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하게 젖은 땅. 끈적끈적한 공기. 오다큐 전철 요요기우에하라역 代々木上原駅 よよぎうえはらえき 은 지상철이었어요. 하늘을 바라봤어요. 아까보다 빗줄기가 엄청나게 많이 가늘어졌어요.
제가 타고 온 전철은 떠났어요. 맞은편 플랫폼에 전철이 들어왔어요.
"우리 여기 다음 일정 어떻게 돼?"
"요요기 공원 갔다가 시부야 가기로 했잖아."
"아, 맞다."
신주쿠에서 과일 파르페 디저트 전문점인 신주쿠 타카노에서 과일 파르페를 먹고 나서 일본에서 가장 큰 서점 중 하나인 키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을 갔어요. 그 다음 일정은 일본 도쿄 시부야에 있는 이슬람 사원인 도쿄 자미 모스크를 보는 것이었어요. 이후, 요요기 공원을 조금 둘러본 후에 시부야로 넘어가기로 했어요. 시부야도 일본 도쿄에서 유명한 번화가에요.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반드시 듣게 되는 지명 중 하나에요.
그러나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어요. 4시까지 도쿄 자미를 다 보고 요요기 공원까지 둘러볼 계획이었거든요. 신주쿠역에서 요요기우에하라역까지는 한 정거장이고, 모스크는 별로 볼 것이 없을 거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날 일정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어요. 그러나 예상보다 많이 늦어버렸어요. 키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에서 2시간 있었던 것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어요. 기껏해야 30분이나 있다 나오지 않을까 했거든요. 서울 종로 영풍문고, 광화문 교보문고 둘러볼 때 걸리는 시간이 30분 정도였어요. 게다가 키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은 일본 서점이니 거의 모든 책이 일본어 서적이니까 대충 둘러보고 나오면 30분 정도 걸릴 거라 예상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어디에서부터 계획이 틀어진 것일까?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진 것입니다. 비가 내릴 거라고 전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흡연구역 찾는답시고 신주쿠를 돌아다닐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서점에서 도서 구입하기 위해 헤매는 시간도 전혀 계획에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당신 자신의 행동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래서 사람은 말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봐야 하오.
'뭐 때문에 이렇게 계획이 틀어졌지?'라고 친구에게 말하려다가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뱃속으로 꾹꾹 우겨넣었어요. 100% 저 때문에 일정이 틀어진 것이었어요. 누구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긴요. 제가 신주쿠에서 흡연구역 찾는답시고 헤매며 돌아다녔으니까 틀어졌죠. 서점에서 여자력 책 찾고 일본 요리책 찾는다고 헤매었으니 틀어졌죠. 남탓 할 게 아니었어요. 모두 저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거였어요. 이래서 말 하기 전에 잠깐 이 말을 하는 게 맞는지 생각해봐야 해요.
'아니야.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일 수 있어.'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었어요. 뭔가 잘못되었을 수 있었어요. 이게 과연 하루에 다 둘러볼 수 있는 코스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했어요. 막연하게나마 이 일정 자체가 문제가 있을 수 있었어요. 지도를 보면 시부야역에서 긴자역까지 긴자선 타고 16분이면 간다고 나왔어요. 그런데 하루에 신주쿠, 시부야, 긴자를 다 보는 게 과연 가능할까?
이때까지만 해도 여행 일정을 꼼꼼하게 짜고 확정지어놓은 것이 아니었어요. 8월 30일 일정은 제대로 정하지도 못했어요. 그날 하루는 일정이 텅 비어 있었어요. 적당히 상황 봐가면서 무리일 것 같은 곳들은 생략한 다음에 그렇게 생략한 곳들을 8월 30일에 몰아서 갈 계획이었거든요. 게다가 일본에 대한 이미지 중작다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크게 작용했어요. 서울 여행을 기준으로 생각한 것도 있었구요.
어렴풋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나 어디에서 그렇게 크게 잘못되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어요.
'나중에 가지, 뭐.'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요. 8월 30일 일정은 텅 비어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별로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작정하고 돌아다니려고 하면 다 볼 수 있을 거라 믿었거든요.
