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7박 35일 (2009)

7박 35일 - 4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좀좀이 2012. 1. 1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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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어요.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문을 열었어요.


"오빠, 10시에요."

"예?!"

"11시까지 체크아웃이에요. 빨리 준비해요!"


후배 말에 정신없이 씻고 짐을 꾸리고 밖으로 나왔어요. 다행히 11시를 넘기지 않아 추가 요금은 물지 않아도 되었어요.


"달러로 내도 되나요?"

"아니요. 유로나 보스니아 카엠으로 내세요."

"달러 안 되요?"

"안 되요."


다행히 일요일이 아니라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해서 지불하면 되는 일이었어요. 여기는 환전을 하려면 여권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여권 없으면 환전을 안 해줘요. 돈과 함께 여권을 제시해야만 환전을 해주는 나라에 속해요.


"여권 주세요."

"돈 내세요."

"환전하려면 여권이 필요해요. 제 친구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전날 카운터에서 여권을 맡기라고 해서 여권을 맡겼어요. 카운터에서는 여권을 안 주려고 했지만 여권이 없으면 돈을 지불할 방법도 없었어요. 그래서 카운터에 후배가 여기에서 저를 기다릴 것이고 제 짐도 여기 다 놓고 간다고 하자 제 여권만 돌려주었어요.


"잠깐 다녀올게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알았어요."


후배에게 로비에서 짐 보면서 TV보고 놀고 있으라고 한 후 혼자 나와 은행으로 갔어요. 숙박비와 오늘 쓸 돈을 환전했어요.


는 이 

가 면 는 이 

가 면 는 이 는 


은행에서 환전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어요.


"아놔...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그러나 비가 멎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어요. 여기서 비를 피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후배까지 돈을 인출하겠다고 나오면 그것도 골치아픈 일이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비를 쫄딱 맞으며 숙소로 달려갔어요.


"비 많이 와요?"


비에 쫄딱 젖어서 숙소에 들어온 저를 보자 후배가 깜짝 놀랐어요.


"예. 많이 와요."


숙박비를 지불하고 호스텔 입구에 나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어요. 비가 많이 약해졌어요. 담배를 다 태우자 비가 거의 멎었어요.


"이놈의 비는 정말 타이밍 대박이네. 날씨가 아주 내 여행 방해하려고 작정했구나."


담배를 다 태우고 안으로 들어가서 짐을 들고 나왔어요. 은행 가는 길에 우체국을 발견했기 때문에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고 후배에게 엽서도 사 주었어요. 엽서 중에는 사라예보의 유명한 공원이 그려진 엽서도 있었어요. 엽서 속 공원을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니 3번 트램을 타고 종점까지 가서 1km만 들어가면 된다고 했어요.


우체국에서 나와 버스표를 구입하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걸어갔어요.



교회 벽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었어요.



이 건물이 바로 여자를 상징화한 건물이에요.



지난번 왔을 때 보기는 했지만 사진을 찍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찍으며 버스 터미널을 향해 걸었어요.




모스크 옆에 보이는 것이에요.



정말 다시 걸어도 질리지 않는 사라예보 구시가지였어요.



이 불은 1년 365일 꺼지는 일이 없는 사라예보의 성화래요.



센터 버스 터미널로 갔어요. 동 사라예보 버스 터미널은 세르비아와 연결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센터 버스 터미널과 연결되요. 아직 남은 여행 일정을 어떻게 할 지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었어요. 아직도 여행 일정이 열흘 넘게 남아 있었어요. 마음 한 구석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다녀오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었어요. 우크라이나는 한때 소련이었어요. 우크라이나만 갔다 온다면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동구권 국가를 갔다 오게 되는 것이었어요. 물론 폴란드까지 갔다 온다면 과거 기준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으로 모든 동구권 국가를 갔다 오는 것이었지만 폴란드는 독일과 더불어 그냥 가기 싫었어요.


