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다 내려갔을 때였어요.
'뭔가 참 허전한데...'
아무리 봐도 뭔가 빠뜨리고 온 것이 있는 것 같았어요. 분명히 다 챙겼는데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계속 느껴졌어요. 이런 공허함은 상당히 찝찝해요. 보통은 이런 원인 불명의 허전함이 느껴져도 별 일 없었어요. 제가 제 물품을 다 챙긴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 뿐이니까요. 가끔 이런 느낌 때문에 분명히 짐 다 잘 챙기고 문 잠긴 것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확인해보는 일이 있어요.
이 찜찜한 느낌. 이대로 전철 타러 가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기분. 무엇 때문에 이런 기분이 강렬하게 드는 것일까?
'빠뜨리고 올 거 없는데...'
혹시 모르기 때문에 가방을 열어봤어요. 카페에서 가방을 열어본 일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가방 안에 있어야할 것은 전부 다 있었어요. 일본은 한국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치안이 가장 좋은 나라 중 하나에요. 유럽 같은 곳이었다면 누가 가방을 칼로 째고 훔쳐간 것 없나 항상 신경써야 해요.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항상 신경 곤두세우고 어디든 중요품이 들어 있는 가방은 앞으로 메고 다녀야하지는 않아요. 제가 가방을 안 열었다면 제 가방 안에 있는 것은 없어질 확률이 거의 없었어요. 게다가 가방은 등에 메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무게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어요. 가방 안에 자잘한 것은 안 집어넣었기 때문에 뭔가 없어졌다면 무게 차이가 크게 나야 했거든요.
'뭐지?'
분명히 가방 안까지 다 확인했어요. 가방 속 내용물 확인까지 다 했는데도 전혀 사라지지 않는 찝찝함. 사라져야 할 허전함과 공허함이 오히려 더 강해졌어요. 가방을 여는 순간 가방 안에 꾸겨넣었던 그 기분 나쁜 느낌이 펑하고 튀어나와 온몸을 감싼 기분이었어요. 이번에는 주머니를 뒤져봤어요. 외투 주머니 각각에 손을 다 집어넣어봤어요.
"지갑 있고, 스마트폰 있고, 담배 있고...잃어버린 게 없는데?"
에스컬레이터는 계속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어요. 가방도 다 확인해봤고 주머니도 다 확인해봤어요. 있어야할 것이 다 있었어요. 심지어 지갑을 열어서 돈과 교통카드가 잘 있는지까지 확인해봤어요. 모든 것이 다 잘 있었어요. 그렇지만 에스컬레이터가 내려가는 속도처럼 영 기분좋지 않은 이 느낌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어요. 아래로 내려갈 수록 직감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것이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어요.
'아...대체 뭐야? 왜 이렇게 느낌이 안 좋지?'
계속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숙소에 뭐 빠뜨리고 왔나? 모스크에서도 뭐 잃어버릴 게 없었고...'
이 기분나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소. 그런데 왜 기분 나쁜지 모르겠소. 대체 뭣 때문에 이런 것이오?
친구를 쳐다봤어요. 친구도 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어요. 서로가 서로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스캔했어요. 친구는 친구대로 제가 대체 뭘 빠뜨리고 온 건지 살펴보고 있었고, 저는 저를 쳐다보는 친구를 쳐다보며 혹시 친구가 뭐 잃어버린 거 아닌지 살펴봤어요.
'오늘 잘못했다가는 진짜 악운 제대로 끼는 거 아니야?'
분명히 매우 안 좋은 일이 하나 있을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었어요. 친구에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혼자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모든 것을 다 확인했는데도 이 기분 나쁜 느낌이 전혀 안 사라지고 있었거든요. 지금 무슨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들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고 확신했어요. 정말 재수없다면 내일 다시 신주쿠 와서 신주쿠 타카노와 키노쿠니야에 가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예측이 떠올랐어요.
불행을 예견하는 기분나쁜 느낌이었어요. 마치 감기 걸리기 전에 몸이 살짝 으슬으슬하고 코가 조금 맹맹해지고 관자놀이가 가볍게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처럼, 이 느낌은 앞으로 있을 아주 나쁜 일을 예견하는 것이라 추정되는 느낌이었어요. 점점 그쪽으로 확신해가고 있었어요. 신주쿠에서 지하철을 타기 전까지 어떻게든 이 느낌의 원인이 뭔지 밝혀내야만 했어요.
