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는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어요. 빗줄기는 사람 약올리려고 작정했는지 그칠 거 같다가 굵어졌고, 굵어져서 완전 망했다 싶으면 가늘어졌어요.
'카메라 안 가져오기를 잘 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여행에는 안 들고 왔어요. 이번 여행은 순수하게 폰카로 사진을 찍으며 다니기로 했어요. 갤럭시노트10+ 중고로 산 것을 카메라 삼아서 다니고 있었어요. 아직 전화기로는 갤럭시노트5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갤럭시노트10+는 공기계 상태였어요. 공기계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갤럭시노트10+도 사진 잘 찍히니까 갤럭시노트5 고장날 때까지 카메라로 사용하기로 했어요. 이번이 그 첫 여행이었어요.
카메라 안 들고 온 것이 신의 한 수였어요. 비가 내릴 때는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기 매우 고약해요. 비 때문에 우산 써야 하는 것은 우비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카메라 렌즈에 빗방울 떨어지는 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그때그때 렌즈 닦는 천으로 빗방울을 닦는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렌즈에 떨어진 빗방울을 한 번 닦아내었다고 봐줄 하늘이 아니에요. 기껏 렌즈에 떨어진 빗방울 닦아봐야 구도 잡는 그 사이에 또 빗방울 떨어지는 일도 매우 많아요. 비 오는 날 디지털 카메라 들고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려고 하면 정말 짜증 많이 나요.
그러나 스마트폰 카메라는 이런 문제에서 매우 자유로워요. 스마트폰 렌즈는 워낙 작기 때문에 빗방울이 절묘하게 렌즈 바로 위에 떨어질 일이 별로 없어요. 렌즈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대충 옷자락으로 쓱쓱 문질러서 닦아도 되고, 휴지로 닦아도 되요. 단점이라면 스마트폰을 자꾸 꺼내고 만지작거리는 동안 렌즈에 지문 찍히는 일이 잘 발생하는 점이지만 이 정도는 불편한 축에도 못 들었어요.
갤럭시노트10+를 순수하게 카메라로 써먹고 있으니 배터리 지속시간도 길었어요. 사진 촬영을 많이 하면 스마트폰 배터리가 많이 닳아요. 그러나 전화기 기능은 죄다 갤럭시노트5로 보고 있었고, 갤럭시노트10+는 순수하게 카메라 역할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터리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어요.
빗줄기 속에서 장미사택을 향해 걸어갔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운탄고도 도계리 탄광사택 마을 장미사택은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느티로 9 일대에 있었어요. 도계리 탄광사택 마을을 찾아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도계중학교로 가면 되요. 도계중학교 주변 및 그 일대가 탄광사택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에요.
친구는 혼자 막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어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사진도 안 찍고 혼자 앞장서서 빨리 걸어가고 있었어요.
'쟤 왜 저러지?'
예전에는 이런 곳 오면 사진도 열심히 찍고 구경도 열심히 하던 친구였어요. 그런데 사진도 전혀 안 찍고 주변 구경도 안 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계속 앞으로 빨리 걸어가고 있었어요. 무슨 귀신에 씌인 것처럼 말도 없이 혼자 마구 앞으로 쭉 걸어갔어요.
'이 동네에서 뭐 봐야하는지 알려줬는데?'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제가 빨리 걸어가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냥 놔뒀어요. 가다가 자기가 사진 찍은 거 있으면 멈춰설 거고, 보고 싶은 거 있으면 서서 유심히 보겠죠.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발 맞추며 다닐 것까지는 없었어요. 무슨 군대에서 제식훈련 발 맞춰 걷는 것 연습하는 것도 아니구요. 길만 같으면 앞서 가든 뒷서 가든 적당히 각자 즐기면 되요.
드디어 장미사택에 도착했어요.
"야, 어디 가!"
친구는 한참 앞에 있었어요. 주변을 보지도 않고 무조건 직진만 하고 있었어요. 친구에게 오라고 손짓했어요. 친구가 돌아왔어요.
"여기가 장미사택이야. 여기부터 이제 골목 돌아다니면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보면 돼."
친구에게 여기가 장미사택이라고 알려줬어요. 광산 회사에서 광부에게 들어가서 살도록 마련해준 거처 중 하나라고 알려주고 이제부터 이 사택 마을을 쭉 돌아다니며 보면 된다고 했어요.
장미사택 한 동을 쭉 걸으며 봤어요.
