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복습의 시간 (2016)

복습의 시간 - 55 중국 명절 단오절 둔황에서 란저우 가는 기차

좀좀이 2016. 11. 2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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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를 치고 가방에서 저녁거리를 꺼내었어요. 저녁거리라고는 아까 구입한 도넛과 기차역에서 구입한 짝퉁 초코파이와 짝퉁 카스타드. 비닐 껍질은 비닐봉지에 담으며 계속 까먹었어요. 적당히 잡담하며 과자를 까먹고 있는데 달이 떴어요.


2016년 라마단 초승달


하늘에 뜬 달은 초승달. 라마단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었어요. 저 초승달을 무슬림들 속에서 바라보았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둔황에도 회족들이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슬람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어요. 기껏해야 할랄 마크가 붙어 있는 식당 정도였어요. 모스크도 시내에 하나 밖에 없었고, 특별히 이슬람 색채를 느껴볼 수 없었어요. 만약 쿠차나 카슈가르에서 저 초승달을 보았다면 느낌이 정말 달랐을 거에요.


'벌써 1년인가.'


작년 이맘때에는 인도네시아 여행중이었어요. 그때도 라마단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인도네시아 여행 일정을 그렇게 짰어요. 인도네시아 여행을 마치고 태국으로 넘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라마단이 시작되었거든요. 작년 이맘때에는 그믐이었는데 올해는 초승달이 떴어요. 그러고보면 그 1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때는 제가 이렇게 중국을 여행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구요.


둔황 저녁


점점 하늘이 어두워져갔어요.


"별 떴다!"


주변에 불빛이라고는 간혹 지나가는 차 정도. 깜깜한 땅을 비추어주는 것은 어슴푸레한 초승달빛이었어요. 그 초승달빛을 피해 멀리서 별이 반짝였어요. 친구와 짝퉁 초코파이를 까먹으며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것도 꽤 좋았어요. 고개를 들어서 밤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사람들과 만나서 밤하늘을 같이 쳐다보는 일은 날이 갈 수록 줄어들고 있어요. 밤하늘을 본다 해도 그것은 밤하늘을 보기 위해 밤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숨을 게워내기 위헤 보는 것. 이렇게 친구와 같이 밤하늘을 보기 위해 밤하늘을 보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몰랐어요. 이 친구와 여행을 여러 번 다녔지만 밤하늘을 보기 위해 밤하늘을 본 마지막은 아마 2006년 여름이 마지막이었을 거에요.


중국 둔황 별 달 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참 그대로네."

"그러게."


아주 예전에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과연 나중에도 이렇게 여행할 수 있을까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아마 10년전이었을 거에요. 과연 10년 후에도 이렇게 대책없이 걷고 대합실서 의자에 드러누워서 자고 할 수 있을지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때 저는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친구는 10년 후에는 그래도 결혼도 하고 했을 텐데 조금 어렵지 않을까 말했었어요. 10년 전에도 둘이서 그러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러고 있다니 참 웃겼어요. 아니, 그때는 그래도 하룻밤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었고 그나마도 국내에서 그런 것이었는데, 10년이 지나고 나니 스케일이 더욱 커져서 이제는 중국땅에서 대놓고 텐트 치고 노숙질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이랑 이렇게 못 다니겠지?"

"우리니까 이렇게 다니지,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다니자고 하면 미쳤다고 할 걸? 이 나이에 누가 이렇게 다니냐?"


꽤 씁쓸한 이야기였지만 친구의 말이 사실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니자고 하면 분명히 썩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 거에요.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이제 그렇게 못 다닌다고 할 거에요.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은 건가? 사람들은 툭하면 나이탓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억지로 나이를 쑤셔먹이려고 하는데, 나이탓이라는 것 대부분이 엉터리 핑계일 뿐이에요. 맨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밥 먹고 술 먹고 바로 잠자니 조금만 걸어도 힘들죠. 잠자기 전까지 스마트폰 조물락거리니 눈이 침침하구요. 부양해야야 할 가족이 있어서 못 하는 것과 나이가 들어서 못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에요. 나이가 무슨 벼슬도 훈장도 상처도 아닌데 나이에 맞는 지위를 이야기하고 나이에 맞는 역할을 논하고 나이에 따른 기회의 차별을 준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이야기.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괜찮을텐데요. 모두가 '과거'라는 족쇄를 하나씩 차고 서로 족쇄가 아름답다고 자랑하면서 족쇄를 풀려고 하면 왜 족쇄를 푸냐고 비난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별 사진 찍을까?"

"디지털 카메라로 별 찍혀?"

"응. 찍혀. 조리개 최대한 열어주고 ISO는 낮추고 최대한 장노출로 찍으면 돼."


친구와 자리에서 일어나 별을 찍기 시작했어요.


둔황 야경


제 카메라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최대노출이 고정되어 있었어요. M모드로 놓고 찍는데도 셔터스피드, 조리개와 ISO를 조합한 값이 딱 일정 밝기 이상 되지 않았어요. 예전 사용하던 디지털 카메라는 셔터스피드는 최대한 느리게, 조리개는 최대한 열어주고 ISO는 여기에 다시 더 높일 수 있었는데 이 카메라는 그것들보다 더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진에 별이 많이 찍히지 않았어요.



