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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할 거 하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어요. 딱히 연락오는 곳도 없고 특별한 일도 아무 것도 없었어요. 평화롭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카카오톡으로 메세지가 왔어요. 제주도 살고 있는 친구가 보내온 메세지였어요.

 

"너 집 주소 뭐냐?"

"나?"

 

친구는 다짜고짜 제가 살고 있는 집 주소를 물어봤어요.

 

"왜?"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가 제게 제가 살고 있는 곳 주소를 물어볼 이유가 없었어요. 친구가 갑자기 제 방에 찾아오겠다며 주소를 물어봤을 거 같지는 않았어요. 그랬다면 자기가 먼저 서울 올라간다고 이야기했을 거에요. 그리고 보통 그러면 제가 서울로 가서 만나요. 애초에 다짜고짜 제 방에 불쑥 찾아오는 친구도 아니었어요. 친구가 제게 집주소를 물어보는 이유가 궁금했어요.

 

"레드향 한 박스 보내줄께."

"레드향?"

"그래, 너 거기에서 먹고 살기 힘들 건데."

"아, 고마워!"

 

친구가 제게 집주소를 물어본 이유는 레드향 한 박스를 부쳐주려고 하는데 제가 살고 있는 집주소를 몰라서 물어본 거였어요. 갑자기 연락와서 레드향 한 박스 보내준다고 하자 얼떨떨했어요. 준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뜬금없이 왜 갑자기 레드향 한 박스를 부쳐주겠다고 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러나 이상한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안심하고 받아도 될 거였어요.

 

"잠깐만 기다려."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저도 제가 사는 곳 주소를 외우고 있지 않았어요. 아직 고지서 받은 것도 없어서 부동산 계약서 보고 주소를 찾아서 친구에게 보내줬어요.

 

친구에게 주소를 알려준 후 떠오른 것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레드향 한 번도 못 먹어봤다.

 

저는 제주도 출신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제가 귤을 엄청 많이 먹어봤고, 온갖 종류의 귤을 다 먹어봤을 거라 지레짐작하곤 해요. 하지만 전혀 아니에요. 황금향, 레드향 같은 귤은 한 번도 못 먹어봤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진짜 감귤 뿐이었어요. 감귤과 금귤이 전부였어요. 그 중 금귤은 보다 귀한 거였어요. 금귤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건 제주도에서도 흔히 보이는 과일까지는 아니었어요. 보통 일본어 그대로 '낑깡'이라고 하곤 했는데, 이건 제주도에서도 지천에 널려 있는 과일이 아니라 먹고 싶으면 사서 먹어야 했어요. 귤은 정말 많았구요.

 

제가 어렸을 적에 제주도 감귤 산업은 나날이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어요. 감귤 산업이 안 좋자 한 푼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비상품선과인 파치를 마구잡이로 팔았고, 이는 감귤 가격 폭락을 야기했어요. 감귤 가격이 폭락하자 또 한 푼이라도 건지기 위해 파치를 마구잡이로 내다팔았어요. 이러면 또 감귤 가격 폭락이었어요. 무한 악순환이었어요. 여기에 잘 익지 않은 감귤을 따서 카바이드 처리해서 노랗게 만들어서 파니까 맛도 떨어졌고, 더 이상 상품성 있는 감귤을 열지 못하는 늙은 나무도 계속 놔두고 감귤을 생산하니 감귤 질은 더욱 나빠졌어요. 제가 제주도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이런 문제는 TV 제주 지역 방송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오던 주제였어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한라봉이에요. 한라봉이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고급 작물로 대성공하면서 감귤 농사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한라봉으로 넘어갔어요.

