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끝이 보인다!"
흥분이 가라앉았어요. 발에 누적된 고통과 다리에 누적된 피로가 주는 고통이 갑자기 폭풍처럼 확 몰려왔어요. 갑자기 발이 아프고 다리가 피곤해진 것은 아니었어요. 꽤 먼 곳부터 고통이 계속 강해지고 있었어요. 그것을 흥분한 상태라 못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어요. 흥분이 가라앉자 못 느끼고 있었던 고통이 본격적으로 제대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옛날 옛적, 빨간 구두를 너무 좋아한 한 소녀가 있었어.
그 소녀는 장례식장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갔어.
소녀는 저주받았고, 두 발은 죽을 때까지 춤을 추었대.
왜 제가 지금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 속 주인공 소녀의 고통에 공감해야 합니까?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 속 주인공과 저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새 신을 신었다는 점이었어요. 안데르센 동화 빨간 구두 속 주인공이 신은 빨간 구두는 새 구두였어요. 제가 신고 있는 신발도 몇 번 신지 않은 새 신발이었어요. 안데르센은 동화 빨간구두를 통해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여행 갈 때는 절대 발에 익숙해지지 않은 새 신 신지 말고 길들어서 편한 신던 신발 신고 가라구요.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 속 주인공이 저주 받아서 두 발이 죽을 때까지 계속 춤을 춘 이유는 금기를 어겼기 때문이었어요. 장례식장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가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뜨리고 장례식장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갔어요. 그 결과 빨간 구두의 두 발은 영원히 고통받게 되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운탄고도1330 8길은 아직 정식 개통된 길이 아니었어요. 안전이 확보된 길이 아니기 때문에 운탄고도 운영측이세 8길 가는 것은 지양하라고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갔어요.
제발 좀 앉아서 신발 벗고 쉬게 해 줘!
운탄고도1330 8길이 전혀 어려울 게 없는 구간인데 코스 길이가 짧은 이유를 두 발의 고통을 통해 깨달았어요. 쉴 만한 곳이 버스 정류장 뿐이었어요. 그 버스 정류장도 도시처럼 촘촘히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드문드문 있었어요. 버스 정류장만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었어요. 쉴 만한 곳을 찾으려고 한다면 찾을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하필 이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어요. 쉴 만한 곳이 다 빗물에 젖어 있었어요. 그러니 이건 거의 쉬지 못하고 계속 걸어야 하는 인내의 길로 변했어요.
마침 절묘하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아이유의 Eight 가사는 '이런 악몽이라면 영영 깨지 않을게'였어요.
이런 악몽이라면 영영 깨지 않을게?
아직은 즐거운 꿈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악몽이 되어버릴 거 같아!
방법이 없었어요. 신기역까지 죽어라고 걸어야 했어요. 이제 되돌이키고 말고 없었어요. 마차리역도 지났고 마차리 마을회관도 지났어요. 다 와놓고 포기할 수 없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어요. 마지막까지 빨리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방법도 없었어요. 포기하려면 결국 신기역 가서 포기하는 방법만 남아 있었어요. 신기역 도착하면 운탄고도 8길이 끝나요. 운탄고도 8길 종점이 신기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는 포기하고 자시고 없었어요. 오직 '완주'만이 유일한 해답이었어요.
다시 38번 국도로 들어왔어요. 마지막 38번 국도 타고 걷는 코스였어요. 그동안 계속 서로 춤을 추며 노는 것처럼 두 손 잡았고 껴안았다가 서로 밀어내며 멀어졌다가를 반복해온 강원남부로와 마지막으로 다시 두 손 잡고 같이 춤을 출 시간이었어요. 대평리에서 38번 국도와 424번 지방도 강원남부로가 갈라지는 지점이 나올 거였어요. 38번 국도는 이 지점에서 그대로 동해시로 쭉 올라가고, 지방도 424번 강원남부로는 신기터미널을 향해 뻗어 있었어요. 38번 국도와 424번 지방도 분기점에서 424번 지방도를 따라 더 걷다가 대평교에서 강원남부로와 드디어 작별할 거였어요.
38번 국도로 진입했어요.
진짜 1절만 해라.
노래방에서 두 곡 연속에 2절 끝까지 부르면 민폐인 거 몰라?