그러나 여기에서 우크라이나까지 가려면 일단 헝가리까지 가야 했고, 기차 요금도 매우 비쌌어요. 결정적으로 키예프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 원칙은 무조건 버스 야간 이동이었어요. 하지만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구간에서 이 원칙은 깨졌어요. 그래서 양보하고 다시 세운 원칙이 '기차를 타지만 침대칸은 안 탄다'였어요. 하지만 우크라이나까지 침대칸을 타지 않고 간다는 것은 그냥 미친 짓. 무슨 군대 가혹행위 체험할 것도 아니고 이틀 넘게 기차를 타는데 가는 내내 의자에 앉아서 버틴다는 건 무리였어요.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워낙 큰 나라라서 당일치기로 휙 보고 나올 나라가 아니었어요. 가게 된다면 최소한 키예프와 세바스토폴은 보고 나오고 싶었어요. 대충 '나는 우크라이나도 갔다 왔다!'라고 하려고 키예프만 찍고 돌아나오기에는 경비나 시간이나 너무 많이 들었어요.


당장 우크라이나까지 가려면 방법은 하나였어요. 지금 당장 동 사라예보 버스 터미널로 가서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타고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간 후, 야간 기차를 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서 우크라이나 키예프행 기차를 타는 것이었어요. 작정하고 가려면 갈 수는 있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더 추가되었어요. 그것은 바로...


우크라이나 다녀오면 날짜가 애매하게 남아!


후배는 늦어도 4월 13일까지 앙카라로 돌아가야 했고, 저는 4월 13일에 프라하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어요. 그런데 우크라이나를 다녀오면 날짜가 정말 애매하게 남아서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기도 애매하고 머무르기도 애매한 날짜가 남아 버렸어요.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일단 제외했어요.


두 번째 경로는 이제 발칸 국가의 2번째 도시를 다니는 것이었어요. 다시 알바니아로 기어들어가 베라트, 지로카스트라를 보고, 불가리아의 벨리코 터르노보 (벨리코 투르노보), 릴라의 수도원, 루마니아의 브라쇼프, 몬테네그로의 코토르 등을 보는 경로였어요. 하지만 이 경로는 크게 끌리지 않았어요. 일단 이렇게 하면 무조건 1박은 필수라고 보면 되었어요. 그러나 최대한 숙박을 피하고 매일 다른 나라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욕심이 너무 컸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언어가 확확 변하는 그 느낌은 한국에서 절대 체험할 수 없는 느낌이에요. 이 느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수도가 아닌 다른 도시를 보고 바로 다른 나라로 이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세 번째 경로는 무조건 프랑스 파리에 가 보는 것. 후배가 저를 생각해 파리 갔다 오는 경로가 어떻겠냐고 물어보았어요. 대학교 다니며 불어를 부전공해서 학점 참 많이 말아먹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정작 프랑스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외국 나와서 불어를 안 써본 것은 아니었어요. '첫 걸음' 편에서 튀니지와 모로코 여행할 때 불어를 했어요. 하지만 한국어 배워서 중국 연변에 가서 한국어 해보는 것과 대한민국 서울에 가서 한국어 해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어요. 그래도 한때 정말 열심히 했던 불어를 프랑스 파리에 가서 한 마디라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시험 보느라 외워야 했던 '에쎈쎄페' (SNCF, 프랑스 철도청), '에헤흐' (RER, 프랑스 국철)를 실제 이용해보고 싶었어요. 프랑스 파리에 가서 뭐 바게트를 뜯어먹는다든지 몽마르트 언덕에 가서 낭만을 느낀다든지 노틀담 성당에 가서 노틀담의 꼽추를 상상해 본다든지 이런 건 없었어요. 단지 수업 시간에 왜 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본문에 나오니까 억지로 외워대었던 에쎈쎄페, 에헤흐, 프랭땅 백화점, 씨벨로 같은 것을 보고 싶었고, 한 번 파리에서 불어를 한 마디라도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기 역시 비용이 만만치 않았어요.


