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조금 있으면 밤 11시였어요. 어쩌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있었어요. 길거리는 매우 조용했어요. 건물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도 없었어요.
"저거 목욕탕 아냐?"
목욕탕이 있었어요. 습기 냄새가 진동했어요. 목욕탕 주변에서 풍기는 냄새는 한국 목욕탕 냄새와 비슷했어요.
"이쪽 모스크 가는 방향 아니야?"
"그렇네?"
일본 도쿄에는 모스크가 여러 곳 있어요. 그 중 한 곳은 아사쿠사에 있었어요. 제가 별 생각 없이 안 가본 곳이라고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아사쿠사에 있는 모스크를 향해 가는 방향이었어요.
"너 설마 모스크 가려고 하는 거 아니지?"
"안 가! 진짜 갈까?"
아사쿠사에 있는 모스크를 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어요. 이제 어두워서 사진도 제대로 안 찍히고 있었어요. 안 흔들리면 다행이었어요. 나중에 귀국해서 여행기 쓸 때 밝기와 대비를 보정해서 살릴 수는 있을 거였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리려면 일단 사진이 안 흔들려야 했어요. 아무리 캐논 SX70 HS 카메라의 손떨림 방지 기능이 좋다고 해도 셔터스피드가 1초를 찍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어요. 게다가 몸이 피곤했어요. 강한 가로등 빛은 난반사를 일으키고 있었구요. 몇 장을 찍어서 간신히 덜 흔들린 사진을 찍으면 가로등 불빛의 난반사 때문에 사진이 무지 지저분하게 나왔어요.
여기에 모스크가 밤 11시 넘어서까지 문을 열어놨을 리가 없었어요. 구글맵에 있는 모스크 사진을 보면 넓은 정원이 있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모스크처럼 생긴 모스크가 아니었어요. 평범한 빌딩처럼 생긴 모스크였어요. 이런 모스크는 밤에 가도 빌딩 같이 생긴 외관 보고 돌아오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어요. 어두워서 그 외관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구요.
일본 도쿄 와서 모스크 한 곳을 갔어요. 이제 모스크 욕심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모스크 가자!"
친구가 모스크 가고 싶어하지 않아서 오히려 모스크 가자고 말했어요. 물론 장난이었어요. 모스크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모스크까지는 절대 안 간다.'
그간 여기저기 돌아다녀본 경험에 의하면 이 시각에 아사쿠사 모스크로 가는 것은 절대 좋은 판단이 아니었어요. 굳이 구글 스트리트뷰를 꼼꼼히 다 살펴보지 않더라도 아사쿠사 모스크가 있는 쪽은 상당히 으슥한 곳일 거였거든요. 아마 일본 거주 외국인 노동자 같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모스크일 거였어요. 아사쿠사 모스크 浅草モスク 는 1998년에 지어진 모스크로, 정식 명칭은 ダール・ル・アルカム・マスジド Dar Al-Arqam Masjid 라고 해요.
나중에 한국 돌아와서 여행기 쓰며 도쿄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다가 이때 모스크로 안 가기를 잘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일본 도쿄 다이토구에는 일본 3대 슬럼가라 불리는 산야지구 山谷 가 있어요. 일본 3대 슬럼가 - 일명 도야 거리 ドヤ 는 도쿄 산야지구, 오사카 아이린 지구, 요코하마 고토부키쵸에요. 이 중 도쿄 산야 지구는 미나미센주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요. 나미다바시 日本 東京 台東区 泪橋 교차로와 타마히메 공원 日本 東京 台東区 玉姫公園 을 지도에서 찾으면 이 일대가 바로 산야 지구에요. 산야지구 입구라 할 수 있는 나미다바시 교차로에서 큰 길 따라 남쪽으로 약 850m 걸어가면 아사쿠사 모스크가 있어요. 서울 종로1가 종각역부터 종로5가 종로5가역까지 거리가 1.7km 정도에요.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850m 라면 산야지구 북쪽 입구에서 충분히 가깝고 도보 이동이 가능하고도 남는 거리임에는 분명했어요. 여기에 모스크가 있는 이유는 당연히 산야 지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거구요. 저렴한 주거지를 찾아 흘러들어온 무슬림 외국인 노동자들과 관련있겠죠.
