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인을 하기 위해 리셉션으로 갔어요.
'어? 여기 보트 투어도 있네?'
원래 계획은 자전거를 타고 섬 바깥 주요 유적도 다 둘러보는 것이었어요. 이날 열심히 자전거를 밟아 다 구경한 후, 다음날은 숙소에서 푹 쉬다가 방콕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어요. 만약 기차가 연착되지만 않았다면 이 계획대로 되었을 거에요. 그러나 기차는 연착했고, 땡볕 아래에서 숙소까지 걸어왔더니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게다가 자전거를 타고 원래 계획한대로 섬 한바퀴를 돌고 섬 바깥쪽까지 보고 오려면 지금부터 정신없이 밟아도 시간이 부족했어요.
"보트 투어 얼마에요?"
"200바트에요. 보트 투어 신청하시겠어요?"
매우 망설여졌어요. 그냥 오늘 보트 투어를 하고 내일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다닐까?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타면 50바트였어요. 선착장에서 자전거를 대여하면 40바트. 10바트 더 비쌌어요. 10바트를 아끼기 위해 1.2km 를 걸어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게다가 만약 여기에서 짐도 맡아준다면 그렇게 크게 나쁜 조건도 아니었어요. 체크아웃할 때 짐을 맡기고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돌아다닌 후 돌아와서 짐을 챙겨나가는 것도 꽤 괜찮은 일정이었어요.
"일단 조금 생각해 볼께요."
이틀간 자전거를 빌려서 타면 100바트. 100바트 내고 당장 열심히 달릴 것인가? 일단 방에 들어가 샤워부터 하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물을 틀자 뜨뜻한 물이 쏟아져 나왔어요. 처음에는 온수를 틀어준 것 아닌가 하고 냉수로 돌려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어요. 너무 날이 뜨거워서 물이 뜨끈뜨끈하게 데워져 있었어요. 샤워를 하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일단 휴식을 취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기는 글렀다.'
리셉션으로 갔어요.
"오늘 보트 투어 신청할께요. 그리고 내일 체크아웃 후 짐 맡기고 자전거 빌릴 수 있나요?"
"예, 자전거는 50바트에요."
200바트를 지불하고 보트 투어를 신청했어요. 보트 투어를 참가하기 위해서는 3시 50분까지 로비로 와야 한다고 알려주었어요. 3시 50분에 로비로 오면 뚝뚝이 선착장까지 태워갈 것이고, 뚝뚝 비용 역시 보트 투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시각을 확인해보니 2시 50분.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어요. 방에 들어가서 쉴까 하다가 주변이나 걸어서 조금 둘어보기로 했어요.
여러 차례 외국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여행 돌아와서 여행기를 쓰면서 체득한 노하우가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무조건 이름부터 사진으로 찍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관람하며 제대로 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하려면 다닐 때 몇 걸음씩 더 걸어야 해요. 그렇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여행기를 쓸 때 엄청나게 고생하게 되요. 유럽에 성당이 한 두 곳도 아니고, 이슬람권에 모스크가 한 두 곳도 아니고, 동남아시아에 절이 한 두 곳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정말로 많고, 하나하나 다 들어가다보면 비슷비슷한 사진이 엄청나게 많이 쌓여요. 성당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이슬람권의 모스크는 진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나중에 어느 모스크가 어느 모스크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종종 생겨요. 유명한 곳은 인터넷 검색을 하고 가이드북을 뒤져서 어떻게 이름을 찾을 수 있지만, 유명하지 않은 곳은 끝까지 이름을 못 찾아내는 경우도 있어요. 지도를 보며 순차적으로 경로를 따라가며 파악해보려고 해도 상당히 어려워요. 그래서 기록과는 별도로, 사진을 찍을 때 무조건 이름부터 사진으로 찍고 그 다음에 본격적인 관람과 제대로 된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이 매우 좋아요.
아유타야는 유적이 정말로 많아요. 지도를 보니 온통 유적이었어요. 별로 크지도 않은 섬인데 절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지어놓았어요. 그리고 그 절 모두 파괴되었어요. 아유타야의 유적지는 거의 전부 절터에요. 멀쩡한 절이라면 그나마 외관을 보고 어떻게 분간을 해내겠지만, 이건 멀쩡한 절이 아니라 절터이다보니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거였어요. 이미 오는 길에 유적을 하나 보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더더욱 무조건 이름을 먼저 찍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왓 랏차 부라나 Wat Ratcha Burana 로 걸어갔어요.