서로가 서로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계속 몇 번을 눈으로 스캔하는 상황.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였어요.
원인이 밝혀졌다! 이 기분나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것!
"아, 우산!"
친구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봤어요. 우산. 우산. 우산! 이 거지 같은 우산! 이 망할 우산! 이 개 같은 우산!
"우산 놓고 왔다!"
허전함의 정체는 바로 우산이었어요. 카페 좌석 아래에는 검은 상자 통이 하나 있었어요. 그 통에 우산과 가방을 집어넣고 앉아 있었어요. 나올 때 가방만 챙기고 우산은 까먹었어요. 우산이 검은색인데다 상자 안에서 구석으로 굴러가서 못 봤나봐요. 왜 계속 뭔가 빠뜨린 거 같다고 느꼈는지 깨달았어요. 들어올 때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들어왔어요. 나갈 때는 양 손 다 빈 손이었어요. 그러니 허전하죠.
그놈의 우산, 가뜩이나 마음에도 안 드는 우산이었는데 이렇게 속 썩이네.
한국에서 우산 들고 오는 것을 잊어버려서 일본 도쿄에서 구입한 우산. 정말 싫었어요. 무려 거금 1000엔 주고 구입한 우산이었어요. 그렇게 비싼 우산임에도 불구하고 우산 질이 매우 안 좋았어요. 자동 우산인데 자동으로 접었다가 펴려면 다시 우산대를 다 집어넣어야만 펴졌어요. 게다가 우산 천에 잡혀 있는 주름도 엉망이었어요. 그 주름 따라서 우산을 접으면 예쁘게 접히지 않았어요. 한국에 놓고 온 5천원짜리 우산이 그것보다 훨씬 더 나았어요.
일본에서 거의 2배 되는 돈을 주고 산 우산이 한국보다 형편없어서 우산 만큼은 2배로 짜증나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 우산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위로 올라가야 했어요. 꽤 많이 내려왔기 때문에 꽤 많이 또 올라가야 했어요. 백화점 안에 입점한 점포들은 문을 닫았어요. 오직 맨 꼭대기층 근처에 있던 그 카페와 식당가만 문을 열고 장사하고 있었어요. 빨리 올라가야 했어요. 엘리베이터를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바꿔탄 후, 성큼성큼 걸어올라갔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우산을 놓고 가버렸다'를 일본어로 뭐라고 해야 하는지 찾아봤어요. '놓다, 두다'는 일본어로 置く おく 였어요. 예전에 공부한 적 있는 단어였어요. 번역기 번역 결과물을 보자 '아, 이거였지!'하고 떠올랐어요.
"죄송합니다. 우산을 놓고 가버렸어요."
카페는 그새 손님들이 와서 모든 자리에 손님이 다 앉아 있었어요.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도 손님이 앉아 있었어요.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이 제게 어느 자리에 앉았었냐고 물어봤어요.
'야, 너네 아까 내 주문 받았잖아.'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온지 몇 분 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직원은 제게 어느 자리에 앉았었냐고 물어봤어요. 아주 넓은 카페가 아니었어요. 좌석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한 번 둘러보면 어디에 어떤 손님이 앉아 있는지 다 알 수 있는 조그만 카페였어요. 게다가 직원들은 계속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니고 있었구요. 그런데도 다시 제게 어디에 앉았었냐고 물어봤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앉았다고 말했어요.
직원이 손님께 양해를 구하고 상자를 꺼내서 안을 확인해봤어요.
"우산 없어요."
"아...예..."
우산은 그렇게 없어졌어요. 직원이 찾아보는 것을 봤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어째서 상자에 집어넣은 우산이 그새 없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우산은 없어졌어요.
카페에서 돌아나와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어요. 기분이 하나도 안 나빴어요. 보통은 이러면 기분이 나빠야 정상이에요. 그렇지만 오히려 기분이 시원했어요.
그 쓰레기 같은 우산, 도쿄 어느 쓰레기 매립장에 처박히겠지.