예전 같았으면 이 상황에 대해 엄청나게 신경쓰였을 거에요. 어떻게든 모든 걸 다 보려고 작정하고 돌아다녔을 거에요. 그러나 이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도쿄 5박 6일'이라는 여행 일정이 주는 편안함이 있었어요. 도쿄 5박6일 일정은 말 그대로 푹신한 침대. 여기에 8월 30일 일정이 없다는 것은 포근한 이불. 8월 30일 일정은 텅 비어있다시피 했고, 8월 31일 오전 일정도 마찬가지였어요. 귀국하는 날인 8월 31일 오전 일정은 아사쿠사 근방을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아사쿠사 근방은 원치 않게 잘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숙소에서 아사쿠사역 가려면 무조건 센소지를 지나가야 했거든요. 여행 후반부 일정은 공란이 너무 많았어요.
요요기우에하라역에서 나왔어요.
빗줄기가 확실히 약해졌어요. 모스크가 벌써부터 제가 온다고 너무 기뻐서 기적을 만들어주고 있었어요. 빗줄기는 우산을 쓰기 상당히 애매할 정도로 약해졌어요. 바람도 안 불었어요. 이 정도라면 모스크 가기 매우 좋은 날씨였어요. 도쿄 자미 모스크는 수줍게 미소지으며 저에게 손짓하고 있었어요. 빨리 오라고 재촉하면 부끄러우니까 은근히 은근히 어서 와줬으면 좋겠다고 날씨를 서서히 개게 만들고 있었어요.
지하철역 근처에 조그만 공원이 있었어요. 공원이라기보다는 놀이터에 가까웠어요.
정확한 이름은 시부야 구립 니시하라 아동 유원지 渋谷区立児童遊園地 しぶやくりつ にしはらじどうゆうえんち 였어요.
놀이터 표지판 뒷면에는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어요.
주의사항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공놀이하지 말라는 점이었어요. 놀이터에서 공놀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처음 봤어요. 여기에 야구 좋아하는 일본답게 배트 갖고 놀지 말라고 되어 있었어요.
여기에 번호가 전부 1번이라는 것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예전에 구호를 외칠 때 '하나, 우리는 어쩌구 저쩌구 한다! 하나, 우리는 어쩌구 저쩌구 한다! 하나, 우리는 어쩌구 저쩌구 한다!'라고 외쳤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전부 번호를 '하나'라고 붙이는지 몰랐어요. 이 표지판도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아마 전부 다 중요하니까 우선순위 가리지 말고 다 똑같이 전부 싸그리 지키라는 것이겠죠.
도쿄 자미 모스크를 향해 걸어갔어요.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어요.
우리는 왜 모스크에 가야 하는가.
친구에게 비싼 과일 파르페를 사준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여행 일정 준비를 거의 혼자 다 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 취향을 전부 다 반영해줬어요. 그게 고마워서 사준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고마움의 중심에는 바로 일본 도쿄 시부야 이슬람 사원인 도쿄 자미 모스크 日本 東京ジャーミイ モスク 가 있었어요.
나의 더 슈퍼 울트라 하이퍼 그레이트 모스크 로드.
이걸 의도한 것은 아니에요. 저의 첫 외국 여행이었던 튀니지, 모로코, 스페인 여행부터 흘러흘러 중국 여행까지 가게 된 길고도 길었던 이야기. 희안하게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모스크는 어떻게든 보고 들어가게 되었어요. 모스크에 열광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무슬림도 아니구요. 그런데 어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각 나라에 있는 모스크를 최소한 하나씩은 제 의도와 상관없이 가봤어요.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그것을 각성해 버렸다.