"마작방이다!"
일본 만화를 보면 마작하는 장면이 상당히 많이 나와요. 당연히 대체로 안 좋은 쪽으로 많이 등장해요. 일본 만화 보면 야쿠자, 양아치들이 마작으로 도박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어요.
진짜로 일본에서 마작 하는 사람들 적지 않은가 보네.
한국에서 마작 이미지는 엄청나게 안 좋아요. 실제 마작으로 도박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에요. 도박이라고 하면 섯다, 고스톱 등 화투, 아니면 포커, 바둑이 같은 카드로 많이 하죠. 그렇지만 한국에서 마작은 도박 이미지가 엄청나게 강해요. 한국에도 마작방이 있기는 해요. 외국인 노동자로 입국한 조선족, 중국인들이 가는 곳이에요. 조선족, 중국인들 사이에서 마작방은 도박도 하고 커뮤니티 센터 역할도 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마작방이 보이는 동네는 무조건 조선족, 중국인이 득시글한 곳이에요. 한국에서 마작 즐기는 사람은 진짜 소수니까요.
마작방 입구를 직접 보니 일본 만화에서 야쿠자, 양아치들이 마작 치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 것이 과장된 것은 아닌 것 같았어요.
스미다강을 향해 걸어갔어요.
'이 밤중에도 길거리 엄청 깔끔하네.'
길바닥이 진짜 깔끔했어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담배 꽁초도 없었고, 침 뱉은 자국도 없었어요.
'나는 여행기 어떻게 써야 할까?'
머리 속에 계속 맴도는 생각. 나도 알아. 일본에 대해 악담을 잔뜩 써놔야 한국인들이 좋아하겠지. 정치권은 툭하면 일본에 대한 증오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려고 하니까.
그러나 그게 과연 옳은 걸까?
일본이 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20년, 잃어버린 30년이라 해도 아직까지도 한국은 일본을 못 따라잡았어.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발전한 사회야. 일본도 내적으로 여러 문제 많겠지.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사회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 당장 이 깨끗한 길바닥이 말해주고 있잖아. 단순히 과학 기술 같은 것만 일본이 한국보다 더 발달한 것이 아니야. 오히려 사회 문화 부분에서 격차가 훨씬 커.
칭찬만 해준다고 그게 진짜 좋은 걸까?
중증 천사병이 만연하고 있는 대한민국. 과연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잘못된 거고 무턱대고 한국 최고 김치 최고 한국은 세계제일이라고 외치는 게 진짜 옳은 일일까? 그거야말로 오히려 잘못 아닐까? 열등한 상태인 것을 열등하니 노력하고 분발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열등한 상태도 좋은 거라고 가식적인 소리하는 것은 천불 지옥에 떨어져 사지가 다 찢겨나가도 모자랄 가장 큰 죄악 아닐까?
머리 속이 복잡했어요. 당장 다음날 한국 돌아가면 여행기를 쓰기 시작해야 했어요. 이 여행기 수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 지 고민이었어요. 정부의 반일 선동이 판치고 있고 사리판단 못 하는 정신나간 몇몇과 중국인, 조선족들이 이 선동에 미쳐 날뛰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고민되었어요.
여행기를 어떻게 써야할지 계속 고민하면서 일본 도쿄 밤거리를 걸었어요.
뭔가 이상하지.
왜 외국 체류기 보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인생 폐급으로 살았다는 자기 공개 선언은 그렇게 많이 보일까.
여행기를 어떻게 써야 할 지 고민하다 생각이 이쪽으로 튀었어요.
