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중앙아시아 생존기 (2012-2013)

우즈베키스탄 1980년대 목화 스캔들

좀좀이 2012. 12. 2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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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에서는 목화 농업이 매우 중요한 산업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세계적인 목화 생산국 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지금도 목화 수확철이 되면 학생들이 목화 수확에 동원되기도 하구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목화를 하얀 황금 'oq oltin' 이라고 합니다. 교과서에도 종종 나오죠. 이 나라를 목화를 모르고 본다면 그건 이 나라를 보지 못한 거나 다름없어요.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 목화밭을 보게 되거든요. 목화밭이 얼마나 많고 넓은지 확실히 보려면 목화 수확철인 9월에 우즈베키스탄을 돌아다니는 것이 좋답니다.


우즈베키스탄_목화


하지만 목화가 항상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축복이었던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목화 때문에 아픈 역사가 있지요.


소련 시절, 우즈베키스탄은 소련에 농산물을 공급하는 주요 거점이었어요. 소련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농산물 생산이 가장 높은 곳이라면 우크라이나와 우즈베키스탄을 들 수 있지요.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것이라면, 우크라이나는 단순히 농업 생산물을 소련에 보급하는 곡창지대 외에도 공업 또한 크게 발전했어요. 체르노빌 사고를 겪기는 했지만, 러시아에서 안 되는 것은 우크라이나랑 손 잡고 하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는 과학기술, 공업이 엄청나게 발달했죠. 반면 우즈베키스탄은 실상 오직 농업 뿐이었어요. 심지어는 주요 목화 생산지임에도 불구하고 목화로 면직물을 만드는 공장조차 제대로 없었거든요. 우즈베키스탄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처럼 일종의 유형지였고, 주요 농업생산지역 역할만 담당하고 있었어요.


소련은 우즈베키스탄에 지나치게 무리한 목화 생산량을 강요했습니다. 이 무리한 목화 생산 할당량은 1970년대 들어서는 이제 우즈베키스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까지 다다랐어요. 이때 어느 정도로 극한의 상황까지 갔냐 하면


환경 문제 이야기할 때 종종 예로 등장하는 아랄해 - 이것도 목화 농업을 위해 무리한 관개를 하다보니 아랄해로 들어가는 강물이 크게 줄어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환경 문제 이야기할 때 제발 생각없이 아랄해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아랄해는 목화 농업을 위해 무리한 관개 사업을 진행해 말라가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업 발전과는 큰 관계 없습니다. 환경 문제임은 맞지만,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공업화로 인한 환경 문제'와는 거리가 아주 먼 이야기입니다. 아랄해의 고갈은 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사막화와 같은 부류의 환경 문제로, 농업과 개간으로 인한 환경파괴에 속합니다.


두 번째로 목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무리한 개간 사업이 끊임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풍족한 농업국가였던 우즈베키스탄은 식량 생산을 위한 밭조차 목화 밭으로 바꾸어야 했고, 결국 다른 소련 내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들로부터 식량을 수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 번째로 불법 노동이 만연했습니다. 아동 및 임산부들을 사실상 강제로 목화 농업에 동원했어요. 이렇게 안 하면 목화 할당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목화 농업은 농업 가운데에서도 가장 고된 농업으로 손꼽히는 농업입니다. 예를 들어 목화 수확은 전부 사람이 손으로 따야 합니다. 이러니 사실상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우즈벡 민족 전체가 목화 농업에 투입되었고, 불법 노동이 만연했어요. 참고로 소련 시절, 아동 및 임산부를 노동에 동원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었습니다. 실상이 어쨌든 노동자를 위한 국가이다보니 복지 체계는 매우 잘 발달해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잘 지켜지고 있었구요.


즉, 이미 1970년대에 우즈베키스탄 목화 생산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고, 더 이상의 증산은 불가능한 상황이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우즈베키스탄은 오직 '목화 생산을 위한 나라'가 되었으니까요. 위에서 언급했듯 목화를 가공하는 공장조차 우즈베키스탄에 없었구요. 오직 목화를 생산해 소련에 공급하는 목화 공급 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죠.


이미 1970년대에 이런 이유로 우즈베키스탄 목화 생산은 한계에 다다랐고, 온갖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강제적인 불법 노동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고, 목화 농장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데 그 위에 비행기로 제초제를 뿌려대어서 많은 사람들이 제초제 맞고 시름시름 앓고 죽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한편, 1980년대, 소련 연방정부는 우즈베키스탄 민족주의를 사전에 분쇄할 방안을 고안해내었어요. 이것이 바로 1980년대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뒤집고 쑤셔놓은 '목화 스캔들'입니다.


