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역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대문 쪽으로 걸어가던 중이었어요. 동대문쪽으로 걸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큰 길을 따라 동대입구역으로 가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었어요. 그 다음으로 쉬운 길은 역시 큰 길을 따라 청구역을 지나 신당역 가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가는 것이었구요. 길을 정말 잘 못 찾겠다 싶으면 약수역에서 청구역 방향으로 쭉 걸어올라가서 청계천이 나올 때까지 걸어간 후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역으로 가는 방법이 있어요.
약수역에서 청구역까지 걸어갔어요.
'평소 안 가본 길로 가볼까?'
약수역에서 동대문까지는 어떻게 가도 갈 수 있어요. 많이 돌아가는 길과 조금 돌아가는 길만 있을 뿐이에요. 북쪽 방향만 알고 있으면 동대문까지 가는 건 엄청 쉽거든요.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도 북쪽 방향만 알고 있다면 북쪽을 향해 올라가면 어떻게든 동대문으로 갈 수 있었어요. 약수역에서 큰 길 따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가는 것은 그렇게 재미있는 길은 아니에요. 게다가 이쪽 골목길은 제대로 돌아다녀본 적이 없었어요. 동대문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봤지만 신당동 쪽은 잘 가지 않았거든요. 심지어 그 유명한 신당동 떡볶이조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안 가본 길로 가야지.'
청구역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다 샛길로 빠졌어요. 큰 길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졌어요. 아직까지는 그렇게 놀랄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동대문 인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풍경이었거든요.
길을 따라 걸어가며 길 옆 골목길 안쪽을 쳐다봤어요. 매우 낡은 집이 많이 있었어요. 이 근방에서 허름한 분위기는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어요. 창신동, 오장동, 을지로 등등 옛날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창신동, 숭인동, 충신동, 이화동은 오르막길에 있는 달동네라서 약간 인상적일 수도 있지만 이쪽은 그냥 평지였어요. 그래서 별 관심 안 갖고 쭉 걸어갔어요.
광희문 거의 다 왔을 때였어요. 제가 걸어가는 길만 오르막길이었어요.
'여기 뭐지?'
오르막길 옆으로 매우 허름한 집이 바글바글했어요.
'여기 한 번 들어가볼까?'
광희문이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동대문까지 못 갈 수가 없는 곳이었어요.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고 해도 동대문을 무조건 갈 수 있는 위치였거든요. 밀리오레, 두타몰 건물이 보였어요. 아무리 길을 헤멘다 하더라도 밀리오레, 두타몰 보고 그쪽으로 걸어가면 동대문이었어요.
'한 번 들어가봐야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어요.
"뭐야? 동대문 근처에 이런 곳이 숨어 있었어?"
달동네 비슷한 분위기. 아무리 창신동, 숭인동 등 동대문 근처 지역이 매우 낙후된 곳이 많은 곳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낙후된 모습은 별로 못 봤어요. 여기는 진짜로 많이 낙후된 곳이었어요.
'아, 설마 거기인가?'
광희문에서 신당역으로 이어지는 지역 지도를 보면 허름한 집이 엄청나게 많이 밀집해 있는 곳이 하나 있어요.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 길 건너 맞은편의 뒷골목 지역을 찾아보면 되요. 이 구역은 상당히 넓어요. 여기가 '신당동'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어요.
지도를 확인해봤어요. 맞았어요. 광희문에서 신당역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는 빈민가. 서울 속 유서 깊은 빈민가인 서울 중구 신당동 광희문 슬럼 지역이었어요.
서울 도처에 빈민가가 있어요. 서울에 산재해 있는 빈민가 중 역사가 매우 긴 빈민가는 의외로 별로 없어요. 보통 한국전쟁 종전 후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곳, 그리고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전국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올라와 판잣집 짓고 살던 곳이에요.
그러나 서울 신당동은 무려 조선시대 때부터 빈민가였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에요. 최소 몇백 년 된 빈민가에요.
서울 중구 신당동 역사를 살펴볼 때는 광희문 역사도 같이 살펴보는 것이 좋아요. 둘 사이에는 상당히 큰 관계가 있거든요.
한양 도성에는 4대문이 있었어요. 동대문인 흥인지문, 서대문인 돈의문, 남대문인 숭례문, 북대문인 숙청문이 있었어요. 여기에 동북쪽에는 동소문인 홍화문, 서남쪽에는 서소문인 소덕문, 동남쪽에는 남소문인 광희문, 서북쪽에는 창의문을 만들었어요. 홍화문, 서소문, 광희문, 창의문은 4소문이에요.
이 중 광희문 光熙門 은 청계천 오간수문의 이간수문이 가까워서 수구문 水口門 이라고도 불렸어요. 수구문까지는 정식 명칭이었어요. 광희문은 1396년 조선 태조 5년에 도성을 축성할 때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운 문이에요. 1711년 조선 숙종 37년에 고쳐 쌓았고, 1719년 숙종 45년에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어요.
그러나 광희문은 '광희문', '수구문'보다 시구문 屍軀門 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어요. 사람들 모두 '시구문'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수구문이 발음이 변하고 의미도 변해 시구문이 된 이유는 실제 이 문으로 많은 시체가 한양 도성에서 도성 밖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어요. 예전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의 시체들은 대문이 아니라 소문을 통해 성 밖으로 빠져나갔어요. 이 중 특히 광희문으로 유독 많은 시체가 성 밖으로 나갔어요.