불 켜진 민가라고는 아주 멀리 딱 하나 있었어요.



그 민가만 없으면 이렇게 정말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어요.


포도밭 야경


포도밭 위에도 별이 초롱초롱 떴어요. 사진에 나온 것보다 별이 훨씬 더 많이 보였어요. 정말 밤하늘을 별이 꽉 채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별이 많이 뜬 밤이었어요.


'한 번 닷징이나 해볼까?'


원하는 부분을 밝게 만드는 닷징 기술은 원하는 부분을 어둡게 만드는 버닝 기술과 더불어 대표적인 후보정 기술. 이 기술은 필름 카메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상당히 유구한 역사를 가진 현상 및 후보정 기술이에요. 지금은 장노출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원하는 부분을 불빛으로 아주 잠깐 살짝 비추어주면 땅은 밝게 나오고 별도 찍히지 않을까? 땅에 불빛을 살짝 비춘 후 장노출로 사진을 찍어봤어요.



절반은 성공이고 절반은 실패였어요.


밤하늘에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어요. 이것을 사진으로 찍어보고 싶은데 과연 제대로 찍힐지 의문이었어요. 그래도 한 번 찍어보았어요.


은하수


찍히기는 찍혔어요. 주변이 너무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지만요. 공기 더럽다는 중국에서 이렇게 많은 별을 볼 줄은 몰랐어요.


"모기 왜 이렇게 많냐?"


모기가 귀찮게 자꾸 달라붙었어요. 밤하늘을 사진으로 찍다보니 오랫동안 가만히 있어야 했고, 모기는 더욱 신나서 달려들었어요. 모기는 우리나라 모기의 절반 정도 되는 작은 놈들이었어요. 얼굴이고 목이고 팔이고 계속 달라붙었어요. 사진을 찍는 중 모기가 달라붙는 것을 알아도 가만히 있어야 하다보니 더욱 짜증이 나고 괴로웠어요. 가방을 열고 모기 기피제를 꺼냈어요. 이번 여행 올 때 들고 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었어요. 모기기피제를 목과 양팔에 치덕치덕 바르자 모기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어요.


"우리 동네 탐험 할까?"


친구가 이 깜깜한 밤에 마을은 어떤 모습인지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귀중품만 챙겨서 살짝 갔다올까? 여기 찾는 거 어려운 일도 아닌데."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어요.


"가지 말자."


아주 예전, 친구와 풍기 여행을 마치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한밤중에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가보자고 한 적이 있었어요. 역무원에게 물어보고는 단양역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듣고 단양행 기차를 탔어요. 단양역 주변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어요. 친구와 진짜 아무 것도 없는 단양역 주변을 돌아다니다 불빛도 거의 없는 마을 하나를 발견했어요. 한밤중 마을 구경을 하려고 하는데 동네 개 한 마리가 짖어대기 시작했어요. 아무 소리도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개가 짖어대자 공사장 굴착기 소음처럼 아주 우렁찼어요. 당연히 동네 주민이 밖으로 나왔고, 죄송하다고 사과드린 후 동네를 도망치듯 빠져나왔어요. 아마 지금 동네를 간다면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해서 이 동네에 엄청난 민폐를 끼칠 것이었어요. 친구도 그때 단양에서의 일을 기억해내고는 한밤중 중국 시골 동네 탐험은 하지 말자고 말했어요.


"이제 자자."


자정이 한참 넘어서야 텐트 안으로 다시 들어갔어요.


"아, 추워!"


추워서 깨어났어요. 친구가 텐트 창문을 닫고 자면 질식한다고 텐트 창문을 열어놓았어요. 그 창문으로 차가운 새벽 공기가 콸콸 들어오고 있었어요. 6월인데도 새벽 공기는 매우 차가웠어요. 에어컨 18도로 맞추고 그 앞에 가만히 계속 앉아 있는 기분이었어요. 외투의 접은 팔을 다시 풀러서 긴팔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추웠어요. 너무 추워서 텐트 밖으로 나왔어요.



슬슬 새벽 6시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여기는 베이징보다 훨씬 서쪽이라 시계보다 해가 훨씬 늦게 움직이는 동네. 이제 동이 터오르고 있었어요.


중국 둔황 여명


밖에서 몸을 움직이며 몸의 한기를 좀 쫓아낸 후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자리에 다시 누웠지만 잠은 다 깨었고,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또 몸이 으슬으슬했어요. 감기가 걸리거나 몸이 너무 허해져서 한기를 느낀 것이 아니었어요. 정말로 일교차가 컸고, 입고 있는 옷은 얇았어요. 이따 몰아닥칠 한낮의 더위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한기였어요. 텐트 창문을 닫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요.


텐트에서 계속 뒤척이고 있는데 친구가 일어났어요. 친구가 일어나자 텐트를 정리하고 다시 기차역으로 걸어갔어요.


중국 둔황 과수원


중국 농촌 아침


"빨리 가자."


아직 기차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친구는 계속 빨리 가자고 재촉했어요.