앵콜곡은 한 곡이나 불러주고 잘 해야 두 곡 불러주고 끝인데 이건 적당히를 몰랐어요. 다시 진입한 강원남부로. 덤프 트럭이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질주했어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구간이었어요. 이쪽은 차도가 진짜 38번 국도 뿐인 구간이었어요. 운전자에게 선택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구간이었어요. 좋든 싫든 마차리에서 대평리로 가는 구간은 길이 38번 국도 하나만 존재했어요. 그렇다고 도로 폭이 넓은 것도 아니었어요. 도로 폭도 별로 안 넓었어요. 아까는 트럭이 한 대 지나가고 조용해지면 다시 한 대 오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그냥 트럭과 나란히 함께 가는 수준이었어요.
아까와 비교해서 흰색 차선 바깥 구역 상태도 더 안 좋았고 더 좁았어요.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트럭에 신경써야 했어요. 트럭에 신경써야 했고, 그나마 더 걷기 좋은 방향을 선택해서 걸어야 했어요. 차가 지나갈 때마다 물보라 뒤집어쓰는 건 너무 계속 일어나서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하고 넘어갈 지경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비가 계속 내리고 있는데 대형 덤프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물보라가 피어올라오니 강원도 산 속에 워터파크 개장해버렸어요.
신기 산악회가 2007년 4월 22일에 세운 비석이 나왔어요. 비석에는 '동굴도시 삼척시 신기면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어요.
뭔 소리지?
나 신기면은 아까부터 들어와 있었는데?
마차리도 신기면이에요. 신기면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비석을 세울 거라면 마차리 입구나 마차리역에 세워놔야 할 거 같은데 마차리역 한참 지난 곳에 있었어요. 여기에서 더 가도 신기면이었어요. 마차리 북쪽 대평리도 신기면이고, 대평리 북쪽 신기리도 신기면이에요.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한가운데에 이런 비석이 있었어요.
끝없이 달려오는 덤프트럭들과 함께 오르막길을 올라갔어요.
"저거 때문에 덤프 트럭이 이렇게 많이 달리는 건가?"
삼척시 도계읍과 신기면을 연결하는 새로운 도로 공사 현장이 나타났어요. 카카오맵을 보면 이 도로는 2021년 완공이라고 나와 있었어요. 2022년 10월 6일인데 카카오맵에서는 여전히 2021년 완공이라고 나와 있는 개통 예정 도로였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서 신기면으로 이어지는 강원남부로에 어째서 대형 덤프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어요. 대형 공사현장이 있지나 않다면 덤프 트럭이 많이 다닐 일이 없어보이는 곳이었어요. 석탄이야 기차로 운반하고, 이 지역 석회석 광산은 싹 다 폐광했어요. 덤프 트럭 동원해서 운반할 만한 무언가가 아예 없는 지역이었어요. 초대형 공사장이 있지나 않다면요.
도계 신기 간 도로 공사 현장을 보자 왠지 저 도로 건설 때문에 덤프 트럭이 엄청 다니는 것 같았어요. 그거 말고는 이 길에 대형 덤프트럭이 끝없이 달리고 있는 현상이 설명되지 않았어요.
2022년 10월 6일 오후 1시 27분, 드디어 38번 국도에서 탈출하는 지점인 강원남부로와 38번 국도 갈림길에 도착했어요.
지도를 안 봐도 38번 국도로는 절대 가지 말아야하게 생겼어요. 아무리 이쪽 지역에 길이 별로 없다고 해도 저렇게 대놓고 차만 가라고 만들어놓은 도로로 가라고 할 리는 없었어요. 이 지역이 산간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 고가도로는 무조건 터널 한 번은 만날 거였어요. 걸어서 터널을 관통해라...그건 진짜 아니었어요. 그렇게 코스 설정하면 이 길 걸은 사람들에게 욕 바가지로 먹을 건데요.
저 38번 국도 고가도로가 강원남부로와 38번 국도가 다시 찢어지는 지점이었어요.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며 매우 만족스러워졌어요. 왜냐하면 운탄고도1330 8길이 왜 강원남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는 사진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어요. 고가도로 아래쪽으로 보면 피암터널 입구가 있어요. 피암터널 입구쪽 철길 너머 푸른 밭이 바로 운탄고도1330 8길 코스가 이어지는 대평리였어요.