때는 2015년 동남아시아 여행을 할 때였어요. 태국과 라오스는 불교 국가에요. 좋아요. 태국이야 남부에 무슬림들이 살고 있고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니까 그러려니 해요.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유명한 빈국인데다 사회주의 국가에요. 그래서 라오스에서 모스크 갈 일은 없을 줄 알았어요. 라오스에 뭔 모스크가 있겠냐 싶었어요. 그런데 비엔티안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이었어요. 모스크를 싫어하는 친구가 앞장서서 길을 찾아가며 걸어가고 있었어요. 저는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나타났어요. 라오스에 절대 없을 것 같던 모스크가 나타났어요. 친구가 절대 의도한 것이 아니었어요. 친구는 단지 길을 보며 찾아가던 중이었고, 저는 그 친구를 따라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모스크에 와버린 것이었어요. 경악했어요. 진지하게 모스크가 저와 친구가 모스크를 안 가려고 하자 부다다다 달려와서 길을 가로막고 선 것 아닌가 싶었어요.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모스크였어요. '어떻게 나를 안 보고 갈 수가 있어?'라고 소리지르며 울며 저와 친구 앞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후 중국 여행에서 다른 친구와 중국 대륙을 횡단하며 가는 도시마다 모스크를 갔어요. 딱 한 도시에서만 모스크 안에 안 들어갔어요. 시안이요. 그러나 그때 모스크를 보기는 했어요. 단지 안에 안 들어갔을 뿐이죠. 중국 대륙 횡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하던 친구가 모스크가 정말 싫다고 하도 징징거려서 못 들어갔어요. 그 결과, 그 친구는 천벌을 받았어요. 유로 2016 경기 결과를 놓고 셋이서 승부를 맞춘 사람에게 10위안씩 주기로 했어요. 친구는 아일랜드 대 스웨덴 전에서 아일랜드가 이기는 쪽을 선택했어요. 아일랜드가 1:0으로 잘 이기다가 후반전에 골을 먹어서 1:1로 비겼어요. 그 경기에서는 제가 비긴다고 했기 때문에 저는 돈을 땄어요. 다른 경기에서는 다른 친구가 승부를 맞춰서 돈을 땄구요. 모스크 가기 싫다고 한 이 친구만 모스크의 저주를 받아 돈을 잃었어요.
일본 여행 계획을 짤 때였어요. 친구에게 일본 도쿄에 모스크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설마. 있을 걸? 도쿄가 서울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도시인데 모스크 하나 없겠어?"
친구가 인터넷을 검색해봤어요. 진짜 모스크가 있었어요. 이 친구도 모스크 가는 것을 영 안 좋아하는 친구에요. 그런데 친구는 여기 하나 정도라면 여행 일정에 넣어주겠다고 했어요. 그 모스크가 바로 도쿄 자미 모스크였어요.
우체통이 있었어요. 우체통 앞에서 친구에게 물어봤어요.
"일본 여행 와서 일부러 모스크 찾아가는 놈은 나 밖에 없겠지?"
"그건 당연한 거 아냐?"
한국인 중 일본 여행 와서 일부러 모스크를 찾아가는 사람은 아마 저 밖에 없을 거에요. 이것은 나의 더 슈퍼 울트라 하이퍼 그레이트 모스크 로드. 유라시아 대륙을 넘어 바다 건너 일본까지 이어지는 모스크 로드.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고 웃겼어요. 남들은 이쪽 온다면 시부야, 하라주쿠, 롯폰기 같은 곳 가기 위해 돌아다닐 건데 저는 아무 것도 없는 요요기우에하라역까지 기어와서 고작 간다는 곳이 모스크.
"야, 모스크 가까워지니까 날씨 좋아지고 있어!"
"아니야!"
"이제 우산 안 써도 되잖아! 봐, 내가 모스크나 절 가면 여행 운 좋아진다고 했지?"
친구는 강력히 부정했어요.
"좀좀동화 하나 써줘?"
"어?"
제 블로그를 아는 친구들은 제 블로그 문체를 보고 웃곤 해요. 가끔 그것을 흉내내면서 '좀좀동화'라고 부르곤 해요. 모스크를 가는 길을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즉석에서 좀좀동화 한 편 써주기로 했어요.
"친구가 모스크에 너무 가고 싶어했어요. 모스크라면 반드시 가야한다고 하며 굵은 빗줄기를 뚫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친구의 이런 모습에 알라신도 감동했는지 빗줄기가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라후 아쿠바루데스였어요. 친구는 일본의 모스크는 스고이할 거라고 크게 기대했어요. 요요기우에하라역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하늘 위 먹구름이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뜨거운 햇볕이 쫙 내리쬐었어요. 친구는 하늘을 보며 이것이 아라후 아쿠바루데스까 소리쳤어요. 친구는 드디어 일본 도쿄의 모스크가 가까워지고 있다면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어요."
즉석에서 지은 좀좀동화.
"야!"
