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새벽, 길가에 앉아서

시간을 거슬러 - 05 가양 4단지

좀좀이 2014. 2. 1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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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고 그냥 거기 가서 버스를 타고 의정부 돌아올 것임에도 거기로 바득바득 가는 이유는 단 하나. 그런 식으로 기억을 쌓아가는 건 이제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 한 번이 너무나 독특한 기억이라 다시 생각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것은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거나 닥치는 대로 칠해보는 것과 같았다.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 모든 게 다 달랐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아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집에서 집안일을 해본 적도 없었고, 며칠간 혼자 집에 남아 있었던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다고 거리와 시간 개념이 고향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상상 속 서울과 비슷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런데 어쨌든 대학교는 서울로 왔기 때문에 혼자 서울에서 살기 시작해야 했다.


당연히 하얀 도화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가니까 가기는 하는데, 당장 학교를 왜 한시간 넘게 걸려서 가야 하는지 조차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하철 한 정거장이 어느 정도 거리인지 감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가니까 갈 뿐이었다.


그래서 뭔지도 모르고 그 하얀 도화지 위에 마구 칠했다. 이것도 칠해보고 저것도 칠해보고 무슨 색이 어울릴지 따위의 생각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잡히는 대로 칠해대었다. 그려놓은 것이 아름다운지 추한지조차 몰랐다. 뭘 그릴지도 모르고 그렸다.


하지만 지금은 집 떠나서 산 지 꽤 되었다. 아무리 새로운 곳에 가서 살게 된다 하더라도 대충의 밑그림은 그리고 시작한다. 그때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기억을 쌓아댈 수는 없는 것이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한 후부터 또 다시 서울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때는 그 전에 2년간 마구 쌓아놓은 기억과 경험들도 있고, 군대에서 배운 것들도 있어서 그것들을 토대로 기억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 마찬가지다. 설령 외국에 나간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뭐가 뭔지 몰라서 마구 기억을 쌓아가지는 않는다. 단지, 뭘 해야 할 지는 아는데 그 동네에서는 어떻게 해야할지만 잘 모를 뿐이다.


처음 서울 올라와서 가양 4단지에서 살게 된 이유는 가양 4단지에 제주도립 제주도민 학생 기숙사인 '탐라영재관'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서울 가서 처음 혼자 사는 것이니 서울에 적응도 하고 얌전히 공부하라는 이유로 이 기숙사에 들어가게 하셨다. 문제는 나도, 부모님도 이게 얼마나 내가 다녀야하는 학교와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학교를 가 보고는 그제서야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집에서는 내가 졸업할 때 서울 올라오셔서 학교에서 종로까지 차로 가보시고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먼 거리에서 통학을 하고 있었는지 대충 감을 잡으셨다.


가양 4단지에서 사는 동안, 전라남도 학생 기숙사인 남도학숙을 매우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거기는 1호선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철 타기 위해서 한참 걸어가야하는데, 그리고 그 전철도 정작 1호선도 아니고 5호선인데, 남도학숙에서 사는 학생들은 바로 1호선 타고 학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러웠다.


덕분에 나는 대학교 저학년때 집에서 걱정할 짓은 하지 않았다. 당장 통학하는 게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9호선 가양역이 바로 앞에 있지만, 그때는 9호선 공사중이었다. 당연히 전철을 타기 위해서는 발산역까지 가야 했다. 마을 버스를 타고 가든가 걸어가든가 해야 했는데,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렸다. 마을 버스를 기다렸다 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걸어다녔다. 그때는 버스-지하철 환승이 안 되었고, 마을 버스가 매우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아르바이트니 동아리니 하는 건 생각도 못했다. 매일 아침 학교 가는 게 문제였고, 매일 저녁 집에 돌아가는 게 문제였다. '한 시간 넘게 걸려서 등교한다' 라는 것 자체가 내 머리 속에 없던 개념이었다. 신호등에 환승에 이것 저것 더하면 학교 가는 데에만 2시간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도시에서 혼자 살아야한다는 것에 적응하기 이전에 일단 2시간 걸려서 학교에 가는 것에 적응하는 것이 먼저였다.


매일 아침 빨려들듯 들어가던 3번 출구에서 나왔다.





"여기에서 침대보 샀었는데."


