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뜨거운 마음 (2011)

뜨거운 마음 - 23 아르메니아 귬리

좀좀이 2012. 6. 13.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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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에서 우리들에게 추천해준 도시는 귬리 Gyumri Քյումրի 였어요. 이름부터 왠지 발음하기 이상해요. 중국 영화 배우 '궁리'도 아니고 '굼리'도 아니고 '귬리'에요. 끝말 잇기에서 만약 상대방이 '귬'으로 끝나는 단어를 말하고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면 바로 이 도시 - '귬리' 때문에 한 번은 받아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제 머리 속에 '귬'으로 끝나는 단어는 생각나지 않네요.


단순히 호스텔에서 좋다고 해서 귬리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어요. 현지인들 말을 100% 믿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거든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현지어에 자신이 있다면 현지인의 말 대 가이드북 및 인터넷 정보를 70:30 비율로 받아들여 정보를 재조합해 판단하는 게 좋고, 현지어에 자신이 없다면 현지인의 말 대 가이드북 및 인터넷 정보를 30:70의 비율로 받아들여 정보를 재조합해 판단하는 게 좋아요. 현지인들은 오히려 유명한 관광지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이유는 다양해요. '그깟 흔해빠진 건물 (교회, 모스크, 절 등) 뭣 하러 봐?', '그 정도 산이라면 우리나라에 많고 많아', '거기 물가 비싸', '거기 사람들 돈만 밝혀. 아주 불친절해' 등등 다양하고 많은 이유가 있어요. 이건 사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현지 거주자들은 맛집이라고, 관광지라고 올라오는 글을 보며 '거기 맛 없고 비싸기만 한 곳인데', '거기를 뭣하러 바득바득 기어가는지 모르겠어. 뭐가 았다고'라고 말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외부인의 평가 기준과 현지인의 평가 기준이 다른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적당히 조합해서 자기만의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게 보면 여행자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는 현지인도 좋다고 하고 외부인도 좋다고 하면 일단 꼭 가보라는 이야기. 귬리가 좋다는 현지인의 말에 론니플래닛을 펼쳤어요.


무려 지도도 있어!


정말 짜증나게도 론니플래닛은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되어 있어요. 아직까지 여행 다니며 가장 믿을만한 것은 일본에서 만든 가이드북을 한국에서 번역해서 만든 것.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여행 가이드를 만들기는 하나, 아직 다양한 지역을 다루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가이드북 중 믿을만한 것은 일본에서 만든 가이드북을 한국에서 번역해 만든 것이에요. 서양인들은 우리들과는 원하는 여행이 꽤 달라서 서양인 말만 믿었다가는 낭패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하지만 카프카스 지역은 이때 일본에서 만든 가이드북을 한국에서 번역해 만든 것이 없어서 그냥 론니플래닛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일본에서 만든 가이드북의 문제는 일본어의 특성상 지명과 인명을 읽기 매우 고약하다는 것. 유명한 예시가 있죠. '마꾸도나루도'.


알지도 못하는 아르메니아어를 교재 구해서 조금씩 공부해가며 되지도 않는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것도 힘들고 피곤한데 영어로 된 책을 보고 싶을 리가 당연히 없었어요. 평소에도 영어로 된 거 읽으려면 일단 짜증이 폭발하고나서 시작하는데 즐거운 여행지에서, 그것도 언어 문제로 고생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영어를 보고 싶을 리는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대충대충 넘겨보았는데


지도가 있다.


론니플래닛은 저처럼 영어만 보면 일단 짜증부터 폭발하고 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를 해 놓은 책이에요. 정말 직관적으로 찍어가며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책. 론니플래닛에 설명이 많고 지도가 나와 있다면 일단 강력히 추천하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지도가 없으면 일단 중요도가 조금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집어넣은 것은 당연히 지도도 없고 설명도 한 쪽이 채 되지 않아요.


게다가 책에는 1988년 지진으로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지만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라고 나와 있었어요. 현지인도 좋다고 하고 론니플래닛에서도 좋다고 하고 정말 성심성의껏 적은 티가 팍팍 나서 여기로 가기로 했어요.


베르니사즈 벼룩시장을 본 후 귬리로 가기로 했어요.


아르메니아라고 모두가 넉넉하고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았어요. 당연히 아르메니아도 거지가 있답니다. 단지 외국인 신변에 위협을 가하지 않을 뿐.


귬리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기차역에 가야 해요. 기차역은 지하철로 갈 수 있답니다. 지하철로 기차역에 가면 주변에 버스정거장이 있어요.


론니플래닛에는 Zoravar Andronik역 근처에 귬리로 가는 버스 터미널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하필 우리가 귬리로 출발하기 3일 전에 기차역 주변으로 버스 터미널을 옮겼다고 했어요. 아...시작부터 너무나 상큼한 시작. 너무 좋아 짜증이 예레반 분수쇼처럼 솟구쳤어요. 론니플래닛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사람들도 이때는 다 조라바르 안드로닉 역 근처에 있다고 했거든요. 버스 터미널 옮긴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까요.


조라바르 안드로닉 역까지 기껏 걸어왔는데 결국은 지하철을 타야 했어요. 덥고 덥고 또 더워서 주변에서 음료수나 하나 사 먹기로 했어요.

"이거 뭐야?"


신기해서 집어들었어요. 음료수의 이름은 '레몬젤라'. 레모네이드 음료수였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패트병 안에 진짜 레몬을 집어넣었어!