"이렇게 여행기에 써줄까? 역사 날조."
"하지 마!"
낄낄 웃었어요.
"그런데 봐. 진짜 날씨 좋아지고 있잖아. 여행 중에 모스크랑 절 많이 가면 간 만큼 운이 엄청 좋아진다니까? 이건 싸이언쓰라니까!"
"뭔 소리야!"
"지금까지 유라시아 대륙 횡단하면서 진짜 이랬다니까? 내가 이야기 안 해줬어?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눈에 띄는 절은 보이는 족족 다 들어갔더니 비엔티안 갈 때 버스가 축지법 쓴 거."
"말도 안 돼."
"이거 과장 아니야!"
친구가 어이없어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자."
"아, 진짜 이거 싸이언쓰인데 안 믿네."
친구는 제 말을 안 믿었어요. 도쿄 자미 모스크를 향해 걸어갔어요.
"모스크다!"
'여기는 터키식 모스크구나.'
보자마자 이 모스크는 터키와 연관이 상당히 많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모스크는 이슬람 학파 및 종파에 따라서 모습이 많이 달라요. 각 지역에 따라 또 모습이 다르구요. 이것은 딱 봐도 터키 가면 엄청나게 많이 볼 수 있는 모스크 건물과 비슷한 디자인이었어요. 터키 가면 바글바글하고 득시글한 모스크 중 제대로 모스크 건물이라 부를 만한 것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생겼어요. 이 모스크는 어떤 식으로든 터키와 크게 관계되어 있을 거였어요. 일본 도쿄 시부야 이슬람 사원인 도쿄 자미 모스크 외관은 터키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다시피 지어대는 모스크 모습과 엄청나게 닮았거든요.
터키 모스크 외관 디자인 특징이 뭔지 궁금한 사람은 터키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사진을 보면 되요. 터키 이스탄불 블루모스크는 이렇게 생겼어요.
위 사진은 2009년 12월 발칸 유럽 여행 중 터키 이스탄불을 들렸을 때 찍은 사진이에요.
미나렛만 봐도 이 모스크가 터키와 매우 크게 연관되어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어요.
'터키는 아주 모스크를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생산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쯤 가면 합리적 의심. 터키가 다른 나라에 모스크 지어준 것 보면 한결같이 이렇게 생겼어요. 공장에서 찍어낸 모스크마냥 거의 다 비슷하게 생겼어요. 터키 최고 수출품 중 하나가 모스크라고 해도 믿을 지경.
우리나라에도 일본 시부야 이슬람 사원인 도쿄 자미 모스크와 아주 비슷한 모스크가 있을 뻔 했어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모스크인 서울 중앙 성원은 1969년 5월 한국 정부의 특별 배려에 따라 약 1500평의 성원건립 부지를 희사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국가가 성원건립 비용을 지원해서 1974년 10월 착공하고 1976년 5월 21일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이에요. 당시 한국 정부가 1500평에 달하는 땅을 모스크 부지로 내놓은 이유는 오일쇼크 때문이었어요.
1967년 3차 중동전쟁까지 한국은 이스라엘의 우방이었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외교는 일본에 관련된 것 외에는 전부 미국이 하는 것을 그대로 쫓아가기에 바빴거든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 일명 6일 전쟁은 세계사에서 큰 의의가 있는 전쟁이에요.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편을 들은 국가들에게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 자원 무기화를 시도한 전쟁이거든요. 당연히 한국은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아랍 국가들로부터 석유 수입에 큰 제한을 당했어요.
그제서야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아랍 및 이슬람권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요. 이런 친아랍, 친이슬람 제스처 중 하나가 바로 모스크 부지 제공이었어요. 한국 최초의 모스크인 서울 이태원 한남동 모스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중동 국가들의 지원으로 건설되었어요.
모스크가 처음 건설될 때만 해도 한국에 무슬림들이 이렇게 많아질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 못 했어요. 그러나 1990년대부터 한국이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무슬림이 엄청나게 증가하기 시작했어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이란에 소련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어요. 여기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지면서 아랍인, 아프리카 무슬림들도 과거와 비할 수 없이 많이 들어왔구요.
