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정신없이 잤어요. 국경검사를 받고 또 잤어요. 정말 푹 잔 거 같았어요.
2009년 3월 14일 오후 1시. 마케도니아 스코페에 도착했어요. 버스 터미널은 그냥 그랬어요. 특별한 인상을 주는 것이 전혀 없었어요.
일단 환전을 했어요. 1유로가 63디나르였어요. 버스표를 구입하고 짐을 사무실에 맡겼어요.
"택시?"
우리를 보자 달려드는 택시기사들. 사방팔방에서 우루루 달려들었어요. 소매를 잡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20유로, 시내 전부 구경!"
스코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게 괜찮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20유로는 좀 너무 심했다 싶어서 그냥 무시하고 가려는데 계속 잡아댔어요.
"저리 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한 할아버지께서 택시기사들을 마구 쫓아내셨어요.
"택시기사, 마피아! 택시, 노!"
할아버지께서는 택시기사들을 쫓아내시고 우리를 버스 터미널 입구까지 배웅해 주셨어요. 할아버지가 쫓아내는 것을 본 택시기사들이 우리들에게 들러붙지 못했어요.
후배가 엽서를 모은다고 해서 엽서도 사고 우표도 살 겸 해서 버스 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우체국에 갔어요. 우표를 파는 창구 위에는 마케도니아어로, 아래에는 불어로 우표를 판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불어로 물어보았어요.
"우표 사고 싶어요."
직원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다른 창구를 가리켰어요. 그래서 그 창구에 가서 다시 불어로 우표를 사고 싶다고 했어요. 직원은 멀뚱멀뚱 쳐다보았어요.
"뽀슈따! 아즈 이스깜 도 꾸뿌밤 뽀슈따!"
그러자 처음 간 창구로 돌아가라고 해어요. 그래서 처음 간 창구로 돌아갔어요. 거기서 손짓 발짓 하면서 우표와 엽서를 사고 나왔어요.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몰라서 일단 버스 터미널 앞쪽 큰 길을 타고 쭈욱 갔어요.
마차도 다닐 수 있다는 표시겠죠? 큰 길 뒤쪽에는 집시들이 몰려사는 허름한 주택이 몰려 있었어요. 표지판을 보니 '자 스코폐'라고 적혀 있었어요. 이건 '스코폐를 위하여'라는 뜻. 무슨 시장 선거 하나?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어를 쓰는 마케도니아인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거리 간판은 알바니아어로 된 간판이 마케도니아어로 된 간판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었어요.
큰 길을 타고 계속 걸어가자 다리가 나왔어요.
다리의 왼쪽은 신시가지, 오른쪽은 구시가지. 딱 봐도 알 수 있었어요.
이것은 다리 왼쪽.
그리스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마케도니아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와 마케도니아는 미수교국이에요. 마케도니아에서는 우리와 수교를 맺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우방인 그리스를 생각해서 수교를 맺고 있지 않아요. 정식 명칭은 마케도니아 공화국이지만 그리스가 이 국명을 쓰는 것을 극렬 반대해서 국제 사회에서는 '마케도니아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FYROM)이 정식 국명이에요. 그리스가 극렬 반대하는 것은 단순히 '마케도니아'라는 이름 뿐만이 아니라 국기도 포함되요. 마케도니아의 국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문장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이 국기 사용도 극렬 반대.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 국기는 그냥 사용하고 있어요.
구시가지 쪽은 공사중.
자세히 보면 이래요. 뒤에 얼핏 보이는 것은 마케도니아 스코페 성.
이것은 다리에 대해 적혀 있는 거에요. 그런데 마케도니아어로 되어 있어서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다리를 건너자마자 교회와 모스크가 있었어요.
구시가지로 들어가자마자 발견한 것은 바로!
스칸데르베그 동상이었어요.
신시가지는 마케도니아어가 많았고, 구시가지에는 알바니아어가 많았어요. 왠지 신시가지에서는 마케도니아인들이 활동하고, 구시가지에서는 알바니아인들이 활동할 것 같았어요. 여기에 스칸데르베그 동상이 있다니 여기에도 알바니아인들이 정말 많이 살고 있나 봐요.
구시가지를 조금 구경하다가 스코페 성으로 갔어요.
이렇게 보면 성이 별로 안 높아 보여요. 그런데 성 아래 있는 문 높이는 성인 남성의 키보다 조금 커요. 그러니 약 2m 쯤 될 거에요. 그나마 이쪽은 많이 높은 쪽은 아니에요.
성 내부.
성에서 내려다본 스코페 시내.
성은 복구중이었어요.
성 안에 밴치가 있어서 잠깐 앉아서 쉬었다 가기로 했어요.
"어머? 어머?"
동양인 여성 세 명이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관심을 보였어요.