그 우산이 정말 싫었거든요. 1000엔 주고 사서 버리기 망설여졌어요. 한국 들고 가서 쓸까 싶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제 방에 더 좋은 우산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천 엔이나 주고 구입한 우산은 한국에서 쓸 일이 아마 하루 내지 이틀 뿐일 거였어요. 아주 가끔, 1년에 한두 번 정도 고향에서 친구가 올라와서 제 방에서 며칠 신세질 때가 있거든요. 그때 비가 내리고 친구에게 우산이 없다면 친구에게 쓰라고 건네주는 용도로 방에 처박아놓아야만 했던 우산이었어요. 가져가도 짐덩어리인 골치 아픈 우산이었어요. 버리자니 천 엔 주고 산 것이라 아깝고, 들고 가자니 이런 고약한 품질의 우산을 어디에 써먹을지 애매했어요.
정답은 간단했어요. 잃어버렸으니까요.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이제 그 우산은 제게 없어요. 누가 들고 간 건지, 새까만 상자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직원이 못 본 건지 몰라요. 어쨌든 사라져버렸어요. 제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우산이었어요. 우산에 제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 같은 것을 적어놓은 것도 아니었구요. 그 중국제 저질 우산이 제게 돌아올 확률은 장담컨데 0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문제 하나가 저절로 해결되어 버린 셈이었어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어요. 출구로 나왔어요.
"이제 돌아가자."
다음날 일정은 매우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야 했어요. 숙소로 일찍 돌아가야 했어요.
"우리 신주쿠 조금 더 보다가 돌아갈까?"
신주쿠는 상당히 컸어요. 아직까지도 제 인생 처음으로 일본 왔을 때 맨 처음 찾아갔던 그 공원을 못 가봤어요. 분명히 흡연 구역이 있는 공원이 하나 있었어요. 그게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것만큼은 다시 보고 싶었어요. 거기 가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싶었어요. '나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으로 흡연 구역 재떨이에 담배 꽁초를 버리고 가고 싶었어요.
친구도 그러자고 했어요. 앞으로의 일정에서 신주쿠를 또 올 일은 아마 없을 거였거든요.
친구와 함께 아까 가보지 않은 길로 걸어갔어요.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신주쿠. 아까에 비해 차도 줄어들었고 사람도 줄어들었어요. 이제 비는 완전히 다 그쳤어요. 그 망할 중국제 우산이 없어도 아무 문제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우산이 없어서 오히려 더 좋았어요. 두 손이 자유로워졌거든요. 이제는 날이 어두워져서 두 손으로 카메라를 잘 잡지 않으면 사진이 무조건 흔들렸거든요.
캐논 SX70 HS 카메라의 손떨림 방지 기능은 엄청나게 강력했어요. 삼각대 없이도 최대 광각인 35mm 환산 초점거리 21mm에서 야경을 1초까지 손떨림 없이 찍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단점이 있었어요. 이 강력한 기능은 랜덤으로 발동되었어요. 게다가 제대로 손떨림 방지 기능이 발동되었다 해도 셔터스피드가 1초가 나와버리면 그때부터는 흔들린 사진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어요. 그래도 이제 자유롭게 아무 때나 양손을 이용해 카메라를 잡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어요.
'기술 진짜 참 많이 발전했어.'
예전에는 삼각대 없으면 밤에 멀쩡한 사진 찍을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손떨림 방지 기술이 엄청나게 좋아졌어요. 불과 올해 3월 제주도 여행 갈 때까지 사용했던 후지필름 HS10 디지털 카메라와 비교해보면 이건 말 그대로 신세계였어요. 올해 카메라 바꾸기 정말 잘 했어요.
"대체 그 공원 어디 있지?"
아무리 찾아봐도 공원이 보이지 않았어요.
'신주쿠 엄청 크네.'
신주쿠는 우리나라에서 종로, 시청 또는 명동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정도 되는 곳 같았어요. 그러나 엄청나게 컸어요. 명동에서 종각까지 이어지는 범위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어요.
'도저히 감당 안 되어서 축소 지향한 거 아냐?'
이 넓은 공간에 빌딩을 빽빽히 세우고도 감당이 안 되어서 축소 지향적으로 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종로, 명동 정도가 아니라 서울 강남, 역삼과 비교해도 훨씬 넓고 크게 느껴졌어요. 물론 버블 경제의 여파로 인해 일본에 축소 지향적인 문화가 탄생한 건 절대 아니에요. 버블 경제 이전부터 일본은 작고 섬세하게 꾸미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유물만 봐도 한국인들이 일본 문화 보고 '축소 지향 일본인'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어요.
고가도로 아래에 있는 식당에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어요.
'무슨 맛집인가?'
간판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봤어요.
新宿ワヰン酒場
新宿ワヰン酒場?