이렇게 되자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모스크는 미어터지게 생겼어요. 가뜩이나 낡은 모스크인데 수용인원이 한계치에 다다랐어요. 이때 터키에서 이태원 모스크를 허물고 새로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터키가 자기 돈 들여서 모스크를 새로 지어주겠다고 했고, 우리나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청사진과 조감도까지 다 나왔어요. 이 청사진 및 조감도 같은 것을 보면 일본 도쿄 자미 모스크와 많이 비슷해요. 아주 공장에서 찍어내다시피 하는 터키 모스크 양식 그대로 짓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나 터키 경제 상황이 영 밝지 않아서 그런지 서울 이태원 모스크를 허물고 새로 짓는 계획은 아직까지도 계획 단계에 머무르고 있어요. 새로 짓는다고 일정까지 다 나와 있는데 공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 자체를 모르고, 아는 사람이라 해도 이게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현재 의문이에요. 의문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백지화되었다고 보고 있어요.
도쿄 자미 모스크와 서울 중앙 성원 모습이 크게 다른 것에는 이러한 원인이 있어요. 도쿄 자미 모스크는 터키에서 지어준 것이고, 서울 중앙성원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어준 것이거든요.
아래는 서울 이태원에 있는 모스크인 서울 중앙성원 사진이에요.
아래는 일본 도쿄에 있는 모스크인 도쿄 쟈미 모스크 사진이에요.
"여기 사진 찍기 어렵네."
길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가로수 때문에 모스크 전체 모습이 잘 안 보였어요. 길 건너 모스크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이번에는 너무 가까워서 사진으로 전체 모습을 찍을 수 없었어요.
입구 옆에는 안내문이 적힌 액자가 서 있었어요.
도쿄 자미 모스크의 정식 명칭은 도쿄 자미 & 터키 문화센터 日本 東京ジャーミイ & トルコ文化センター 였어요.
도쿄 자미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어요.
입구에는 터키인 한 명이 앉아 있었어요. 입장료 같은 것은 없었어요.
터키 문화센터답게 터키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어요.
대추야자 무료 시식 코너도 있었어요. 확실히 이슬람이 인심이 좋기는 해요. 그리고 이렇게 이슬람, 무슬림이 인심이 좋은 이유는 이슬람 5대 의무 중 하나인 자카트와 관련 있어요. 자카트는 보통 '헌금'에 비유하나, 번역할 때는 '희사'라고 많이 번역해요.
이슬람 자카트는 기독교의 헌금으로 많이 비유하지만 근본적으로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어요. 헌금 비율에서 기독교 헌금은 명목 수입, 이슬람 자카트는 실수입을 기준으로 한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나, 이런 건 이 둘을 근본적으로 크게 차이나게 만드는 요소까지는 아니에요. 이슬람 자카트와 기독교 헌금에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이유는 바로 방법 차이에요.
이슬람 자카트는 상당히 자의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꼭 모스크에 가서 돈을 내야 자카트가 아니에요. 자기가 불쌍한 사람을 위해 베풀면 그게 자카트에요. 집에 남아 도는 물건을 불쌍한 사람에게 주는 것도 자카트고, 모스크에 돈을 기부하는 것도 자카트에요. 다 똑같은 자카트에요. 방법은 자기 마음대로에요. '불쌍한 사람을 위해 베푸는 것'이면 다 자카트에요. 음식점에서 음식이 남을 것 같아서 굶는 사람에게 남은 음식을 주는 것도 자카트에요. 이게 기독교 헌금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에요. 자신의 실질 수입에서 자기 마음대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그게 다 자카트에요. 이게 자카트의 기본 원칙이에요. 그래서 이슬람권, 무슬림들이 인심이 좋다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들 입장에서는 먹을 것 주고 차 공짜로 태워주고 하는 것 전부 자카트에 해당하거든요.
이슬람 문화에 대해 '인심이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받는 걸 알라의 뜻이라 생각하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면서 괘씸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평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자카트 방법에 있어요.
이 대추야자 시식도 어쩌면 자카트에 해당할 수도 있어요. 개인이 자비 들여서 대추야자 사서 저렇게 놔둔 거라면 자카트에 해당할 거에요.
윗층은 모스크였어요. 모스크를 보기 위해 윗층으로 올라갔어요.
