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기/오늘의 잡담

오늘의 잡담 - 후기

좀좀이 2017. 8. 14. 18:20
728x90

어제 새벽 4시에 카페에 가서 오후 2시 20분쯤 집으로 돌아왔다. 몇 시에 잤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오후 8시쯤 잤을 거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9시 조금 넘어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어. 왜 여기까지 흘러갔는지도 모르겠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니 이런 해괴한 일이 생기네.


나중에 소설 아이디어나 소재로 써먹을 수도 있으니 정리는 잘 해놔야겠다.


7월 16일. 


서울로 올라온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때 지인분께서 외국 여행중이었다. 지인분과 카톡으로 대화하며 의정부역으로 걸어가는데 인터넷 속도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고, 거기에서 '시간 차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외국에서 지낼 때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하다보면 참 웃긴 경험을 하곤 했다. 내가 있는 곳 통신상황이 별로 안 좋다보니 묘하게 양쪽에서 시간차가 발생했다. 그래서 대화가 나중에는 서로 엉키곤 했다. 전화통화도 그랬고 채팅도 그랬다. 그래서 내가 이상해진 거 아니냐는 오해도 여러 번 받았다. 특히 송신보다 수신에서 이 문제가 컸기 때문이었다. 양쪽이 둘 다 느리면 상관없겠지만, 나의 수신만 유독 느려서 이런 일이 발생하곤 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싶으면 상대방들에게 지금 내쪽에서 수신에 문제 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자 오해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전화통화가 어떤 식으로 꼬이냐하면 처음에는 별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내 수신이 느리기 때문에 내가 한 말은 상대방이 바로 듣는데 나는 상대방이 한 말을 조금 늦게 듣는다. 이 묘한 시차가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순간 확 꼬이는 상황이 발생한다. 상대방이 두 문장을 말했고, 앞 문장에서 내가 '예', 뒷문장에서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하는 상황인데 나는 첫 문장만 들은 상태라 '예'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상대방은 앞문장은 내가 대답을 안 하고 뒷문장에 '예'라고 대답했다고 생각해서 급 당황. 이때부터 대화는 걷잡을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지인분께서도 이런 것을 외국 계실 때 겪어보았다고 이야기했다. 서로 공감하면서 이야기를 하다 의정부역에 도착했다.


'시간차를 소재로 소설을 써볼까?'


문득 이것을 공동집필로 쓰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음악은 합주가 있는데 소설은 공동집필이 없을까? 파트를 나누어서 쓰는 경우야 있지만 왜 동시에 쓰는 건 안 할까?


'시차'를 소재로 글 쓰기, 합주 같은 공동 집필 도전. 이 두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며 광화문으로 갔다.


친구가 제주도 돌아가는 길이라고 해서 광화문에서 만나 같이 김포공항으로 가며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구가 일단 소설 같이 써보자고 했다. 공항에서 소설 스토리와 설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는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7월 17일


저녁에 친구와 소설 설정 적은 것을 교환했다. 그리고 이날 진심 친구 때문에 화났다. 내가 짠 설정 중 카카오톡으로 메시지가 날아오는 부분이 있었는데 집요하게 '카카오톡'에만 집착하며 그건 안 되며 새로운 어플이 자동으로 폰에 깔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구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안 써보아서 이 부분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트집을 위한 트집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 부분에 계속 집착하며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화가 났다. 무조건 스마트폰에 새로운 메신저 어플이 깔려야 한다고 우기고 보기 싫어도 강제로 보여져야 한다고 우기니 정말로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 이게 왜 나를 열받게 만들었냐 하면 '전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안 해보고 단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자고 트집잡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항에서 같이 이야기하며 기본적으로 설정했던 분량과 스토리에 친구 의견을 대입해보면 절대 그 분량과 스토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에 강제로 맨날 이상한 장면 뜬다고 해봐라. 게다가 메시지 오는대로 무조건 다 확인하는 사람이라면 신경이 상당히 예민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람이 미치지. 결정적으로 이러면 선악 구도가 초장에 너무 빨리 갈려버리고 절대악과 절대선이 되어 버린다. 이러면 누가 읽어. 더욱이 둘이 쓰는데 이렇게 되면 비중 배분도 완벽히 무너져버린다.


이것이 설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 이 망할 '메신저'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이 나지 않았다.