1,2,3번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일단 뒤로 미루었어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은 두브로브니크를 가서 크로아티아를 끝내는 것. 새벽에 잠깐 걷고 버스로 휙 둘러보고 기억나는 것은 폭풍우 몰아치는 항구밖에 없지만 어쨌든 스플리트를 갔고, 플리트비체는 잘 보았고, 자그레브는 뭘 봤는지 기억도 잘 안나요. 기억나는 거라고는 기차역 앞에 트램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무슨 동상 하나 있었다는 것. 지나가든 스쳐가든 대충이라도 가보지 못한 곳이 하필 크로아티아 도시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두브로브니크였어요. 그래서 여기를 가서 크로아티아를 일단 끝내고 그 다음을 생각하기로 했어요.


"22시 두브로브니크행 버스 없어요."


분명 버스 터미널에는 22시에 사라예보에서 출발해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그러나 매표소에서 22시 두브로브니크행 버스푤르 사려고 하자 버스가 없다고 했어요.


"어쩌지..."


진짜 크로아티아와는 인연이 전혀 없었어요. 아니, 온통 악연 뿐이었어요. 지난번에 그렇게 고생을 시키더니 이번에는 아예 버스가 없다고 했어요. 울친을 포기하고 두브로브니크로 가야 했나? 하지만 크로아티아와의 악연을 생각하면 울친 본 것이 울친 포기하고 두브로브니크로 간 것보다 약 10억만배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보았어요.


"몰라! 크로아티아 버려!"


크로아티아 일정을 발로 뻥 차버렸어요. 가뜩이나 향후 일정 때문에 골치아픈데 이렇게 끝까지 도도하게 굴다니 차라리 안 가고 만다고 딱 결정을 내렸어요. 버스 시간표를 잘 살펴 보았어요. 야간 이동을 못 하면 결국 다른 도시 가서 1박을 해야 했어요. 아니면 진짜 '꿈은 이루어진다'고 당장 동 사라예보 버스 터미널로 가서 베오그라드로 들어간 후 야간 열차를 타고 소피아나 부다페스트로 가야 했어요.


"20시 40분 류블라냐행 버스 있다!"


구 유고 연방 중 아직 유일하게 스쳐 지나가지도 않은 나라가 바로 슬로베니아였어요. 류블라냐는 하도 볼 거 없다는 말을 많이 들은 데다 여기는 정식으로 유로존에 가입한 나라라 매우 가기 싫었던 곳이었어요. 유로 쓰는 곳은 무조건 비싸요. 심지어는 몬테네그로, 코소보처럼 유로를 '빌려 쓰는' 국가들의 물가가 다른 주변 자국 화폐를 쓰는 국가의 물가보다 비쌌어요. (몬테네그로, 코소보는 유로존에 가입한 나라는 아니나 자국 화폐를 발행하지 않고 유로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슬로베니아는 빌려 쓰는 정도가 아니라 정식으로 유로존에 가입한 나라에요. 물가 비싼 것은 안 가봐도 알아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지금 다른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야간 이동이 가능한 경로는 사실상 이게 전부였어요. 


코소보까지 끝냈는데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슬로베니아 하나만 빼놓기도 그랬어요. 여기만 가면 발칸 유럽 국가 전부 다 가 보는 거에요. 그리고 슬로베니아 바로 옆은 이탈리아. 슬로베니아에서 부다페스트로 들어갈 수도 있어요. 류블라냐로 간다는 것은 1,2,3번 선택 문제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쨌든 지금 몇 번을 선택하든 류블라냐나 베오그라드로 가야 해요. 즉, 류블라냐로 가는 것은 중요한 선택을 위한 마지막 장소로 베오그라드 대신 안 가본 나라, 안 가본 도시인 슬로베니아 류블라냐로 간다는 매우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이에요.


...라고 자기최면을 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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