왓 랏차 부라나는 돈을 내고 들어가야하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그 옆에 있는 유적은 무엇인지 표지판을 살펴보았어요.
왓 랏차 부라나 바로 옆은 아유타야에서 매우 유명한 왓 마하탓 Wat Mahathat 이었어요.
"밖에서 이렇게 다 보이는데 꼭 안에 들어가야 하나?"
왓 마하탓 역시 유료. 게다가 여기는 입장료도 저렴하지 않았어요. 왓 마하탓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아유타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나무 뿌리에 둘러쌓인 불상 머리. 밖에서 둘러보는데 내부가 너무 잘 보였어요. 안 보이는 것이라고는 불상 머리 뿐이었어요. 안에 들어가서 돌아다닌다면 무언가 다른 느낌이 있겠지만, 아무리 보아도 안에 들어가야하는 특별한 이유라면 그 불상 머리를 보기 위해서 뿐 같아 보였어요.
하늘에 구름이 있었어요. 정말 의미없는 구름이었어요. 햇볕은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어요. 그냥 파란색만 있으면 심심해 보이니까 장식으로 몇 개 매달아 놓은 것 같았어요.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또 땀이 비오듯 쏟아졌어요. 내 자신이 고체인지 액체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땀이 좍좍 흘러 나왔어요. 이러다 땀이 아니라 육즙까지 뿜어져 나올 것 같았어요.
지금 이 순간, 이 표지판에 한국어가 없어서 참 자랑스럽다.
유적지에서 하면 안 되는 행동들을 알려주는 표지판에는 영어, 일본어, 태국어로 설명이 적혀 있었어요. 한국어 설명이 없는 이유는 아유타야로 오는 한국인들이 적어서일 거에요.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오죽 유적지에서 온갖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저렇게 팻말을 만들어놓았을까 싶었어요. 사실 영어는 충분히 이해가는데, 일본어와 태국어로 적혀 있는 것은 꽤 의외였어요.
'내일 들어가봐야지.'
일단 여기까지 왔는데 안 들어가볼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나중에 가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실망하더라도 들어가서 직접 보는 것이 나았으니까요. 그리고 외부에서 보았을 때 입장료 내고 들어가서 그렇게 실망할 것 같지는 않았어요. 밖에서 보았을 때 분명히 폐허였어요. '왓' 으로 시작했으니 보나마나 절터. 그렇지만 밖에서 보아도 충분히 멋있었어요. 안에 들어가면 밖에서 대충 둘러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을 것 같았어요.
숙소에서 너무 멀리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반대쪽으로 걸어가자 이번에는 시장이 나왔어요.
시장에 물건은 진열되어 있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곳이 시장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너무나 고요했어요.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만 없다면 너무나 인적도 없고 조용해서 텅 빈 마을에 홀로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어요. 아무리 날이 덥다고 해도 시장에 물건만 있고 사람이 이렇게 없는 것은 또 처음이었어요. 아무리 장사가 안 되는 시장이라 해도 최소한 장삿꾼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장삿꾼들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저기도 절터가 있네?"
'저거까지만 보고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3시 27분이었어요.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정도. 딱 저 절터까지만 보고 숙소로 돌아가면 가볍게 샤워하고 보트 투어를 하러 갈 수 있었어요.
"헉! 저건 뭐야!"
이 절터의 이름은 왓 수완나와스. Wat Suwannawas. 이 절터 앞에 서자마자 입이 쩍 벌어졌어요. 파괴되다 만 불상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반쯤 파괴된 불상이 없었다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에요. 불상만 없었다면 그냥 작은 쩨다가 있는 절터 정도로만 여겼을 거에요. 왓 마하탓, 왓 랏차 부라나에 비하면 정말 작은 절터. 규모만 놓고 보면 크게 둘러보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곳이었어요. 스윽 한 번 훑어보고 지나가도 무방한 규모였어요. 이렇게 작은 규모의 절터에 시선이 확 꽂힌 것은 전적으로 반쯤 파괴된 불상이 만들어내고 있는 묘한 분위기였어요.
길을 건너 절터로 들어갔어요.
아유타야.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였지만 버마군에게 점령당하며 철저히 파괴된 도시. 이 별 것 아닌 작은 절터가 그것을 확실히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었어요.
절터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기도를 드리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 불교 관련 석상조차 부서져 있었어요.
아유타야 도착하고나서 벌써 두 번 감탄하는구나!
