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기/미분류

은행 창구 직원이 불쌍하게 느껴진 날

좀좀이 2014. 2. 3. 13:43
728x90

국민, 농협, 롯데 카드 회원정보가 대거 털렸다는 뉴스를 들은 후 한 번 은행에 가 보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저 역시 한때 위에서 언급한 은행 두 곳 중 하나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은 되었지만, 일단 계좌가 아직도 살아있는지 해지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은행이 난리도 아니라는 말을 들어서 설날 연휴 끝나고서 다녀오자고 생각했어요.


'오늘 은행을 갔다 올까? 귀찮은데...'


아침에 일어나서 슬슬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하면서 오늘 은행을 갈까 내일 갈까 고민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혹시 오늘 오후에 출근하실 수 있어요?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요."

"예."


옷을 갈아입으려다 오후에 출근해줄 수 없겠냐는 전화를 받고 그러겠다고 한 후 바닥에 앉았어요.


'다시 잘까? 그런데 지금 자면 얼마 못 자고 일어나서 또 씻어야 하는데...'


그래서 컴퓨터 앞에서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 이대로 있으면 일하러 나가야할 때에 미친 듯이 잠이 올 거 같아서 은행 볼 일이나 보며 잠이나 깨기로 했어요.


은행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많은 사람. 사건이 터진 지 며칠 지났는데도 은행 안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계좌 있는지 확인하러요."


대기표를 보니 제 앞으로 25명. 아직도 이 문제로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예금-출금 창구에 신규-해지 창구 한 개까지 합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어요.


카드 영업 정지 당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하는 사람, 고작 입금하러 왔는데 20분 넘게 기다리고 있다고 화내는 사람, 신경 날카로워져서 창구 앞에 앉아 있는 사람 등등 전혀 좋을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청원경찰은 번호표를 확인하며 간단한 예금은 ATM에서 처리하도록 유도하고, 고객들에게 방문 목적을 물어보며 서류 작성 같은 것은 미리 하게 하고 있었어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제 계좌가 있는지 확인하려구요."

"그러면 주민등록증 주세요. 그리고 이거 작성해주세요."


서류 한 장을 주고는 청원경찰이 제 신분증을 들고 어디론가 갔어요. 서류 작성하고 있는데 청원경찰이 돌아와서 제게 신분증을 돌려주었어요.


"계좌 두 개 있더라구요. 그런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신 것 같던데요."

"예. 전부 해지하려구요."

"그러면 여기에 '전부해지'라고 적어주세요."


청원경찰은 전표 두 장에 전부해지라고 적고 대기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또 대기.


드디어 제 차례가 왔어요.


"어떤 일로 방문하셨나요?"

"계좌 해지하려구요."

"신분증 주세요."


신분증과 미리 작성한 서류를 제출하자 해지 절차를 밟기 시작했어요.


"계좌 해지하면 체크카드도 같이 해지되나요?"

"아니요. 그것은 따로 신청하셔야 해요."

"그러면 카드도 다 해지해주세요."


카드와 계좌 해지를 하고 돌려받은 돈은 1400원. 하이구야...돈 벌었네.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묘한 상황.


"혹시 제 개인정보 유출되었는지 확인해주실 수 있으세요?"

"아마 고객님 것은 유출되었을 거에요."


뚜두둑


물론 당연히 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직원이 잘못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었어요. 사실 저 상황에서 직원이 뭐라고 해도 매우 기분 상했을 것은 당연했지만요. 털렸을 거라고 하든, 안 털렸을 거라고 하든, 그냥 확인해보겠다고 하든 어쨌든 결과는 모두 꽝인 상황.


정해진 양식이 인쇄된 종이를 기계에 넣었다 빼서 제게 보여주었어요.





빠직


이게 참 서류로 받아보니 기분이 남다르네? 아놔 xx ... 아이구 너무나 상쾌한 아침일세?


농담반 진담반으로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개인신상은 국제적 공공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걸 서류로 따악 받아보니 기분이 참 신난단 말이야? 너무 신나서 욕이 마구 튀어나올 거 같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에 있는 창구 직원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처럼 울컥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텐데 그거 일일이 다 받아주어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책임자가 잘못이지 창구 직원이 무슨 잘못이겠냐만은 순간 화가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


그래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하나하나 설명을 들었어요. 성명, 이메일, 휴대전화, 자택전화, 주민번호, 자택주소 하나하나 물어보며 확인해주는데 간단히 말해서 싸그리 털렸어요.


진심으로 말만 사과하고 허리굽힐 게 아니라 담당자들을 창구에 앉혀서 직접 다 처리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신나게 욕 한 바가지 퍼부어줄텐데. 책임을 진다면 자기들이 창구에 앉아서 일일이 고객들 분노 다 받아주고 처리해주어야 하지 않아?


카드와 통장 모두 개인정보 삭제를 요청했어요. 카드는 금방 처리되었는데 통장은 오늘 지침이 바뀌었다고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요즘 많이 힘드시겠어요."

"예. 어쩔 수 없죠."


애꿎은 창구 직원들만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들은 이번 사건이랑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인데...


통장 쪽은 바로 처리되었고, 카드는 열흘 정도 소요될 거라는 안내를 들었어요.


창구 옆에는 친절하다면 5점을 주라는 코팅된 팻말이 붙어 있었어요.


"이거 5점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도 고생하는 것 같아서 5점 주려고 물어보았어요. 난리가 한풀 꺾였을 오늘도 이런 모습인데 그 즈음은 대체 어땠을지 상상이 되었어요.


"아...그거 이미 끝난 거에요. 그런데 떼면 보기 싫어서 그냥 붙여놓고 있어요."

"예...안녕히 계세요."


큰 일 때문에 은행에 간 적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은행 창구 직원들과 다투거나 은행 창구 직원 때문에 불쾌했던 적은 없었어요. 이번도 마찬가지였어요. 최대한 고객 화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못은 딴 놈이 하고 매는 엉뚱한 사람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은행 창구 직원이 불쌍하다고 느낀 날이네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