'서울에 있는 모스크보다 규모 더 작아 보이는데?'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태원 모스크인 서울 중앙성원보다 크기가 작아 보였어요. 터키 문화원이 같이 있어서 아래쪽은 서울 중앙성원보다 훨씬 더 잘 꾸며져 있었어요. 서울 중앙성원은 허름한 낡은 상가 같은 느낌이 엄청나게 강하거든요. 서울 중앙성원은 여자 기도실을 제외하고 모스크 전 부분을 거의 다 들어가봤어요. 안에 조그맣게 사무실 같은 것도 있고, 모스크 담장 역할을 하는 곳은 가게들로 들어차 있어요. 그에 비해 일본 도쿄 자미 모스크는 딱 터키 문화원과 모스크의 조합이었어요. 그 외의 것이 없었어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모스크 크기는 서울 중앙성원보다 작아보였어요.
'이거 진짜 터키 모스크네.'
아무리 봐도 이것은 터키 모스크 모습이었어요. 터키가 공장에서 모스크를 찍어내 전세계로 공급하고 있는 거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외관이었어요.
터키 이스탄불 한 시간만 걸어도 이것과 비슷한 모스크 2개는 볼 거에요. 매우 깔끔하기는 했지만 터키를 갔다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인상적이지는 않았어요. 인상적이라면 오히려 서울 이태원 모스크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일본인들한테 서울 이태원 모스크도 관광지로 소개해도 되겠는데?'
농담이 아니에요. 진짜에요. 서울 이태원 모스크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에요. 주로 이슬람권 -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이 잘 찾아가는 관광지에요. 한국으로 여행 오는 무슬림들에게 이태원 모스크 소개해주면 거기 가서 인증샷도 찍고 좋아해요. 이태원 자체가 외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관광지라서 이태원을 잘 찾아가는데 모스크가 있다고 하니 겸사겸사 가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쪽에 할랄 식당도 여러 곳 있고 게스트하우스도 있어서 무슬림 관광객들이 그쪽으로 몰리는 것도 있구요.
그러니 이왕 무슬림들에게 소개하는 관광지라면 일본인들한테도 소개해도 될 거에요. 이태원 구경가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있을 거니까요. 명동에서 버스 타고 이태원까지 바로 갈 수 있으니까 이 버스 노선만 잘 설명해주고 덤으로 거기에 한국 최초의 모스크도 있다고 알려주면 찾아가는 일본인들이 있을 거에요.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어요.
깔끔하고 예뻤어요.
일본 도쿄 시부야 이슬람 사원인 도쿄 자미 모스크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관련이 있어요.
1917년,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혁명이 발생한 후였어요. 당시 러시아령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수많은 무슬림들이 소련의 종교 탄압을 피해 도망갔어요. 소련의 이슬람 탄압은 종교 자체를 박해하던 정책과 더불어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한 튀르크 민족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어요. 그래서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무슬림들이 외국으로 도피했어요. 이 가운데 일부는 일본으로 탈출했어요. 소련의 종교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도망친 무슬림들 상당수가 타타르인이었어요.
소련의 종교 박해를 피해 도망친 무슬림들 중 일부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만주로 이동하거나 정착했고, 그 중 일부는 소규모로 장사를 하며 한국과 일본까지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어요.
소련에 점령된 중앙아시아에서 망명해서 정착한 중앙아시아 튀르크 무슬림들은 여권이 없었기 때문에 타국으로 이주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정부는 이들 소련에서 탈출한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무슬림들에게 보증금 1500엔을 받고 비자를 발급해줬어요. 이로 인해 1920년대에 만주로 망명하던 소련 러시아 카잔주 튀르크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러시아 카잔주의 튀르크인들은 금새 일본 생활에 적응했어요. 일본에 정착한 튀르크인들은 특히 일본의 기후에 매우 만족해했다고 해요.
1922년, 도쿄 대지진이 발생했어요. 이때 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국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미국으로의 이동을 허용해 주었어요. 도쿄에 있는 외국인들은 요코하마항에 정박해 있는 특별 운반선을 쉽게 탈 수 있었어요. 이렇게 미국으로 가는 쉬운 방법이 있었지만 카잔주에서 넘어온 타타르인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일본을 떠니지 않았어요.