처음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걸어오는 길에 그 더위에 감탄했어요. 그리고 지금, 왓 수완나와스를 보며 이렇게 폐허가 된 절에서 풍겨져 나오는 묘한 분위기에 취해 또 한 번 감탄하고 있었어요. 왓 수완나와스 뿐만 아니라 기차역에서 지금 여기까지 오며 계속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어요. 왓 수완나와스를 바라보고 있자 전날 방콕 - 특히 왕궁과 왓 프라깨우를 보며 느꼈던 나쁜 감정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전날 방콕을 구경하며 태국에 대한 정나미가 뚝 떨어졌어요. 하지만 여기에 오니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 같았고, 태국에 대한 호감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그래, 방콕만 아니면 되는 거구나!'
어떻게든 방콕에 머무를 시간을 줄인다면 태국 여행도 나름 즐겁게 보낼 수 있겠어!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어요.
3시 40분. 숙소로 돌아왔어요. 너무 더워서 그냥 나갈 수 없었지만, 시간이 마땅찮았어요.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옷을 잡아뜯어내듯 벗어던지고 찬물만 끼얹지고 다시 옷을 주워 입었어요. 옷을 입고 나오자마자 다시 덥고 땀이 나는 것 같았어요. 보트 투어고 나발이고 그냥 방에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밖으로 나오니 꽃이 보였어요.
리셉션으로 갔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어요. 5분 정도 지난 후, 뚝뚝이 왔어요. 이 투어 패키지에는 뚝뚝 및 보트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뚝뚝 요금은 왕복이었어요.
"이따 저쪽에 야시장 있으니 저녁에 한 번 가봐요."
주인 아주머니께서 잘 보고 오라고 배웅해주시며 야시장 위치를 알려주셨어요.
뚝뚝을 타고 선착장으로 갔어요.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뚝뚝 기사가 잠시 기다리라고 영어로 말했어요. 우리가 갈 투어에 총 4명이 참여하는데, 그 중 두 명이 아직 안 왔으니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했어요.
'저기라도 잠시 들어갔다 올까?'
선착장 맞은편에도 무언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었어요. 그러나 뚝뚝 기사가 두 명이 조금 있으면 곧 올 거라고 말해서 계속 선착장에서 그 두 명을 기다렸어요.
선착장 바로 맞은편에는 절이 있었어요.
그리고 강을 따라 부레옥잠 무리가 떠내려오고 있었어요.
'이 사람들 언제 오는 거지?'
먼저 보트에 타라고 해서 보트에 올라탔어요. 보트에 올라타서 두 명을 기다리는데 계속 오지 않았어요.
"여기는 진짜 열대 밀림이다!"
왠지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어디에선가 불시에 정글 게릴라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어요. 월남전 영화에서나 보던 그 밀림과 매우 비슷한 분위기였어요.
"저기서 사람들 뭐 하는 거지?"
맞은편 멀리서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 하고 있었어요. 잘 보이지 않아서 카메라 줌을 이용해 사진을 찍은 후 확인해 보았더니 무언가를 촬영하고 있는 현장이었어요.
"오! 물 속으로 들어갔어!"
촬영스태프들이 먼저 강물 속으로 들어간 후, 임산부 분장을 한 여자가 촬영을 하기 위해 강물 속으로 들어갔어요. 자세히 보니 촬영 스태프들은 좋은 장면을 위해 진짜 머리만 내놓고 온몸을 강물 속에 담그고 있었어요.
"저러다 감전되는 거 아니야?"
영상 장비를 들고 물 속에 푹 잠겨 있는 스태프들을 보자 감전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1.5V 배터리 넣어서 작동하는 장비 같아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저 장비가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도 궁금했어요. 저 스태프들의 한쪽 뇌는 촬영에, 다른 한쪽 뇌는 장비의 침수를 걱정하지 않을까? 저렇게 물에 푹 잠겨서 촬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더욱 신기했어요.
4시 20분. 드디어 두 명이 왔어요. 둘은 태국인 커플이었는데, 딱 봐도 신혼부부 티가 났어요. 남자는 키가 매우 컸어요. 남자, 여자 모두 매우 잘 생겼고, 예의가 바랐어요. 우리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어요. 사실 그 사람들이 늦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이 늦었다고 해서 전혀 화가 난 상태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숙소 주위를 둘러본 후 바로 와서 저도 약간의 쉴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두 사람이 늦게 오는 덕분에 푹 쉰 데다, 같이 다녀야하는 태국인들이 예의바르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제 시각에 온 무례한 사람과 늦게 온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후자가 좋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