한국인들의 외국 체류기 보면 종종 외국인들과 역사 문제로 다퉜다는 글을 볼 수 있어요. 외국인들과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말문이 막혀서 앞으로 역사 공부 많이 해야겠다는 내용의 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게 엄청 웃긴 거에요. 영어, 수학, 과학, 사회에 기타 과목 전부 모두 학교에서 배운대로 말하면 외국인들과 굳이 논쟁 벌이고 싸울 일이 없어요. 유럽을 가든 중동을 가든 동남아시아를 가든 1+1=2 이고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이 바뀌지는 않아요. 학교에서 배운대로만 말하면 최소한 골이 비었다는 소리 안 듣고 그걸 갖고 논쟁을 벌일 일도 없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운 것을 부정당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유독 역사 - 특히 근대사 쪽 이야기만 보면 치고 박고 논쟁 벌이며 싸우다 한국인들이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았다는 내용이 엄청 많아요. 아무리 역사가 민족주의,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이용된다 해도 어느 정도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맞고 나중에 분해서 앞으로 역사를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소리 나올 건 아니에요. 객관적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면요.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사실은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제대로 된 사실을 근거로 한다면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을 일은 없어요.
외국인들과 역사 논쟁 붙어서 두들겨맞고 국사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말하는 것은 학창시절에 자기가 쓰레기였다는 소리 밖에 안 되요. 그게 아니라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요.
어째서 유독 국사만큼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운 게 외국인들과 대화할 때 전혀 통하지 않을까.
한국이 안 알려져서? 승자 중심의 역사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어요.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요. 아무리 역사왜곡을 한다 한들 그건 대부분 해석에서 갈리는 것이에요. 제 아무리 일제강점기를 찬양한다 한들 1945년 8월 15일에 조선이 광복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왜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더욱이 무슨 길바닥 돌쪼가리처럼 생긴 뗀석기, 간석기 유물 하나에 몇백년이 왔다 갔다 하는 선사시대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구요.
외국 체류 한국인들이 다 학창시절에 저능아 아니면 양아치라서?
이건 당연히 아닐 거 아니에요.
갑자기 아랫배가 아팠어요. 화장실에 가고 싶었어요. 마침 스미다 공원이 바로 앞에 있었어요. 스미다 공원으로 들어갔어요. 스미다 공원 입구 근처에는 화장실이 있었어요.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여기는 비데 없네?"
일본 도쿄 여행 다니며 가본 화장실 대부분에 비데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비데 보면서 일본인들의 비데 사랑이 엄청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나 스미다 공원 화장실에는 비데가 없었어요. 휴지만 비치되어 있었어요. 휴지만 비치되어 있는 평범한 좌변기를 보자 반가웠어요.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왔어요. 화장실에서 나와 스미다강 강변으로 갔어요.
지금 우리나라는 뭐가 잘못된 걸까?
스미다 공원으로 걸어오며 떠오른 역사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어요.
2002년 초여름.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해 국민들 모두 열광하던 그때. 치우천왕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응원 현수막이 경기장에 펼쳐지던 그 순간. 거기에서부터 한국은 잘못되어가기 시작한 걸까.
이때부터 한국에 잘못된 자민족 우월주의인 쇼비니즘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이미 끝난 이야기인 간도협약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선동해서 중국이 작정하고 동북공정 역사왜곡을 펼치게 만들지를 않나, 조선 망국의 주역 민비를 역사왜곡하면서 내가 조선의 국모다 외치는 오페라 명성황후를 엄청 홍보하고 물고 빨아대지를 않나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1990년대만 해도 국사 시간에 조선 말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눈 감고 귀 막고 있다가 세계에 완전히 뒤쳐져서 일본에 나라 빼앗긴 것이라 했다. 삼정의 문란으로 개판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고, 무능하고 쓰레기인 고종과 민비는 손가락만 빨다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1990년대까지 학교를 다닌 한국인들은 다 이렇게 배웠을 거다.
민비에 대해서는 일본인 낭인들에게 시해당해서 불쌍하다는 의견이 많기는 했지만 딱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조선 말기는 옹호해줄래야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국사 교과서를 보면 임진왜란 이후 - 그러니까 국사 하권부터는 조선이 얼마나 열등하고 미개했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장 유물이라고 실린 사진만 봐도 국사 상권에서 나오던 화려한 금 귀걸이, 금속 향로, 고려 청자 같은 것과 비교도 안 되는 종이쪼가리들 뿐이었다.