내가 하자고 한 것이니 친구 설정대로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친구 설정을 따라갈 경우 분량을 잘 뽑아야 중편이었다.


추리 소설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추리 소설에 처음부터 범인이 나오고 범인이 자기가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는지까지 다 이야기해준다. 그 다음에 탐정이 나와서 추리를 시작한다. 이런다고 꼭 이 스토리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 '추리 과정'이라는 장르 대신 범죄자와 탐정의 내면을 묘사하면 되니까. 그런데 절대악과 절대선이 구분되어버린다면 소설에서 인물의 내면 묘사가 주는 효과 역시 크게 반감된다. 가뜩이나 둘 다 1인칭으로 쓸 건데.


'전체적 흐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카카오톡은 본사에 로그 남고 회사가 개인을 얼마나 감시하는 줄 아냐' 등등 소설에서 정말 무의미하고 가장 쓸 데 없는 걱정에 얽매여서 그거에만 집착하며 새로운 메신저가 소설에 나와야 하며 그것으로 메시지가 올 때마다 인물은 메시지 꼭 확인하고 메시지는 자동재생되며 죽어도 안 꺼져야 한다는 것에만 집착할 뿐이었다. 그러면 전체 스토리 어떻게 할 거냐니까 그건 묵묵부답. 오직 저 메신저. 게다가 친구 설정대로 간다면 이 망할 메신저로 메시지 받는 역할은 내가 써야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둘이 같이 쓰기로 했던 작법에서 엄연한 내 영역 침범.


소설은 이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영원히 무기한 보류. 아마 저건 나 혼자 쓰게 될 거다. 그냥 같이 쓰는 것 포기했다. 내가 세운 설정은 나중에 혼자 쓰던지 다른 사람과 같이 쓸 생각이다.


'이래서 소설 공동집필을 안 하는 건가?'


이해가 되었다. 파트를 나누어서 쓰는 구성으로 쓰는 경우는 있지만 아예 배역을 나누어서 같이 쓰는 경우는 왜 없는지 알 거 같았다. 몇 가지 어려운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서로 의견이 안 맞으면 '확 혼자 써버릴까'라는 생각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그래서 중재 및 조율 겸 총괄 역할이 필요한데, 이 역할의 말에 작가들이 절대 복종할까?


왜 배역을 나누어서 쓰는 소설 작법은 존재하지 않을까? 기껏해야 옴니버스 구성으로 끝날까?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점. 왜 나는 나의 이 공동집필 작법을 제대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전달하지 못할까? 작법 중 느낌과 감각으로만 존재하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부분이 확실히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7월 18일


중국 다녀온 친구 A와 대화를 나누었다. 친구와 저런 일이 있어서 도저히 같이 못 쓸 거 같다고 하자 A는 내게 그냥 혼자 쓰라고 했다. 나도 그래야겠다고 했다. 나중에 같이 쓴다고 하면 이야기 새로 하나 짜면 되는 거고, 내가 구상한 것은 그냥 나 혼자 쓰든가 다른 사람이랑 쓰든가 해도 상관없었다.


A는 내가 쓴 판타지 소설을 읽더니 3인칭이라고 했다. 얘는 대체 무슨 말이지? 하여간 여기서 또 충격. 자기도 이건 설명하기 힘드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A가 헛소리할 친구는 아닌데 왜 내 소설을 보고 3인칭이라고 하지?


7월 21일


오늘의 잡담 글에 A가 내 소설을 3인칭 같다고 썼고, 이때부터 지인분과의 시점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궁금한 것은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에서 궁극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이고 어떤 것이 1인칭 시점의 극단적 모습이냐는 것이었다.


지인과 시점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는 별개로 여자친구와 1인칭 시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A가 잘못 보아서 3인칭 같다고 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A가 3인칭으로 보았냐는 의문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돌았다.


8월 5일


드디어 1인칭 시점이 왜 3인칭 시점과 다른지 그동안 내 안에 있던 것을 정리해냈다.


1인칭 시점은 '화자 '나' = 이야기 = 세계'였다. 참 별 거 아닌데 이 말로 그간 감각적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깔끔히 정리해낼 수 있었다. 내 글에서 어떤 부분이 3인칭처럼 보이는지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8월 6일


1인칭 시점에 대해 정리가 되자 궁금한 것이 생겼다. 1인칭 시점이 아닌 것은 3인칭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인과 대화하던 중 2인칭 소설도 있다고 지인이 알려주었다. 지인은 2인칭이 가장 폐쇄적인 방식이라 드물게만 쓴다고 알려주었다.


