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대로 일단 중앙역으로 갔어요.
"여기 내가 처음에 왔던 역이잖아!"
수수께끼는 거의 다 풀렸어요. 서울에 영등포역과 서울역이 있는 것처럼 여기도 중앙역과 아침에 내린 휑한 역이 있는 것이었어요. 만약 여기를 다시 오지 않았다면 귀국해서도 왜 그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지 계속 고민했을 거에요.
중앙역에서 나오니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어요. 굳이 사진으로 찍어온 민박집 가는 길을 보지 않아도 대충 찾아갈 수 있었어요. 민박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눌렀어요.
"살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속으로 외쳤어요. 설마 쫓아내겠어. 지금이 성수기여야 맞기는 하겠지만 한국에서 체코 오는 것은 그다지 성수기도 아니에요. 해외 여행은 국내 여행과 달리 방학이 성수기인데 지금은 4월 12일. 중간고사로 정신없을 때였어요.
예약도 하지 않고 온 거라 민박집 주인 아저씨께서는 당황스러워 하셨어요. 급히 방이 있나 확인을 해 보시더니 지금 당장은 자리가 없지만 오늘 나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따 저녁에 침대를 줄 수 있다고 했어요. 당연히 좋다고 했어요. 앉아서 민박집 컴퓨터로 인터넷 하며 노는 것이 밖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덜 피곤하니까요. 몇 시간만 어떻게 버티면 그렇게 갈구하던 침대에서 누울 수 있었어요.
"수건과 비누는 제공해 주나요?"
"아니요. 그건 개인 것 쓰셔야 해요."
주인 아저씨께서는 제가 여기에 민박 예약도 하지 않고 어느 이상한 역에서 내려서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 짐끌고 돌아다녔다고 말했어요.
"아...홀레쇼비체에서 내리셨구나! 거기로 가는 경우도 있어요."
완벽히 풀린 수수께끼. 제가 아침에 내린 역은 홀레쇼비체역 (Hlavní Holešovice)이었어요. 원래 중앙역에서 내려야 했는데 너무 깊게 잠들어서 중앙역은 지나치고 홀레쇼비체에서 내린 것이었고, 그 외국인이 다급히 저를 깨운 이유는 아마 그 외국인이 중앙역을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주인 아저씨께서는 정말 힘들고 배고프시겠다고 하시며 컵라면 하나를 끓여주셨어요. 컵라면이 너무 잘 넘어갔어요. 게다가 다음날 저와 같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사람들이 또 있기 때문에 공항에는 그 사람들과 같이 가면 된다고 알려주셨어요. '무사귀국'이라는 최종 목표를 90%까지 달성한 느낌이었어요.
라면을 다 먹고 돈을 지불했어요. 돈을 지불하자 주인 아저씨께서는 장부에 기입하시고는 제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주인 아저씨께서 들고 오신 것은 프라하 지도였어요.
"프라하 전에 오신 적 있으세요?"
"예. 전에 와서 구시가지는 다 봤어요."
"음...그럼 1성채 가보시겠어요?"
주인 아저씨께서는 지도를 펼치시고는 프라하 관광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셨어요. 제가 지난번에 와서 구시가지를 다 보았다고 하자 제 1성채를 다녀오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1성채는 비셰흐라드 (Vyšehrad)에요. 한때 프라하성보다 오래된 성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연구 결과 프라하성보다 나중에 지어졌다는 설이 유력해졌어요. 여기를 가는 방법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3번 트램을 타고 가는 것이었어요.
비셰흐라드를 보러 민박집에서 지도를 들고 나왔어요. 지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환전을 조금만 했어요. 이 당시 환율은 1USD 가 20코룬 정도였어요.
이건 따뜻하다 못해 더웠어요. 바츨라프 광장과 그 주변 거리에서 맥주를 아무렇지 않게 우리나라 거리에서 음료수 팔듯 팔고 있었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맥주와 소세지를 먹으며 놀고 있었어요.
"맥주 5한 잔 주세요."
가격도 비싸지 않고 체코 와서 맥주 한 잔 안 먹고 가면 무언가 섭섭할 것 같아서 맥주 제일 작은 잔으로 한 잔 주문했어요.
