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대체 뭐지?"
일단 다리를 따라 걸어보는데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어요.
물은 콸콸 흐르고 다리도 복잡하게 여러 개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여기는 길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아무리 보아도 이 다리를 건너가는 것은 길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시 중량천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으로 돌아갔어요.
'청계천으로 빠져야 하는데...'
머리가 살짝 복잡해졌어요. 큰 길로 올라가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야 하나? 만약 길을 못 찾으면 의정부로 걸어서 돌아가야 하는데...못 찾을 리는 없겠지? 정 안 되면 큰 길로 올라가서 길을 찾으면 되겠지.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확대해 보았어요.
'일단 청계천이랑 중량천이 이어져 있으니까 다리는 절대 건너면 안 될테고...그냥 일단 땅으로만 가다 보면 어떻게 되지 않을 까? 여기는 아직 산책로를 안 만든 건가, 아니면 그냥 없는 건가? 일단 땅으로만 가자.'
다리를 건너지 않고 땅으로만 갈 수 있는지 보았어요. 풀숲 사이로 샛길 비슷한 게 있었는데 바닥은 블록으로 포장되어 있었어요. 길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생긴 것이었는데 일단 거기로 가보기로 했어요.
'저, 실례하지만 말씀 좀 여쭈어볼 수 있을까요?'
마침 자전거를 만지고 계신 아주머니께서 계셔서 아주머니께 길을 여쭈어 보았어요. 아주머니께서는 제가 올라온 길이 청계천 가는 길이니 길 타고 쭉 가라고 하셨어요.
그 길이 바로 이 길. 여기로 가라고 알려주셔서 가기는 하는데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었어요.
무슨 시설이 있었어요. 일단 길은 있었기 때문에 계속 길을 따라갔어요.
이거 청계천 맞아?
하천과 길 사이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어요. 그래서 물 흐르는 게 보이지 않았어요. 지도를 보니 맞게 가고 있다고는 나오고 있었어요.
수풀 때문에 하천이 보이지 않아 갑갑했어요. 그러다 처음 하천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쉬자."
다리가 너무 아팠어요. 의정부부터 여기까지 앉아서 쉰 것은 딱 한 번. 외대쪽 중량천 입구에서 앉아서 10분 쉰 것이 전부였어요. 앉자마자 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하지만 걸을 수 밖에 없다.
걸어야만 했어요. 사람들에게 청계 광장까지 걷겠다고 이야기하고서 포기해 겪을 쪽팔림 때문이 아니었어요. 걸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새벽 4시라는 것이었어요. 이 시각에 할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기나 뜯길 것이고,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니 PC방 가서 할 것도 없고, 뭘 어떻해도 2시간을 버틸 방법이 없었어요. 포기할 마음은 없었지만 포기할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동트기 전에 청계 광장에 도착하는 것은 이제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어요. 여기부터 2시간 내에 인터넷에서 알아본 청계천 길이인 10여 킬로미터를 주파하는 건 도저히 무리. 쌩쌩해도 될까 말까인데 지금 다리 상태로는 분명 불가능했어요. 게다가 발에 물집도 잡혀 버렸어요. 신발 모양이 발 모양과 전혀 맞지 않아서 많이 걷는다 싶으면 물집이 잡히곤 했는데 이번도 역시나 물집이 양쪽 엄지 발가락에 잡혔어요. 너무 아파서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걸을 때 신경이 쓰이기는 했어요.
"어쨌든 끝까지 가기는 가야지."
청계천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징검다리.
"여기는 왜 이렇게 생겼지?"
종종 걸어왔던 동대문~청계광장 구간의 청계천과는 많이 달랐어요. 동대문~청계광장 구간은 꽤 잘 꾸며놓은 길이었는데, 청계천 하류 쪽은 그냥 풀숲에 풀 밀고 산책로를 급조한 듯한 느낌이었어요. 길도 매우 좁고 양쪽으로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어요.
"아놔...다리 건너야 하잖아!"
그냥 다리면 별 생각 없이 걷겠는데 징검다리였어요. 다리도 아프고 발도 아픈데 건너려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안 건너면 길을 더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별 말 없이 건넜어요. 그래도 다리 아래에 있는 징검다리는 청계천에서 흔히 볼 수는 없는 것.
또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신기한 디자인의 건물이 보였어요.
무슨 공상과학기지센터라고 해도 믿게 생긴 디자인. 이렇게 청계천 가운데에 서서 보면 묘하게 어울리는 듯 싶었어요.
예전 청계 고가도로의 흔적.
"휴...쉬자."
청계천 들어온 이후로는 계속 쉬었다 갔다를 반복하고 있었어요. 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또 쉬려고 의자에 앉았는데 마침 친구로부터 카톡이 날아왔어요.
- 대박 ㅋㅋㅋㅋㅋ 넌 정말 용자다.
용자랄 것 까지야...이미 출발했을 때 끝은 정해져 있었어요. 청계천을 들어와서 청계천을 끝까지 걷느냐 마느냐의 문제였을 뿐이었어요. 청계천에서 동대문부터 청계 광장 까지는 여러 번 걸어보았어요. 즉, 한 번에 의정부역에서 중량천, 청계천을 타고 청계 광장까지 가느냐, 두 번에 잘라서 - 예전에 갔던 구간과 합쳐서 다 걸었다고 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었어요.
'동대문에 도착하면 그만두고 싶을까, 아니면 힘이 날까?'
