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새벽, 길가에 앉아서

시간을 거슬러 - 03 영등포역

좀좀이 2014. 2. 3. 08:15
728x90

"시간 진짜 애매하네."


종로5가까지 걸어가면 의정부행 버스인 106, 108번이 달리고 있을까? 아니면 청계천을 그냥 또 끝까지 걸어서 한양대까지 갈까? 아니면 청계천 끝까지 간 후 거기서 중량천 타고 외대까지 걸어가서 1호선 타고 돌아갈까?


시청에 도착해서 어디를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무턱대고 광화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금이 만약 자정쯤이었다면 걸어서 그냥 의정부까지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새벽 5시. 7시 넘어가면 동이 틀 거다. 동튼 후 일 없이 중량천을 걷기는 싫단 말이야. 그렇다고 딱 청계천만 다 걸어서 한양대역으로 가자니, 거기는 의정부로 돌아가기 참 애매한 곳. 그럴 바에는 적당히 카페 들어가서 시간 때우다 6시쯤 나와서 전철 타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일단은 청계광장에서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어서 종각까지 금방 도착했다.


새벽에 조계사나 구경하고 인사동이나 가봤다가 종로5가 가서 버스 타고 집에 갈까?


보신각 앞 횡단보도에 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새벽의 인사동을 보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은데 말이야. 서울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은 인사동 밖에 없을 거야. 낮에는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고 장사의 거리인데 새벽이 되면 쓰레기나 굴러다니는 동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디카로 사진을 찍었던 그곳. 친구가 디카를 사서 친구와 함께 새벽에 돌아다니다 친구 디카를 빌려서 처음 디카로 사진 한 장 찍어본 곳이 바로 새벽의 인사동 거리였다.


초록불이 들어왔고, 이제 길을 건널 때가 되었다.


잠깐...그곳에 가봐?


순간 아까 시청역 천장이 떠올랐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곳. 내가 서울 올라와서 처음 2년을 보냈던 곳. 일년에 한 번 쯤은 그냥 옛날 기억을 느끼기 위해 가보곤 하던 곳.


그곳에 가자!


지금 그곳까지 걸어가는 것은 무리이지만,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지금 의정부 돌아가면 거기는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귀찮아서 안 가다 보면 작년처럼 한 번도 못 가고 지나가버릴 수도 있다.


그 동네에 갔다 올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물어보곤 한다.


'거기 뭐가 있다고 그렇게 가냐?'


내가 살았던 곳에 들어가보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서 인사하고 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동네까지 갔다가 주변 휙 둘러보고 돌아와버리니 당연하기는 하다. 하지만 내게 그 동네는 너무나 특별하다. 내가 어디에 있든 추억이 쌓이고 기억이 쌓이기 마련이지만, 더 이상 그때 쌓은 추억과 기억처럼 추억과 기억을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급히 돌려 남대문 시장으로 걸어갔다.


남대문 시장 가면 영등포역 가는 버스가 있겠지?


풍경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길을 그대로 가는 버스는 이제 없다. 하지만 비슷하게는 갈 수 있을 것이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버스를 살펴보았다. 503번 버스가 남대문 시장에서 영등포역까지 가는 버스였다.





503번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자마자 핸드폰 배터리를 갈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사진이 몇 장 있다.


영등포역으로 갔다. 깜깜해서 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예전 48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으로 가던 길과는 많이 달랐다.


예전에는 125번 (현재 6631번) 과 48번 (현재 261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곤 했다. 125번은 6631번으로 숫자만 바뀌었지만, 48번은 261번으로 바뀌며 노선도 많이 짧아졌다. 예전 48번은 여의도를 거쳐 영등포역에서 회차했지만, 지금 48번은 여의도에서 회차한다.


"영등포역 꽤 변했구나."





예전에 영등포역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제 가려고 하는 곳에 가기 위해 버스를 다른 정거장에서 갈아타야할 차례였다.





"여기서 많이 사먹었었는데."


이 길을 이용해 학교를 다닐 때, 아침과 저녁 둘 다 먹은 날이 거의 없었다. 아침을 먹든가, 저녁을 먹든가, 아니면 둘 다 안 먹든가였다. 배고픈 것보다 졸린 것이 우선이었던 나날이었다. 아침에는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침대에서 뭉쓰다 아침 먹을 시간을 놓쳐버리고, 저녁은 시간 늦어서 그냥 방에 들어가 침대에 쓰러져서 자든가 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패스트푸드와 이 영등포역 주변 노점삼을 많이 이용했었다. 125번 버스에서 내려서, 또는 48번 버스에서 내려서 여기에서 핫도그 하나 사먹곤 했다.


집안이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 끼 다 챙겨먹어야 한다는 것 자체에 원래 별 관심이 없고, 통학 시간이 길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우와, 이제 버스정거장 생겼네?"


예전 여기에서 버스 탈 때에는 이런 버스 정거장이 없었다. 여기도 전부 노점상이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차도로 내려가 있어야 했다. 인도에서 기다릴 수도 있기는 했지만, 버스가 엄청나게 몰려와서 서던 이곳에서 인도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내가 탈 버스가 왔는지 안 왔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버스가 우루루 몰려오곤 했는데 희안하게도 각 버스는 딱 서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나중에는 그것을 알고 항상 자리를 잡고 있다가 버스가 들어올 때 버스랑 같이 달려서 1등으로 버스에 올라타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시원하게 버스 정거장이 생겨서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버스 표지판을 보니 605번을 타면 발산역으로 갈 수 있었다.


가양 4단지로 갈까, 발산역으로 갈까?


버스로 가양4단지를 간다면, 돌아올 때 걸어서 발산역까지 가면 되고, 버스로 발산역으로 간다면 돌아올 때 가양 4단지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되었다.


'그냥 발산역으로 가자.'


얼마 기다리지 않아 605번 버스가 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