조선시대 도성 안에는 두 가닥의 큰 길이 동서로 나 있었어요. 하나는 종로에 해당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퇴계로에 해당하는 길이었어요. 퇴계로에 해당하는 남산길 주변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몰려살았다고 해요. 퇴계로 주변에 몰려 살던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가족이 죽으면 장례를 치룰 새도 없이 최대한 빨리 시신을 처리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문제는 한양 도성 안에 마땅한 장지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한양 도성 바깥에 있는 낮은 산자락을 찾게 되었어요. 한양 도성 4소문 가운데 문 밖의 낮은 산자락과 이어지는 곳은 바로 남소문 - 광희문이었어요. 광희문에서 나온 상여 행렬은 대체로 근처의 작은 고개를 넘어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거나 신당동 화장터로 갔다고 해요.
많은 조선인들이 광희문 앞 신당동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해요. 당연히 광희문으로 가는 장례 행렬이 빈번하게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광희문 근처 길을 황천길이라고 부르기도 했대요. 하도 죽은 사람들이 광희문을 통해 많이 나가다보니 수구문(水口門) 조차 시구문(屍軀門) 으로 바뀌어버렸어요. 참고로 수구문은 정식 명칭이지만, 시구문은 정식 명칭이 아니에요.
미개한 조선 시절, 전염병과 대기근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어요. 이렇게 죽은 사람들 시체가 무더기로 빠져나가던 문이 광희문이었어요. 1880년대 말 한양에 콜레라가 유행해 한양도성 안에서 살던 많은 아이들이 앓거나 죽었어요. 이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환자를 피막 같은 곳에 대충 방치하다 숨을 거두기 전에 광희문 밖에 내다버리기도 했다고 해요. 참고로 피막이란 조선 시대 사람이 죽기 바로 전에 잠시 안치하여 두던,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을 이르던 말이에요. 아직 죽지 않은 사람까지도 광희문 밖에 내다버렸으니 광희문 밖은 이미 죽은 아이들 시체와 신음하며 죽어가는 아이들로 인해 생지옥이었다고 해요.
이 뿐만이 아니었어요. 처형당한 시체도 광희문을 통해 한양 도성 밖으로 빠져나갔어요.
조선 사람들은 이렇게 온갖 한 많은 시체가 광희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봤어요. 그 결과, 조선 사람들은 광희문이 온갖 원귀들과 사귀어 왔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로 인해 광희문 돌가루를 취하면 병마를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광희문 돌가루를 치료제라 여겨 몰래 긁어가는 풍습도 생겨났다고 해요.
광희문 바깥에는 빈민들이 몰려 살았어요. 그리고 무당들도 많이 몰려 살았어요. 한 많은 귀신들이 가득하고도 남을 곳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마을 이름이 신당동 神堂洞 이 되었어요. 옛날 지도에는 신당리 神堂里 라고 나온다고 해요.
바로 이 점 때문에 제가 신당동 빈민가 마을 이름을 절대 못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어요. '신당동'이라는 이름은 원래 광희문 바깥 빈민가이자 무당이 많이 몰려 살고 화장터가 있던 그 자리를 지칭하는 말이었거든요. 해방 이후에 등장한 곳이 아니라 조선시대때 형성된 상당히 유서 깊은 빈민가 동네 이름이었어요. 마을 이름 자체가 '신당동'이었어요.
이후 신당동 지명은 한자만 神堂洞 에서 新堂洞 으로 바뀌었어요.
일제 강점기 시절, 신당동에는 일본인이 조성한 사창가가 있었다고 해요. 이 사창가는 한국전쟁 이후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어요. 여기에 한국전쟁 당시 자유 대한민국의 품으로 월남한 실향민들이 신당동에 정착했어요. 신당동은 기존에 살던 빈민들에 실향민들까지 몰려 거대한 판자촌 빈민가가 되었어요.
1950년대 광희문 일대에는 시구문 시장까지 있어서 매우 번잡한 곳이었다고 해요. 광희문 일대는 정부에게 매우 골치아픈 지역이었어요. 매춘부가 밀집해 있는 지역인데다 판자촌과 시구문 시장으로 혼잡하기까지 했거든요.
오죽하면 광희문을 철거해버리는 계획까지 등장할 정도였어요.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광희문 철거는 보류되고 복원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광희문 신당동 일대 사창가와 판잣집을 정비하고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실시되었어요. 광희문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꽤 한참 지난 후의 일이에요.
신당동은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로 유명해요. 신당동 떡볶이 또한 빈곤 속에서 태어난 음식이에요. 한국전쟁 이후 먹을 것이 부족하던 이 동네에서 피난민 출신인 할머니께서 가래떡에 고추장 양념을 팔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고추장 양념 떡볶이의 시초라고 해요. 이 떡볶이가 조리법과 형태가 바뀌어서 오늘날 떡볶이가 되었어요. 초기의 떡볶이는 아마 현재 고추장 양념 바른 떡꼬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해요.
아래 영상은 2020년 1월 15일 새벽 2시경에 촬영한 서울 중구 신당동 광희문 시구문 시장 빈민가 심야시간 야경 동영상이에요.
서울 중구 신당동 광희문 시구문시장 빈민가에서는 두타몰, 누존 등 동대문 상권 고층 빌딩이 매우 잘 보여요.
광희문에서 신당동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있는 낡고 허름한 집이 가득한 지역은 마을 이름 자체가 신당동이에요. 조선 시대 때부터 빈민들이 모여 살던 유서 깊은 빈민가 지역이에요.
참고로 이 지역은 큰 길 따라서 밖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아요. 단순히 서울 어디에나 있는 낡고 허름한 가게와 공작소 같은 곳이 몰려 있는 곳 정도로만 보일 뿐이죠. 그러나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가면 빈민가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