인터넷을 뒤져서 '2인칭 소설'이라는 것의 몇 단락, 그리고 소설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그리고 내 소설 써놓은 것을 한 번 바꾸어보았다.


여러 문제가 있었다. 기준이 매우 혼동스러웠다. 내 옆에 항상 너가 있어야 한다는 문제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어보였다. 더 나아가 대체 2인칭 시점이 존재한다면 1인칭 관찰자 시점과 다른 점이 뭐냐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 핵심적인 문제들이었다.


8월 7일


새벽에 2인칭 시점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A가 내 2인칭 시점 아이디어를 보고 흥분해서 전화를 걸어왔다. 엄청나게 떠들었다.


하지만 영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글을 쓰려고 하면 계속 기준이 매우 혼란스럽다는 문제가 있었다. 왕래발착 동사는? '나'로 표현되는 화자가 혼자 있는 경우는? 어떤 장면도 다 묘사가 가능해야 하는데 절대 표현이 안 되는 것이 몇 있었다.


이날, 나는 인천을 갔다.


8월 8일


인천에 있는 24시간 카페에서 밤을 새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간석역으로 걸어가야 했다. 그런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간석역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주안역으로 가기로 했다.


주안역으로 걸어가다 횡단보도가 하나 나왔다. 날이 덥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데 땀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득 2인칭 시점에 대해 떠올랐다. 뭘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안정적으로 기준을 잡고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주안역으로 가고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순간 거울이 떠올랐다. 그거라면 되겠어.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주안역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2+1 음료수를 구입해 마셨다. 왠지 될 거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디어를 글로 정리하지 않고 골아떨어졌다.


8월 9일


카페에 갔다. 내가 항상 앉는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른 자리에 앉았더니 집중이 참 안 되었다. 그래서 원래 쓰려고 했던 소설은 한 글자도 못 쓰고 계속 머리에 맴돌던 그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날 떠오른 아이디어를 글로 정리했다. 어디까지 거울에 비추어볼 것인가. 계속 의문이었다. 죽어도 못 바꾸는 것이 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답이 없었다.


8월 10일


카페에 갔다. 내가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았다. 순간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의미'에의 집중. 8월 6일부터 계속 이 문제를 고민하며 '본질적 의미에의 집중'을 위해 노력했다. 정말 안 풀릴 것 같은 난제가 드디어 풀렸다.


A에게 이거 어떻냐고 물어보았다. A는 어지간하면 당장 내 아이디어 내리라고 했다. 나중에 아이디어 털리고 후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A가 사용하는 표현이 이상했다. 단순히 흥분이 아니라 뭔가 이건 돈 된다는 느낌이 들어 있는 표현이었다.


A가 보고 열광했다. 자기랑 이거 쓰는 방법 같이 연구하고 글로 써보자고 했다.


머리 속으로 내 여행기, 아이스크림 먹고 쓴 후기 등을 다 바꾸어보았다. 바꿀 수 있었다. 그래서 A에게 자신있게 이 방법으로 어떤 글이든 다 쓸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8월 11일


친구 말대로 2인칭 시점에 대한 글을 다 내렸다. 같이 해보자고 해서 내렸다. 사실 더운 여름날의 잡생각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글을 쭉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그거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는 건가 싶었다. 사실 5일간 이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이제 그 두통에서 해방이었다.


8월 12일


'당신은 그것을 찾을 것입니다.'


영문 위키로 2인칭 시점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았다. 바로 저 문장. 만약 저게 소설에 나온다면 저건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8월 13일


자정 너머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카페에 갈까 말까 망설이며 바닥에 앉아 있는데 저 문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만약 내 정의가 맞다면 그 정의에서 벗어난 것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예전에 제4의 벽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도대체 저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또 기적처럼 여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답을 도출해냈다.


글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일까? 2인칭 시점에 대한 글을 전부 내려버렸으니 그 글을 제대로 본 최소한 4명은 그 글을 이해할 수 있겠지. 맞았든 틀렸든 간에.