"이건 정말 많은데?"
거품을 잔뜩 만들어서 술을 조금만 주는 게 아니라 정말 잔을 맥주로 꽉꽉 채워주었어요. 게다가 제일 작은 잔이 500cc였어요. 정말 맥주 양을 보니 너무 아름다웠어요. 우리나라에서 시키는 맥주 500cc보다 양도 더 많고 맛은...우리나라 맥주와 비교하는 것은 이 맥주에 대한 극악한 모욕을 주는 행위였어요. 맛도 좋고 양도 많고 참 좋았는데 한 가지 매우 불편한 것이 있었어요. 컵 크기는 우리나라 팝콘 컵 크기였어요. 생긴 것도 영락없는 팝콘 컵. 그런데 컵이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단단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플라스틱 큰 컵이었어요. 단단한 부분이라면 오직 테두리 뿐이었어요. 여기에 맥주를 500cc 부어주니 다 마시기 위해 근성이 필요했어요. 트램에 들고 타는 것은 당연히 안 되었구요. 가볍게 마시고 트램을 타고 싶었는데 솔직히 가볍게 마실 양은 아니었어요. 생각 없이 시간 때우며 느긋하게 마실 양이지 입가심하려고 마시는 음료수캔처럼 마실 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워서 근성으로 다 마셨어요. 다 마시니 배가 뽕뽕해지는 기분이었어요.
맥주 500cc를 급히 마시고 3번 트램에 올라탔어요. 얼굴에 열이 확확 올라왔어요.
"비셰흐라드 여기에서 내려요?"
"노, 노."
앞 좌석에 앉아 계신 현지인 할머니께 비셰흐라드 내리는 정류장을 여쭈어 보았어요. 할머니께서는 계속 아니라고 하셨어요. 분명 창밖에 비셰흐라드로 보이는 건물이 보이고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길도 보이는데도 아니라고 내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할머니 말씀만 믿다가 종점에 내렸어요...
지도까지 보여드리며 길을 물어보았는데 왜 종점에서 내리라고 하셨지? 정말 미스테리. 내가 그렇게 미웠나? 어쨌든 표를 다시 구입해 아까 제가 보아둔 정류장에서 내려 성을 향해 걸어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아까는 모아이, 이번엔 고양이.
모아이 조각을 보았을 때도 왜 모아이 조각이 거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고양이 조각이었어요.
올라가는데 얼굴이 식는 것이 느껴졌어요. 너무 더워서 이마를 계속 훔치며 땀을 닦아야 했어요.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성당. 멀리서 보았을 때 새까맣게 탄 것 처럼 보였던 성당 앞에 도착했어요.
적당히 걷다 쉬다 하면서 성을 돌았어요.
혼자 성을 돌려고 하니 심심해서 괜히 봄이 느껴지도록 사진을 찍어보았어요.
망했어요...확실히 사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
비셰흐라드에서 보는 프라하의 모습은 앞에서 본 프라하의 모습들과는 꽤 다른 느낌이었어요.
비셰흐라드에서 내려와 걸어서 구시가지까지 가기로 했어요. 다음 목표는 바로 스트라호프 수도원. 여기를 못 갔기 때문에 여기를 가 볼 생각이었어요.
강을 따라 걷는 거라 방향을 잃고 말고도 없었어요. 이렇게 철교가 있어서 길을 건널 수 있었어요.
철교에서 프라하성을 찍었어요. 이제는 반대쪽을 찍을 차례. 그런데 이 다리가 기차 선로라서 다리 위를 지나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다리를 다 건너 반대쪽에서 다시 올라갔어요.
역시 모델이 좋으니 사진을 잘 못 찍어도 그럭저럭 볼만하게는 나와주었어요.
건축 디자인으로 상을 탔다는 건물. 이 건물을 보고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으로 식당에 들어갔어요. 웬만해서는 술을 또 먹고 싶지 않아 콜라와 닭을 구운 요리를 시켰어요. 콜라가 먼저 나왔어요. 콜라를 다 마셨는데도 음식이 나오지 않았어요. 이건 식당 주인의 농간이 아니라 너무 덥고 목이 말라서 콜라가 나오자마자 다 마셔버렸기 때문이었어요. 정작 음식이 나오자 마실 것이 없었어요.
