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겨울 강행군 (2010)

겨울 강행군 - 17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좀좀이 2012. 2. 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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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러면 일단 안경 맞추러 가자."

"아 몰라! 이 거지 같은 나라, 당장 떠날 거야!"


일단은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친구를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어요. 친구는 무작정 당장 베오그라드를 떠난다고 했는데 떠난다고 될 일이 아니었어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상황에서 몰타로 돌아갈 방법도 마땅찮았어요. 무조건 이 망할 베오그라드를 떠나자고 하는데,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가려면 일단 베니스로 가야 했어요. 베니스로 가서 무작정 공항으로 간 후 표를 구해서 몰타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필 이 시기는 성수기 시즌이라 표가 없었어요. 두 번째, 원래 여행 경로를 앞당겨서 당장 위로 올라갈 경우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높은 물가. 차라리 여기에서 일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안경 문제 만큼은 해결해야 했어요. 여행 일정을 어떻게 할 지는 그 다음 문제.


"야, 여기 넘어가면 물가 정말 비싸. 그리고, 너 여기서 몰타 돌아가는 것도 문제잖아. 당장 보이는 것도 없는데 어떻게 돌아갈래? 여기에서 몰타까지 바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단 말이야."


일단 친구를 진정시키고, 무조건 당장 떠나겠다는 것은 말렸어요. 어차피 당장 떠날 수도 없었던 것이 세르비아 디나르가 한 푼도 없었거든요.


커피를 두 잔 주문했어요. 아마 주인 아저씨께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친구가 매우 안 좋은 일을 겪었음은 눈치채셨을 거에요. 현지화도 없는데 커피를 주문한 이유는 카페에서 역내 환전소가 문을 열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였어요. 역내 환전소에서 환전을 해서 커피 값을 내고 기차표를 산 후 시내로 나갈 계획이었어요.


솔직히 저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어요. 이건 분명 친구가 제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어요. 동유럽의 기차는 매우 위험하므로 귀중품은 반드시 품에 지니고 자라고 몇 번에 걸쳐서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친구가 괜찮다고 했고, 결국 일이 터진 것이었어요. 안경도 이 동네에서는 나름 비쌀 테니 안경집에 넣어서 품에 지니고 자라고 했어요. 하지만 친구는 불편하다며 가방에 집어넣고 잤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친구가 진정하고 안경을 맞추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계속 친구를 진정시키고 잘 달랬어요. 친구는 어쨌든 여기는 당장 뜰 거라고 하면서 계속 씩씩 거렸지만 흥분은 가라앉은 것 같았어요. 카페 구석을 보니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가 있었어요. 그래서 헝가리에서의 민박을 검색해 보려고 했으나 한국어 자판이 지원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ctrl+c -> alt+tab -> ctrl+v 를 해가며 겨우 '헝가리 민박'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했지만 검색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헝가리에서의 숙박이 해결된다면 친구가 원하는 대로 당장 부다페스트로 넘어가도 상관 없었지만, 부다페스트에서의 숙박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는 반드시 오늘 밤 9시에 타야 했어요.


환전소가 문을 연 것을 확인했어요. 친구에게 기다리라고 한 후, 매표소에서 부다페스트행 기차표 요금을 확인하고 넉넉하게 현지화를 환전했어요. 카페로 돌아와 커피값을 내고 친구를 데리고 매표소로 갔어요.


"부다페스트행 2장이요."

일단 기차표 2장을 샀어요. 이제 친구 안경을 해결해야 했어요.


"잘 따라와."

한 가지 다행이라면 제가 베오그라드는 몇 번 온 적이 있어서 역에서 시내까지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친구 손을 꼬옥 잡고 시내를 향해 걸어갔어요.


'에휴...이게 뭐하는 짓이냐...내가 칙칙한 남자 손을 이렇게 꼬옥 잡고 베오그라드 거리를 걸어야 하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베오그라드 거리를 안경 잃어버린 고등학교 동창 남자 손을 꼬옥 잡고 가는 것은 정말 기분이 좋은 일이 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친구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친구를 데리고 시내로 가서 안경점에 갔어요.