중국 생활 수준


저 흙담은 몇년이 된 흙담일까? 알고보니 저것도 100년 넘은 흙담 같은 거 아니야? 스스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왠지 또 그렇게 생각해보니 그럴싸했어요.


"저기 양이다!"


중국 양


양이 아침부터 풀을 뜯어먹고 있었어요. 이 양이 바로 신장 위구르 지역의 양꼬치가 맛있다고 하는 이유. 보면 알 수 있듯이 흰색 털을 가진 양으로 이 양은 면양이에요. 양들은 저와 친구를 쳐다보며 저와 친구가 무엇인지 가만히 살펴보며 경계하더니 다시 풀을 먹기 시작했어요. 양을 보자 갑자기 멀리 명사산이 생각났어요. 양은 풀을 뿌리까지 먹어서 너무 많이 키우면 사막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거든요.


"저것들 오늘 밤 양꼬치 되는 거?"

"글쎄? 그런데 다음주 쯤 양꼬치 되지 않을까?"



전날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했던 포도밭 사진을 찍으며 양이 귀엽다고 말하면서 저것들 양꼬치 언제 되냐고 대화를 나누었어요.



전날 잠자리 후보로 보아두었던 곳이 나왔어요.


"빨리 가자."

"왜 자꾸 재촉해? 아직 기차 시간 많이 남았구만."

"많이 남기는 뭐가 많이 남아? 빨리 가게."


친구는 계속 기차역으로 빨리 가자고 재촉해대었어요. 적당히 동네를 한 번 살펴보고 기차역으로 가도 충분한데 친구가 자꾸 빨리 기차역 가자고 보채서 바로 기차역으로 갔어요. 전날 동네를 돌아다니고 잠자리를 찾으러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며 걸었기 때문에 멀리 온 느낌이 들었을 뿐, 실제로는 기차역에서 멀리 온 것이 아니었어요. 친구의 예상과 달리 제 말대로 정말 금방 기차역에 도착했어요.



2016년 6월 9일 아침 8시 24분. 드디어 6월 9일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둔황역


그러고 보니 오늘 단오절이지!


바로 오늘이 중국 명절이자 중국의 공휴일 중 하나인 단오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단오라고 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고 그저 교과서로만 배우는 전통 풍속 중 하나인데 중국에서는 엄연한 명절이에요. 한식이니 단오니 교과서로 가르치려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때 뭔가 좀 했으면 좋겠어요. 말로만 중요한 전통 풍속이라고 떠들어대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나아보였어요.


중국 둔황 택시


"우와, 저 사람 봐라!"


중국 둔황 기차역


명절이라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기차역 앞에 있었어요. 역에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냥 총체적으로 사람이 바글거렸어요. 이 정도면 이따 명사산은 사람들이 줄서서 걸어야하지 않을 건가? 진짜 전날 미리 기차표를 발권받아놓기를 잘 했어요. 저 인파 속에서 기차표 발권을 기다리려고 했다면 시간 엄청 걸렸을 거에요.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어요.


.

중국 기차역 대합실


대합실에는 농민공이 많이 있었어요.



저 비닐 자루와 페인트통이 곳곳에서 보였어요.


"나 씻고 온다."

"응."

"너는 안 씻어?"

"이따 기차 안에서 씻을 거야."


수건과 비누, 치약, 칫솔과 샴푸를 들고 화장실로 갔어요. 역시나 화장실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어요. 기차역 안에서는 금연이지만 사람들이 화장실 안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어요. 역무원도 화장실 밖에 나와서 담배를 태우지 않으면 그냥 신경 안 쓰는 것 같았어요.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어요.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니 한결 개운해졌어요. 씻고 나와서 짐에 세면도구를 집어넣고 개찰구 앞에 줄을 섰어요.


기차는 제 시각에 맞추어서 왔어요. 9시 14분이 되자 기차가 출발했어요.



"진짜 동쪽으로 가고 있구나."



황량한 들판에 초록색이 보였어요. 초록색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점점 더 동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비록 아직 둔황에서 아주 멀리 떠나지 않은 것이라 초록빛이 이렇게 보이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과할 때에 비해 엄청난 녹지였어요.


둔황에서 멀어져갈수록 풍경은 점점 황량해져갔어요.


중국 간쑤성 사막


"우리는 왜 농민공들 사이에만 자리를 줄까?"

"외국인이라 대충 농민공들 사이에 처박아놓는 거 아니야?"



역시나 이번 기차에서도 저와 친구가 타고 있는 객차 승객 모두 농민공이었어요. 객차 승객이 전부 농민공이라 좋은 점은 우리도 아주 마음 편하게 행동해도 된다는 것. 이분들도 아주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 분위기에 맞추어 행동했어요. 그래도 좌석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없었어요. 객차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어요. 승무원이 먹을 것을 팔러 돌아다니는데 아직은 기차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무도 무언가 구입하지 않았어요.




슬슬 잠이 몰려왔어요. 어차피 창밖은 사막. 신기할 것도, 볼 것도 없었어요. 처음 지나가는 길이기는 했지만 사막은 사막이었거든요. 창밖으로 지금껏 보지 못한 신기한 것이 나와야 보는 재미도 있고 창밖 사진 찍는 재미도 있을텐데 창밖은 그냥 사막이었어요. 지금 타고 가는 기차는 이번에 처음 타보는 노선. 익숙하지 않아야 정상. 그러나 여기는 바로 사막. 누군가 제 머리 속 기억을 복사해 눈 앞에 또 똑같이 틀어주는 기분이었어요.


