으로 물어보는 방법이 있어요. 시시껄렁하다고 판단되는 일상생활 관련 질문도 좋아요. 사실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심각한 이야기들보다 오히려 시시껄렁한 것 같은 현지인들의 일상생활 이야기들을 사람들은 더 좋아해요. 사실 현지인들의 일상생활 이야기는 오히려 진짜 현지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것들이거든요. 기본 예절이나 풍습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은 많지만, 왜 그런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요.


두 번째는 가이드가 설명할 때 집중해서 잘 듣고, 가이드와 여러 잡담을 하며 최대한 많은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에요. 가이드는 현지와 외지인 사이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와 같은 존재에요. 얼마나 많은 문을 열어줄 수 있느냐는 가이드들의 경험과 연륜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어요. 영어가 잘 통하지 않을 수록 여행자들 사이에서의 정보와 현지인들 사이에서의 정보의 차이는 매우 커져요. 그리고 여행자들에게 말해줄 필요를 아예 못 느껴서 말해주지 않는 것들도 많아요.


결론적으로 초등학교 현장학습 떠난다는 기분으로 가면 이쪽도 매우 재미있고 매우 많은 것을 얻고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이 되는 것이에요. 준비한 만큼 얻고 돌아오는 것은 배낭여행이나 가이드 대동 패키지 여행이나 똑같았어요. 단, 가이드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여행 전체의 질이 결정된다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요. 저는 제가 생각해도 이번 여행은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은 다른 관광객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출국게이트로 들어가며 모두가 웃으며 가이드 아주머니와 악수를 하고 기분좋게 떠날 수 있었거든요.


반성하는 자세로 여행기를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여행기 작성이 반성하는 자세로 삼보일배하는 기분이었다.


기록해놓은 것 없음. 사진 찍은 것도 거의 없음. 모든 이야기를 완벽히 기억해내는 것도 아님.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얼마 쓰지 않아서 그냥 막막해졌어요. 일단 기록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여행사에서 받은 일정표와 여행 돌아와서 구입한 가이드북 한 권이 전부였어요.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놓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어요. 사진 자체도 매우 적게 찍었고, 그나마도 버스 좌석을 안 좋은 방향으로만 아주 잘 골라앉는 바람에 중요한 장소를 버스에서 구경만 하고 사진은 못 찍은 곳이 많았어요. 이것은 특히 화리엔에서 매우 심했어요. 거기에다 모든 이야기를 완벽히 기억해내는 것도 아니었어요. 대만 역사 및 지리에 대해 잘 모르니 설명을 아무리 열심히 듣는다고 해도 기억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중국 대륙에서 완벽히 철수하기 이전까지의 타이완섬의 역사,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후퇴한 이후의 타이완 역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후,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후퇴하고 중국 대륙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실패하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등소평이 정권을 잡으며 '흑묘백묘론'에 따라 개혁개방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세계사 시간때 배운 것의 전부. 게다가 타이완 역사 및 지리를 순서대로 들은 것이 아니라 가는 곳에 대한 설명을 하나씩 들은 것이었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이 된 부분들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래도 열심히 썼지만, 점차 뒤로 갈 수록 너무 쓰기가 힘들어졌어요.


'확 카테고리 없애버리고 일반 글 속으로 퍼트려버릴까?'


타이완 여행기를 쓰는 내내 저 생각을 매우 많이 했어요. 그냥 '타이완 여행기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저 생각이 꼭 몇 번씩 떠올랐어요. 나날이 여행 당시의 감상은 무뎌져갔고, 정말 최후의 방법으로 사진으로 어떻게 해보려 해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이 마땅히 없어서 몇 글자 써보려고 하다가 접어버리기 일쑤였어요. 그나마도 일이 많아지고 글감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자 그저 '타이완 여행기 써야 하는데...'라는 생각만으로 그치는 나날이 이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2월말에 다녀온 타이완 여행에 대한 여행기는 8월말까지 질질 끌게 되었지요.


'그냥 솔직하게 쓰자.'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것은 7월 중순,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였어요. 반성하는 자세로 쓰기로 했으니 거기에 충실하게 쓰기로 했어요. 기억 안 나고 잊어버리고 잘 모르고 쓸 말 없는 것은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그냥 그대로 쓰고, 쓰면서 다시는 이렇게 준비없이 여행가지 말자고 생각을 굳히자 그때부터 다시 대만 여행기를 작성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8월 18일 오전 9시 ??분. 이 괴로웠던 여행기 작성은 끝을 내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대만 여행기 뒷 이야기.


"저 돌아왔어요."

"대만 어땠어?"

"정말 좋았어요!"


친한 형에게 대만에서 돌아왔다고 메신저를 통해 메세지를 보냈어요.


"형, 일본어 하나도 안 통하잖아요!"

"미안. 나도 누가 대만에서는 일본어 어느 정도 통한다길래 정말인줄 알았어."

"아...진짜...형, 이거 완전 허위정보 유포 아니에요? 설마 악의적인 허위정보 유포?!!!"

"아니라니까. 진짜 타이완에서 일본어 안 통하나보네..."


채팅창에 대만을 좋아하던 친한 동생도 참여했어요.


"대만 잘 다녀왔어요?"

"응. 대만 정말 최고더라!"

"제가 좋다고 추천할 때에는 관심 없으니 대만 이야기 하지 말라면서요?"


