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겨울 강행군 (2010)

겨울 강행군 - 16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좀좀이 2012. 2. 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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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베오그라드 가는 것은 저도 처음이었어요. 기차에 타서 양말을 갈아신고 잠을 잘 준비를 했어요. 기차에 사람이 없어서 둘이 한 칸에 들어가 의자에 드러누워 잘 수 있었어요.


"야, 귀중품 잘 챙겨."

"알았어."

"품에 지니고 자."

"괜찮아. 가방에 자물쇠 채웠잖아."


친구에게 귀중품은 최대한 몸에 지니고 자라고 했지만 친구는 몸에 지니고 자면 불편해서 잘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래도 여권과 돈이 든 목걸이 지갑은 목에 걸고 옷 속에 집어넣은 후 잤어요. 귀찮음과 피로가 팍팍 느껴지는 친구의 말에 그냥 놔두었어요. 저는 매일 그랬듯 귀중품을 전부 얇은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잠근 후, 외투를 잘 잠그고 그 위에 두꺼운 점퍼를 잘 껴입고 의자에 드러누웠어요.


곤히 자고 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일어나보니 기차는 불가리아-세르비아 국경에 도착해 있었어요. 먼저 불가리아 출국 심사. 기차 이동할 때 좋은 점은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심사를 해서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실내에 가만히 앉아서 심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심사도 버스로 통과할 때보다 훨씬 느슨했어요.


"야, 일어나! 국경심사!"

친구를 거칠게 흔들어대자 겨우 일어났어요.

"국경심사 받아야지."

국경심사 받을 때만큼은 일어나 있어야 하는데 친구는 여권을 꺼내더니 다시 잠자기 시작했어요.

"에휴..."

직원들이 오자 저와 친구의 여권을 건네주었어요. 출국심사에서는 특별한 것이 없었어요.


이제 세르비아 입국심사. 친구를 다시 꺠웠지만 친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어요. '어어어' 거리다가 바로 잠들었어요.

"아이그..."

깨우는 것은 포기. 일단 제가 여권 두 개 제출한 다음에 만약 친구의 입국심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 깨우기로 했어요. 복도에서 멀리서부터 구둣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Passport control."

무표정한 얼굴로 여권 두 개를 건넸어요. 자다 일어나 눈이 부어 있고 뻑뻑했어요.

"이 여권 누구꺼야?"

"쟤꺼."

친구를 흔들어 깨웠어요. 친구는 또 '어어어'하며 정신을 못 차렸어요. 친구의 얼굴을 확인한 직원은 별 이야기 없이 여권을 넘겨보기 시작했어요. 코소보 입국 기록도 없고 일본 및 EU 국가 입출국 기록이 있는 여권이라 전혀 긴장되지 않았어요.


철컹


여권에 도장을 찍고 여권을 돌려주었어요. 선명하게 잘 찍힌 세르비아 입국 도장을 확인하고 친구를 다시 깨웠어요.

"야, 여권 집어넣어."

"응? 국경심사 끝났어?"

"그래, 임마. 여권 잘 집어넣어."

친구는 목걸이 지갑에 여권을 집어넣고 다시 골아떨어졌어요. 저도 이제 마음놓고 잘 수 있었어요. 기차의 종점은 베오그라드. 자다가 도중에 못 내려서 엉뚱한 곳에 내릴 일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해서까지 우리가 못 일어나면 누군가 알아서 깨워주게 되어 있었어요.


자려고 누웠는데 그제서야 이 기차 승객들의 입국심사가 다 끝난 것 같았어요. 서로 특이사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한국인 2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구둣발이 기차 밖으로 향했고,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기차 방문을 잠글 수 없었지만 친구는 백팩 지퍼를 자물쇠로 물려놓았고, 저는 모든 귀중품을 품 안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어요. 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은 후 다시 잠을 청했어요.


어두컴컴한 새벽.