지루한 차창 밖 사막 풍경을 보고 있으니 잠이 더 쏟아졌어요. 의자에 드러누웠어요. 오늘은 하루 종일 기차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날. 누군가 옆자리에 앉는다고 타기 전에 조금이라도 누워 있어야 했어요. 그렇게 의자에 고문당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줄여야 했어요. 기차는 거의 자정 다 되어서 란저우에 도착할 예정이었거든요. 맨정신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어요. 하루 종일 노트북을 켜놓을 수도 없었어요. 노트북 배터리가 그만큼 버텨줄 수 없었거든요. 기차 안에 노트북을 충전할 곳도 없었구요. 이 기차 안에서 할 것이라고는 노트북으로 여행 기록을 정리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여행 기록을 정리하는 것이 조금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오늘은 정말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라 굳이 벌써부터 할 필요도 없었어요.


무릎은 바닥을 향해 꺾여 있고 몸을 뒤척일 수 없어서 매우 불편하기는 했지만 앉아 있는 것보다는 25만배 정도 나았어요. 깊게 잘 수는 없었어요. 두 다리를 뻗고 누운 것이 아니라 정강이부터는 의자 밖에 있었거든요. 그래도 불만은 없었어요. 이것도 감지덕지였어요. 누운 상태로 의자에 묶여 있는 느낌이었지만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덜 고통스러웠거든요. 허리와 다리가 불편해서 자꾸 잠에서 깨어나기는 했지만 이렇게라도 잘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감사했어요. 이 형편없는 좌석칸에서 이렇게나마 누워서 갈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었거든요. 역시 사람은 고통을 받아야만 지금껏 누려온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렇게 얼마간 누워서 자다가 앉아 있다가 다시 누웠다가 서서 다리를 풀었다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거의 다 닳은 배터리가 들어간 기계가 오락가락 깜빡거리는 것처럼 졸려 서 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누워서 잤어요. 아무 의욕도 없었어요. 불편하다고 생각이 들면 일어나고, 일어나서 조금 있다가 다시 의자에 쓰러지듯 누워서 잤어요. 정신이 든 것은 정오가 넘어서였어요.


노트북을 꺼내 여행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너 뭐하고 있어?"

"여행 기록 정리해."


여행 기록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갔어요. 기록을 남기는 것은 잘 써야한다는 부담이 전혀 없는 일. 욕을 쓰고 싶으면 욕을 쓰는 것이고, 좋으면 좋았다고 쓰는 것이 여행 기록. 그런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어요. 여행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여행 기록을 남기는 것인데도 무슨 말을 써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어요. 여행기를 쓰기 위한 여행 기록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자세히 써야 했어요. 어디를 다녀왔다는 일정 정리는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여행 일정 정리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대신해주고 있었거든요. 수많은 경험의 결과, 여행 일정과 여행 경비 정리만 가지고는 여행기를 절대 잘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여행기를 쉽고 보다 잘 쓰려면 감정과 생각이 매우 중요했어요. 여행에서 있었던 잘잘한 일과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최대한 자세히 남겨야 하는데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억지로 쥐어짜가면서 조금씩 쓰고 있는데 친구가 다시 물어보았어요.


"너 여행기 써?"

"아니, 여행 기록 남기고 있어."


대체 무슨 여행 기록 남기는 것이 여행기 쓰는 것보다 더 어렵지? 자려고 드러누울 때마다 생각했지. 천장에 모니터가 달려 있고, 원격 키보드로 타이핑을 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고 있을텐데. 여행 한 두 번 다녀본 것도 아니고 여행기 한 두 편 써본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아직도 여행 기록 남길 때마다 이토록 고통받을까? 어쨌든 여행 기록을 밀렸기 때문에 지금 고통받는 것은 당연했어요.


기록을 빠르게 남기는 법을 아직도 찾지 못했어요. 하루 일정을 마치고 여행 기록을 남기면 기록 남기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스마트폰은 편리하기는 한데 배터리 문제도 있고 잃어버릴 위험도 있어요. 여행 중에는 스마트폰을 최대한 안 꺼내는 것이 좋아요. 스마트폰 노리는 도둑은 어디든 많으니까요. 수첩에 남기자니 이것은 이동할 때 남길 수가 없어요. 기록을 꼼꼼히 하려면 막간에 잠깐잠깐 바로 남겨야 하는데 이러기 좋은 곳이 바로 버스 기다릴 때와 타고 있을 때. 버스 기다릴 때야 서서 쓰면 된다고 하지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수첩에 기록남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에요. 게다가 기록을 자주 남기려면 수첩을 작은 것으로 들고 다녀야 하니 그 수첩에 기록을 남기려면 글자를 작게 써야 하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작은 글자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진짜 쉽지 않아요.