ヰ?
얼핏 봤을 때는 키 キ 처럼 생겼어요. 그러나 달랐어요. キ 와는 다른 가타가나였어요.
ヰ 라는 가타가나는 오늘날 일본어에서 거의 안 쓰는 가타가나에요. 히라가나로는 ゐ 에요. 옛날 발음은 wi 이지만, 현대 발음에서는 i 가 되었어요. 오늘날 ゐ ヰ wi와 ゑ ヱ we 는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려고 할 때 가끔 쓴대요. 즉, 상표, 식당 간판 같은 곳에서나 가끔 쓰는 문자에요. 한국어에서 이런 포지션에 해당하는 글자라면 아래아가 있죠.
신주쿠 와인 사카바. 사카바 酒場 さかば 는 '술집, 주점, 바'라는 의미에요. 저와 전혀 안 친한 단어에요. 저는 미성년자였던 고등학교 1학년때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술 관련된 단어라고는 사케 酒 さけ 하나만 공부했어요. 新宿ワヰン酒場 는 제게 미스테리한 단어였어요. ヰ 는 제가 모르던 글자였고, 酒場 은 제가 공부해본 적이 없는 단어였거든요. 간판 보고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어요.
서울 중구 명동과 비슷한 분위기가 매우 강해졌어요. 차이점이라면 명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화려하고 크고 깔끔하다는 점이었어요.
"신주쿠역 어떻게 돌아가지?"
신주쿠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까지는 좋았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어요.
신주쿠역까지 돌아가야 해.
신주쿠역에서 아사쿠사역 근처에 있는 숙소까지는 걸어서 돌아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어요. 이제 밤 9시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백주대낮이라도 걸어갈까 생각하면 상당히 망설여지는 거리였어요. 그런데 낮도 아니고 밤이었어요.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책의 무게가 두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어요. 전날 피로가 깔끔히 사라진 것도 아닌데 추가적으로 계속 피로가 쌓이고 있었어요.
너무 멀리 가면 신주쿠역까지 다시 되돌아가는 길도 똑같이 멀어졌어요. 친구와 지도를 봤어요. 어떻게든 신주쿠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신주쿠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왔던 길을 다시 똑같이 걸어가야 했어요. 힘들고 재미없는 길이었어요. 신주쿠역으로 안 돌아가는 방법만 있다면 어떻게든 안 돌아가고 싶었어요. 방법이 없다면 이제 신주쿠역으로 걸어가야만 했어요.
"여기서 신주쿠역 안 돌아가고 바로 갈 수 있는 방법 있어."
"뭔데?"
친구가 구글맵을 계속 들여다보다 말했어요.
"여기에서 히가시 신주쿠역으로 가서 전철 타고 쿠라마에역으로 가면 돼."
"쿠라마에역?"
"응. 히가시신주쿠역에서 오에도선 타고 쿠라마에역 가면 돼."
쿠라마에역? 거기는 무슨 역인지 모르겠다.
쿠라마에역은 처음 들어보는 전철역이었어요. 숙소와 제일 가까운 전철역은 아사쿠사역이었어요. 아사쿠사역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가면 숙소가 나왔어요. 그 다음은 우에노역. 우에노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은 조금 멀었어요. 그러나 전날 걸어봤기 때문에 길을 다 알고 있었어요. 우에노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갈 만한 거리였어요. 웃으며 걸어갈 만한 거리는 아니었어요. 숙소로 걸어서 돌아가기 위해 감내할 수 있는 거리의 한계선에 가까웠어요. 조금 멀기는 하지만 걸어갈 수 있는 정도라고 하는 게 맞을 거에요.
"쿠라마에역은 여기야."
친구가 지도를 보여주면서 설명해줬어요. 쿠라마에역에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은 길이가 1.6km 정도 되었어요. 쿠라마에역에서 숙소까지 길을 찾아가는 것은 쉬웠어요. 아사쿠사역에서 숙소 가는 길보다는 멀었지만 당장 신주쿠역 돌아가는 길을 생각해보면 나쁠 것도 없었어요. 오히려 좋았어요. 쿠라마에역 주변은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안 가본 곳을 조금 더 볼 수 있는 길이었어요.
"히가시신주쿠역으로 가자!"
히가시신주쿠역으로 가기로 했어요. 히가시신주쿠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던 방향으로 계속 쭉 걸어가야 했어요.