"안경 사러 왔어요."

"종이."

"종이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하여간 무슨 종이를 달라고 했어요. 서로 대화가 잘 안 통해서 한참 고생했어요. 그래서 무슨 종이가 필요한지 알아냈어요.


여기에서 안경을 맞추기 위해서는 시력검사표를 받아와야 했어요. 안경점에서 시력검사 해주고 바로 안경 맞추어주는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 우리가 간 곳에서는 시력검사는 안 해주는 안경점이라 다른 곳에서 시력검사표를 받아오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밖으로 나와 시력검사를 받을 수 있는 안경점을 찾아 헤맸어요.


겨우 시력검사표를 받아들고 안경점에 다시 갔어요.

"2주 후에 오세요."

"2주 후요?"

안경을 제작하려면 2주일 걸린다고 했어요. 그래서 또 한참을 헤매서 다른 안경점을 찾아갔어요.


"우리가 오늘 여기서 부다페스트 가야 하는데 안경 바로 되나요?"

"예, 되요."

그래서 안경을 겨우 맞추었어요. 한국에서 공짜로 주는 테 하나 구입하는 데에만 몇 만원 들었고, 전체 다 합쳐보니 안경 하나에 얼추 20만원 들었어요. 안경점에서는 안경알이 매우 튼튼해서 절대 기스가 나지 않는 안경알이라고 했어요.


안경을 다 맞추고 나니 정오가 넘었어요. 오전 내내 친구 안경 맞추느라 돌아다녔어요. 일단 밥을 먹으로 왔던 길을 돌아갔어요.


"너 이거 기억 안 나지?"

"당연하지. 아까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었대니까."


점심은 동네 식당에서 간단하게 피자를 먹었어요. 친구는 안경을 맞추고 밥도 먹으니 기분이 좀 누그러진 것 같았어요.


"그래도 왔는데 구경이나 조금 하자."


그래서 다시 시내로 나갔어요.



모스크바 호텔. 크게 변한 것은 없었어요.



세르비아 국회의사당도 그대로였어요. 옆에는 무슨 공연을 할 예정인지 무대를 설치하고 있었어요.



이것은 국회의사당 맞은편 건물. 이게 무엇인지 까먹었어요.



베오그라드 우체국. 이것도 변한 게 없었어요.


"안경테 엄청 불편하네."

친구가 안경을 벗어서 안경테를 맞추기 시작했어요.

"아우...이 망할 나라! 기스 안 나는 안경알이라고 하더만 벌써 기스 났네."

친구가 안경을 보며 화를 내었어요. 친구 말대로 안경알에 기스가 나 있었어요. 분명 아까 안경점에서 절대 기스 안 나는 안경알이라고 같이 들었는데? 하지만 화를 낸다고 기스가 사라질 리는 없었어요. 그리고 그나마 이 안경이라도 없으면 친구는 말 그대로 눈 뜬 장님.


어쨌든 성 마르코 교회로 갔어요.



성 마르코 교회 (Church of St. Marko). 이것도 전혀 변한 게 없었어요.



성 마르코 교회를 뒤로 하고 



사바 교회 (Church of St.Sava)로 갔어요. 이건 뭐 하도 커서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멀리서도 보여요.



제가 이 교회에 붙여준 별명은 '슈퍼 뚱땡이 교회'. 현재 발칸 유럽에서 가장 큰 동방정교 교회에요.


교회 내부 모습 사진들.



여전히 공사중. 오직 성금만으로 짓는다더니 역시나 공사중이었어요.



완성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한쪽은 일단 교회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전에 왔을 때보다 조금 더 공사가 진척되었어요. 그런데 이 속도로 진척되면 정말 끝도 안 보일 것 같았어요. 서유럽에는 가우디 성당, 동유럽에는 사바 성당...