여행 기록 남기는 것이 심히 고통스러웠지만 좋게 생각했어요. 어차피 남아도는 것은 시간이고, 이럴 때 여행 기록을 한 자라도 더 남겨야 나중에 여행기 쓸 때 덜 괴로울 거에요. 지금 10분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여행기 쓸 때 100분 괴로워질 거에요. 지금껏 계속 그래왔거든요. 여행 기록을 꼼꼼히 남긴 날은 여행 기록에 내용 조금 추가하고 글을 다듬으면서 사진 고르고 글에 맞추어서 삽입하면 끝인데, 여행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은 날은 당장 그날 무엇을 했는지부터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어요. 억지로 그때 그 느낌을 집어넣어보려고 해도 그게 잘 될 리가 없었어요.


"너 여행기 써?"

"여행 기록 남긴다니까."

"무슨 여행 기록을 그렇게 길게 써?"

"여행기를 쓰려면 여행 기록을 잘 남겨야지. 나중에 '여기 좋았다, 이거 맛있었다' 이렇게만 쓰고 끝낼래?"


친구가 계속 여행기 쓰냐고 물어보자 짜증이 났어요. 가뜩이나 여행 기록 잘 안 써지는데 계속 여행 기록이 아니라 여행기 쓰냐고 물어보고 있었거든요.


둔황 기차역 오기까지의 여행 기록을 남기고 노트북을 껐어요. 친구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어요.


"뭐하냐?"

"채팅."

"B하고?"

"아니, 다른 사람하고."

"그거 조금만 하고 핸드폰 꺼. 배터리 닳는다."

"괜찮아. 이거 배터리 많아."


중국 산맥


기차는 잘 달리고 있었어요. 차창 밖으로 만년설이 보였어요.


중국 만년설


'이제 또 어느 도시가 가까워지고 있나 보네.'




친구는 계속 심심하다고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채팅중이었어요.


"야, 스마트폰 꺼. 오늘 밤에 스마트폰 배터리 없으면 우리 망해."

"이거 배터리 많아."

"B한테는 우리 내일 아침까지 스마트폰 충전 못하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대답 하든 말든 일단 다 질문하라고 보내. 시간 되면 한 번에 대답해주겠다고 하고."

"알았어."


친구가 계속 스마트폰으로 채팅하는 모습을 보니 불안했어요. 지금 란저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역에서 나와서 쭉 걸어가면 황하가 나오고, 그 황하 근처 어딘가에 야시장이 있다는 것 뿐이었어요. 오늘 저녁밥은 란저우 야시장에서 먹어야 했고, 잠은 황하 강변에서 자야 했어요. 만약 스마트폰 배터리가 떨어진다면 꽤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었어요. 자정 너머 그 야심한 시각에 둘 다 눈 뜬 장님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친구는 B가 모레 오기 때문에 채팅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건 B한테 양해를 구하고 궁금한 것 답이 오든 안 오든 질문을 다 보내놓으라고 한 후, 적당히 때가 될 때마다 스마트폰을 켜서 답장을 해주면 될 일이었어요. 여기가 무슨 유럽도 아니고 시차가 실상 없다고 보아도 되는 지역이었거든요. 한국과 중국의 시차는 1시간. 유럽이라면 시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기회가 되는 대로 계속 채팅을 해야겠지만, 여기는 중국이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게다가 친구에게 누구와 채팅하냐고 물어보니 B와 채팅하는 것이 아니라 지인들과 잡담하는 중이었어요. 친구가 계속 배터리 여유 있다고 하고 친구의 아이폰 기종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빨리 끄라고 하기도 이상해서 몇 번 스마트폰 끄라고 말하기만 했지만, 분명히 오늘 기차에서 내렸을 때 핸드폰 배터리가 없을 것 같았어요.


차창 밖을 계속 쳐다보았어요.


중국은 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한족을 대거 이주시키고 있을까? 그게 과연 지배력 강화만을 위해서일까?


중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계속 한족을 대거 이주시키고 있어요. 단순히 지배력 강화만을 위해 그런다고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위구르인들의 힘만으로 독립할 확률은 거의 없거든요. 중국이 춘추전국시대로 분열되지 않는 한 솔직히 말해서 위구르인들과 티베트인들이 독립할 확률은 없어요. 차라리 미국 또는 러시아와 중국이 전면전에 돌입하는 것이 훨씬 가능성 있을 거에요.


문득 중국이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철로를 개통했다는 뉴스를 읽었던 것이 기억났어요. 중국이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엉터리 도시들을 마구 세우고 있다는 뉴스를 읽었던 것도 기억났어요. 그리고 중국에 있는 공장들이 동남아시아로 이전중이라는 이야기도 생각났어요.


중국은 과연 자국에서 공장이 빠져나가는 것을 원하고 있을까?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그리고 서쪽 끝에서 다시 동쪽 끝으로 돌아가는 길. 과연 중국이 자국에서 공장이 빠져나가는 것을 원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상하이 번화가는 굉장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거든요. 도시에서 벗어나자마자 펼쳐지는 너무나 낙후된 시골. 그리고 기차역에 바글대는 농민공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촉수를 뻗어 세상의 생기를 혼자 다 빨아먹고 거대해져가는 괴물 모습이었어요. 도시의 중심은 화려하나, 거기에서 벗어나면 바로 낙후되고 열악한 환경이 나타났어요. 이런 풍경을 계속 보면서 왜 중국에 대해 찬양하지 못해 환장한 부류와 중국을 10억 거지떼가 득시글거리는 쓰레기라고 하는 부류로 모세의 기적처럼 쫙 갈리는지 이해가 되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과연 중국이 중국에 들어왔던 공장들이 계속 빠져나가는 것을 과연 좋게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구요.