한참 자다가 깨어났어요. 시계를 보았어요. 베오그라드 도착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어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기차 화장실로 향했어요. 역시나 후줄근한 기차라 화장실 시설이 낡은 것은 당연하고 물도 삘삘삘 나왔어요.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까지 감았어요. 기차 화장실이 매우 좁다는 점은 화장실에서 씻을 때 오히려 장점이었어요. 한 발로 버튼을 밟고 한 발은 뒷벽에 대고 한 손은 앞벽에 대면 마구 흔들리는 기차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씻을 수는 있어요. 그래도 기차가 흔들려서 머리를 감다가 수도꼭지에 몇 번 머리를 박았어요.


간단히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후 객실로 돌아왔어요. 어두컴컴한 실내. 정말 너무 어두워서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의자에 앉아 가방에 수건을 우겨넣고 구석에 기대 졸았어요.


"베오그라드!"

역무원이 우리를 깨웠어요. 친구를 흔들어 깨우고 가방을 짊어맸어요.


"내 안경!"

"응?"

"내 안경 없어졌어!"

"야, 잘 찾아봐."

"진짜 없어!"


순간 머리 속에 든 생각은 딱 두 개였어요.

'아...시박...'

'설마 안경을 훔쳐가겠어.'


"야, 내 자물쇠 잘려 있어!"

"뭐!"


첫 번째가 맞았어요. '아...시박...'


자물쇠가 잘려 있었다면 이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어요.


"야, 카메라랑 전자사전 없어졌어!"

제 가방을 열어보았어요. 분명 뒤진 흔적이 있기는 했는데 가방을 다 뒤져보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어차피 제 가방 속에는 기념품 몇 개와 옷가지 밖에 없었어요. 귀중품은 전부 품에 지니고 잤기 때문에 강도가 아닌 이상 분실할 수가 없었어요.


"뭐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램프를 든 역무원이 기차 안을 돌아다니다 우리를 발견했어요.

"친구가 안경 잃어버렸어요."

역무원은 의자 아래를 램프로 비추어 주었어요. 당연히 아무 것도 없었어요.

"빨리 내려."

일단 가방을 다시 꾸리고 기차 밖으로 나갔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안경을 도둑맞았는지 잃어버린건지 확실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왠지 누가 훔쳐갔을 거 같았어요.


"아...개새끼들! 훔쳐갈 게 없어서 안경을 훔쳐가냐!"

친구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손에 들고 나온 짐을 바닥에 내팽겨쳤어요.

"아놔...진짜 내 안경 훔쳐간 새끼 잡히면 죽여버린다. 이건 살인이나 다름 없어! 안경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한단 말이야!"

훔쳐간 도둑놈이 당연히 잡힐 리 없지...벌써 멀리 튀었을 텐데...


친구는 시력이 매우 안 좋아서 안경을 끼지 않으면 앞을 분간할 수 없다고 했어요. 카메라와 전자사전을 잃어버린 것보다 당장 안경을 잃어버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더 분노하고 있었어요. 친구가 선물로 주기 위해 산 엽서들이 처량하게 바닥에 흩어져 있었어요. 친구가 막 소리치고 허공에 대고 욕을 퍼붓는 동안 저는 말 없이 친구가 내팽겨친 짐을 주워서 정리했어요.


일단 짐을 다 정리한 후, 친구를 데리고 베오그라드 기차역 안에 있는 카페에 갔어요.

"야, 진정하구..."

"아놔...나 안경 해결 못하면 몰타로 돌아간다!"

"응?"

"뭐 보이는 게 있어야 여행을 하지! 지금 너 얼굴도 안 보이는데 무슨 여행이야!"


잠깐만...친구가 몰타로 돌아가 버린다면...?! 지금 친구는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요. 걔 말에 의하면 자기는 눈이 얼마나 나쁜지 안경 없으면 앞이 거의 안 보인대요. 가까이 있는 제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인다고 하니 얘가 혼자 몰타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 정도가 아니라 얘가 몰타 돌아간다면 저도 같이 돌아가야 하는 상황.




카페 안에 One Republic 의 All The Right Moves 가 TV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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