이 시기 국사 교과서 일제 강점기 내용을 보면 조선이 기술적으로 열등하고 미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원은 많았던 상태였는데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조선의 자원을 마구잡이로 착취했다는 식이었다. 그놈의 평북 창성 대유동 금광.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후 공장도 짓고 철도도 짓고 사회를 근대화시킨 것에 대해 '일본이 조선 점령 후 조선땅을 근대화시킨 것은 맞다. 자기들이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한 짓이기 때문에 고마워할 것은 없다'는 식으로 배웠다. 아마 1990년대까지 학교를 다닌 한국인들이라면 다 이렇게 배웠을 거다.
일본이 조선 점령 후 조선땅을 근대화시킨 것은 맞다. 그러나 자기들이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한 짓이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에서 많은 인력과 지하자원 등을 수탈해갔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해 고마워할 것은 없다. 오히려 조선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을 무단으로 점령해 우리가 갖고 있던 인력과 지하자원을 수탈해갔기 때문에 일본이 잘못한 것이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대한 평가는 딱 저랬다.
조선 망국의 역사와 일제강점기를 배우며 다시 한 번 그런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끊임없이 선진국의 발전한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여 조국 선진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배웠다. 사회 분위기도 그런 분위기였다. 아직 한국은 세계적으로 중진국이고 더욱 분발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사람들 모두에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하고 더 배우려 하는 모습이 이상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렇지만 2002년 치우천왕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응원 현수막이 경기장에 펼쳐지던 시기 즈음부터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뜬금없이 민비를 명성황후라 불러야 한다고 하면서 '내가 조선의 국모다!' 라고 외치는 오페라 명성황후가 엄청 뜨기 시작했다.
미친 거지. 세상 어떤 애미가 자식들을 철저히 노예 상태로 만들어 착취해 근로의욕 자체를 상실하게 만들고 산으로 강 너머로 도망치게 만들어.
아, 있네!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멈. 콩쥐팥쥐에 나오는 팥쥐 엄마.
좌파 운동권들이 물고 빨던 자본주의 맹아론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사 교육 내용도 이런 분위기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맹아론으로 인해 조선은 쓸 데 없이 고평가되기 시작했다. 마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근대화되고 산업화 이룩해 번영하는 대한민국이 되었을 거라는 식으로 왜곡되어갔다. 왜곡 수준을 뛰어넘어 날조 수준에 가까운 조선에 대한 고평가. 실제로는 이씨 왕조 후손들에게 구상권 청구해도 모자랄 판인데. 고종, 순종과 민비 무덤을 파헤쳐 뼈를 다 끄집어내서 광화문 광장에서 부관참시 효수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왜곡되어버린 국사 교육. 여기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배울까.
떼쓰기. 징징거리기. 우기기.
이런 것 말고 뭘 배워? 쓰레기만도 못한 열등하고 미개했던 조선을 고평가하고 일본이 조선 사회를 근대화시킨 걸 부정해버리면 남는 건 떼쓰기, 징징거리기, 우기기 뿐이지. 단순히 세계에 뒤쳐졌기 때문에 조선이 열등하고 미개하고 치욕스러운 시대라 하는 것이 아니야. 그나마 갖고 있던 기술조차 그 이전 사회에 비해 미개해져버렸기 때문이야. 다층 목조 건물 짓는 기술 사라진 것도 조선시대. 고려청자 비취색 만드는 기술 사라진 것도 조선시대. 바퀴도 없고 길 닦을 생각도 못 하던 조선시대. 제대로 된 도로도 없고 수레도 널리 보급되지 못해 모두 지게에 싣고 다녔는데 근대화? 산업화? 일단 바퀴부터 만들어 수레부터 널리 보급시킨 후 이야기합시다. 리어카 비슷한 것도 제대로 없었던 게 조선 시대인데 무슨 얼어죽을 근대화고 산업화야.