처음 일본으로 온 카잔주 출신 타타르인들은 고베와 도쿄에 정착했어요. 도쿄에서 이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은 오오쿠보였어요.
압둘 하이 쿠르반 알리가 일본으로 오면서, 일본에 온 카잔주 출신 타타르인들은 보다 더 강하게 결속하게 되었어요. 일본에 정착한 타타르인들은 1922년 압둘 하이 쿠르반 알리를 대표로 선출해서 '메핫레이 이슬라미' メハッレイ・イスラミイイェ 라는 협회를 결성했어요.
이후 이들 타타르인들은 터키 공화국 국민으로 귀화했어요. 정확히는 망명이라고 해야할 거에요. 이렇게 일본에 정착한 카잔 타타르인들이 대거 터키 국적을 갖게 되자 1953년에 협회 이름을 도쿄 이슬람인 협회 東京トルコ人協会로 개명했어요.
1933년 압두 라시드 이브라히모프 アブドゥルレシド・イブラヒム가 일본에 온 것은 일본에 망명한 카잔 타타르인들에게 제2의 전기가 되었어요. 참고로 압두 라시드 이브라히모프의 정식 이름은 Әптрәшит Ипрағимов 이에요. 왜냐하면 압두 라시드 이브라히모프는 그 이전에 일본에 방문했을 때 많은 일본 정부 관계자들과 만남을 가지며 우호를 다졌기 때문이었어요. 압두 라시드 이브라히모프의 활동 덕분에 일본에 정착한 카잔 타타르인들의 생활은 더욱 개선되었어요.
카잔 타타르인들은 일본에 정착한 후 자녀들이 태어나고 자라남에 따라 일본 정부에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을 신청했어요. 1927년에 일본 정부는 학교 설립을 허용했어요. 일본 정부의 학교 설립 승인이 나자 신오오쿠보에 있는 건물을 임대해서 1928년에 '멕테비 이슬라미예' メクテビ・イスラミイェ 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학교가 개교했어요.
멕테비 이슬라미예 학교 건물의 일부는 예배소로 사용되었으나, 1931년에 토미가야 富ヶ谷에 있는 건물을 매입해서 학교를 이전시켰어요. 멕테비 이슬라미예 학생들은 터키인과 타타르인 교사들로부터 터키어, 타타르어, 영어, 러시아어를 배웠고, 초등학교 과목 전부를 일본어로 공부했어요. 학교에서는 튀르크 민족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연극은 이런 노력의 일환 중 하나였어요.
그 이후, 일본 기업의 협력으로 시부야구에 토지를 매입해서 1935년에 교사가 완성되었어요. 이 교사가 완성되자 토미가야에 있는 학교가 여기로 이전되었어요. 1938년에는 학교 교사 옆 토지에 도쿄 자미 모스크가 건설되었어요.
이후 1986년이었어요. 일본 무슬림들의 종교적,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도쿄 자미 모스크는 낙후되고 노후화된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건설하기로 했어요. 이후 모스크와 학교 소재지는 모스크 건설을 조건으로 터키 공화국에 기부되었어요.
모스크가 철거된 후, 새로 지어진 모스크는 터키 오스만 양식으로 건설하기로 결정되었어요. 일본 이슬람 최초 정착민이라 할 수 있는 카잔 타타르인들이 터키로 망명해서 터키 국적을 취득한 것이 이 결정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어요. 현재 도쿄 자미 모스크 건물을 과거 건물을 철거한 후 2000년 5월에 새로 개소한 건물이에요.
벽에는 예배 시간표가 걸려 있었어요.
한국과 일본의 현대 이슬람 역사, 그리고 양국 수도에 있는 가장 큰 모스크의 역사를 보면 가깝고도 먼 나라에요. 양국 모두 현대 이슬람 역사를 보면 튀르크인, 터키와 깊은 연관이 있어요.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달라도 엄청나게 많이 달라요.