친한 동생이 대만에 다녀오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대만 관광객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저와 친한 형에게 타이완이 좋다고 열심히 설파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타이완도 결국 중국이고, 중국 자체에 전혀 관심 없다고 짜증을 내었어요. 친한 동생은 내심 다같이 중국어 공부를 하는 것을 원했지만 동생이 타이완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하지 말라고 말을 막고는 했어요.


"미안. 가보니까 정말 좋더라. 이제 중국어도 공부하려구."


진심으로 사과했어요. 솔직히 타이완이 이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요.


"음..."

"쟤가 진짜로 사과하잖아. 받아줘."

"예."


셋 중 중국어를 처음 시작한 것은 친한 형이었어요. 친한 형이 중국어 공부하자고 할 때 친한 동생은 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저는 성조 언어 자체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 친한 형이 중국어에 관심이 없어진 후, 친한 동생이 중국어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하고 저와 친한 형에게 같이 중국어 공부 하자고 꼬드기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둘이서 합세해서 동생을 구박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저도 중국어에 관심이 생겨서 중국어 공부를 해볼까 생각하며 친한 동생과 함께 친한 형에게 다시 중국어 공부를 하자고 꼬드기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나 타이완 가서 게이 워 이거 말했어."

"오오! 역시 형이네요!"

"그리고 워 쓰 한궈도 했다."

"아니, 워 쓰 한궈가 뭐에요!"

"워 쓰 한궈 맞잖아."

"형이 무슨 루이14세에요? 짐이 곧 국가이게요? '워 쓰 한궈'라고 하면 '나는 한국이다'라는 말이에요."

"그래도 타지키스탄에서는 '워 한궈'라고 했는데 이제는 '워 쓰 한궈'까지 왔어."

"형, '워 스 한궈런'이에요."

"응? 형이 타이완식으로 발음하려면 '워 쓰'라고 해야 한다던데?"

"타이완 애들도 다 권설음 해요. '워 스'를 '워 쓰'라고 하는 건 말레이시아 애들이나 그래요."


친한 형이 친한 동생의 설명을 듣고 그제서야 제게 타이완도 권설음을 하므로 권설음을 제대로 해야 한다며 열심히 권설음 발음 트레이닝을 시도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미 입에 붙어버렸어요. 친한 형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통해 저는 타이완에서 일본어를 했고, 저는 뛰어난 학생이라 청출어람하여 친한 형님의 가르침인 '워 쓰 한궈런'에서 더 나아가 당당히 '워 쓰 한궈'를 외쳤어요. 예, 제가 곧 한국입니다.


서점에 가서 중국어 교재를 구입해왔지만 진도는 지지부진했어요. 일단 번체로 공부하고 싶었는데 시중 판매중인 중국어 교재는 모두 간체였어요. 친한 동생이 성조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바빴기 때문에 저를 도와주지 못했어요. 사실 4성조의 구조는 고등학생때 알고 있었어요. 친구가 갑자기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 중국어를 독학해보겠다고 책을 구입해왔길래 몇 장 거들떠본 적이 있었는데, ma 를 가지고 4성조가 어떻게 되는지 설명이 나와 있었거든요. 솔직히 4성조가 어떤 구조인지 그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그게 구분도 안 되고 하려고 해도 안 되니까 문제이지요.


"워 쓰 한궈."

"형, 그거 말련 애들 발음이라니까요. 하지 마요. 그리고 '워 스 한궈런'이라니까요."

"이건 다 형 탓이야. 워 쓰 한궈."

"참 싫네요."


친한 동생에게 장난으로 '워 쓰 한궈'라고 말할 때마다 동생은 매우 싫어하며 타이완 사람들도 권설음 하니까 '워 스 한궈런'이라고 말하라고 했어요.


이래저래 일이 많아지고 여행기도 미루기 시작하며 중국어 공부도 '니 스부스 한궈런'에서 끝나버렸어요. 그렇게 평소 하던 일과 공부를 계속하던 어느 날. 두근두근우체통 어플에 엽서가 왔어요.


"타이완?"


타이완 사람이었어요.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한국어를 잘 하지 못했어요. 저도 중국어 공부를 혼자 하고 있는데 중국어 거의 모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서로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했어요. 비록 영어로 대화하지만 타이완 사람과 메신저로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신기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과 타이완이 제가 느끼기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영어로 이야기하다 가끔 '你 like 這個嗎。' 이런 식으로 메세지를 보내기도 했어요.


"형, 선물이요."

"응? 무슨 선물?"



친한 동생이 준 선물은 바로 타이완의 초등학교 국어책이었어요. 제가 외국 교과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타이완에 놀러 갔다 오면서 선물로 사온 것이었어요.



삽화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이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저도 몰라요. 지금도 중국어는 전혀 몰라요. 여행 당시 급히 형에게 배운 몇 마디와 가이드 아주머니로부터 배운 몇 마디가 제가 아는 중국어의 전부에요. 아마 한동안은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국어를 모를 거에요. 중국어를 공부할 시간이 지금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조금씩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이 책 한 권은 다 읽어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형, 그런데 왜 자꾸 '워 쓰 한궈'라고 해요? 형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요."

"응. 그건 말이야..."


알아요. 我是韓國人. 아시한국인. 워 스 한궈런. 이것은 절대 까먹지 않을 거에요. '워 쓰 한궈'가 아예 틀렸다는 것도 알아요. 동생은 제발 제가 자신 앞에서 '워 스 한궈런'이라고 똑바로 말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나 계속 '워 쓰 한궈'라고 해대는 이유는...


'워 스 한궈런'이라는 문장을 맨 처음으로 타이완에 가서 말하고 싶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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