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기/미분류

내가 목격한 ADHD와 언어 습관

좀좀이 2013. 4. 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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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공부할 수록 참 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존재다. 아무 생각없이 항상 쓰는 존재 -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쓰는 줄 조차 모르며 쓰는 그런 존재인데, 파고들면 세상에 이렇게 고약하고 어려운 게 존재할 수 있나 싶을 지경이다.


언어는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일단 누구든 소리와 기호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단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것은 소리와 기호와 연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조금 더 어려워진다.


기분 좋다.


사전을 뒤져서 저 문장을 해석한다면 이유야 어쨌든 지금 진짜 기분이 좋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언어 사용에서 저 말은 진짜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아주 기분이 더러운데 그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학교에서 질리도록 듣는 소리 중 하나가 '문맥을 보고 파악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못 알아듣는 것, 그리고 가끔 서로 오해를 하는 이유는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면 왜 이렇게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일이 발생할까?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암호 해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속에 있는 생각을 소리 또는 문자로 바꾸어 상대에게 보낸다. 상대는 전달받은 소리나 문자를 자신만의 고유한 해독 방법을 통해 풀어내어 그 속에 있는 의미를 이해한다. 화자와 청자 모두 이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가 같다면 의미는 잘 전달된다. 그러나 사용하는 도구가 다르다면 당연히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 . .


얼마 전 사래가 너무 심하게 들어서 기침을 너무 격하게 했더니 목이 또 헐어버렸다. 그래서 쿨쿨 자다 일어나 재미있는 뉴스 올라온 것 있나 보니 성인 ADHD 관련 뉴스가 보였다.


요즘 ADHD 이야기를 종종 접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성인 ADHD까지 나오는 것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정신질환과 관련된 것이 자꾸 종종 등장해 이슈가 되면 누구든 한 번은 '나도 혹시?'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단 질병과 관련된 제대로 된 정보는 인터넷에서 구하기도 매우 어려우며, 설령 구한다 치더라도 그 정보가 제대로 되었다면 이해하기 극악으로 어렵기 마련이다. 인터넷에서 도는 정보들을 보면 대부분 아주 두리뭉실한 몇몇 증상만 나열한 후, '이런 증상이 있으면 이런 병일 수 있으니 병원 가보세요'라는 내용이다.


육체적 질병은 그래도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일단 감기약 먹고, 어느 기간 낫기를 기다려본 후에 안 나으면 병원 가면 되니까. 스스로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정신질환은 이렇게 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두리뭉실한 설문지 몇 개 보고 '어? 나도 이거 걸린 거 아니야?'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보니 정신질환이 이슈가 되면 누구나 심란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다고 조금만 이상해도 무조건 병원으로 뛰어가는 것도 건강한 삶은 아닐 것이고. 그건 오히려 병원에 대한 심리적 의존증이라고 해야겠지.


당연히 의학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ADHD에 대해 간단히 글을 쓰는 것은 직접 ADHD 아이를 몇 명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간 한 명을 가르쳐보기도 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ADHD 증상을 보면 정말로 막연하기 그지 없다. 일단 산만하다면 무조건 'ADHD인가?'라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게다가 만약 집중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더더욱 강한 의심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서, 정말 하기 싫은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보자.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뭔가 이유를 만들어 억지로 하기 싫은 영어 공부에 집중하려 하는데 갑자기 다른 자극이 느껴진다면 당연히 집중력은 흐트러질 것이다. 게다가 그 자극이 흥미롭다면 정신은 그 자극을 향해 갈 것이다. 정신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게 정말 하기 싫은 상황에서 그 일에 집중이 잘 된다면 그게 오히려 신기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일들이 우리가 하기 싫은데 해야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도 산만한 편이지만 ADHD에 대해 '나도 ADHD인가?' 하는 공포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말했듯 ADHD인 학생을 1년간 가르쳐보며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은 무엇이고 언제 정신과에 가 보아야 하냐는 말에 지금까지 내가 읽고 들은 대답 중 이 말만큼 좋은 말도 없는 것 같다.