현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이슬람 역사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우방이자 혈맹으로 전쟁에 참여한 터키로부터 시작되요. 6.25 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군인들이 전쟁의 포화로 인해 고통받던 한국인들을 도와주면서 이슬람이 사실상 처음으로 한국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거든요. 이후 한국의 이슬람은 터키의 지원도 있었지만, 1976년 서울 이태원에 한국 최초의 모스크가 건립된 이래 계속 아랍권의 지원을 많이 받고 있어요. 서울 이태원 모스크는 특히 터키의 지원도 있기는 했지만, 터키 입김보다는 아랍 입김이 항상 강했어요. 건설하게 된 이유 자체가 3차 중동전쟁 당시 발생한 오일쇼크 때문이었으니까요. 지금도 라마단 때 모스크를 가보면 아랍국가에서 이프타르 후원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어요.
단, 우리나라 모든 모스크에 아랍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은 아니에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세워진 모스크들은 또 다르거든요. 규모가 안 되면 모스크 하나 지어서 같이 이용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각각의 국가 사람들, 민족이 자기들의 커뮤니티 센터를 겸하는 모스크를 만들어서 운영해요. 그래서 한국에도 방글라데시인 모스크, 인도네시아인 모스크, 파키스탄인 모스크, 우즈베크인 모스크 등이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죄다 그냥 모스크겠지만요.
시작은 둘 다 튀르크인들이지만, 한국은 터키인, 일본은 타타르인들이에요. 그리고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에 있는 가장 큰 모스크는 아랍권과 밀접히 연관된 모스크이지만, 일본 수도인 도쿄에 있는 가장 큰 모스크는 터키와 밀접히 연관된 모스크에요. 어떻게 보면 양국의 수도에 있는 가장 큰 모스크는 아예 족보가 다르다고 봐도 별로 틀린 이야기가 아니에요.
모스크 안으로 머리에 히잡을 쓴 여자 한 명이 들어왔어요.
'관광객인가?'
머리에 히잡을 걸치기는 했지만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게 꽁꽁 싸맨 것은 아니었어요. 여자들이 패션으로 스카프 두르는 것처럼 히잡을 썼어요. 검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 예쁜 여자였어요. 처음에는 관광객인 줄 알았어요. 그 여자도 모스크 안에 들어와서 내부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 찍을 때 적당히 서로 피해주면서 모스크 안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얼굴이 서로 몇 번 마주쳤어요.
'어느 나라 사람이지?'
어떻게 보면 동아시아인 얼굴. 어떻게 보면 외국인 같은 얼굴. 뭔가 상당히 미묘했어요. 일본인이라고 보기에는 일본보다 훨씬 서쪽에 있는 다른 나라 사람 얼굴 같았어요. 그렇다고 외국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동양적으로 생겨서 일본인 같았어요.
'혼혈인가?'
왠지 혼혈 같았어요. 모스크 안에 들어와서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가린 것으로 보아 이쪽에 대해 꽤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아주 꼼꼼하게 잘 두른 것은 아니었어요. 머리 위에 천조각 올려놓은 수준보다야 훨씬 잘 두르기는 했어요. 그러나 진짜 여자 무슬림들이 히잡 두르고 머리카락 가리는 것에 비하면 허술하기 그지없었어요. 예의를 안 갖춘 것도 아니고 예의를 잘 갖춘 것도 아닌 딱 예의를 대충 갖춘다는 정도였어요.
저와 친구, 그리고 정체 불명의 여자 셋이 모스크 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모스크 내부에서 사진을 찍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예배 방향을 알려주는 미흐랍이에요. 도쿄 자미 모스크 미흐랍은 이렇게 생겼어요.
모스크는 2층 구조였어요. 2층은 여자 기도실이었어요.
모스크에서 나왔어요.
모스크 입구에는 모스크 견학시 지켜야할 예절과 주의사항에 대해 적혀 있었어요. 일본 도쿄 시부야에 있는 도쿄 자미 모스크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래요. 기도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경우에는 아침 첫 기도 시간인 파즈르 예배때 열리고, 오전 10시부터 마지막 밤 기도 시간인 이샤 예배때까지 열린대요. 기도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은 기도 시간표를 보면 될 거에요.
주의사항이라면 신발 신지 말고 들어가고, 여자는 머리에 스카프를 써야 하고, 모스크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야 하는 것 정도였어요. 다른 모스크에 들어가볼 때와 다른 점은 딱히 보이지 않았어요.
이제 다시 요요기우에하라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어요.
조용히 일본 도쿄 시부야에 있는 이슬람 사원인 도쿄 쟈미 모스크에서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