 

하지만 기존에 감귤 농사하던 사람들이 한라봉 농사로 아주 많이 넘어가지는 않았어요. 한라봉은 제대로 맛을 내려면 제주도 기후로도 힘들어요. 비닐하우스에서 난방을 엄청나게 빵빵하게 틀어줘야 제대로 맛이 나는 한라봉이 생산되요. 그래서 시설 설치 및 관리 비용이 꽤 많이 들어가요. 그리고 한라봉은 감귤 농사에 비해 손이 매우 많이 간다고 해요. 이 때문에 한라봉은 인기가 전국적으로 폭발하고 분명히 고수익 작물이기는 한데 감귤 나무 싹 베어내고 한라봉 농사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한라봉의 인기 폭발은 이후 제주도 과수농업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어요. 한라봉은 아무리 비싸도 맛만 있다면 잘 팔린다는 것을 증명해냈어요. 1990년대말 기준으로 한라봉 한 알이 5000원 7000원 1만원 이랬는데도 엄청 잘 팔렸어요. 지금도 주먹만한 과일 한 알에 5000원 7000원 1만원이라고 하면 엄청 비싸다고 난리인데 지금 기준이 아니라 1990년대 기준으로 가격이 저랬는데 매우 잘 팔렸어요. 그러니까 요 근래 기준으로는 샤인머스캣 정도나 되어야 당시 한라봉 광풍과 맞먹을 만 하다고 비벼볼 수 있어요.

 

한라봉의 성공에 힘입어 제주도는 여러 고급 과일을 내놓았어요. 아쉽게도 한라봉만큼 인기가 폭발하지는 못 했어요. 한라봉 이후 제주 망고가 또 살벌한 가격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지만 이것은 그렇게 인기가 폭발하지는 못했어요.

 

제주도는 감귤을 개량해서 고급 감귤을 여러 종류 내놓았어요. 제일 처음에 등장한 것이 천혜향일 거에요. 천혜향은 한라봉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꽤 인기를 끌었어요. 사실 한라봉은 맛도 맛이지만 생긴 것이 꼭지 뽈록 튀어나온 것이 제주도를 연상시켜서 단순히 농업 뿐만 아니라 일종의 관광 마스코트, 제주도의 상징 등으로 써먹기에도 매우 좋았어요. 귤과 모양이 매우 달라서 누가 봐도 바로 분간 가능하구요. 그렇지만 천혜향은 생긴 건 감귤과 같기 때문에 외관만 봐서는 특징을 찾을 수 없었어요. 또한 한라봉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맛을 넘어서서 제주도 과수산업에 상당한 족적을 남긴 의미있는 과일이라 한라봉의 명성에 걸맞는 성과를 내기는 애초에 매우 힘들었어요.

 

한라봉 태풍만큼은 아니지만 천혜향도 나름대로 인기가 좋았어요. 이후 고급 감귤로 레드향, 황금향 등이 출시되었어요. 이런 것은 제가 제주도를 떠난 이후에 본격적으로 판매된 것들이에요. 그래서 저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천혜향도 시식으로 먹어본 게 전부구요.

 

도시 사람들은 재배지에서 살면 고급 상품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거라 여기는데 이게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제 경험상 20은 맞고 80은 틀려요. 왜냐하면 상품 작물 농사 짓는 사람들은 자급자족하려고 농사짓는 게 아니라 작물 팔아서 돈 벌려고 농사지어요. 당연히 좋은 건 비싼 값 받고 팔아야죠. 자기들끼리 좋은 거 몇 개 정도는 먹을 수 있지만 제일 좋은 거를 자기들끼리 다 먹어치우면 돈은 뭘 팔아서 벌 거에요.

 

제주도에서 감귤이야 워낙 많이 생산되고, 그 중에서 관광객들과 현지인 모두 공짜로 얻어먹는 도처에 굴러다니는 귤은 비상품선과 파치에요. 파치가 맛이 없어서 파치가 아니라 외모지상주의에서 탈락한 과일이 파치에요. 크기가 너무 커서 파치인 것도 있고, 크기가 너무 작아서 파치인 것도 있어요. 멀쩡하고 맛있는데 단지 외모 기준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비상품선과로 전락한 것들이에요. 감귤은 파치가 워낙 많기 때문에 파치 감귤은 제철에 가면 많이 얻어먹을 수 있어요.

