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지?"
예미역 근처 모텔인 약수장 모텔에서 잠을 매우 잘 잤어요. 얼마나 깊게 잤는지 모르겠어요. 숙소 들어와서 샤워를 마친 후 일찍 자야겠다고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바로 잠들었어요. 저녁 8시쯤 잠든 거 같았어요. 방에 불을 켜고 스마트폰으로 몇 시인지 확인했어요. 새벽 4시였어요. 창문을 열어봤어요. 어두웠지만 조금씩 동이 트려는 기색이 보였어요. 정신을 차리고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화장실 가서 볼 일 보고 샤워를 한 후 짐을 챙겼어요. 아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을 다시 확인했어요.
"물 챙겨가야지."
35000원 내고 하룻밤 묵은 방은 원래 2인실이었어요. 그래서 냉장고에는 처음 왔을 때부터 생수가 두 통 들어 있었어요. 이 중 한 통은 전날 뜯어서 마시다가 남겼어요. 한 통은 새 것이었어요. 뜯지 않은 500mL짜리 생수 새 것 한 통은 가방에 넣었어요.
'이렇게 보면 엄청 저렴하게 잘 잤어?'
작은 2인실이라고 하지만 엄연한 2인실이었어요. 35000원이면 괜찮은 싱글룸 가격이었어요. 싱글룸도 4만원 받는 곳들 여럿 있으니까요. 그런데 2인실이라고 생수도 2통 줬고 수건도 4장이나 비치되어 있었어요. 가격도 만족스러운데 2인실에 해당하는 물과 수건이 있었으니 아주 크게 만족했어요.
방에서 나왔어요. 열쇠는 카운터 앞에 있는 조그만 플라스틱 바구니에 넣었어요.
2023년 5월 17일 새벽 4시 30분, 드디어 운탄고도1330 4길 일정이 시작되었어요.
이 시각에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어요. 운탄고도1330 4길 걸을 거 아니라면 이 시각에 걸어서 어디 갈 일이 있을 리 없는 시골이었어요. 그래도 자동차는 간간이 다녔어요.
운탄고도1330 안내표식 리본이 매달려 있었어요. 아주 친절한 안내 표식이었어요. 여기는 카카오맵 보고 걸어도 되는 구간이라 길 잃어버릴 일이 없는데도 매우 상냥하게 조동리로 가라고 알려주고 있었어요.
운탄고도1330 리본을 보자 지난해 운탄고도1330 걸었던 것이 떠올랐어요. 그때는 운탄고도1330 4길을 걸을 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운탄고도1330 4길이 접근성이 매우 안 좋다고 여기고 있었구요.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당일치기는 어렵지만 접근성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어요. 숙박 문제는 괜찮게 해결할 수 있고, 꽃꺼끼재에서 사북역 내려가는 문제만 잘 해결하면 되었어요. 이렇게 숙박비 문제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고 꽃꺼끼재에서 사북역으로 내려갈 방법은 얌전히 택시 타고 내려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왔어요. 이 정도면 접근성 괜찮은 길이었어요.
"이거 운탄고도 맞아?"
너무 친절해.
안내 표식이 너무 너무 친절해!
운탄고도1330 3길은 안내표식이 엉망이었어요. 진심 분노했어요. 그러나 운탄고도1330 4길은 안내표식이 너무 친절했어요. 조금도 헷갈리지 말라고 갈림길에서 가야하는 방향 길 위에 안내표식을 세워놨어요.
날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어요.
2023년 5월 17일 새벽 5시, 조동철교에 도착했어요. 조동철교는 라멘식 철도로 유명해요. 지난해 함백에 놀러왔을 때 가본 다리였어요. 그때는 타이밍이 운 좋게 맞아서 조동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을 찍었어요. 이번에 왔을 때는 기차가 조동철교 위로 지나가고 있지 않았어요. 조동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어요. 길은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었어요. 부지런히 걸어야 했어요.
함백 탄광촌으로 왔어요. 여기에서부터는 길을 잘 찾아야 했어요. 새비재로 가는 길은 2개 있었어요. 하나는 운탄고도1330에서 안내하는 정식 코스였고, 다른 하나는 안경다리까지 가서 올라가는 길이었어요. 만약 안경다리로 가서 올라가는 길로 가면 타임캡슐공원을 가지 않고 바로 새비재로 올라가요. 중간에 타임캡슐공원으로 가는 길을 잘 찾아야 했어요.
'카카오맵 보면서 가면 돼.'
카카오맵에는 운탄고도1330 전 구간이 다 등록되어 있어요. 카카오맵에서 '운탄고도 4길'이라고 검색하면 운탄고도1330 4길 전체 코스가 나와요. 그러니 스마트폰 통신에 문제가 없는 구간에서는 카카오맵 보면서 걸어도 되었어요.