"웨어 아 유 프롬?"
"아이 프롬 재팬!"
"소우데스까! 와따시다치와 강코쿠진데쓰!"
고등학교 1학년때 공부한 후 한 번도 공부하지 않은 일본어. 아무리 까먹어도 '소우데스까'는 안 까먹어요. 제가 일본어를 하자 그쪽에서 매우 깜짝 놀랐어요. 다행히 일본인들이 영어를 매우 잘 했기 때문에 저는 저의 저질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쓰며 대화를 했어요. 그 분들은 무슨 자원봉사 때문에 스코페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여기는 정말 볼 것 없는 도시인데 왜 왔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여행중인데 알바니아에서 터키로 넘어가려고 여기 왔다고 했어요.
"여기 볼 것 이게 전부인가요?"
"예. 이 도시 볼 것 없어요."
정말 명쾌한 대답이었어요.
일본인들이 간 후, 우리도 일어났어요. 가만히 앉아있는데 바람이 계속 불어서 추웠어요.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았어요. 우리가 이제 갈 곳은 구시가지. 내려가면서 아까 성 입구에서 보았던 모스크에 들리기로 했어요.
안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어요.
구시가지로 돌아왔어요.
출출해서 저녁을 먹어야할 것 같았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은 정말로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어요. 프리슈티나에서 아침 일찍 나오느라 아무 것도 못 먹었고, 여기 와서도 돌아다니느라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그래서 식당에 들어갔어요.
"뭐 먹을래요?"
여기 현지 음식은 아는 것이 없었어요. 메뉴를 보니 케밥과 쿄프테가 전부였어요.
"왜 여기에 구야쉬가 있지?"
구야쉬는 헝가리 전통 음식이에요. 사람들이 헝가리로 배낭여행을 많이 가면서 이 음식은 우리나라에 꽤 잘 알려졌어요. 그 이유는 바로 맛. 이게 우리나라 뼈다귀 해장국 국물 맛과 비슷하다고 해서 느끼한 유럽 음식에 지친 우리나라 사람들 입에 잘 맞는다고 했어요. 그 구야쉬를 마케도니아에서 팔고 있었어요.
후배는 무엇을 먹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냥 쿄프테에 구야쉬 시켜 먹어요."
어차피 봐도 모르는 메뉴...케밥은 그다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케밥을 먹었을 때 좋은 기억은 없었어요. 그냥 이걸 왜 비싼 돈 주면서 사먹어야하나...하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래서 차라리 고기 경단인 쿄프테에 구야쉬나 시켜 먹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어휴...이거 왜 이렇게 느끼해?"
쿄프테는 너무 느끼했어요. 구야쉬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내심 얼큰한 국물을 기대했는데 전혀 얼큰하지 않았어요. 그냥 기름 둥둥 뜬 붉은 고기 국물이었어요.
"이건 헝가리에서 만든 게 아니라 여기로 오면서 변형된 거라서 그런가?"
어쨌든 배를 채웠어요. 아직 버스 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시장을 돌아다녔어요.
"어? 이건 또 왜 여기서 팔아?"
코소보에서 보았던 사람의 초상화와 아래 'Bac, u kry!'라고 적힌 열쇠고리를 팔고 있었어요.
"이거 얼마에요?"
"100디나르."
"이게 백 디나르?"
왠지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흥정을 시도했어요.
"80 디나르."
"오케이!"
너무 흥정이 쉽게 끝났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50 디나르를 불렀어요. 바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80 디나르에 구입하고 신시가지로 갔어요.
구시가지와는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른 신시가지. 앞의 저 시계는 예전 기차역이었대요. 스코페에 대지진이 나서 엄청난 인명 피해 및 재산 피해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진 때문에 저 시계도 멈추었대요. 그래서 저 시계가 가르키고 있는 시각은 당시 지진이 났던 시각이래요.
테레사 수녀 동상은 신시가지에 있었어요. 그러나 사진은 찍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티라나에서 테레사 수녀 동상을 안 찍었기 때문이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스코페에서 찍을 수 있었지만 날이 어두워져서 카메라가 자꾸 흔들렸어요. 그래서 그냥 안 찍기로 했어요. 비록 테레사 수녀 동상은 전부 찍지 못했지만 스칸데르베그 동상 사진은 티라나, 프리슈티나, 스코페에서 찍었기 때문에 매우 만족스러웠어요.
버스 터미널 내부. 그냥 버스 터미널 답게 생겼어요. 무언가 놀랄만한 것은 없었어요.
이제 이스탄불로 다시 돌아갈 시간. 후배와는 이스탄불에서 헤어지기로 했어요. 이제 저 혼자의 여행이 시작될 거에요. 무언가 많이 아쉽고 섭섭했어요. 그래도 갈 길은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