기숙사에 반드시 챙겨서 들어가야하는 것 중 하나가 침대보였다. 집에서는 앏은 이불을 침대보처럼 깔고 지내라고 얇은 이불과 두꺼운 이불을 챙겨주셨는데, 기숙사에서는 그거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올라온 다음날, 마을 버스를 타고 저 마트에 가서 제일 싼 침대보를 하나 샀었다.


그리고 이 길은 마음씨 좋은 택시기사 덕분에 알게 된 길이기도 하다. 기숙사에는 자정까지 들어가야 했는데,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가 있었다. 이러면 벌점을 받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곤 했는데, 택시기사들이 기숙사를 몰라서 항상 '가양4단지' 가 달라고 말하곤 했다.


하루는 그날도 아슬아슬해서 택시를 잡아 탔는데 가양 4단지 가달라고 말씀드리자 바로 내가 그 기숙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게 지름길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이렇게 가면 당시에는 딱 기본요금이 나오는데, 다른 택시기사들은 일부러 크게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 택시기사 아저씨께서 지름길을 알려주신 후, 걸어다닐 때에도 이 길을 종종 이용했고, 3번 출구에서 택시를 타면 무조건 '바로 우회전 해주세요' 부터 말하게 되었다. 당시 일반적으로 택시 기사들이 가던 길은 현재 9호선 양천향교역까지 가서 거기서 9호선 가양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중에는 이 길을 통해 걷기보다는 아예 발산역 4번출구로 나가서 걸어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맨 처음 걸어다니던 길로 걸어갔다. 길 자체는 단순해서 특별히 무언가를 크게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3번 출구로 나와서 호서직업전문학교까지 쭉 걸어간 후에, 호서직업전문학교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어서 다시 쭉 내려가야 한다.


"바뀐 듯 안 바뀐 듯 하네."


길 건너편이 개발에 들어갔는지 철제 담장이 쳐져 있었다. 예전엔 그냥 풀밭인 공터였었다. 가게들이 자잘하게 바뀌어서 바뀐 것 같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때 그 길 그대로였다.





직업전문학교가 무엇인지 그때 매우 궁금해했었다. 그냥 학원 같은 것인지, 전문대학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직업전문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잘 모른다. 나중에 군대 전역한 후 알고 지내던 고교 동창 하나가 여기에서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던 것 정도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매일 아침 발산역으로 걸어갈 때 이곳이 나오면 '드디어 발산역이 보인다!' 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반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이 나왔을 때에는 항상 별 느낌이나 생각이 없었다.





"여기였던가?"


대학교 1학년 때 5월이었을 거다. 그날은 5교시 수업이 있어서 11시에 나와 발산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중인 초등학생들의 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으...음!"


갑자기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휴지는 없고 코피는 이미 쏟아지고 있는 중이라 왼손으로 코를 쥐고 옆에 있는 노점상 아주머니께 갔다.


"저,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휴지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아주머니는 딱 잘라서 안 된다고 말씀하시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지금 코피 나는데 휴지가 없어서요."


손가락으로 코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코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머니께서는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시더니 휴지를 한 움큼 끊어주셨다.


피곤하면 정말 코피가 나는가 보다. 일부러 과장되게 그리는 것인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였구나. 아주머니께서 주신 휴지로 코피를 닦고 휴지를 뭉쳐 코에 쑤셔박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드린 후, 계속 발산역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은 밤이라 아무도 없지만 낮에는 이 길에 지금도 노점상과 좌판들이 줄지어 있겠지?


"아, 여기! 내가 진짜 아무 것도 모를 때..."





수학여행때 서울을 와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서울을 본 적은 없었다. 서울 올라온 지 며칠 지나서 내가 있는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 궁금해서 마을 버스가 가는 길을 따라 돌아다니다 이곳을 보고서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하늘 높이 뻗어 있는 가로수. 이런 건 내 고향에서 전혀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거리는 시내 중심가와 맞먹었다. 이런 게 서울이구나! 여기가 서울 중심가도 아닌데 내 고향 시내 중심가와 맞먹는 규모의 거리가 있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모습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보면서 감탄했었다. 그리고 이걸 보며 말로만 듣던 명동, 종로, 신촌 같은 곳은 얼마나 굉장할까 매우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동네 번화가에서는 크게 놀랐지만, 명동, 종로, 신촌 같은 곳은 내 상상보다 너무 평범하고 작아서 오히려 크게 실망했었다.