'이거 어디서 봤지? 나 이거랑 비슷한 거 본 적 있는데?'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운탄고도1330 탄광사택 마을 장미사택 건물 중 한 동을 쭉 다 보고 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건물이 신기하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신기하지 않았어요. 이런 건물을 본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서울에서 달동네 찾아다닐 때 장미사택과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 몰려 있는 동네에 갔었어요. 그게 어디인지 바로 기억나지 않았어요. 예전에 장미사택 마을과 비슷한 곳을 간 기억이 나서 의외로 매우 익숙한데 그게 어디인지 떠오르지 않았어요.
'청량리 부흥주택이었나?'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근처에 있는 청량리 부흥주택이었어요. 청량리 부흥주택 마을이 여기와 묘하게 비슷했다고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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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량리 부흥주택은 홍릉주택이라고도 불러요. 서울 홍릉주택단지는 서울 미래유산 중 하나에요. 한국전쟁 이후 주택영단을 통해 외국 차관을 도입해 공동주택사업으로 서울에 공급한 대규모 국민주택이에요.
'아닌데? 홍릉주택은 원래 2층이었잖아. 나중에 확장해서 그렇게 된 거구.'
서울 청량리 홍릉주택단지는 처음부터 2층 건물로 지었어요. 주택 4호가 붙어 있는 2층 연립주택이었어요. 나중에 사람들이 증개축을 하며 여러 건물이 하나의 길다란 건물로 바뀌었어요. 그러니 청량리 홍릉주택과 장미사택은 거리가 멀었어요. 장미사택은 처음부터 여러 세대가 살도록 길게 지은 건물이었어요. 청량리 홍릉주택은 원래는 별개의 건물들이었지만 증개축을 통해 하나의 길다란 건물로 합쳐진 것이었구요.
'홍릉주택 말고 어디였지?'
서울 달동네 돌아다니던 기억을 되짚어봤어요. 노원구에 있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달동네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어요. 노원구에 있는 달동네는 형성 과정에서 서울시가 서울 도심부 판자촌 주민들을 이전시키며 4가구에 약 30평 되는 땅을 불하해서 나눠서 살도록 했어요. 그래서 단층에 사각형 구획으로 딱딱 떨어져요. 여기와는 모습이 아주 달랐어요. 그러니 노원구 달동네는 아니었어요.
서울 도처에 있는 달동네들과는 형태가 매우 달랐어요. 그나마 가옥 형태가 비슷한 곳이라면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구룡마을이었어요. 구룡마을은 1980년대에 형성된 비닐하우스 형태의 판자촌이에요. 판잣집 업자가 불법으로 비닐하우스처럼 길게 다세대 판잣집을 짓고 도시 빈민들에게 판매했다고 해요. 장미사택 모습은 구룡마을 집들과 모습이 비슷한 모습이었어요. 건축자재에서 구룡마을은 나무판자와 비닐 같은 것이고 장미사택은 벽돌이라는 차이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구룡마을은 불법 판자촌이고 여기는 합법적인 건물이에요. 급히 지어야했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그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어요.
"아, 거기다!"
이화동 벽화마을
드디어 떠올랐어요.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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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의 정식 명칭은 낙산 국민주택단지에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요. 여기는 낙산 국민주택단지보다는 이화동 벽화마을로 더 유명해요.
서울 종로구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는 1958~1959년에 조성되었어요.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는 시멘트 블럭을 재질로 사용했고, 시멘트 모르타르로 외부를 마감했어요. 기와는 슬레이트 기와를 얹었어요.
이화동 국민주택단지와 모습이 매우 비슷해보였어요. 장미사택은 평지에 지어져 있었지만, 이화동 국민주택단지처럼 고저차가 심한 경사진 곳에 건설되었다면 아마 정말 많이 비슷했을 거에요.
장미사택을 천천히 보며 걸었어요. 친구는 혼자 막 앞서서 가고 있었어요. 사진도 안 찍고 아무 것도 안 보고 뭐에 홀린 것처럼 그저 앞으로 가고 있었어요. 친구에게 길에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보라고 알려줬어요. 자기 혼자 막 앞서 가든 말든 놔두기로 했어요. 사람들 살고 있는 마을에서 큰 소리로 친구한테 골목 하나씩 둘러보라고 소리치는 건 완전히 민폐였어요. 혼자 알아서 가든 말든 놔두기로 했어요. 어차피 혼자 막 가다가 제가 안 오면 다시 돌아오든가 기다리든가 할 거였어요.
장미사택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집 앞에는 고추를 심은 화분이 있었어요. 고추가 빨갛게 잘 익어 있었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탄광사택 마을에 있는 장미사택은 11개 동으로 형성되어 있어요.
