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새벽, 길가에 앉아서

깊은 밤의 노래 - 01 의정부역 - 중량천

좀좀이 2013. 9. 23.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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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에 방을 잡은 후, 의정부에 살고 있는 친한 동생이 제게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형, 나중에 같이 한 번 걸어볼까요? 중량천 따라서 가다가 청계천 타고 청계광장까지 같이 걸어요."

"응."


동생과 나중에 한 번 걸어보기로 했지만 직접 걷지는 못했어요. 왜냐하면 동생이 매우 바빴거든요. 게다가 혼자 걸어보려 했으나 의정부를 워낙 안 돌아다녀서 중량천조차 찾지 못했어요. 그리고 저도 제 일이 있었구요. 이래저래 밍기적거리다보니 어느덧 계절은 여름이 되어 버렸어요. 이번해, 의정부는 비가 엄청나게 많이 내려서 장마철에는 감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냥 매일 비가 주구장창 내렸고, 그 비가 조금 온 것도 아니라 많이 퍼부어서 중량천이 산책로까지 잠겨버리기도 했어요. 비가 멎으니 이제는 한여름.


단순히 날씨 때문에 못 걸은 것은 아니었어요. 올해 들어서 몇 번 밤에 친구와 걸은 적이 있어요. 친구랑 홍대에서 일산 호수공원까지 걸어보았고, 서울 중심가를 뱅뱅 돌아보기도 했고, 서울대에서 과천시까지 걸어보기도 했어요.


'이건 그냥 걸을 거리는 아니다.'


홍대에서 일산 호수공원까지 걸어본 것이 지금껏 걸어본 것 중 가장 긴 거리였는데 이게 20km 조금 넘는 거리였어요. 그런데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서 중량천을 타고 가다가 청계천으로 들어가서 청계광장까지 가는 건 30km가 넘는 거리였어요. 홍대에서 일산 호수공원까지 걸어갈 때에도 힘들고 피곤해서 혼났는데 의정부역-중량천-청계천-청계광장 구간에 비하면 홍대-일산호수공원은 애들 장난.


걷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평소에 많이 걸어다니는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걸을 일은 더욱 없어졌어요. 일단 집과 학원은 빨리 걸으면 5분, 학교는 어차피 전철. 게다가 의정부에서 밤에 걸어서 어디 멀리 나갈 수 있는 길이 결국 이 중량천 밖에 없었어요. 올해 들어서 제대로 걸은 적은 친구랑 저렇게 딱 세 번 걸은 것이 전부. 학교 근처에서 살 때에는 낮에 혼자 서울시청까지 걸어가기도 했는데 여기로 오면서 제대로 오래 걸은 것은 계절 행사처럼 되어 버렸어요.


친구는 툭하면 청계천-중량천-의정부역을 걷자고 하는데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절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이건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거든요.


의정부에서 하천 두 개를 따라 걸어서 청계광장까지 가기...언젠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감히 할 엄두는 못 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추석에 고향은 안 내려가기로 했고, 학원을 마치고 노래를 들으며 걸어오는데 갑자기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확 걸어?"


평소라면 30km 는 다음날을 생각하면 절대 걸을 수 없는 거리. 하지만 이날은 달랐어요. 어차피 3일 연휴가 있었기 때문에 다리가 아프다 해도 집에서 쉬면 그만이었으니까요. 혼자 할 것도 없는데 이거 끝내서 밀린 숙제 해치운 기분을 느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준비 좀 하자."


밤에 하천을 따라 걷는 것은 낮보다는 걷기 쉽다는 장점은 있어요. 일단 덥지도 않고 눈도 피로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대신 먹을 것, 마실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어요. 낮에는 하천에 있는 매점에서 대충 뭐라도 사 먹을 수 있지만 밤에는 매점이 당연히 문을 닫기 때문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가 없어요. 하천에서 벗어나 구할 수 있기는 한데 하천 입구가 사방팔방에 다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천에서 벗어나 편의점을 찾아 헤매는 거리 또한 있으며, 편의점에서 먹고 다시 하천으로 돌아가려 하면 힘이 쭉 빠져서 더 힘들어요. 예전에 친구와 중량천을 걷다가 엉뚱한 천호대교로 빠져서 중량천을 결국 다 못 걸은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요. 중량천에서 빠져나와 편의점 가는데 편의점이 근처에 없어서 헤매다 편의점에서 뭐 먹고 나니 그 하천으로 더 걷기 싫어서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어버렸거든요.


준비할 것이라고는 찬물로 시원하게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먹을 것, 마실 것은 챙기지 않았어요. 등산 가는 것도 아니고 잘 포장된 산책로만 따라 걷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건 그저 짐덩이에 불과한 것들.


블로그에 달린 댓글에 답글을 달며 잠깐 쉬다가 카메라를 챙겨서 의정부역으로 향했어요.




2013년 9월 17일 22시 45분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 신시가지 (서부광장) 방향


여기는 정말 질릴 정도로 오는 곳. 하여간 어딘가 간다 하면 저는 일단 여기로 가니까요.




신세계 백화점 앞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그냥 역 안으로 들어갔어요. 의정부 살면서 깨우친 지하철 탈 때 노하우란 의정부 갈 때에는 1번칸보다는 3번칸이 앉아서 갈 확률이 높다는 것. 의정부역 출구가 1-1 에 있어서 1번칸에 의정부역에서 내릴 사람들이 많이 타거든요. 3번칸부터 텅텅 비어 있는데 1번칸만 꽉 찬 경우도 종종 목격했어요. 3번차는 회기에서 승객이 많이 빠지기 때문에 종로에서 의정부로 1호선 타고 갈 때 의정부역 출구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으면서 앉아서 갈 확률도 높아요.




의정부 구시가지 (시내쪽, 동부광장)로 나왔어요.


여기서 지하도를 통해서 길을 건넌 후, 사진 오른쪽 구석 잘린 큰 길을 따라 쭉 걸어갔어요. 곧 송산 교차로가 나왔고, 중량천도 모습을 드러냈어요.




"슬슬 시작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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