주변의 반응은 이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며 왜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2인칭 시점때와는 정반대였다. 아주 무의미한 것이라는 반응. 시점 같은 것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글 자체를 잘 쓰는 것에 집중하라는 조언.


집에 돌아와서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쓰고 이제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8월 14일


일어나서 전날 정리하던 과정에서 의문이 들었던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 문제만 나 스스로 명쾌하게 답을 내린다면 드디어 해방이었다.


왜 '작가가 만든 가상의 독자'는 가장 마지막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점이 낮아질 수록 표현이 안 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시점이 올라갈 수록 표현이 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시점이 올라갈 수록 새로 등장하고, 기존에 있던 것도 보다 커진다. 예를 들어 1인칭 시점 화자 '나'가 3인칭 시점 등장인물 '그'가 될 때 묘사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진다.


마치 미분해서 얻은 도함수를 부정적분하면 맨 마지막에 알 수 없는 적분상수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일단 '작가가 만든 가상의 독자'는 기본적으로 3인칭 시점부터 등장이 가능하다. 3인칭 시점부터 그 위로 계속 등장이 가능하다. 그러면 가장 마지막에 나오면 안 되는 걸까?


3인칭 시점에 등장하는 경우와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았다. '작가가 만든 가상의 독자' 형태가 같다면 어제 내 생각에 틀린 부분이 있는 것이고, 다르다면 맞는 거다.


달랐다. 3인칭 시점 위로는 '작가가 만든 가상의 독자' 또한 복수로 나온다.


그러므로 4인칭 시점으로 보는 것이 맞았다. 등장 가능한 지점은 3인칭 소설부터, 그리고 3인칭 소설에서는 하나만, 그 이상에서는 여럿으로 나오므로 맞았다. 작가가 3인칭 소설에서 여럿 만들어놓고 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의미없다.


한편으로는 왜 합주 같은 공동 작법은 없는지, 왜 내 공동 작법에 대한 구상을 다 말로 표현해낼 수 없는지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내 공동 작법에서 줄거리는 하나의 선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이었다. 이것을 정확히 표현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 역시 어떻게든 선 하나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었고, 그러면 할 이유가 없었다. 싸움 나기만 좋고 말이다. 왜냐하면 만약 선 하나를 놓고 각각 인물을 잡아서 글을 쓴다면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 흉내내면 될 일이니까. 물론 그래도 각각이 배역을 맡아서 쓴다면 각 인물의 특징이 확 살아나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내가 상상하던 것은 '세계의 흐름'이었다. 이것이 표현이 안 되고 어떤 식으로 소설이 완성되어야할지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이 전달이 안 되었던 것이고, 나조차도 나중에는 거기에 얽매이게 되었다.


내게 처음부터 - 소설 공동집필 아이디어 단계부터 마지막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영감을 주었던 것은 1976년 영화인 The Message 라는 영화다. 이 영화 솔직히 재미는 없다. 오죽하면 내가 여자친구에게 국제법 개정해서 전쟁하기 전에 저 영화 꼭 3번씩 쉬지 않고 보고 전쟁 시작하라고 하면 전쟁 자체가 없어져서 세계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영화가 엄청나게 길다. 그리고 내가 저 말을 한 이유는...보면 안다. 이왕이면 아랍어 버전으로. 207분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볼 수 있다. 저 영화가 왜 충격적이냐하면...


영화인데 주인공이 안 나와!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진짜 보고 충격이었다. 어떻게 주인공이 한 번도 안 나오냐. 물론 사도 무함마드를 영상에 나오게 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찍은 것이기는 한데, 그 기법을 보며 참 감탄했다. 얘들이 어디 끝까지 무함마드 옷 끝쪼가리 하나라도 안 나오게 하나 어디 한 번 보자 하고 거진 세 시간 동안 참고 보았는데 진짜 안 나오더라. 그런데 또 희안하게 사도 무함마드가 그려지기는 했다.


진짜 와 진짜 어떻게 이렇게 영화를 만드나 감탄했다. 찍기는 찍어야겠고 주인공인 사도 무함마드는 절대 나오면 안 되고. 하여간 엄청나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영화 보면서 참 괴롭기는 했지만 정말로 너무 인상적이었다. 줄거리 뻔히 다 아는데 끝까지 주인공이 나오나 안 나오나 지켜보았고, 정말로 끝까지 안 나왔던 영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