번쩍거리는 상하이 난징동루와 불빛조차 없던 둔황 시골 마을이 겹쳐졌어요. 중국이 이제 후진국 아니고 잘 사는 국가라고 하는 사람들 말대로라면 지금 제 눈 앞의 농민공들은 허깨비들일 거에요. 중국이 진짜 원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아마 공장이 중국 서부로 이전하는 것 아닐까?


중국에서 공부하고 일한 친구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한결같이 과연 공장이 중국 서부로 이전하겠냐고 대답했어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도 않은데다, 중국 공장은 중국 내수를 보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가공해 수출하는 것을 보고 돌아가는 것이 대부분인데 서쪽으로 이전할 리가 있겠냐고 말했어요. 그래서 공장들이 인건비가 올라 경쟁력이 떨어진 중국을 떠나고 있다고 했구요.


영유권 강화를 위해 여기저기에 엉터리 도시를 세우고 한족을 대거 이주시킬 필요가 과연 있을까? 중국에 56개 민족이 있다고는 하나, 한족을 제외한 55개 민족 다 합쳐봐야 전체 인구에서 10%도 안 되요. 위구르족이 많다고 하지만 중국 전체 인구에서 1%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고, 티베트족이 많다고 하지만 전체 인구의 0.5%도 차지하고 있지 못해요. 인구수로나, 군사력으로나 애초에 상대가 안 되요. 유령 도시 건설이야 경제성장률 때문이라 쳐도, 한족의 대거 이동은 지배력 강화로는 설명이 안 되요.


엄청나게 낙후된 중국 서부. 한족의 대거 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로의 철도 개통.


중국은 공장을 중국 서부로 이전하고 싶은 것 아닐까?


중국을 빨아대는 쪽이나 비난하는 쪽이나 한결같이 인정하는 것은 중국에 가난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기차타고 주마간산 격으로 보는 풍경만 봐도 이게 보이는데 실제 여기서 일하고 사는 사람들이 보는 것은 아마 훨씬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에요. 엉터리 같겠지만 중국을 빨아대는 쪽도, 중국을 비방하는 쪽도 다 맞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도시는 발전했어요. 도시 번화가에 한정해서 본다면 우리가 못산다고 깔볼 상대가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그 도시를 제외한 억 단위에 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한 것 또한 사실이에요. 이 빈부격차를 해결하려면 결국 서쪽으로 공장을 이전시켜야할 거에요. 하지만 공장이 서쪽으로 이전하면 시장에서 멀어져서 손해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판매시장이라도 만들어놓기 위해 한족을 그렇게 이주시켜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욱이 중국도 도시로의 인구 집중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구요.


지나친 발전 불균형 및 빈부격차 문제 해결을 위해 서쪽을 개발할 필요가 있어서 한족을 서쪽으로 대거 이동시켜서 시장을 형성시키고 중앙아시아쪽으로 철도를 연결해 수출을 위한 인프라를 확충했다고 보면 나름 그럴싸했어요. 그리고 저의 이 가설이 맞다면 중국은 당연히 자국에 있는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겠죠.


오늘날 지구촌에서 심각한 문제들은 제조업의 중국 편중 때문 아닐까?


중국의 위구르인 영토 강점 문제를 생각하다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갔어요. 난민과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테러. 그리고 영국의 EU 탈퇴 결정.


'만악중국설' 이야기하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공부하고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떠올려보면 이 또한 하나하나 아귀가 들어맞았어요.


제조업은 상당히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요. 공장의 생산직 근로자 뿐만 아니라 공장 운영을 위한 사무직, 그리고 생산된 제품과 관련된 운송업까지 연관되어 있지요. 아직까지 제조업만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이 실상 없어요. 기술의 발전은 3차 산업의 일자리를 무서울 정도로 줄여나가거든요. 단적으로, 은행 ATM이 널리 보급되면서 은행 창구의 일이 확 줄어들었죠. 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자리가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하구요.


공장이 들어서면 사람들이 모이고, 도시가 형성되요. 그리고 도시가 거대해지면 제조업은 다른 곳으로 이전해요. 그래서 도시가 지나치게 성장하면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제조업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시키죠. 여기까지는 중학교까지 똑바로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


중국이 저렴한 인건비를 앞세워 선진국의 제조업을 유치하면서 경쟁력이 약화된 선진국의 많은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했어요. 그로 인해 선진국에서는 일자리가 크게 감소했어요. 이는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구요. 우리나라는 그나마 중국과 가깝고, 분단 상황으로 인해 섬 같은 상황이라 문제가 덜한 편이지만, 유럽쪽은 상황이 많이 달라요. 유럽과 중국은 거리적으로 너무나 멀고, 유럽으로 넘어와 일하려는 사람들은 바로 코앞에 있으니까요.