 

반면 한라봉 및 고급 품종 감귤들은 파치가 나온다 해도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아요. 지금 한라봉 관련 제품들 나온 거 보세요. 무슨 한라봉 주스니 화장품이니 정말 많은데 전국적으로 그 상품들 공급하려면 한라봉이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어요. 이러니 파치가 많이 나오지 않아요. 그나마 있는 것들도 식품공업용 원재료로 팔려나가니까요. 그래서 이런 건 진짜 한라봉 및 고급 품종 감귤 농사하는 사람이 바로 옆 이웃이나 가족, 친척이 아닌 이상 공짜로 먹기 어려워요.

 

이후 한동안 택배 온다는 연락이 없었어요. 잊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제였어요. 택배 도착 문자가 왔어요. 문을 열고 나가봤어요. 친구가 보내준 레드향이 도착해 있었어요.

 

 

박스 그림은 멀리 초록빛 완만한 오름이 보이는 노란 유채꽃밭이었어요.

 

박스 오른편에는 '새콤달콤 입안 가득 퍼지는 레드향의 신선한 자연의 맛...'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어요.

 

 

상자를 열어봤어요.

 

깜짝 놀랐어요.

 

 

진짜 좋은 비싼 레드향이었어요. 친구가 제게 레드향 한 박스 보내준다고 했을 때 저는 당연히 파치 한 박스 보내주는 줄 알았어요. 사실 파치 한 박스라고 해도 주기만 하면 감사합니다 허리 90도 깍듯이 인사에요. 위에서 언급했지만 고급 품종 과일은 파치도 쉽게 먹기 어려워요. 파치로 줘도 엄청 고마울 건데 이건 파치가 아니라 진짜 비싼 상품이었어요.

 

안 먹어봐도 이게 매우 비싼 거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어요. 3kg인데 딱 14알 들어 있었어요. 포장도 상품 포장이었어요. 레드향 한 알 크기가 상품으로 매우 선호도 높은 크기였어요. 청소년 학생들 주먹 크기였어요. 귤에서 이런 건 비싼 상품으로 잘 팔려요. 과일은 외모지상주의의 끝판왕이고, 귤은 무식하게 큰 건 오히려 파치이고 딱 여자~청소년 주먹 크기가 제일 인기 많아요. 그 크기가 제일 예쁘거든요. 그릇 같은 곳에 올려놔도 예쁘고 다른 것과 같이 놨을 때도 그림이 예쁘게 잘 나와요. 가볍게 입가심 간식으로 먹는다면 한 번에 한 알 먹고 끝내기 딱 좋구요. 그래서 이 크기가 인기가 많아요.

 

가격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고급 선물용이었어요. 갑자기 친구에게 엄청나게 황송해졌어요.

 

 

친구가 보내준 레드향을 먹기 위해 껍질을 까기 시작했어요.

 

"이거 껍질 엄청 얇네?"

 

레드향 껍질을 까기 시작하자마자 이게 일반 귤과 상당히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손으로 확 전해졌어요. 레드향 껍질은 매우 얇고 질겼어요. 귤껍질이 과육이 두꺼운 옷을 껴입은 느낌이라면 레드향은 과육에 피부로 껍질이 붙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레드향은 껍질이 매우 얇았지만 상당히 질겼고, 과육과 껍질이 매우 단단하게 붙어 있었어요. 레드향 껍질을 벗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어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레드향은 껍질을 잡아뜯어내는 느낌에 훨씬 더 가까웠어요.

 

껍질을 벗기며 드러나는 과육을 보자 또 신기했어요. 레드향은 껍질을 벗기자 과육에 붙어 있는 하얀 섬유질이 거의 없었어요. 아주 정성껏 하얀 섬유질을 다 뜯어낸 것처럼 매우 맨질거리고 깨끗한 과육이 나왔어요.