카카오맵을 보면서 길을 걸었어요. 함백은 매우 아름다운 동네에요. 만약 처음 함백을 왔다면 길이 길기는 해도 사북에서 1박할 거니 함백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다시 길을 걸었을 거였어요. 그러나 다행히 지난해에 함백을 와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운탄고도1330 4길만 걷기로 했어요.
타임캡슐공원으로 올라가는 조그만 길이 나왔어요. 운탄고도1330에서 너무 친절하게 절대 헷갈리지 말라고 갈림길에서 타임캡슐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양옆에 안내표식을 박아놨어요.
'운탄고도1330이 이럴 리가 없는데...'
적응 안 되었어요. 운탄고도1330 3길은 이정표를 길 찾으라고 설치한 건지 길 헤매라고 박아놓은 건지 분간 안 되게 설치해놨어요. 운탄고도1330 1길과 2길 후기를 보면 1길과 2길도 이정표 이상하게 설치해놔서 짜증 좀 나는 길인 모양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4길에서 엄청나게 친절하고 절대 착각 못 하게 이정표를 박아놨어요.
타임캡슐공원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올라가다가 뒤를 바라봤어요.
함백 마을의 예쁜 풍경이 보였어요.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은 정말로 한 번 여행 꼭 가볼 만한 지역이에요. 예미리에서 한적하게 여유를 즐기는 힐링 여행을 즐기고, 조동리에서 예쁜 탄광촌 마을을 구경할 수 있어요.
타임캡슐공원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옆으로 아름다운 정선군 풍경이 펼쳐졌어요.
"이 길 사람 진 빼는 길이네."
타임캡슐공원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구간은 어렵거나 위험한 길은 아니었어요. 걸을 만한 길이었어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길이었어요. 시멘트 포장된 오르막 농로라고 보면 되는 길이었어요. 그러나 경사가 꽤 있고 계속 오르막이었어요. 중간에 아주 짧게 가빠진 숨 진정시킬 수 있는 평평한 구간이 조금 있었지만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졌어요. 힘들거나 어렵거나 위험한 길이라고 표현하는 건 틀린 표현이었어요. 그 대신 '사람 진 빼는' 길이었어요.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고 하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포장 잘 된 이런 길 하나 못 가냐고 타박하게 생긴 길이지만 경사 꽤 있는 구불구불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졌고 쉴 만한 곳도 별로 없어서 지치게 만드는 길이었어요.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산 속에 있는 절 가는 길 정도로 생각하면 될 정도였어요. 예전에 북한산 도선사 걸어올라갈 때가 떠올랐어요.
"우와!"
멋진 경치가 등장했어요. 광활한 고랭지 배추밭이었어요.
배추가 없어도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지형 자체가 상당히 아름다운 지형이었어요. 운탄고도 표시석도 풍경과 잘 어울리게 좋은 자리에 서 있었어요.
해가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고랭지 밭을 따스하게 덮고 있었어요.
"이런 사진도 되네?"
배추가 없는 고랭지 밭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사진으로 찍었어요. 그러자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의 사진이 되었어요. 우리나라 여행이 아니라 사막 여행하고 있는 것처럼 나왔어요. 제대로 배낭여행중인 느낌의 사진이 찍혔어요.
"여기는 배추 없어도 예쁜데?"
어쩌면 배추가 없었기 때문에 더 예뻤을 수도 있어요. 배추가 있을 때는 못 와봤어요. 이때 처음 가봤어요. 배추가 있으면 있는 대로 매우 환상적으로 아름다울 거에요. 그런데 배추가 없으니까 묘하게 사막 같은 느낌이 들며 이국적인 맛이 있는 사진이 찍히는 장소였어요. 지형 자체가 아름다웠고, 배추가 없어도 지형과 흙만 있는 배추밭이 어우러져서 멋진 장관을 이루고 있었어요.
영월군 배추는 배추 형태가 보일 정도로 자랐는데 정선군은 이제 배추를 심고 있었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걸어갔어요.
'운탄고도 그냥 때려칠까?'
예전에 월간 산 잡지에서 운탄고도1330 각 코스 소개 기사를 연재한 적이 있었어요. 월간산 잡지의 운탄고도1330 각 코스 소개 기사에서 4길 기사를 보면 기자가 타임캡슐공원에서 배추밭이 너무 아름다워서 4길 종주 의욕을 잃을 뻔했다고 적어놨어요. 기사를 잃을 때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어요. 와서 보니 과장이 아니었어요. 진짜로 너무 아름다웠어요.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계속 감상하고 사진 실컷 찍고 놀다가 함백으로 다시 내려가서 함백 마을 돌아다니고 싶어졌어요. 함백 마을과 새비재 배추밭에서 한나절 돌아다니며 구경하면서 놀면 그것만으로도 매우 황홀한 일정이 될 거였어요.
'기자 말이 맞았네.'