내가 그 문제로 너무 불편함을 느끼거나 주변 사람들이 너무 불편함을 느낄 때


나는 바로 이 말에서 뒷부분 - 주변 사람들이 너무 불편함을 느낄 때에 보다 많은 강조를 주고 싶다. 실제 ADHD인 아이들을 볼 때마다 걔네 스스로 집중 못한다고 불편해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나도 이런 정신질환 가지고 있나?'라고 생각된다면 가족 및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나의 어떤 성격 때문에 너무나 불편하고 힘드냐고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할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학원 강사를 시작했을 때였다. 교육학의 '교'자도 들여다보지 않았고, 어린이들과 많이 어울려 놀아주던 것도 아니다보니 당연히 '신세계'를 접한 기분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외국 온 기분이었다. 애들도 한국어로, 나도 한국어로 이야기하는데 애들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유는 내가 애들 사이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평소 하던 대로 사용했기 때문. 애들은 애들대로 자기네들끼리 쓰는 말을 쓰는데 그걸 내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TV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다보니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교육 제도도 내가 학교 다닐 때와 많이 달랐고, 교과서 내용도 달랐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예 전혀 다른 세계였다. 정말 세상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게다가 내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학원 강사를 시작했으니 심지어는 간단한 주변 지리조차 하나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학원 다녔을 때에나 지금 애들이나 공통점이라면...


학원에서 공부하기 싫어한다.


이건 뭐 그대로였다. 대체적인 경우 애들이 놀고만 싶어하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당연히 힘들고 딴짓이 하고 싶기 마련. 그래서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을 잡으려는 선생과 선생님께 안 걸리고 수업에 집중 안 하려는 학생들과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수업 시간에 못 알아들어도 듣는 척 리듬을 타는 것도 기술이다. 떠들지 말라 하면 딴 짓 하고, 딴 짓 못하게 하면 자고, 자지 못하게 하면 멍때린다. 그러면 당시 아이들은 다 ADHD였을까? 그건 절대 아니다. 단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해야 하니 그런 것 뿐.


적응하는 데에 몇 달은 걸렸다...한 학기 고생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적응도 끝나고 애들하고 호흡도 맞추어서 애들과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애들과 그냥저냥 잘 지내고 있는데, 딱 한 명하고는 뭔가가 있었다.


처음 적응기에서 애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만 해도 이 아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애들이 모두 집중해 50분간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게 사실은 비정상이니 말이다. 대학생들도 50분 수업 들을 때 나중에는 쉬는 시간만 기다리는데 중학생들이 오죽할까.


'아이들이 50분 수업을 50분 내내 집중해 듣기는 엄청 힘들다'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각기 다르다. 사람들마다 잘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이 다 다르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로 호흡을 맞추는 기간이 필요하고, 이 기간에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기간이 지나도 계속 내 골치를 썩히는 애가 하나 있었다.


일단 애는 착했다. 특별히 비뚤어지거나 그런 애는 아니었다. 그런데 일단 산만함이 도가 지나쳤다. 얘 엉뚱한 짓 하는 거 잡아내다가는 수업을 아예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수업 좀 하려고 하면 엉뚱한 짓 하고 있고, 하지 말라고 하면 또 엉뚱한 짓 하고 있고, 또 하지 말라고 하면 그새 멍때리고 있고, 멍때리지 말라고 하면 또 엉뚱한 짓 하고...얘 엉뚱한 짓 계속 잡아내다보면 뭐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흐름을 잘라먹어버리니까.


이렇게 산만한 경우야 그다지 특별하다고 느낄 것 까지는 아니었다. 수업 듣기 싫고 놀고 싶어서 딴짓하고 멍때리는 애들이 어디 걔 뿐이랴.


놀랍게도 초기에는 오히려 수업 태도가 다른 애들에 비해 좋은 편에 속했다.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ADHD 증상에 수업 참여를 지지리 못한다는 말이 많은데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내가 지레짐작한 것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애는 ADHD였다. 병원에서 제대로 진단을 받은 애였던 것이었다.


초기 애들과의 기싸움이 벌어질 때만 해도 내 머리 속에서 이 애는 '수업을 들어준다는 것' 자체 때문에 매우 모범적인 학생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애들과의 기싸움도 끝나고 호흡 맞추는 것도 끝난 이후부터 이 애가 내 수업 시간에서 문제 학생이 되었다.


여기까지 읽고 대체 수업시간에 엉뚱한 짓만 해대는 애가 왜 모범학생이냐고, 얼마나 애들이 선생님 말을 안 들었으면 차라리 엉뚱한 짓을 하는 학생이 모범적으로 보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쓴 이유는 정말로 일반적인 애들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일반적인 말로 설명하기에는 매우 독특한 경우였던 것이다.