국사 교육을 받으며 배우는 삶의 자세? 떼쓰기, 징징거리기, 우기기. 농담 아니야. 진짜야. 설마 외국인들과 역사 논쟁한 후 처참히 두들겨맞고 뒤에서 씩씩거리며 역사 공부 더 해야겠다는 사람들이 진짜 전부 학창시절에 양아치였고 빠가사리였을까? 떼쓰기, 징징거리기, 우기기 모두 말도 안 되는 억지논리 강요를 정상적으로 여길 때 나타나는 행동이야. 조선을 쓸 데 없이 왜곡 수준을 뛰어넘어 날조 수준으로 고평가하고 일본 강점기를 더 나쁘게 왜곡하려는 좌파 운동권 자본주의 맹아론적 주장의 보급이 낳은 결과가 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떼쓰기, 징징거리기, 우기기야.
국사 교육이 엉터리로 바뀌었어. 그게 지금 한국인들과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사회적 질병의 근본 원인이야.
스미다강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어요.
"너 한국도 그렇게 비판할 수 있어?"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을 돌아다니고 란저우로 가는 기차 안이었어요.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을 목도한 충격, 그리고 끝없이 보는 농민공들에 대한 충격. 중국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물어봤어요. 한국도 그렇게 비판할 수 있냐구요.
'그래, 쓰자.'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야.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도 없잖아.
결심했어요. 일본 도쿄 돌아다니며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여행기에 쓰기로요. 수위 조절이고 뭐고 신경 안 쓰기로 다짐했어요. 저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니까요. 제가 갖고 있는 대한민국 여권은 16억 중국인들이 모두 침 질질 흘리며 탐내는 소중한 여권이니까요. 원하든 원치 않든 저는 영원한 한국인 한민족이니까요. 잘못 가고 있는 건 잘못 가고 있다고 말해야죠.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해야죠. 그것이 애국이니까요. 눈 가리고 귀 막고 무조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정부나 문 걸어잠그고 우리민족끼리 부르짖던 조선시대 무능하고 열등한 지배계층이나 뭐가 다르겠어요. 망한 명나라 물고 빨던 양반들이나 중국몽에 동참하겠다는 정신나간 것들이나 뭐가 다르겠어요.
"이제 돌아가자."
어느덧 11시 반이었어요. 슬슬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숙소 돌아가서 짐을 다 꾸린 후 롯지 아카이시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했어요.
"저거 뭐지?"
다리 입구 쪽에 무슨 비석 같은 것이 있었어요.
뭐라고 적혀 있는지 봤어요.
あ、
東京大空襲
朋よやすらかに
아,
도쿄대공습
친구여, 고이...
"도쿄대공습!"
안내문이 적힌 표지판이 있었어요.
제목은 戦災により亡くなられた方々の碑 였어요. '전쟁의 재앙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비' 정도 될 거에요. 한국식으로 번역한다면 간단히 '전쟁 희생자 추모비'라고 해야 좋을 거에요.
내용을 읽어보니 도쿄대공습 희생자 추모비 맞았어요.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던 1945년 3월 9일부터 10일에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의 일환으로 도쿄 일대에 대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했어요. 이를 도쿄대공습이라고 해요.
미국은 1945년 3월 9일 밤부터 3월 10일 새벽까지 일본 도쿄에 소이탄을 대거 투하하는 예배당 작전 Operation Meetinghouse 을 실시했어요. B-29 슈퍼 포트리스 폭격기 344기를 동원해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네이팜탄 총 2400여톤을 투하하는 작전이었어요. 이 작전이 펼쳐진 6시간 동안 300여대가 넘는 B-29 폭격기가 도쿄에 E-46 확산탄 8500발, M-69 소이탄 자탄 50만 개, 네이팜 소이탄 총 1700톤을 투하했어요.
당시 도쿄에는 목조 건물이 상당히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네이팜탄 폭격은 엄청난 효과를 만들어내었어요. 곳곳에서 거대한 화재가 발생했고, 화재로 인해 가열된 공기가 팽창하며 위로 치솟으며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강한 풍속의 폭풍과 불기둥을 만들어내었어요. 불기둥으로 빨려 올라간 불 붙은 연소물들의 잔해는 다시 사방으로 퍼져 화재를 확산시켰어요.