스스로 궁금했어요. 동대문에서 청계광장까지는 한 시간. 걷자면 걷는데 여러 번 가 본 곳이라 꼭 가야할 필요는 없었어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또 걷기 시작했어요.
어두운 청계천을 걷는데 앞에 시커먼 사람 형태의 무언가가 보였어요.
"뭐지?"
놀랐잖아!
왜 여기에 제주도의 상징 중 하나인 물허벅 멘 여자 석상이 있지? 게다가 몇 걸음 더 걸어가자 돌하루방 두 기도 서 있었어요. 예전 진주에서는 물에 자빠져 있는 돌하루방 한 기를 보고 놀랐었는데, 여기서는 어두워서 물허벅 멘 여자 석상 보고 놀랐어요.
"동대문이다!"
멀리 보이는 두타 건물. 스스로에게 가졌던 의문이 풀렸어요. 신기하게 힘이 났어요.
'이제 한 시간만 더 걸으면 끝나!'
새벽 5시. 빨리 걸으면 한 시간 안에 청계 광장에 도착할 수도 있었어요.
'요즘 해가 6시 즈음에 뜨지 않나?'
잘 하면 해뜨기 전에 청계 광장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햇볕 맞으며 청계 광장 도착해 패배자처럼 버스타러 가지는 않겠어!'
어두운 길을 계속 빨리 걸어갔어요.
'포도 먹고 싶다.'
평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포도가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요. 집에 갈 때 시장 들려서 포도 한 송이 사서 갈까? 그런데 우리나라 포도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먹었던 것과 달리 셔서 씹어먹지는 못하겠지? 포도 한 송이 혼자 다 먹으려면 많은데...
청계 광장에는 24시간 문 여는 카페가 하나 있고 편의점이 하나 있지. 원래 계획은 야심한 새벽에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책 조금 읽다 어둠이 사라지면 전철 타고 집에 돌아가는 것. 하지만 이미 원래 계획은 글렀어. 어둠 속에 청계 광장에 도착한다 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해가 떠 버릴 거야.
포도 먹고 싶은데 도착하면 편의점에서 포도 주스나 하나 사마셔야겠다.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마시고 안 먹었잖아. 그거 하나 먹고 집에 가야겠다.
드디어 종로에 들어왔어요. 이쪽은 낮이고 밤이고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이미 충분히 잘 아는 곳.
끝이 보인다!
이제 진짜 거의 다 왔어요.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지만 그냥 기분탓이려니 생각했어요. 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어설프게 쉬었다가는 햇볕 쬐며 패배자처럼 청계 광장에 도착할 게 뻔했으니까요.
"보인다!"
뛰어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계속 걸어왔잖아. 마지막까지 끝까지 걸을 거야!
진짜로 거의 다 왔어요. 그냥 끝까지 걸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거의 다 왔어요.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남았어요.
다 왔다!
드디어 청계천 시작 지점에 도착했어요.
계단을 걸어 올라갔어요.
새벽 5시 45분. 드디어 청계 광장에 도착했어요.
내가 더 빨랐다!
뒤를 돌아보니 햇볕이 저를 쫓아오는 중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더 빨랐어요. 아직 제가 서 있는 곳은 어둠이 진하게 남아 있었어요. 저쪽은 슬슬 잠에서 깨어나고 있겠지만 제가 서 있는 곳은 아직 잠들어 있는 공간.
편의점에 가서 포도 주스 하나 사서 마셨어요.
이제 어떻할까?
이왕 걸은 거 더 걷고 싶었어요. 하지만 마땅히 걸어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일단 시청과 한국은행을 거쳐 남대문 시장으로 갔어요. 하지만 거기까지 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어요. 해가 떠 버렸기 때문에 그냥 김이 새어버렸어요. 남산 꼭대기는 가본 적이 없으므로 가볼까 생각했지만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어요. 나머지 떠오르는 길은 전부 자전거든 버스든 가본 길.
그냥 버스 타고 집이나 가자.
이왕 남대문 시장까지 온 것, 106 이나 108번 버스 타러 종로5가까지 걸어가기는 귀찮았어요. 그래서 261번 버스를 타고 여의도를 돌아 청량리에 가서 120번 버스로 갈아타고 미아삼거리에서 내려서 106 또는 108번 타고 의정부역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버스를 타고 가며 이것 저것 보았어요. 여의도에 사람도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각에 버스 타고 여의도를 돌아볼 때에는 차가 많고 사람도 많았던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하지 않았어요. 청량리 도매시장은 아침 일찍부터 명절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어요. 장사 준비를 하는 상인들도 보였고, 장을 보러 온 사람들도 보였어요. 정말 장이 열리자마자 북적거리고 있었어요. 청량리에서 120번으로 갈아타고 본 풍경은 그다지 인상에 남는 게 없었어요. 마치 이 이른 아침 261번 타고 본 여의도처럼 한산한 거리가 당연해 보였어요. 미아삼거리에서 106번으로 갈아타고 본 풍경 중 인상 깊었던 풍경이라고는 제가 걸었던 중량천을 보며 '아, 내가 저 길을 걸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 정도였어요.
그리고 버스에서 잠깐 잠에 들었다 눈을 떠 보니 버스는 의정부역에 거의 다 도착해 있었어요.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갔어요. 얼른 집에 가서 버스 정거장 근처 빵집에서 구입한 고로케 두 개나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