칭찬을 하고 관심을 가져주면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아니, 열심히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머리 속에서만 그려지던 그런 '이상적인 수업'이 되는 듯 했다.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질문하고, 열심히 듣고 따라가려고 했다. 문제는 바로...


질문이 이상해!


처음 한 두 번은 그러려니 했다. 사람 생각이 일정한 논리와 순서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듯 수업 듣다 갑자기 무언가에 느낌이 팍 꽂혀서 물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얘는 그 정도가 심했다. 아무리 논리적 개연성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웃으며 설명을 해 주는데 설명을 해 주면 또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애초 시작된 질문이 설명과는 관련 없는 쓸 데 없는 질문인데, 그 다음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는 관련이 없는 또 쓸 데 없는 질문인 것이었다. 즉, 무슨 말이 튀어나올 지 당최 예측이 불가능했다.


"공급이 줄어들면 가격은 뛰어. 사과 농사가 흉년이 들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사과가 조금 나오지? 그러면 공급이 감소해서 사과 가격이 상승해."

"선생님, 사과 주스는 어느 회사 것이 맛있어요?"

"응? 나는 어느 회사 꺼 좋아하는데?"

"그 회사 꺼는 포도 주스가 맛있던데...우리나라도 청포도 나와요?"


뭐 이런 식이었다. 이것을 매 시간, 그리고 툭하면 이런 식으로 물어대니 걔가 질문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하나씩 대답해주기 시작하다보면 수업은 아예 산으로 가버렸다. 질문을 자르고 수업을 하면 시무룩해져서 조용히 딴짓하기. 딴짓하지 못하게 하면 또 다른 딴짓. 그 딴짓도 못하게 하면 결국 존다. 조는 거 깨워서 수업 듣게 하면 다시 엉뚱한 질문.


웬만하면 내 수업 시간에 발생하는 문제는 내 선에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타이르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짜내서 별별 수를 다 동원했지만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얘는 결국 원장선생님께 수업태도가 불량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얘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예전 일을 돌아보는 데다 얘가 특별한 애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걔가 왜 그랬나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을 전혀 몰랐다. 그 상황에서 매 시간 저렇게 수업 흐름 다 잘라버리고 엉뚱한 질문만 해 대고, 질문 공세를 끊으면 딴짓하거나 졸아버리는데 그걸 곱게 볼 수 없었다. 화를 내고 혼을 내도 계속 그러니 얘가 나를 우습게 보고 시비거나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1년간 이 아이하고 큰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수업 자체를 뒤엎어놓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건들지만 않으면 별 문제 없었다. 마치 말벌 벌통 같다고 할까나...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더라도 남들 방해되게 하는 건 아니라 걔를 건들지만 않으면 조용히 정상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걔를 수업에 참여시키려고 건드리는 순간 말벌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사실 사회에서 이런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냥 상대를 안 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 하나라서 수업을 안 들어도 그냥 혼자 조용히 딴짓하고 놀라고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건드리면 말벌 벌집 들쑤셔놓은 것처럼 되어 버린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발상을 바꾸어보자...


콜롬부스의 달걀처럼 모두 동시에 집중을 시킨다는 생각을 한 번 버려보자. 일단 얘는 혼자 딴 짓 하며 놀아도 다른 애들 방해는 하지 않는다. 어쩌다 '샤프심 빌려줘', '볼펜 떨어졌다!' 수준으로 다른 애들에게 말 거는 것 외에는 그냥 조용했기 때문에 신경을 끄려면 끌 수도 있다. 얘를 억지로 다른 애들과 동시에 수업에 집중하게 하면 수업 흐름 다 잘라버린다.


얘를 다른 애들과 함께 수업에 집중하게 하면 수업 자체를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일단 다른 애들을 위해 얘는 크게 소란을 피우지 않는 한 그냥 놔두고 수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애들이 문제 푸는 시간에 얘를 가르친다. 그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니 일단 교실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설명을 해 주고 문제를 풀게한 후, 얘를 따로 가르치려는데...당연히 잘 될 리 없었다.


일단 다른 애들 수업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마음의 평화를 많이 되찾았다. 그래서 얘를 가르치려는데 그게 잘 되었다면 당연히 이 당시에 '얘 진짜 ADHD 아니야?'라고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때 얘가 ADHD 라는 것은 몰랐지만 그 즈음 우연히 ADHD 가 뭔지 알게된 후, 얘가 분명 ADHD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수업 듣기 싫고 나랑 놀고 싶어서 그렇게 수업을 자꾸 끊어먹고 공부에 아예 흥미가 없어서 딴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얘를 가르치려는데 당연히 제대로 될 리는 없었다. 얼마 설명하지도 못하고 질문 받아주다보면 이야기는 산으로 가버리고, 다시 교재로 돌아와 설명하려다가 또 이야기는 산으로 가 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애들과 답 맞출 시간이 되어 버리곤 했다. 어쨌든 전보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서로 타협해가며 좋게 좋게 가자고 생각하면서 얘를 대했는데 이상한 점이 보였다.