갈아넣은 것도 아니고 진짜 잘라 넣은 레몬이 있었어요. 당연히 패트병 주둥이보다 훨씬 컸어요. 억지로 패트병에 우겨넣는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한다면 당연히 레몬이 찌그러지고 제 모양이 아니죠. 이 음료수 속에는 정말 제대로 된 레몬이 들어 있었어요. 제 머리 속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맛도 괜찮았어요. 그냥 레모네이드 음료수보다는 훨씬 나았어요. 이 나라도 그렇고, 조지아도 그렇고 그냥 '레모네이드 주세요'라고 하면 이상한 음료수를 주어요. 특히 레모네이드 중 '보르조미'라는 놈이 있는데 이것은 요주의 음료. 만약 식당에서 레모네이드를 시켰는데 '보르조미'를 주면 그냥 콜라 달라고 하세요. 절대 권장하는 맛이 아니에요. 정말로 매우 이질적인 맛. 이게 왜 레모네이드인지조차 이해가 안 되는 맛이에요. 색도 보라색, 초록색, 체리색 등이 있는데 왜 레모네이드가 그런 색이 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무식하거나 영어를 모르거나 외국인 골탕먹으라고 주는 게 아니라 진짜 '레모네이드'라고 하면 '보르조미' 주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보르조미'라는 음료수 자체가 병에 '레모네이드'라고 적어놓았거든요. 그런데 이건 정말 탄산수에 레몬 집어넣고 약간 단맛이 첨가된 정도라서 맛도 깔끔하고 좋았어요.


예레반 기차역 뒤쪽 시장 쪽으로 가면 버스 터미널이 있어요. 버스 터미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장거리 합승차 (마슈르트카) 터미널이에요. 우리가 '버스'라고 말하는 커다란 버스는 없어요.

귬리행 버스는 1500디람. 가격은 생각보다 매우 저렴했어요. 아르메니아 돈은 대충 곱하기 3 하면 우리나라 돈이므로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4500원.


내가 지금 아스팔트 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거야, 오프로드를 달리는 거야


차 상태는 정말 안 좋았어요. 도로 상태는 차 상태와 맞먹을 만큼 안 좋았어요. 그래서 몸과 머리가 정신없이 흔들렸어요. 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머리가 신나게 흔들려서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어요. 무슨 자동차에 장식으로 달아놓는 용수철 인형처럼 몸과 머리가 신나게 흔들리는데 현지인들은 이런 길에 적응이 되었는지 별로 흔들리지 않고 차를 잘 타고 있었어요.


게다가 제 옆에 앉은 아르메니아 청년은 이 승합차를 타기엔 키가 너무 컸어요. 무례해서 다리를 쩍 벌리고 타는 게 아니라 정말로 각잡고 앉는데도 다리가 길어 어쩔 수 없어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그 청년 때문에 좁은 자리가 더 좁아져서 완벽히 각을 잡고 앉아 있어야 했어요.


차가 하도 낡고 안 좋아서 가뜩이나 속도가 안 나오는데 오르막에 들어가면 속력이 확 줄어버렸어요. 기사 아저씨는 나름 열심히 악셀러레이터를 밟아대시는 것 같았지만 현실은 빌빌거리며 오르막길을 기어올라가기.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빌 정도는 아니었으나 워낙 많이 흔들리고 속력이 느려서 정신이 없었어요. 정말 다행인 것은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빌어야할 구간은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한참 가다 휴게소 같지도 않은 곳에 차를 세웠어요. 사람들이 잠시 바람을 쐬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차에서 내렸어요. 기사 아저씨는 보닛을 열었어요. 아마 엔진을 식히기 위해 열어놓은 것 같았어요.

"저거 봐!"


둘 다 할 말을 잃었어요. 군용 트럭이 스패너 하나로 다 해체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진짜로 왠지 스패너와 드라이버 하나씩만 있으면 다 뜯어버릴 수 있게 생겼어요. 보닛 안이 이렇게 텅 빈 듯 보이는 차는 처음이었어요. 저렇게 생긴 차가 아직까지 굴러간다는 것 자체가 소련 과학의 힘, 소련 기술의 승리란 말인가! 대체 무슨 차 내부가 이렇게 단순한지 그저 한없이 궁금할 뿐이었어요.

휴게소에 세워져 있는 다른 차. 이 차도 낡기는 우리가 탄 승합차 못지 않게 낡았어요. 차가 굴러간다는 것을 떠나 차 문이 제대로 열린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


오후 4시 반. 드디어 귬리에 도착했어요. 귬리가 가까워질수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다행히 귬리에 도착해 차에 내렸을 때에는 빗방울이 거의 떨어지지 않아서 돌아다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때 우리 말고 제 옆에 앉았던 키가 큰 아르메니아 청년도 같이 내렸어요. 아르메니아 청년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냐고 했고, 우리는 시내로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자 청년은 우리를 시내에 있는 시장까지 데려다주고 자기 갈 길을 갔어요. 왠지 자기 때문에 제가 칼같이 각을 잡고 계속 차를 타야했던 게 나름 미안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리를 걷는데 한여름임에도 왠지 스산한 느낌이 우리들을 감싸안았어요. 무언가 이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다지 크게 볼 것이 없는 것은 우리가 아직 Azatutyan Hraparak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어요.

저것이 반전의 상징인가?


저것을 넘어가면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은 지진 희생자 추모비.

지진으로 무너진 성당. 아직도 복원중인 거 같은데 복원이 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 자체가 의문.

그 당시 지진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어요. 교회가 흔들려 지붕이 날라간 거에요.

무너진 교회 앞에서 본 지진 희생자 추모비. 지진 희생자 추모비는 꽤 잘 만들었어요. 이건 볼 만 했어요. 정말 주변 보지 않고 오직 이것만 본다면요.


교회를 넘어가자 Azatutyan Hraparak이 나왔어요.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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