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야 했던 숙제 (2012)

해야 했던 숙제 - 16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좀좀이 2012. 10. 3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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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로 일단 돌아갔어요. 방에 그림을 놓고 다시 나와 화장실로 갔어요.


"휴...살겠네."


역시나 또 설사. 벌써 세 번째였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시원했어요. 전날 먹은 것까지 거의 다 비워낸 것 같았어요.


"이제 서점이나 가야겠다."




골목에서 나와 시장으로 가는 마슈르트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조금 걸어가자 아까 보았던 나스렛딘 호자 아저씨가 나왔어요.



"얘들아, 그 아저씨 좀 놔둬라."


애들이 나스렛딘 호자 동상에 올라가 놀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저 말을 중얼거리게 되었어요. 부하라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부하라 시장도, 부하라 주민들도 아니에요. 저 나스렛딘 호자 아저씨가 부하라에서 가장 인기 좋고 바쁜 사람일 거에요. 관광객들도 와서 위에 올라가도 보고 기대어서 사진도 찍고 가고, 동네 애들도 와서 동상에서 놀고...먼 훗날 나스렛딘 호자 아저씨 동상이 닳아서 없어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람들이 계속 만지고 기대고 올라가고 그랬어요.



제가 가는 방향은 구시가지 바깥쪽으로 나가는 길. 그래서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단체 관광객이 많이 온 것 같았는데 일단 단체 관광객들이 라비 하우즈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라비 하우즈 근처에서도 관광객이 별로 보이지 않았어요.



이것은 18세기에 지어진 코클라이 후르드 모스크 Kokilayi Xurd Masjidi.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벽돌집은 19세기에 지어진 도물로 하산 마드라사 Domullo Hasan Madrasasi.




이 유적들을 뒤로 하고 계속 걸어갔어요.



이 모스크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지어진 오이 비녹 모스크 Oy Binok Masjidi. 이 모스크는 지금도 조메 모스크로 사용하는 모스크라서 현판도 최신이었어요.



"뭐 이렇게 유적이 많아?"





이 벽돌로 된 평범하게 생긴 건물은 19세기에 지어진 이브로힘 오훈드 마드라사 Ibrohim Oxund Madrasasi.



이것은 19세기에 지어진 이스테자 마드라사 Isteza Madrasasi. 이 마드라사는 프랑스 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이제 다시 큰 길로 나가야지."


코클라이 후르드 모스크부터 이스테자 마드라사까지 유적 4개를 보는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그만큼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까웠거든요. 코클라이 후르드 모스크부터 이스테자 마드라사까지 사진 찍고, 건물 주변 걸으며 구경하고,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들어가보며 걸은 게 고작 10분이었어요.


큰 길로 돌아나와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어요.




"오쉬 있어요?"

"응. 있어."


1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 점심을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아직 오쉬(플로브)가 있다고 해서 부하라식 오쉬를 먹었어요.


"이거 뭔가 이상한데..."


부하라 오쉬는 타슈켄트 오쉬와 코칸드 오쉬와 맛이 매우 달랐어요. 일단 오쉬 재료들을 섞어서 주지 않고 그냥 올려서 주었어요. 타슈켄트 오쉬는 재료를 다 섞어서 주거든요. 그리고 맛이 상당히 강한 느낌이었어요. 재료 모두가 있는 힘껏 소리지르는 듯한 맛. 기름도 타슈켄트에서 먹던 오쉬보다 매우 느끼했지만, 이것은 섣불리 '부하라 오쉬는 타슈켄트 오쉬보다 느끼하다'고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제가 먹은 오쉬는 분명 솥 아랫부분의 오쉬였을 것인데, 가뜩이나 기름이 많은 오쉬는 솥 아랫부분에 기름이 한가득 고여 있거든요. 확실히 타슈켄트에서 먹던 것과 나오는 모양과 맛이 달랐어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타슈켄트 오쉬가 더 우위로군.'