소련에서 민족주의가 강한 곳은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이 있었어요. 그 외 국가들도 민족주의가 있었지만, 이들 나라의 민족주의는 원래 강한 편이었고, 스탈린이 민족주의를 사실상 박멸시켰다고 하나 언제든 고개를 들 수 있는 상황이었죠. 가장 큰 이유는 소련에 강제 편입 (군사적 점령)된 지역인데다, 아제르바이잔에서의 아제리인,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우즈벡인의 비율이 매우 높고, 소련 영토 바깥에 있는 국가들에 거주하는 아제리인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는 아제리인보다 이란에 거주하는 아제리인이 훨씬 많습니다. 추정치가 800만~2천만, 보통 1천만이라 합니다), 우즈벡인들이 있어서 언제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실제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숨가이트 사태, 검은 1월 사건등이 발생해 소련이 무력 진압을 했죠)


하지만 이런 민족주의 및 소련 탈퇴의 움직임을 조기에 차단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게 소련 연방 정부의 문제였어요. 그래서 고르바초프는 1980년대에 우즈베키스탄 민족주의를 제거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안합니다. 이게 바로 '목화 스캔들', 또는 '우즈벡인 스캔들' 이라 불리는 사건이죠.


1985년, 소련 중앙정부에서는 그들얀 Gdlyan 과 이바노프 Ivanov 검사를 총지휘자로 한 검찰단을 우즈베키스탄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돌아다니며 목화 농업과 관련된 비리를 캐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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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 입장은 누명을 씌워 희생자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리고 실제 어떤 죄목과 어떤 경과로 진행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자료를 찾지 못했어요. 일설에 의하면 실제로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할당량을 뇌물을 주고 '가라'로 처리했다고 해요. 뇌물을 주고 할당량 채웠다고 한다 해도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이미 1970년대에 한계에 다다라 목화 농업을 위해 우즈벡인 총동원 상황이었거든요. 당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학교에서 9월부터 시작해 목화 수확이 끝날 때까지 - 짧게는 3개월, 길면 4개월 동안 학생들을 강제로 목화 수확에 투입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목화 생산 할당량은 늘어갔으니 뇌물을 써서 채우지 못한 할당량을 무마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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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우즈벡인들을 가두기 위한 비밀 감옥들이 건설되었고, 약 2만 5천명이 체포 및 감금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고문은 필수였구요. 목적이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소련 연방 탈퇴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는데, 무분별한 체포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정치와 아무 관련이 없는 무고한 목화 농부들, 부녀자, 아이들, 노인들까지도 마구잡이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당연히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한 명이 잡히면 연좌제 적용이 되었구요. 당시 주요 죄목은 사기와 뇌물수수였습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더욱 분개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은 이 일을 잘 모르는 편입니다. 국가에서 이 일을 1930년대 스탈린의 탄압과 더불어 소련의 탄압으로 인정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든요) 이 일이 '목화 스캔들' 이라는 이름 외에 '우즈벡인 스캔들', '우즈벡인 마피아' 라고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누명쓴 것도 억울한데 우즈벡인들이 대대적으로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다고 소련이 전세계에 알려버렸으니 이 나라 정부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 하죠.


이 일은 1985년부터 시작되어 계속 꾸준히 진행되었고,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들쑤셔놓았습니다. 이 일은 1989년 우즈베키스탄의 정권을 잡은 이슬람 카리모프 (현재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입니다) 가 1990년 소련의 경제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사실상 끝났습니다. 1990년 경제 계획에서도 우즈베키스탄의 목화 생산량 증산 내용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슬람 카리모프가 이것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었죠. 이때 이슬람 카리모프의 우즈베키스탄을 제외하고 모든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이 이 경제계획을 찬성했다고 해요. 소련 중앙정부는 사법부를 이용해 이슬람 카리모프에게 압력을 가하려 했지만, 이슬람 카리모프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목화 증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서 이 목화 스캔들도 사실상 막을 내렸죠.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 목화 스캔들로 누명을 쓴 사람들을 복권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해요.


p.s.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게 아직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보다 많고 자세한 내용을 찾을 수 없네요. 그리고 일반인들도 이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구요. '뇌물수수와 사기'라는 죄목이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무슨 목적으로 뇌물수수와 사기가 이루어졌다고 그들얀과 이바노프가 조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알 방법이 없어요. 단지, 1970년대 상황, 그리고 과거 소련 시절 목화 농업에 대한 증언들으로 미루어보아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죠.


두 번째로 우즈베키스탄이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러시아인의 탄압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나라가 왜 이웃한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과 달리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 중립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는지 보다 쉽게 풀어볼 수 있어요.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협력하기 위해 노력하는 카자흐스탄에 비해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지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굳이 비유하자면 좋든 싫든 어쨌든 같은 나라였고 대충 서로를 이해하기도 쉽고 가까우니 그냥 잘 지내자...랄까요? 우즈베키스탄이 자급자족은 가능한 나라인데다 어차피 자국 내 러시아인들은 우즈벡인들로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고, 이런 얼마 되지 않은 과거에 큰 일이 있었으며 이걸 해결한 것이 현재 대통령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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