이게 얼마나 크냐 하면 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람이 저 노란 작업차보다 작아요. 노란 작업차를 가지고 높이를 비교해보면 얼마나 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이 사진을 24mm로 찍었는데 전경을 다 찍을 수가 없었어요. 참고로 이 교회 건물은 가로가 높이보다 더 커요. 그래서 제가 별명을 슈퍼 뚱땡이 교회라고 지어준 거에요.


성당 모금함에 '제발 빨리 좀 완공되라'는 마음에 세르비아 동전 한 개를 집어넣었어요.


사바 교회에서 나와서 돌아다니다 마트를 발견했어요.

"우리 마트나 구경해보자."


"우와!"

역시 세르비아는 동유럽 관광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에요. 발칸반도에서 저렴한 물가의 북방한계선은 세르비아에요. 유로를 쓰는 슬로베니아는 말할 필요도 없고 헝가리 물가도 저렴하지 않아요. 세르비아까지는 정말 저렴한 물가. 그래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면 마지막 보급지가 바로 세르비아에요. 마트에 가니 정말 물가가 저렴하다는 것을 확 느낄 수 있었어요. 유로를 쓰는 몰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쌌어요. 친구와 과자, 음료수, 물을 마구 구입하고 나와 밖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어요. 몰타에서의 굶주림을 여기서 다 해결하려고 했어요.

"이 마트 몰타에 떼어 가고 싶다. 몰타 물건 살 것도 없는데 물가만 더럽게 비싸."

친구도 과자와 음료수를 마구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참 만족해하는 것 같았어요.


둘이서 마트 앞 벤치에 앉아 과자와 음료수를 열심히 처묵처묵 처먹고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돌아다니다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어요. 그래서 간단히 샌드위치 하나 사먹고 칼레메그단 성채로 갔어요.


성채에서 사바 강과 도나우강을 구경하고 벤치에 앉았어요. 가만히 앉아서 쉬려는데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어요.

"우리 그냥 기차역 카페에서 시간이나 때우자."

대충 볼 것은 다 봤어요. 친구도 그러자고 했어요. 그래서 기차역 카페에 다시 갔어요.


커피를 시켰어요. 아침에도 느꼈지만 유독 풀냄새가 강하게 나고 걸쭉한 세르비아 커피도 여전했어요. 이 맛...정말 익숙해지기 어려운 맛이었어요. 정말 전에 왔을 때와 변한 것이 눈꼽만큼도 없었어요. 변한 거라고는 딱 하나 - 국회의사당 옆에 무대가 설치되었다는 것이었어요.


커피를 조금씩 마셔가며 담배만 뻑뻑 태워댔어요. TV에서는 One Republic 의 All The Right Moves 가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친구는 카페에 있는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기 시작했어요.


친구가 30분 정도 인터넷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는데 주인 아저씨가 친구를 불렀어요. 부른 이유는 인터넷 사용료를 내라는 것이었어요.

"아우...쓸 때는 말도 안 하고 유료라고 적혀 있지도 않아 있는데 왜 돈 내라고 xx이야!"

친구가 다시 머리 끝까지 화가 났어요. 갑자기 막 화내고 소리치는 친구.

"야, 있어봐!"


주인 아저씨께 갔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르비아 디나르가 없다는 것. 세르비아 디나르를 커피값만 남기고 다 써 버렸어요. 인터넷 요금은 50디나르인가 그랬어요. 하여간 한국 돈으로는 아주 푼돈. 1 세르비아 디나르가 15원. 확실한 것은 1유로도 안 되는 요금이었어요. 문제는 세르비아 디나르가 없었기 때문에 돈을 내려면 환전을 해야 하는데 유로는 기본이 5유로에요. 지폐만 환전해주기 때문에 5유로를 환전해야 하는데 그러면 졸지에 500 디나르가 생겨요. 이건 세르비아 여행에서 매우 큰 돈이었어요. 기차 시간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고, 주변 가게는 전부 문을 닫았어요. 정말 골치 아픈 상황. 주인 아저씨께 사정을 해야 하는데 주인 아저씨가 영어를 잘 몰랐어요.   제가 막 더듬더듬 되도 않는 세르비아어와 영어를 섞어 이야기하는데 주인 아저씨께서는 계속 뭐라고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친구는 자리에서 혼자서 마구 성질내고 있고 저는 아저씨와 서로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정말 해괴한 상황. 이런 희안한 상황이 벌어지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저와 주인 아저씨를 쳐다보며 주인 아저씨께 뭐라고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주인 아저씨께서는 카페 안에 있던 한 건장한 청년을 불렀어요.