매일 아침 발산역으로 걸어갈 때 나타나던 첫 번째 분기점이었던 강서구민 올림픽 체육센터. 나는 지금 여기에서 강서구민 올림픽 체육센터가 있는 쪽으로 꺾어서 쭉 가면 되지만, 반대로 기숙사에서 발산역으로 갈 때 이곳이 어떻게 걸어갈지 갈리는 첫 번째 지점이었다. 여기에서 마을 버스 가는 길을 따라 꺾어서 가는 방법이 있었고, 여기를 지나 길이 막힐 때까지 - 즉 KBS 스포츠월드가 나올 때까지 계속 직진으로 가서 거기에서 방향을 꺾어 발산역 4번 출구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길이는 KBS 스포츠월드까지 가서 방향을 꺾는 것이 조금 더 짧았는데, 1교시 수업을 갈 때에는 KBS 스포츠월드까지 걸어가고 그 이후 수업을 갈 때에는 마을 버스 길을 따라 가곤 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지구대와 아파트 사이 길로 쭉 가면 된다. 뭔가 생각하고 주위를 살펴볼 것 없이 직진을 더 이상 못할 때까지 걸으면 된다. 생각 없이 쭉 가서 다시 생각 없이 쭉 가면 되는 길이라 이렇게 갈 때에는 멍때리며 그저 빨리 걷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는 했었다.


이곳에 서자 추억과 그때 기분들이 떠올랐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1년 동안 질리도록 걸은 거리이고, 1년 동안 왠지 걷고 싶을 때 걷던 길이었다. 햇볕 참 좋다고 느끼기도 했고, 학교 언제 가나 한숨 내쉬기도 했다. 발산역에 빨려들어갈 때 가지는 기분은 거의 항상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여기에서 따사로운 햇볕 맞으며 기분 좋다고 느끼면 발산역에 빨려들어갈 때도 그냥 기분이 좋았고, 여기서 학교 언제 가나 짜증이 나면 발산역에 빨려들어갈 때 아직도 한참 남았다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나중에 여기에 혼자 와볼 때마다 여기에 오면 미소를 짓고는 했다. 오래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강서구민 올림픽 체육센터를 지나 쭉 걸어가자 드디어 내가 서울 처음 올라와서 2년간 살았던 탐라영재관이 나왔다.


"요즘은 여기 나름 경쟁률 치열할 건가?"


내가 살 때만 해도 저쪽에 입구가 없었는데 입구도 생겼고, 입구 바로 앞이 가양역이다. 완벽한 역세권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여기 산다고 근성이 늘어나지는 않겠네."


내가 살 때만 해도 여기는 경쟁률이 매우 널널했다. 입사할 때에는 그래도 나름 경쟁률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더도 덜도 말고 한 달 지나가면 학생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당시에는 가양역이 없다 보니 신촌에 위치한 학교들 외에는 통학하기 죄다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신촌에 위치한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 이화여대 학생들은 그래도 여기서 다닐만 했다. 버스로 한 번에 신촌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대학교들은 죄다 가기 불편한 편이었다. 웬만한 학교들 학생들은 죄다 통학시간이 1시간이 넘었고, 서울 동부권에 위치한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학교 가는 게 일단 일이었다.


게다가 통금시간이 있고, 외박 제한도 있었다. 외박 제한에서 풀려나는 달이 1년에 딱 4개월 있었는데, 4, 6, 10, 12월이었다. 4, 10월은 중간고사 준비를 위해 학교에서 밤을 새야 한다는 핑계로, 6, 12월은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학교에서 밤을 새야 한다는 이유를 대어서 무제한 외박을 신청하고 통과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달은 전부 외박 횟수 제한이 걸려 있었다. 이러다보니 1학기가 시작된 후부터 통학이 힘들어서 나가는 경우도 많고, 외박을 마음대로 못해 불편해서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정말 좁은데 3인실로 되어 있는 방의 경우 나중에 가면 실제로는 2인실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저 국민은행 건물은 그대로구나!'


가양 3-5단지 사거리는 내가 살 때와 모습이 바뀌었다. 그도 그런 것이 내가 살 때에는 9호선 공사중이었기 때문이었다. 9호선 가양역이 들어서면서 이쪽은 확실히 모습이 변했다. 하지만 4단지로 가는 길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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