중국으로의 제조업 쏠림, 그리고 중국의 값싼 제품은 지구촌 국가간 부의 양극화에 매우 크게 이바지했어요.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제조업을 발전시켜야할 국가들의 그나마 갖고 있던 미약한 제조업 분야조차 값싼 중국제 수입품에 고사해 버렸어요. 오죽하면 아프리카에 값싼 중국제가 수입되면서 가내수공업조차 고사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요. 상황이 이러니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로 밀입국을 시도하게 되었어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 밀입국 문제가 전세계적으로 꽤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아프리카에서 유럽 밀입국을 하기 위해 사하라 사막을 건너 모로코, 리비아 등으로 집결해 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넘어가다 전복되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어요.


즉, 우리나라에서 서울로의 인구 집중 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충청도, 전라도로 공장을 이전시키듯 유럽은 이러한 아프리카와 중동 밀입국자 유입을 제한하기 위해 인근 국가로 공장을 이전해야 했는데 공장을 저멀리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난민 유입을 잡아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지요. 밀입국자를 제대로 흡수해낼 여력도 되지 못했구요. 이렇게 쏟아져 들어오는 밀입국자들에게 제공할 일자리가 별로 없었으니까요. 이들이 차지해야 할 일자리를 제공하는 공장들은 중국으로 떠나가 버렸으니까요.


EU가 중유럽, 발칸유럽으로 확장해나갈 때 이들 국가로부터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장은 다 중국 가버렸어요. 중유럽, 발칸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모국보다 높은 임금을 제공하는 선진국으로 대거 이주했고, 이들이 사회 중하류층이 차지하던 일자리를 차지하면서 원래 선진국 국민들은 높은 실업과 복지 부담을 떠안게 되었어요.


선진국에서 극우파가 득세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보수는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 수입을 환영하고, 진보는 자신들의 지지세력 수를 늘리기 위해 사회적 약자인 외국인 노동자 수입을 환영해요. 일반 국민들은 보수에게도 진보에게도 버려지고 방치되는 것이지요. 보수는 경제성장을, 진보는 도덕을 내세우며 국민들을 기만해요. 일반 국민들 앞에 남겨진 것은 일자리 양극화와 실업이지요. 일이 더럽고 험해서 하는 사람이 없다면 임금을 올려주어야 하는데 임금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저렴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요. 이들이 더럽고 험한 일에만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업종으로 퍼져나가면서 임금이 점점 더 최저임금에 수렴해가요.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에 대해 막연히 '민주화 운동'이라고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선진국의 민주화 운동과는 성격이 다른 후진국의 민주화 운동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민주주의에 대해 잘 알고 민주화 운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단순히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라 생각하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생존권 투쟁 성격이 강해요. 선진국의 민주화 운동은 생존권 투쟁보다는 동성애, 남여평등, 다문화주의 등 다양성과 평등 운동 성격이 강하구요. 단순히 독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실업난과 생활고 때문에 일어난 것이에요.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 민주화 운동을 보며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득세를 심각하게 걱정했어요. 왜냐하면 이슬람 극단주의는 이들 지역에서 딱 포퓰리즘 정치인의 모습이거든요. 그리고 이 우려는 그대로 적중했지요. 그것이 바로 IS에요.


왜 아랍의 독재자들은 실업이 만연하게 방치했냐고 따질 수 있어요. 답은 간단해요. 자국에 공장을 세워서 생산한 제품이 값싼 중국산 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니까요.


2015년 9월 2일 난민 어린이인 아일란 쿠르디가 밀입국하려다 익사한 시체 사진이 공개되자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고, 독일 총리가 시리아 난민들을 독일로 받아주겠다고 발표했어요. 독일 총리의 이 말 때문에 EU가 발칵 뒤집어지고 내분이 일어났죠. 아마 난민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없어서 경솔하게 발언한 것일 거에요. 그리스, 이탈리아, 몰타, 스페인, 프랑스 등 2000년대에 이미 밀입국자 문제를 심각하게 겪고 있었던 국가들이었다면 아무리 죽은 아이가 불쌍하다 하더라도 당연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에요. 저 말 덕분에 멀리 이란은 물론이고,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까지 독일로 넘어가려고 유럽으로 몰려들었죠. 그리고 독일 총리의 경솔한 저 말 한 마디에 엉뚱한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만 제대로 골탕먹었구요.


난민이라 해서 불쌍해 보이지만 실상은 지독한 실업난에 독일로 취직하고 정착하러 간 거에요. 실업난에 내전까지 겹쳐서 살기 힘든데 갑자기 평화롭던 시절에도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기회의 땅 독일 이민의 문이 활짝 열어젖혀진 거에요. 당연히 독일로 달려가죠. 정말 고국이 전쟁중이라 단순히 피난간 것이라면 그리스면 어떻고 세르비아면 어떻고 헝가리면 어떻나요. 이것은 터키가 자국이 수용하고 있던 난민들을 독일로 가라고 쫓아낸 것이 아니에요. 난민들이 독일 총리 말 믿고 독일에서 살려고 달려간 것이죠. 물론 당시 아무 것도 모르는 언론들은 난민 수용 반대를 외치던 헝가리 총리를 비난하고 독일 총리를 칭찬했지만요. 사실 뉴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독일 총리가 말만 하고 제대로 대처하는 것이 없어서 엉뚱한 헝가리, 오스트리아, 세르비아 등이 난민 폭격을 받았어요.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각해본 것이었는데 의외로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어요.