6시간 동안 실시된 도쿄대공습으로 인해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민간인 83793명이 사망했고, 409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이재민이 100만 명 이상 발생했어요. 공습 직전까지 도쿄 인구는 600여만 명이었지만 공습 이후 사망자와 피난민이 대거 발생해 약 200만 명까지 급감했어요.
도쿄 대공습 당시 이 일대 사람들은 스미다강을 건너가면 살 거라고 판단해 스미다강으로 몰려갔대요. 그렇지만 스미다강 맞은편도 엄청난 화염에 휩싸인 상황이었어요. 사람들은 다리에 갖혀 화재선풍에 죽었고, 강물에 뛰어는 사람들은 강물 자체가 펄펄 끓어서 삶아져 죽어버렸다고 해요.
도쿄 대공습은 폭격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로 따지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했어요. 그리고 일본 도쿄에 에도 시대 흔적이 별로 안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도쿄가 홀라당 불타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요.
도쿄 대공습은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이에요. 오죽하면 일본에서 만든 괴수 및 외계인 침략 소재의 문화 컨텐츠에서 시작하자마자 닥치고 도시를 다 때려부수는 것이 도쿄 대공습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할 정도에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먼 이야기 같고 살기만 무지 어려웠다가 갑자기 미국이 도시를 무차별로 싸그리 때려부수고 불태워서 초토화시킨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다이토구 스미다강 강변에 도쿄대공습 희생자 추모비가 있을 줄 몰랐어요. 숙소 돌아가려다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어요.
커다란 돌은 言問橋の縁石 ことといばしのふちいし 였어요. 1992년에 코토토이바시 (코토토이 다리) 난간을 개수한 후, 기단에 있던 연석을 잘라서 만든 비석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도쿄대공습 당시 이 다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해요. 그 당시에도 있었던 연석이었기 때문에 도쿄대공습을 기리기 위해 연석 일부를 잘라서 비석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었어요.
이런 것 모르는 한국인들 상당히 많을 거야. 국사 교과서에서 고의로 누락시킨 부분이니까.
일본 관련해서 크게 놀랐던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대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방에서 대학교 다니고 있는 친구 자취방에 갔더니 맨발의 겐 만화책이 있었다. 멘발의 겐 만화는 작가가 원자폭탄 피해자로 유명한 만화였다. 그리고 이 만화는 반전, 반핵과 관련된 만화라고 그 당시 소위 운동권, 진보들 사이에서 나름 알려진 만화였다.
맨발의 겐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은 원자폭탄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다. 국사 교과서와 달리 일본 본토의 일본인들도 태평양 전쟁 시기 엄청나게 수탈당하고 착취당하고 고생했다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사 교과서를 보면 일본이 태평양 전쟁 시절 한국에서 수탈한 자원과 인력으로 전쟁을 치룬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공출이라고 수북히 쌓여있는 놋쇠 제품들, 정신대 여자들, 탄광에 적힌 한글 낙서 사진들. 일본 본토의 일본인 민간인들도 태평양 전쟁 때 엄청나게 착취당하고 강제동원되고 고생했다는 것은 이때 처음 알았다.
두 번째는 대학교 졸업 후, 친구 자취방에서 영화 난징! 난징!을 본 후였다. 영화 난징! 난징!은 난징대학살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라고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영화였다. 일본어과를 다니던 친구에게 그 영화 봤냐고 물어보자 자기 컴퓨터에 파일 있으니 보고 싶으면 보라고 했다. 당시 상당한 문제작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매우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영화를 보면 일본인 위안부가 나왔다. 그때까지 위안부 문제라면 조선인 여자들이 징병되듯 강제로 끌려갔다는 묘사가 전부였다. 영화를 다 본 후 일본인 위안부 나오는 저 영화 엉터리 아니냐고 물어보자 그때 일본어과를 다니던 그 친구는 한국에서는 조선인 위안부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위안부도 많았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위안부가 한국에서 선전하듯 무슨 아프리카에서 동물 사냥하듯 인간 사냥해서 잡아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위안부 소녀상을 한국인 여성과 일본인 여성이 서로 무릎꿇고 껴안고 있는 자세로 만들었다면 진정성을 의심받지는 않았을 거야.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다면 여성 인권을 위해 잊지 말자는 순수성은 인정해줘야 해. 일본인 민간인들도 엄청나게 고생했던 게 한국인들이 이를 박박 갈던 1940년대 태평양전쟁 시기야.