장미사택은 기본 주거 단위가 25.5 제곱미터에요. 공간 구조는 매우 간단하게 되어 있어요. 현관은 북서향쪽에서 출입하도록 되어 있어요. 방은 남동향의 햇볕을 받도록 되어 있어요.
장미사택의 각 한 가구는 방 2칸과 부엌 겸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방과 방 사이에는 미서기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서로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여기에서 참고로 미서기문은 미닫이문과 달라요. 미닫이문, 미서기문 둘 다 기본적으로 밀어서 여는 문이에요. 미닫이문은 열었을 때 가벽 속으로 문이 들어가거나 문이 벽과 겹쳐지는 문이에요. 반면 미서기문은 문을 열기 위해 밀었을 때 다른 문과 겹쳐져요. 문을 밀었을 때 문이 벽과 겹치면 미닫이문, 문이 다른 문짝과 겹치면 미서기문이에요.
장미사택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집 안에서 할머니 한 분이 저를 유심히 쳐다보고 계신 것이 보였어요.
"안녕하세요."
허리를 굽혀서 깍듯이 인사했어요. 이런 동네를 탐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에요. 인사를 잘 해야 해요. 인사만 잘 하며 다녀도 많은 도움을 받고 많은 분쟁의 불씨를 바로 꺼버릴 수 있어요.
인사를 하고 할머니께 다가갔어요. 할머니께서 문을 열고 나오셨어요.
"여기가 장미사택인가요?"
"예, 그래요."
할머니께 여기가 장미사택 맞냐고 여쭈어봤어요. 할머니께서는 맞다고 하셨어요.
"제가 제주도 출신인데 여기가 과거 탄광 마을이었다고 해서 궁금해서 와봤어요."
할머니께 제가 제주도 출신인데 여기가 과거 탄광마을이었다고 해서 궁금해서 와봤다고 말씀드렸어요. 할머니께서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여기 온 진짜 이유가 바로 저거였어요. 저는 제주도 출신이에요. 제주도에는 광산이 없어요. 그래서 광산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매우 궁금했어요. 할머니께서도 제가 제주도 출신인데 광산 마을이 궁금해서 와봤다고 하자 바로 납득하셨어요. 제주도에 광산 없는 것은 전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든요.
"여기에 지금도 광부들 살고 있나요?"
제일 궁금했던 점. 지금도 장미사택에 광부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할머니께 지금도 장미사택에 광부들이 살고 있는지 여쭈어봤어요.
"예, 지금도 광부들 살고 있어요."
할머니께서는 지금도 장미사택에 광부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예전에는 여기 사람 많았어요?"
"예전에는 엄청 많았지! 여기 걷지도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매우 많았어요. 이제는 많이 떠나서 별로 없지만요."
할머니께서는 예전에는 여기에 사람들이 무지 많았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과거 광업이 흥할 때는 사람들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하셨어요.
"여기 도계캠퍼스 들어오면서 사람들 늘어났나요?"
"대학교 들어온 후 한때 사람들이 좀 많았어. 그런데 지금은 그것도 줄어들었어요."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가 개교했을 때에는 한동안 사람들이 조금 많이 늘어났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줄어들어서 과거 같지 않다고 하셨어요.
"할머니, 도계에서 유명한 음식이 물닭갈비 맞나요? 여기 이쪽에서 유명한 음식이 물닭갈비라고 들었거든요."
"물닭갈비? 그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어."
"그래요?"
이건 조금 많이 의외였어요. 강원도 남부 탄광지대 대표 음식 중 하나가 물닭갈비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도계에 물닭갈비가 들어온 것은 얼마 안 되었다고 하셨어요.
'물닭갈비는 태백 음식인가?'
삼척시 도계읍과 태백시는 매우 가까워요. 태백시는 도계읍에서 기차로 고작 2정거장이에요. 반면 도계읍에서 삼척시내로 가려면 산을 완전히 내려가야 해요. 기차는 아예 없어요. 어떻게 보면 같은 산골에 탄광도시인 태백이 삼척시내보다 교통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더 가까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태백시와 도계읍이 가깝다고 해도 한 동네는 아니에요. 물닭갈비가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태백에서 먼저 생겨서 유행하면서 나중에 도계로 유입되었을 수도 있어요.
"여기에서 물닭갈비는 어디가 유명해요?"
"텃밭이었던가? 거기 있고 원희네였던가...이름이 갑자기 기억 안 나네. 오늘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 아래 내려가면 있어요."