기차는 계속 달려갔어요.



"이제 폰 배터리 진짜 없다. 핸드폰 꺼야지."

"이따 길 찾을 정도는 있지?"

"간당간당해."


친구가 스마트폰을 꺼서 가방에 집어넣었어요.



"아, 저 다나까 또 입 열었네."


조용한 기차 안. 이 기차가 시끄러워질 때가 있었어요. 대각선 맞은편에 중국인들이 앉아 있었어요. 이들 중 한 명은 왠지 이름이 '다나까' 일 것 같았어요. 중국어로 이야기하는데 왠지 '너 일본인이지?'라고 하면 '하이!' 하고 대답할 것 같이 생겼어요. 그 다나까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기차 안이 엄청 시끄러워졌어요. 이 다나까는 승무원이 물건을 팔러 지나갈 때마다 잡아놓고 물건을 하나하나 다 건드려보고 만져보고 시험해보고 뭐냐고 물어보아대었어요.







다나까가 물건 팔러 돌아다니는 잡상인 같은 승무원에게 또 말을 걸었어요. 승무원이 다나까와 어울려 신나게 떠들며 물건을 이것저것 보여주기 시작했어요.


순간 웅성거리더니 객차 안 승객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승무원에게 몰려들었어요. 순식간에 객차 승객들이 승무원을 포위했어요.


"뭐지?"


저와 친구도 의자 위에 올라가서 무슨 일인가 쳐다보았어요.


승무원이 변신 로보트 조작을 하고 있었어요. 기본은 자동차인데 조작기로 버튼을 누르면 자동차가 로보트로 변신하고 불도 번쩍였어요.


"아우,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


친구가 깔깔 웃었어요. 저도 깔깔 웃었어요. 뭔가 심각한 것이거나 굉장한 것인줄 알았는데 변신 로보트였거든요. 이 변신 로보트가 로보트로 변신하기도 하고 자동차가 되어서 달리기도 했어요. 지루해 고통스러워하던 객차 승객 모두 이 변신 로보트를 보며 즐거워했어요. 지금 이 순간 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없었어요. 변신 로보트 구경도 재미있었고,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가서 로보트를 집중해서 구경하는 이 장면 자체도 재미있었어요.


중국 기차 식당칸


식당칸 의자는 매우 편해 보였어요. 저 의자에 드러누워서 자면 잠을 진짜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게다가 왠지 저기에는 콘센트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러나 들어가보지는 못했어요.


"저거 불교 사원 아니야?"


중국 티베트 불교 사원


멀리 사원이 보였어요. 형태를 보아하니 모스크는 아니었어요. TV에서만 보던 티베트 불교 사원과 비슷한 모양이었어요.



"진짜 지루해 미치겠네."


정말 지루했어요. 그 변신 로보트 이후 다나까는 조용해졌어요. 다나까는 우리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 가는 것 같았어요. 시계를 보니 8시 13분이었어요.



"너 뭐 안 먹어?"

"나는 별로. 배고프면 이따 컵라면 끓여먹으면 돼."


친구가 오늘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이 없어서 정말 신기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친구에게는 컵라면이 있었어요.


"우리 이따 내려서 저녁 뭐 먹지?"

"란저우 라면!"

"아, 너 그거 먹으러 란저우 간다고 했지?"

"응."

"란저우 라면 맛있어?"

"상해에서 먹었을 때 엄청 맛있었어. 그때 라면 학교도 있었잖아!"


친구가 란저우 라면을 노래부르기 시작했어요. 저도 같이 불렀어요. 기다려라, 란저우 라면! 친구가 맛있다고 하니 진짜로 맛있겠지. 오늘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야시장 가서 란저우 라면부터 한 그릇 해치워야지! 갑자기 힘이 났어요. 태어나서 미식을 위해 가는 곳은 이 란저우가 처음이었어요. 원래 가던 곳에 먹을 만한 것이 있으면 먹었지, 먹을 것이 있어서 간 적은 없어요. 그래서 더욱 신이 나고 기대가 되었어요.


"기다려라, 란저우 라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맛좋은 라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란저우 라면!"


둘 다 란저우 라면을 외치며 넋을 붙잡고 있었어요. 상해에서 투르판 갈 때는 그래도 침대칸이라 지루하면 드러누워 자면 되었어요. 이것은 맨정신으로 앉아서 버텨야 했어요. 잠깐 의자에 포박되듯 누워서 자기는 했지만 거진 14시간 기차를 타는 것이었어요. 맨정신에 허리 부러뜨리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 14시간 보내는 것은 고역이었어요. 우리보다 더 멀리 가는 다나까가 갑자기 존경스러워졌어요. 다나까를 보니 다나까는 의연하게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중국 란저우


밤 23시 33분. 드디어 도둑과 라면의 도시 란저우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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