일본 도쿄 24시간 식당이 나왔어요. 24시간 소바 가게였어요.
'일본 왔으니 소바도 한 번 먹어보기는 해야 하는데...'
소바도 일본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에요. 3초 정도 저기 들어가서 소바 하나 먹고 갈까 고민했어요. 위장이 말했어요.
너는 저거 먹고 싶은 생각 지금 없잖아. 뭣하러 돈 낭비해?
딱히 밥 생각이 없었어요. 배고프지 않았어요. 시간을 너무 지체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사진만 찍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어요.
계속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왼쪽으로는 계속 번화가로 들어가는 길이 나왔어요. 왼쪽에 있는 번화가로 들어간다는 것은 신주쿠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어요. 신주쿠가 정말 넓다는 것을 느꼈어요. 시간만 되었다면 아마 한 번 들어가봤을 거에요. 그리고 히가시신주쿠역이 아니라 신주쿠역으로 되돌아갔겠죠. 다리가 아프지는 않았지만 피로가 쌓여가고 있다는 느낌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어요. 무조건 히가시신주쿠역으로 가야 했어요.
"여기 왜 신사가 있지?"
도리이가 보였어요. 신사였어요.
신사 입구에는 花園神社 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었어요. 화원신사. 한자 자체는 어렵지 않았어요.
'이거 어떻게 읽어야해?'
역시나 이게 문제였어요. 花園神社 를 '화원신사'라고 읽는 것은 하나도 안 어려워요. 그러나 이걸 이렇게 읽으면 안 되요. 저건 일본어니까요. 일본어로 읽어야죠.
'일단 신사 이름은 사진으로 찍어놨으니까. 나중에 여행기 쓸 때 뭐라고 읽나 찾아봐야지.'
신사 이름인 花園神社 를 일본어로 어떻게 있는지 찾아보지 않았어요. 이름을 사진으로 잘 찍어놨으니까요. 이름을 일본어로 어떻게 읽는지 꼭 알아야할 필요도 없었어요. 이름 몰라도 안으로 들어가볼 수 있는 신사였거든요. 일단 花 는 '하나'라고 읽을 것 같았어요. 나머지 세 글자를 어떻게 읽는지 몰랐어요.
여행기 쓰면서 찾아보니 花園神社 는 はなぞのじんじゃ '하나조노진쟈'라고 읽는대요.
"이런 번화가에 신사가 있어?"
번쩍이는 신주쿠. 신사가 있었어요. 엄청나게 좁고 침침한 골목을 따라 들어가야 나오는 신사는 아니었어요. 입구는 큰길에 있었거든요. 이 비싼 신주쿠 땅에 신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신기했어요. 친구도 신사를 보더니 이런 비싼 땅에 번화가인 곳에 신사가 있다고 신기해했어요. 친구가 구글맵으로 어떤 신사인지 찾아봤어요.
"여기가 크게 볼 것은 없는데 신주쿠에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간대. 여기 근처에 숙소들이 조금 있나봐. 그래서 숙소 가는 길에 잘 들리는 곳이래. 일단 평은 좋아. 유명한 신사이기도 하구."
"우리 들어가보자!"
어떤 신사인지 궁금해졌어요. 친구도 여기가 유명한 신사라는 것을 확인하자 들어가보자고 했어요.
도리이 너머는 매우 어두침침했어요.
"저기 완전 귀신 나오게 생겼는데?"
일본은 오만 잡신에 귀신의 나라. 일본에 귀신 많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어요. 일본 문화와 관련된 것을 보면 진짜 엄청나게 다양한 귀신과 괴물이 등장해요. 우리나라는 도깨비, 처녀귀신, 몽달귀신, 달걀귀신, 구미호 정도인데 일본은 오만 잡귀가 아주 바글바글해요. 그래서 관련 괴담도 여러 가지 있어요. 교토는 길이 모두 직선이라 귀신한테
도리이 너머로는 너무 어둡고 침침했어요. 진짜로 귀신 나오게 으스스한 분위기였어요.
도리이 너머 안쪽으로 들어갔어요.
일본 도쿄 신주쿠 하나조노 신사는 일본 에도 막부 시대였던 1590년에 이미 존재하던 신사라고 해요.
히나노조 신사는 에도 막부 시대부터 신주쿠의 수호신이었다고 해요.
히나노조 신사는 사업 번창, 임신, 결혼 등에 영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대요. 그래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신사래요.