그러나 혼자 앉아 있는 위안부 소녀상?
정치 선동을 위해 만든 흉물이자 자원 낭비. 국민들이 외국에 나가서 역사 이야기하는 순간 무식하고 왜곡, 날조하려고 한다는 손가락질 받게 만드는 원흉의 상징.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버버 어버버거리다 결국 '조선인 여자들은 달라! 그들은 인간사냥당한 거야!'라고 떼쓰고 징징거리고 우기게 만드는 잘못된 국사 교육의 상징.
착잡하고 씁쓸했어요. 인신매매는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까지 횡행했었어요. 왜 윤락 여성들이 그 늪에서 못 빠져나오는지 연구가 꽤 많이 되어 있고, 여러 이유가 밝혀져 있어요. 이것은 한국 사회에도 상당히 잘 알려져 있어요. 일본이 위안부 운영했다는 것을 잘 했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잘못한 거에요. 그런데 그걸 비판하고 싶다면 제대로 연구를 해서 비판해야죠. 어떤 착취 관계와 채무 관계가 있었는지를 차근차근 연구하고 따져보며 비판해야지, 무턱대고 무슨 아프리카 흑인들이 인간 사냥당해 노예로 끌려가듯 끌려갔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100년 후에는 아마 나아지겠지. 한국은 중국 같은 백년하청의 나라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나라니까.
자정 넘어서 숙소에 도착했어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나와 짐을 꾸리기 시작했어요. 짐을 꾸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진짜 노트북이랑 일본어 교재는 왜 들고 왔지?'
일본 여행 중 여행 기록을 꾸준히 남기려고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왔어요. 매일 가방에 넣고 나갔어요. 그러나 단 한 번도 전원을 켜지 않았어요. 그냥 짐이었어요. 일본어 교재도 마찬가지였어요. 일본 가서 매일 틈이 나는대로 일본어 교재를 보며 예전에 일본어 공부했던 것을 다시 떠올릴 계획이었어요. 당연히 일본어 교재를 단 한 쪽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짐을 다 꾸리고 다시 롯지 아카이시 카페로 갔어요.
직원이 웃으며 맞이해주었어요. 저도 활짝 웃었어요.
커피 한 잔을 주문했어요.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였어요. 피곤했어요.
'여기 내일 다시 올 수 있을까?'
롯지 아카이시 카페는 아침 9시에 문을 열어요. 오려고 하면 한 번은 더 올 수 있었어요.
'내일 아침에 여기 또 와서 마지막으로 밥 먹고 가야지.'
커피를 다 마셨어요. 아직 롯지 아카이시 카페 분위기를 만끽할 시간이 한 번 더 있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조금 덜 했어요.
2시 8분. 롯지 아카이시 카페에서 나왔어요.
"아, 우리 마지막으로 히사고 토오리 가보자!"
숙소에서 신주쿠 가는 방향 큰 길에 히사고 토오리 상점가 ひさご通り商店街 가 있었어요. 여기는 입구를 지나치기만 하고 거리를 걸어보지 못했어요.
"우리 히사고 토오리 갔어."
"우리가? 우리 안 갔어."
친구는 히사고 거리를 간 적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히사고 거리를 가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가보자."
어차피 숙소 근처였어요. 숙소 들어가면 바로 씻고 잘 거였어요. 그래서 히사고 거리를 가보기로 했어요.
별 거 없었어요.
숙소로 돌아왔어요. 다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