아직까지 타슈켄트 시장에서 먹는 오쉬를 따라갈 오쉬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식당에서 먹은 오쉬였지만 타슈켄트 시장통에서 먹는 오쉬의 맛에는 부족했어요. 맛이 강하고 재료 모두가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화려하지는 않았어요.


"여기에서 크리티 바자르 멀어요?"

"아니. 걸어서 15분 정도? 마슈르트카 타고 갈 수도 있어."


걸어서 15분? 그렇다면 많이 걸려야 30분 정도? 이 정도면 소화시키며 걷기 딱 좋은 거리였어요.


식당에 돈을 내고 밖으로 나와 다시 길을 걸었어요.



이 유적은 19세기에 지어진 사이드 카몰 마드라사 Said Kamol Madrasasi.



이 건물 입구에 아랍어로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은 놀랄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벽돌을 잘라 붙여서 만들어 놓은 것은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다가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께서 인사를 받아주시더니 러시아어로 무언가 이야기하셨어요.


"저 러시아어 몰라요. 우즈벡어만 알아요."

"아...우즈벡어 알아?"

"예."

"일본인?"

"아니요. 한국인이요."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우즈벡어를 어디에서 배웠고,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고, 부하라에 언제 왔고 언제 갈 것인지를 물어보셨어요. 거기에 하나 하나 대답해드리는데 할아버지께서 '초르 미노르'에 갔다 왔냐고 물어보셨어요.


"초르 미노르요? 그것은 무엇인가요?"


마침 한 여학생이 지나가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그 여학생을 불렀어요. 여학생은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어요. 저도 여학생에게 인사를 했고, 여대생도 인사를 했어요.


"얘 한국인이래."

"그래요?"


이 여학생은 한국어를 알았어요. 부하라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여대생에게 저를 '초르 미노르'까지 데려다주라고 부탁하셨어요.


"한국어 얼마나 배우셨어요?"

"2년이요."


'초르 미노르'로 가는데 둘이 참 할 말이 없었어요. 서로 무엇 하는지 물어보고 한동안 침묵. 그러다 제가 한국어 어디에서 배웠냐고 물어보자 부하라에 있는 한국어 학당에서 배우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걔가 제게 우즈벡어를 어디에서 얼마나 배웠냐고 물어보자 저는 올해 2월부터 타슈켄트에서 우즈벡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또 침묵. 또 걷다가 제가 한국 드라마 좋아하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한국 드라마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아르크 안 가세요?"

"'아르크'요?"


'아르크'는 또 뭐지? 일단 지금은 초르 미노르 보고 서점 들릴 생각이라고 대답했어요.


"아르크 갈 때 저한테 연락해요."

"예."


''아르크'라는 곳 갈 때 왜 자기한테 전화하라는 거지?'


그러고보니 부하라 출신 친구도 '아르크' 갈 때에는 자기한테 연락을 하라고 했어요. 대체 '아르크'가 뭐길래 부하라 사람들이 거기에서 전화하라는 거지? 무슨 만남의 장소 정도 되는 건가? 아니면 무슨 '부하라 관광 끝냈어요!'라고 할 만큼 아주 중요한 곳인가? '아르크'라는 곳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일단 가야하는 곳은 서점이어서 지금 가지 않고 이따가 가게 되면 전화를 하겠다고 했어요.


"여기가 초르 미노르에요."


부하라 초르미노르


"저 이만 갈게요. 아르크 갈 때 연락해요."

"예."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부하라 대학교 여대생이 집으로 돌아가고 저는 초르수 미노르 앞에 혼자 남았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어를 아는 우즈벡인들은 몇 번 만난 적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서 몇 년간 돈 벌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오신 아저씨들. 한국어를 아는 여대생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여대생이 간 후, 제 주변에는 기념품 가게 주인만 몇 명 있을 뿐이었어요. 사람도 거의 없고 희안하게 생긴 건물 앞에서 혼자 조용히 사진을 찍는데 멀리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초르 미노르 Chor-Minor 는 1806~7년에 지어진 유적. 이름도 타지크어에요. chor는 타지크어로 '4'이거든요. 이름 자체가 '탑 4개'. 이 유적은 부하라의 상징으로 잘 나오는 유적들 중 하나에요. 단체 관광객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안으로 들어갔어요.