히나노조 신사는 예능의 신을 모시는 신사이기도 해요. 그래서 연극, 가곡 등 예능 관계의 봉납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대요. 가수, 배우 등 많은 유명인들이 참배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구요.
뒤를 돌아봤어요.
어두침침하고 으스스한 하나조노 신사로 가는 길 너머에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신주쿠 번화가가 있었어요.
저 도리이는 귀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인가.
아무리 석등에 불을 밝혀놨다고 해도 이쪽은 어두웠어요. 그러나 도리이만 넘어가면 밝고 차도 많이 다니고 있었어요. 걸어다니는 사람도 조금 있었구요. 여기도 분명히 신주쿠였어요. 그러나 전혀 신주쿠 같은 느낌이 안 들었어요. 아사쿠사 센소지 및 아사쿠사 신사보다도 더 음침했어요.
'이래서 일본이 기묘한 이야기를 잘 만드는 건가?'
하나조노 신사가 심령스팟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 도쿄 제일 번화가 중 하나인 신주쿠에 이런 확실한 세계의 구분이 있다니! 아무리 봐도 저승과 이승의 경계. 도리이는 저승과 이승을 연결해주는 문.
이런 기분을 아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그것도 신주쿠에서요! 이런 기묘한 느낌을 도쿄 한복판 번화가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일본이 기묘한 상상을 통해 여러 문화 예술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이런 것도 꽤 클 것 같았어요.
우리나라도 큰 길과 이어진 으슥하고 왠지 범죄의 대상이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드는 무서운 골목들이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귀신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이 큰길과 딱 붙어 있는 경우는 못 봤어요.
하나조노 신사는 문이 닫혀 있었어요. 어떤 일본인이 계단을 올라가 신사 바로 앞까지 가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어요.
'저 빨간 도리이 쭉 늘어선 거 찍으면 사진 예쁘게 나오겠다.'
사진이 계속 흔들렸어요. 예쁘게 나오지 않았어요. 게다가 일본인 두 명이 일렬로 늘어선 도리이에 서서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일단 다른 곳 사진부터 찍어야지.'
신사 뒷편 빌딩 창문 밖으로 새나오는 불빛들이 풍등처럼 찍혔어요.
'이제 갔네.'
도리이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일본인들이 갔어요. 다시 일렬로 쭉 늘어선 새빨간 도리이 사진 촬영을 도전했어요.
'이 정도면 되었을 건가?'
그럭저럭 사진이 찍힌 것 같았어요.
이번에는 일렬로 늘어서 있는 도리이 입구로 갔어요.
이것은 사진이 만족스럽게 찍혔어요.
누가 신사 안에 자전거를 세워놨어요.
신사에서 나왔어요. 다시 히가시신주쿠 역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여자회? 이거 그거 아냐?"
한국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는 것이 떠올랐어요. 그 문화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한때 여자들이 호텔 방 하나 잡아서 파자마 파티를 하곤 했거든요. 이것은 한국에서 여자들이 호텔 방 하나 잡아서 파자마 파티하는 문화와 비슷해 보였어요.
지금도 한국에서 여자들이 호텔 방 잡고 파자마 파티를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이름이 바뀌었을 수도 있구요. 요즘 하룻밤 고급 호텔 방에서 머무르며 놀고 쉬는 호캉스를 즐긴다는 말은 여러 번 봤어요. 그러나 파자마 파티 같은 말은 최근에는 못 본 거 같아요. 파자마 파티가 호캉스에 흡수되어 사라진 건지, 둘은 아예 다른 것인데 파자마 파티는 사라진 것인지는 저도 몰라요.
간판에는 '365일 매일 리조트 인기!'라는 광고가 붙어 있었어요.
'저건 또 뭐지?'
저건 식당이야, 노는 곳이야?
파세라 대인기! 하니토.
이건 진짜 뭔지 모르겠다.
간판에 적혀 있는 말은 엔터테인먼트, 최대 300명, 가라오케 같은 내용이었어요. 일단 파세라가 뭔지 몰랐어요. 하니토는 또 뭔 말인지 알 수 없었어요. 파세라와 하니토가 대체 무슨 단어를 저렇게 표현해놓은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어요. 좋아요. 엔터테인먼트에 가라오케 있으니까 단체로 쿵짝쿵짝.
그런데 저 위에 있는 과일 토스트 같은 건 뭔데?
어렵다.