타임캡슐공원부터 새비재까지 이어지는 배추밭 풍경을 보자 운탄고도1330 4길 완주 의욕이 뚝 떨어졌어요. 배추가 있다면 훨씬 더 아름다울 거에요. 그러면 완주고 나발이고 배추밭에서 실컷 즐기고 놀다가 내려가서 예쁜 함백 마을 구경하고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더 치솟았을 거에요. 배추밭 없어도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새비재로 걸어가며 계속 고랭지 배추밭을 감상했어요.
새비재에는 정자가 있었어요.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데?"
어마어마했어요.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웠어요. 새비재 배추밭은 '죽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 할 우리나라 비경'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줘도 그 누구도 반박 안 할 풍경이었어요.
새비재 정자에 앉아서 휴식을 충분히 취했어요. 조금만 앉아 있다가 다시 출발하고 싶었지만 길이 까마득히 많이 남아 있었어요. 아직 걸어가야 할 거리가 한참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앉아서 10분 이상 쉬고 가기로 했어요. 충분히 쉬면서 엽기소나무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에서 쌓인 피로를 최대한 풀고 가기로 했어요. 준비해간 미니 초코바와 생수를 마시며 계속 경치를 감상했어요. 너무 좋았어요.
"여기는 언제 또 오지?"
벌써 언제 또 올 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여름에 무조건 한 번 다시 갈 거에요. 배추가 있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요. 그때는 4길을 다 걷지는 않고 하루는 또 예미리에서 놀면서 쉬고, 다음날은 타임캡슐공원 배추밭 감상하고 내려가서 함백 마을과 개미촌 마을을 구경하고 갈 거에요. 지금도 보고 있는데 바로 또 언제 다시 올 지 고민하게 만드는 풍경이었어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또 걸어야 했어요.
차단기를 넘어갔어요.
자동차도 다닐 수 있게 잘 조성된 임도가 계속 이어졌어요. 과거에는 이 도로로 석탄을 실은 트럭이 이동했다고 해요. 그리고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이 길을 달렸고, 지금은 도보 여행자들을 위한 운탄고도1330 4길로 조성되었어요.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걷는 길인데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새비재부터는 산행길이 아니라 산책길이었어요. 코스 전체 길이가 워낙 길어서 그렇지, 길 자체는 '난이도 없음'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어요. 간간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우리나라 도시에도 있는 수준이었어요.
게다가 길이 조금이라도 헷갈릴 거 같으면 절대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말라고 길 표지도 위 사진과 같이 제대로 정확히 잘 박아놨어요. 지도 아예 안 보고 걸어도 되는 길이었어요. 지도를 볼 일이라고는 그저 제가 얼마나 걸어왔는지 궁금해서 확인하려고 할 때 뿐이었어요.
이런 풍경을 보며 걸었다고 하면 험한 산을 등산한 줄 알 거에요. 그러나 저는 걷기 너무 좋고 쉬운 길을 걷고 있었어요. 매우 쉬운 길을 걸으며 보는 풍경이 저렇게 멋진 산세를 감상하는 풍경이었어요.
"저기다!"
2023년 5월 17일 오전 8시 27분, 운탄고도1330 4길 중간 스탬프함에 도착했어요.
스탬프함에는 타임캡슐공원 스탬프함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스탬프함 위치는 운탄고도1330 4길 정방향 진행시 새비재에서 3km 진행한 지점이었고, 역방향 진행시 사동골에서 3.9km 진행한 지점이었어요.
"여기 위치 어디지?"
나중에 글 쓸 때 스탬프함 위치를 기록하려고 GPS 정보를 확인했어요.
37도 11'10.8"N 128도 43'39.7"E
위도와 경도 좌표가 저렇게 나왔어요. 스탬프함이 있는 곳은 3G가 제대로 터지지 않았어요. 통신상태가 불량한 지역이었어요. 그래도 완전히 먹통인 지역은 또 아니었어요. 스마트폰을 높이 치켜들어올리면 아주 약하게 데이터 통신이 가능했어요. 위치가 어디인지 찾아봤어요.
"영월?"
GPS 좌표는 스탬프함이 영월군 산솔면에 위치해 있다고 나오고 있었어요.
스탬프함을 열었어요. 스탬프함 안에는 강원도 정선군 여행 도장 중 하나인 운탄고도1330 4길 타임캡슐공원 스탬프가 있었어요.
준비해간 우편엽서에 스탬프를 잘 찍었어요.
강원도 정선군 여행 도장 중 하나인 운탄고도1330 4길 타임캡슐공원 스탬프 도안은 엽기소나무였어요. 도안이 매우 서정적이었어요. 타임캡슐공원 기념도장으로 사용해도 좋을 예쁜 도장이었어요. 그러나 타임캡슐공원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다시 한 번 아까 봤던 고랭지밭의 환상적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어줬고, 숨어 있는 조그마한 보물을 얻은 기분도 조금 들게 만들어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