얘 무슨 생각 하는 거지?


기본적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때는 얘네들이 쓰는 준말이나 은어 같은 건 대충 알아들었고, 모르면 물어보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면 되었기 때문에 '말' 그 자체를 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문제는 내가 말했을 때 얘의 다음 말이 어디로 튈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A가 '나는 어제 사과 먹었어'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을 들은 B가 어떤 말을 할 지는 대충 예상을 할 수 있다. 'A', '어제', '사과', '먹었다' 이것 중 하나와 관련된 말을 할 것이다. 일상 대화에서 '나는 어제 사과 먹었다' 라는 말을 들은 후 'A', '어제', '사과', '먹었다'에서 벗어난 말을 하는 게 오히려 어렵기 마련이다. 최소한 저 네 단어 중 하나와는 연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종종 저 네 단어와 전혀 개연성이 보이지 않는 말을 했다.


A : 나 어제 사과 먹었어.

B : 숙제는?

전혀 A와 B의 대화 사이에 연관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 대화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면 '숙제'는 '어제'와 관련이 있다. 이 대화를 조금 더 전개시켜보면

A : 나 어제 사과 먹었어.

B : 숙제는?

A : 무슨 숙제?

B : 어제 영어책 두 페이지 외워오는 거 있었잖아.

이렇게 자연스러운 진행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얘는

A : 나 어제 사과 먹었어.

B : 사과 맛없어. 나는 포도가 좋아.

A : 아...그런데 지금 포도는 비싸잖아.

B : 우리집에 건포도 있는데...아! 라면 먹고 싶다!


이런 식이었다. 전혀 다른 화제를 갑자기 꺼내는 데에 어떤 과정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얘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뀌는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왜 그 화제가 튀어나왔나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화제가 자꾸 급작스럽게 확 바뀌어대니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음에 뭐가 나올 지 전혀 예상을 할 수 없으니까. 종종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내가 대화를 끌고갈 수는 없었다. 그냥 대화 주도권을 싹 포기하고 걔의 말에 반응을 하기만 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화제를 자꾸 연관성 없이 바꾸어버리니 대화 주제는 종종 순식간에 엉뚱한 산으로 가버리곤 했다.


일반인 갑 : A B C D

일반인 을 : B E F G

일반인 갑 : B H I J

일반인 을 : K L M J


보통 대화의 전개가 이렇게 간다면


나 : A B C D

얘 : B E F G

나 : B H I J

얘 : K L M N

나 : K L M N? ... K L M O

얘 : K P Q R

나 : K P Q S

얘 : B T U V

나 : ...


얘와의 대화는 종종 저랬다.


흥미로운 점은 나와 대화할 때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하고 이야기할 때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는 듯 했다는 것. 애들끼리 대화하는데 얘가 다른 애들과 이야기하다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해서 애들이 '뭔 소리야'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대화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화제를 꺼내버리니 반응이 좋을 리는 없었다.


즉, 간단히 말해서 걔와의 대화에서 걔가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을 너무 많이, 그리고 쉽게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는 자기가 대화에 흥미를 느끼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때 내가 '얘는 분명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다'라고 확답을 내리지는 못했던 것이 흥미를 느끼는 것에는 집중을 했기 때문이었다. 대화하다 갑자기 뛰쳐나가버리고 그러는 충동과 본능에 충실한 모습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랬다면 대화를 시도하기 이전에 학원에서 쫓겨났겠지. '쟤는 왜 자꾸 화제를 쉽게 확 바꾸어버리지?'라는 '쟤는 엉뚱한데?'로 설명이 되지 않는 걔의 말에서 나타나는 부분을 제외하면 평범했다. 기분변화가 남들보다 빠르고 수업시간에 말벌 벌통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화할 때를 제외하면 정상적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하고, 이상하다고 보기엔 정상적이었다.


어쨌든 걔는 별 일 없이 잘 학교와 학원을 다니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서야 걔가 ADHD 아이였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역시 그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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