이건 해석 불가. 제 능력으로 무리였어요.
2019년 8월 28일 밤 9시 29분. 히가시신주쿠 역에 도착했어요.
역 안으로 들어갔어요.
벽에는 다양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요.
"이거 뭐지?"
포스터를 한참 가만히 쳐다봤어요.
"아!"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어요.
윗 사진은 옛날 일본이고, 아래 사진은 오늘날 일본. 옛날 일본 우키요에 속 여자 그림은 현대로 들어와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되었어요. 윗쪽 옛날 일본 가부키 괴물은 아랫쪽 현대 일본 로보트가 되었구요.
"이거 어디서 안 파나? 이거 완전 갖고 싶어!"
아이디어가 진짜 대박이었어요. 너무 웃겼어요. 이런 건 정말 기념품으로 꼭 갖고 싶은 것이었어요. 특히 저 우키요에 속 여자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너무 웃겼어요. 우키요에 속 여자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진화해서 이제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되었네요.
이거 그냥 진화한 게 아니라 회춘한 거 아냐?
그림을 보면 우키요에 속 여자가 애니메이션 캐릭터보다 훨씬 나이먹어 보였어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해가면서 나이는 또 거꾸로 먹은 것인가! 앞으로 100년 뒤에는 이 포스터가 3단 변신물 포스터로 바뀔 건가? 100년후가 또 기대되는 포스터였어요.
2019 일본 도쿄 럭비 월드컵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요. 티켓 선착순 판매일이 5월 18일 토요일부터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포스터는 4월말에서 5월초에 여기 붙었을 거에요. 럭비 월드컵은 한국에서는 인기 없지만 럭비를 좋아하는 국가들에서는 상당히 중요하고 커다란 행사에요. 한국 정부와 반일 선동 세력들은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 안 가니 일본이 관광수지에서 커다란 타격을 받을 거라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일본 도쿄는 당장 9월에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인 럭비 월드컵이 열릴 예정이었어요.
雨の日は、
都バスで。
비 오는 날에는,
도에이 버스로.
토에이 버스는 도쿄부 교통국에서 운영하는 공영 버스에요. 직역하면 '토에이 버스로'가 맞겠지만, 의역하면 '시내버스로'가 더 나을 거에요.
'비 오는 날에는 전철 타라고 해야 맞지 않아?'
일본 도쿄 와서 버스를 타보지 못했어요. 탈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비 오는 날에는 전철 타는 것이 버스 타는 것보다 훨씬 쾌적하고 편해요. 비 오는 날 버스 타면 사람들이 우산 들고 있기 때문에 더욱 불편하거든요. 버스 의자가 우산 놓고 앉기에 좋은 것도 아니구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 오는 날에는 버스 타라고 할 게 아니라 전철 타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여기는 지하철역이었구요.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홍보해야지, 왜 버스를 홍보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すべての「今日」のために。
모든 '오늘'을 위해.
이건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유리창에 비친 인간. 그것 외에 어떤 말도 이미지도 없었어요.
'일본인들은 이걸 이해할 건가?'
만약 이해한다면 이 또한 문화차이겠죠. 무슨 '여러분, 힘내세요!' 같은 포스터일까요?
2020년 일본 도쿄 올림픽 마스코트 포스터도 붙어 있었어요.
일본 도쿄 관광 홍보 포스터도 붙어 있었어요. 이것은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
'저렇게 빨간 도리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곳이 있었나?'
조금 전에 갔던 하나조노 신사에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포스터에서 아래쪽 사진은 수많은 등이 매달려 있는 사진이었어요.
"이것들 다 어디 있다는 거지?"
사진을 보자 가보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이것들이 도쿄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전혀 안 적혀 있었어요.
이것도 글을 쓰며 사진을 자세히 보고 알았어요. 위에 있는 새빨간 도리이가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 일본의 과거, 수많은 등이 매달려 있고 아래에 반영이 비쳐 등불의 공간이 된 모습이 일본의 현재였어요. 글 쓰면서 찾아보니 윗쪽 사진은 일본 도쿄 우에노 하나조노 이나리 신사였고, 아래쪽 사진은 도쿄 디지털 아트 뮤지엄이래요.
히가시신주쿠역 플랫폼으로 내려갔어요.
플랫폼에 도착했어요. 몇 시인지 봤어요. 2019년 8월 28일 밤 9시 36분이었어요. 전철이 오기를 기다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