 

귤 먹을 때 껍질 벗기고 나서 귤 과육에 붙어 있는 하얀 섬유질은 모두가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하얀 섬유질을 싹 다 또 다 뜯어내고 먹는 사람도 있고, 하얀 섬유질을 그냥 먹는 사람도 있어요. 이건 제주도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제주도 사람들 중에서도 하얀 섬유질을 정말 싫어해서 싹 다 뜯어내고 먹는 사람도 있고 별 신경 안 쓰거나 귀찮아서 그냥 다 먹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레드향은 껍질을 벗기자 호불호 갈리는 하얀 섬유질을 완전히 다 뜯어낸 것처럼 매끈한 과육이 나왔어요.

 

"레드향 엄청 맛있네?"

 

레드향의 맛은 옛날 한라봉과 지금 감귤의 중간쯤 되는 맛이었어요. 지금 한라봉은 나무가 늙기도 했고 노지 재배도 많이 하고 해서 과거 초창기 한라봉 맛과 조금 달라요. 과거 한라봉이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는 제주도에서 엄청 심혈을 기울여서 재배했기 때문에 하우스에 난방도 엄청 많이 했고, 나무도 젊은 나무라서 맛이 신맛 하나도 없고 설탕물 그 자체였어요. 그렇게 매우 단 과거의 한라봉과 품질이 매우 좋아진 지금 제주 감귤의 중간쯤 되는 맛이었어요.

 

레드향은 매우 달았어요. 새콤달콤이라고 하는데 신맛은 거의 없었어요. 그냥 달고 달다고 해도 될 정도였어요.

 

레드향은 신맛이 있기는 했어요. 산성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신맛 느껴지는 게 달랐어요. 이게 차가워서 시다고 착각하는 건지, 진짜 신맛인지 애매한 느낌이었어요.

 

아삭아삭 씹히는 감귤

 

식감도 일반 감귤과 매우 달랐어요. 조직이 매우 치밀했어요. 단단했어요. 물렁물렁하게 씹히는 게 아니라 사과 씹어먹는 것처럼 단단한 과일 씹을 때 느껴지는 아삭함에 가까운 식감이었어요. 껍질 얇은 것과 치밀한 조직이 만들어내는 약간 아삭한 것 같은 식감만 보면 칼로 깎아서 먹는 과일 아닌가 싶었어요.

 

얼음 공주의 차가운 유혹

 

제주명품 레드향은 과즙이 매우 많았어요. 맑고 시원했어요. 레드향을 먹을 때 아주 약한 탄산처럼 혀를 가볍게 톡톡 자극하는 맛이 있었어요. 맑고 청량한 천연 음료수였어요. 한겨울 시원한 음료 대신 먹기 딱 좋았어요. 이 시원함은 한겨울 깨끗하고 시린 산 속 공기가 목을 강타하는 맛이었어요.

 

차가운 도시 속, 달콤한 상쾌함

 

가슴까지 시원함과 달콤함이 확 전해졌어요. 아주 맛있었어요. 매우 차가운 레드향은 아주 황홀한 맛이었어요.

 

다음날 방 따스한 곳에 놓고 약간 후숙시킨 것을 먹어봤어요. 단맛은 훨씬 더 강해졌어요. 옛날 한라봉 못지 않게 매우 달았어요. 그렇지만 아주 차갑게 먹었던 것보다는 심심해져버렸어요. 달콤하고 시원하고 혀를 잘잘하게 자극하는 맛이 있는 한겨울 청량과일 느낌이 더 중독적이고 매력적이었어요.

 

레드향은 아주 차갑게 만들어서 먹는 게 매우 맛있었어요. 집안에서 가장 차가운 데에 놓고 먹으면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박스 포장에 적혀 있는 문구에서 '새콤달콤'을 '시원달콤'으로 바꿔준다면 보다 더 맛에 대한 설명도 정확하고 어떻게 보관하고 먹는 게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안 알려줘도 구입한 사람이 바로 추측할 수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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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좀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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