"1000숨."

"1000숨이요?"


아주머니께서 안에 볼 것도 없는데 입장료 1000숨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나갈까 하는데 안에 들어가서 초르 미노르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1000숨을 내고 위로 올라갔어요.


"악!"


별 생각 없이 계단을 올라가다가 천장에 머리를 제대로 찧었어요. 이미 몇 번 찧어서 얼얼한 부위를 이번에는 제대로 세게 박았어요.


"으으..."


머리를 박은 곳을 오른손으로 꾹 누르며 계단을 천천히 기어올라갔어요.


"아놔...결국 피나네."


찐득찐득한 피가 손에 묻었어요. 많이 나는 정도는 아니고 살짝 까진 것 같았어요.



이곳이 옥상 출입구에요.





저 멀리 보이는 것이 바로 미노라이 칼론 Minorai Kalon. 이것 역시 타지크어에요. 의미는 큰 탑.



'저 길은 내일 다 돌아보든가 해야겠다.'


초르 미노르를 뒤로 하고 아까 갔던 길과 비슷한 방향으로 갔어요.



이것은 16세기에 지어진 이맘 코지혼 압둘론의 묘소 Imom Qozixon Abdullon maqbarasi.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었어요. 안에 들어가보려고 했지만 문이 잠겨 있었어요. 창살 틈새로 안을 보니 내부는 큰 특징이 없는 평범한 묘소였어요. 이맘 코지혼 압둘론은 1132년에 태어나 1212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이 묘소는 이맘 코지혼 압둘론이 돌아가신 후 한참 뒤에 세워진 묘소였어요.



이런 건물들 사이를 걸으니 시간을 뒤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천천히 걸으며 감상할까 하다가 부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부하라를 보려면 최소 2일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 생각나 슬슬 걸음을 재촉했어요.


큰 길로 나와서 신시가지쪽으로 걸어가는데 또 유적이 있었어요.



이 유적은 19세기에 지어진 메흐타르 안바르 마드라사 Mehtar Anbar Madrasasi. 여기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무슨 마드라사가 이렇게 많아? 여기 사람들 다 공부만 했나?"


라비 하우즈에 2개, 거기에서 마슈르트카 정거장쪽으로 쭉 걸으며 본 것이 5개. 벌써 마드라사만 7개 보았어요. 시간상 마드라사 7개 보는 것이 뭐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는 것. 저는 관광의 중심지로 걸어들어가는 게 아니라 관광지 중심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깥으로 나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내천을 따라 길을 걸어갔어요. 드디어 큰 길이 나오고 신시가지가 시작되었어요.




이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서 쭉 가면 키르크 바자르가 있어요.


"무슨 15분 걸려?"


솔직히 가깝지는 않았어요. 식당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는 아니었어요. 한 20~30분은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게다가 저는 초르 미노르 보고 골목을 잠깐 탐험하고 나와서 다시 걷는 것이라 시간이 훨씬 더 걸렸어요.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서점을 찾아갔어요. 서점에 타지크어로 된 서적이 있기는 했어요. 그러나 전부 불만족스러웠어요. 살 만한 책이 없었어요. 책의 질이 안 좋고 너무 낡아서 폐지로 내다팔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책들 뿐이었어요. 게다가 제가 원하던 우즈벡어로 된 타지크어 교재는 아예 없었고, 옛날 이야기 책은 타지키스탄에서 구해온 것보다 괜찮은 게 하나도 없었어요.


"허탕쳤잖아."


서점을 더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어요. 뒤지면 서점이 더 나오기야 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부하라 관광을 망칠 수도 있었어요. 만약 여기를 안 찾아왔다면 지금쯤 미노라이 칼론에 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대신 초르 미노라를 못 갔을 수도 있었겠지? 게다가 여기는 관광객들이 잘 오지 않는 곳.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안 가는 부하라 신시가지를 구경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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