할머니께서 물닭갈비 맛집으로 두 곳 정도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할머니와 대화하고 있는데 혼자 막 가던 친구가 돌아왔어요. 친구는 저와 할머니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어요.
'얘가 어디 맛이 갔나?'
멀찍이서 저와 할머니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친구가 매우 이상했어요. 원래 이런 친구가 아니었어요. 여행 중 사람들과 말할 기회 있으면 말하는 거 좋아하고 이런저런 거 물어보는 거 잘 하는 친구였어요. 이 친구와는 여행을 여러 번 다녀봤어요. 이 친구가 관심없고 싫어하는 곳 갈 때 반응과 달랐어요. 아주 확실히 달랐어요.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어요. 관심이 없어서 휙휙 지나치며 가는 게 아니라 뭔가 쫓기고 촉박해서 대충대충 해치우려고 하는 모습이었어요. 관심없어서 대충 하는 것과는 뭔가 확실히 달랐어요. 죽을 날 얼마 남지 않은 사람마냥 깊이고 음미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그저 단시간에 최대한 많이 이동하려고 하는 느낌이었어요. 독서로 비유하자면 한 권씩 제대로 쭉 정독하는 게 아니라 책을 굽혔다 펼치며 글자 하나 안 보고 페이지만 휘리릭 파라락 빠르게 넘긴 후 다 읽었다고 던져대며 무의미하게 읽은 책 제목만 늘려가는 꼴이었어요.
'아, 제일 중요한 거!'
할머니께서는 여기에 아직도 광부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이왕 탄광사택 마을 왔는데 탄광 입구도 보고 싶었어요. 여기 올 때만 해도 아직까지 운영중인 탄광이 있는 줄 몰랐어요. 할머니께서 아직도 여기에 광부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운영중인 탄광이 있을 거였어요.
"지금도 광산 하고 있죠?"
"예."
"광산은 어디에 있어요?"
"저기 저쪽에 LH아파트 있어요. 거기 너머 조금 더 가면 있어요."
"거기 여기서 먼가요? 걸어서 갈 수 있나요?"
"그렇게 안 멀어요. 예전에는 광부들이 걸어서 다녔는데 지금은 버스 타고 다녀요."
"감사합니다."
할머니께서 지금도 운영중인 광산 위치를 알려주셨어요. LH아파트 너머로 조금 더 가면 광산이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친구에게 갔어요.
"가자."
"야, 너 뭐 그렇게 보고만 있었어? 와서 같이 이야기하지."
친구는 별 말 없었어요.
빗줄기는 계속 오락가락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그칠 희망이 없어졌어요. 계속 내렸어요. 하늘도 구름이 걷힐 기미가 안 보였어요.
장미사택 건물 앞에는 호박이 잘 자라고 있었어요. 빗방울은 계속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어요. 빗물 먹어서 모든 풍경이 색이 더 진해졌어요.
"야, 앞에 물구덩이 조심해."
정신줄 놓고 걷는 친구에게 앞에 있는 물구덩이 조심하라고 했어요. 친구는 무슨 영혼 없이 육신만 남은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기분이 영 꺼름찍했어요.
친구가 물구덩이에 발을 빠뜨리지 않았어요. 다행이었어요.
빗줄기는 더 거세졌어요. 카메라에 대놓고 빗줄기가 찍히고 있었어요.
지금은 매우 낡고 허름해보이는 장미사택이지만, 예전 한창 광업이 흥할 때 광부들에게 사택 입주는 모든 광부와 광부 가족들의 희망이자 꿈이었다고 해요. 심지어 사택에 입주해서 자기 집처럼 살고 싶어서 탄광에 취업한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탄광사택은 장기 근속자에게 우선적으로 배당되었다고 해요. 탄광촌에서 주택난이 매우 극심했던 1960년대에는 10년 이상 근무해야 사택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고 해요. 1970년대에는 형편이 많이 나아졌지만 입사한 지 5년 이상 근무해야 사택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해요.
탄광 마을에서 광부들이 사택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다 보니 탄광 마을에서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택에서 살고 싶어했다고 해요. 그리고 이미 사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이 정말 행운이라고 여겼다고 해요.
타지역에서 탄광촌에 처음 온 사람들은 사택을 보고 부정적인 의미로 깜짝 놀랐지만, 사택에 입주하게 된 광부와 광부 가족들은 사택을 호텔 같다고 하고 대궐 같다고 하고 궁전 같다고 표현했다고 해요.
장미사택은 매우 허름한 시멘트 벽돌로 지은 건물이었지만, 아주 예전에는 서로 들어가서 살고 싶어하던 선망의 대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