"무슨 일이에요?"

건장한 청년은 영어를 할 줄 알았어요.

"지금 세르비아 디나르가 없어요. 2유로 동전으로 지불하면 안 되나요?"

어떻게든 또 환전해야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어요. 환전소가 안 열었다면 5유로를 내야할 상황. 단순히 환율만 놓고 계산한다면 2유로 동전 지불하는 것도 카페 주인 아저씨에게는 매우 크게 남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동전은 환전 자체를 잘 안 해주고, 해준다 해도 반값 이상 후려쳐 버려요. 거기다 굳이 꼭 현지화로만 받아야겠다는 가게도 매우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흥정을 해야만 했어요. 하지만 제가  2유로 동전으로 지불하겠다는 말을 세르비아어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어요. 건장한 청년은 주인 아저씨께 뭐라 뭐라 이야기했어요.

"그래도 된대요."

"친구가 안경을 도둑 맞아서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어요. 그래서 저러는 거라고 좀 전해주시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건장한 청년은 다시 주인 아저씨께 뭐라고 말했어요. 주인 아저씨께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았다고 하셨어요. 주인 아저씨께 2유로 동전을 드리자 갑자기 주인 아저씨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문제 있나요?"

"거스름돈 받으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친구가 계속 한숨 푹푹 내쉬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카페에서 아침에도 민폐를 끼치고 저녁에도 민폐를 끼치고 있었어요. 제가 카페 주인이었다면 정말 쫓아내고 싶었을 거에요. 오늘 시작부터 끝까지 재수 없는 일만 당한 친구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꼭지 돈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카페 주인 입장에서는 왜 남의 카페 와서 행패냐고 생각했을 거에요. 카페에서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민폐를 끼쳤기 때문에 거스름돈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받을 필요도 없었어요. 받아서 쓸 곳이 없었으니까요.


테이블로 돌아가려는데 청년이 저를 불렀어요.

"주인 아저씨가 이제 인터넷 마음껏 써도 된대요."

"예."


테이블 앞에 앉았어요.

"이 망할 세르비아! 아 완전 거지 같아!"

"야! 시박 조용 좀 해라!"

친구가 화난 이유는 이해가 되었지만 계속 그러니 저도 화가 났어요.

"야, 그러면 돈 안 내고 튈래? 저 아저씨가 지금 디나르로만 받겠다고 하면 우리 망하는 거 몰라? 유로 지금 환전해서 그거 어떻게 다 쓸래? 겨우 흥정해서 2유로로 막고 왔구만. 그리고 너 그렇게 자꾸 소리치고 엉뚱한 데에다 화내다가 시비라도 붙으면 어떻할래? 여기 영어도 안 통하고 가뜩이나 우리는 여기서 외국인인데 뭘 어떻게 하려구? 그리고 여기 아저씨가 너 안경 훔쳐갔냐? 화나는 건 이해한다만 일 커지게 만드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너도 외국 여행 다녀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제가 낮은 목소리로 화를 내자 친구가 미안하다고 했어요.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아까 도와준 청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요. 그 청년은 마케도니아인이었고, 이라크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어요. 모처럼 휴가를 받아 고향에 들렸다가 부다페스트 여행을 가는 중이라고 했어요.


드디어 기차 탑승 시각이 되었어요. 기차에 올라탔어요. 제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도시 베오그라드에서 친구가 사고를 당해 결국 기분 다 상하고 떠난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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