"맥주 한 잔 주세요."
식당 주인은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음식을 먹는데 맥주를 안 마시냐?'라는 표정을 지으며 맥주를 가져다 주었어요. 역시나 500cc. 닭고기 요리도 양이 엄청나게 많았고 맥주도 양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정말 맛있게 먹었지만 나중에는 남기기 싫어서 꾸역꾸역 먹었어요.
다 먹고 나서 스트라호프 수도원을 향해 갔어요.
나는 왜 이 공원에 있는가?
분명 스트라호프 수도원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엉뚱한 공원에 들어와 버렸어요. 날이 좋아서 그런지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둘 다 큰 영향을 주었는지 공원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놀고 있었어요. 사진 속에서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유는 제가 사람이 별로 없는 쪽을 찍은데다 이 공원이 너무 커서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었어요.
공원을 헤매다 저녁밥을 먹기 위해 민박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민박까지 굳이 트램을 탈 필요도 없었어요.
아침에 건넜던 카를교를 다시 건넜어요.
민박집에 돌아가는 길에 우체국이 보여서 들어갔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우체국이 문을 열었고, 업무도 정상적으로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체코 우표를 다시 샀어요. 이 커다란 우체국 - 전에 프라하 왔었을 때에도 갔던 그 우체국은 자정부터 22시까지 휴일 없이 근무한다고 했어요.
민박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이 생각났어요.
수건과 샴푸, 비누는 자기 것 쓰셔야 해요.
전날 일을 잘 생각해 보았어요. 장소는 부다페스트역. 후배에게 저는 이제 한국 들어가니 아마 후배에게 더 필요할 거라고 샴푸와 비누를 전부 다 주었어요.
고작 하룻밤...샴푸도 비누도 없어!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반드시 해결해야 했어요. 얻어쓸까 했지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여기에서 샴푸와 비누 모두 사는 것은 돈이 아까웠어요.
샴푸냐, 비누냐, 그것이 문제로다!
샴푸를 사기로 했어요. 다음날 비행기도 타야 하는데 샴푸로 머리를 감는 것이 비누로 머리 감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어요. 샤워를 샴푸로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았구요. 그래서 비누는 과감히 포기하고 샴푸를 샀어요.
민박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고 쉴까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이렇게 정신상태가 해이해져서는 안 돼!'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어요. 열흘 야간 이동도 해냈는데 그까짓 거 아침부터 '조금' 걸었다고 이렇게 침대 위에 뻗어버리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수건을 들고 샤워를 하러 갔어요.
샴푸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어요. 샴푸로 몸을 씻으니 온몸이 미끌거렸어요. 어쨌든 샤워를 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전부 풀렸어요...라고 믿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나갔어요.
밤에 혼자 갈 곳은 바로 비셰흐라드. 비셰흐라드에서 프라하 야경을 볼 생각이었어요.
어?
어? 아까 못 보던 건데?
어?!
트램을 잘못 탔어요. 이것은 전적으로 저의 실수. 철로를 따라 걸어갔어요.
"그냥 프라하성이나 가자."
프라하성까지 다시 걸어 올라갔어요.
프라하성에서 본 프라하 야경. 프라하성을 담은 프라하 야경이 예쁘지 프라하성에서 본 프라하 야경은 확실히 별로였어요.
저 하얗게 빛나는 건물이 바로 그렇게 가고 싶었지만 길을 못 찾아 못 간 스트라호프 수도원이에요.
돌아오는 길에 카를교에서 야경을 찍었어요. 역시 프라하 야경은 프라하성이 들어가야 제 맛이었어요.
민박집까지 걸어서 돌아온 후, 바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어요. 침대에 눕자 뼈을 꽉 움켜쥐고 있던 모든 근육들이 마치 철봉에서 매달리다 힘이 빠져 떨어질 때처럼...딱 그 느낌을 신경들에 전해주며 푹 퍼져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