조금 더 걸어가서 대평리를 내려다봤어요.
'설마 저 덤프 트럭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길을 가라는 건 아니겠지?'
지금 걸어온 길도 까딱 잘못하면 사고날 수 있는 매우 조심해야 하는 구간이었어요. 오십천 너머 대평리를 바라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덤프트럭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길은 차선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어요. 차선이 없는 길에 덤프 트럭에 저렇게 줄지어서 달리면 정말로 위험해요. 흰색 차선의 유무가 안전에서의 차이에서는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를 만들어요. 흰색 차선이 존재하면 흰색 차선을 경계로 사람도 흰색 차선을 침범하려 하지 않고 차량도 흰색 차선을 침범하려 하지 않아요. 그래서 흰색 차선 바깥 구석이 아무리 좁아도 흰색 차선이 있으면 그래도 너무 위험한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하지만 저렇게 흰색 차선이 아예 없는 도로는 사람도 차를 보며 피해야 하고, 차도 사람 보며 피해야 해요. 사람도 차도 모두 감에 의존해서 조심해야 하다 보니 진짜 위험해요.
덤프 트럭이 줄지어 달리고 있는 도로가 바로 대평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대평교를 지나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영동선 철길 따라 쭉 걸어가는 길이었어요. 이 길은 대평리 벗어날 때까지 계속 철길이 길 넘어가는 것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대평리 외곽으로 걸어가는 길이었어요. 대평교 지나서 남쪽으로 가면 대평리 마을회관을 갈 수 있는데 바로 그 남쪽길이 위에 있는 사진 속 덤프 트럭이 줄지어 달리고 있는 길이었어요.
"저건 정말 못 가겠다."
왠지 운탄고도1330 8길 지도에 나와 있는 '대평리'는 대평리 마을회관을 지칭할 것 같았어요. 이런 관광 목적으로 설정된 도보 여행 코스를 보면 대체로 마을 내부도 한 번 들렸다 가도록 설정되어 있어요. 쇠락한 동네, 소멸 위기 동네에 조금이라도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목적도 있거든요. 그리고 보통 마을 이름만 덜렁 있으면 마을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대평리에서 가장 대표적인 장소라면 아무래도 대평리 마을회관이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저 길은 아니었어요. 원래 저 길을 운탄고도1330 8길 코스로 설정하려 했다고 해도 계획 변경해서 바꿔야할 판이었어요. 강원남부로 따라 걷는 길은 그래도 흰색 차선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쪽은 정 안 되면 차선규제봉이라도 박으면 어떻게 되요. 하지만 저 대평리 마을회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차선규제봉도 제대로 못 박게 생겼어요.
아무리 봐도 저 길로 가라고 했을 거 같지 않았어요. 운탄고도1330은 원래 2022년에 전구간 개통이 목표였어요. 저 길에 덤프 트럭이 많이 다니고 있는 이유는 저 길 너머 어딘가에서 대규모 공사가 진행중이기 때문일 거였고, 제 추측으로는 도계 신기간 도로 공사가 진행중일 거였어요. 운탄고도1330 계획 단계에서 공사는 이미 진행중이었을 테니 저 길로 가라고 했을 거 같지는 않았어요.
강원남부로를 걸으며 덤프 트럭에 시달리는 것도 힘들었는데 저 길에서 더 심하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어요. 상상만 해도 끔찍했어요. 그래서 얌전히 영동선과 오십천 따라 외곽으로 걷는 길로 걷기로 했어요.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 입구까지 왔어요.
강원도 삼척시 하천 오십천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어요. 아까 아침에 출발할 때 도계에서 봤던 오십천에 비하면 유량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 있었어요. 약 18km만에 오십천은 나름 큰 하천으로 성장해 있었어요.
대평교를 통해 오십천을 건넜어요.
드디어 강원남부로와 작별했어요. 이제부터는 조용한 길로 걸을 거였어요. 마음놓고 걸어도 되는 길만 남았어요. 육체적으로는 아직 휴식을 취할 수 없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고통스러운 구간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주변이 매우 조용해졌어요. 좁은 농로를 따라 걷는 길이었어요. 바로 오른쪽은 영동선 철길이었어요.
"기차다!"
시멘트 운송 열차가 지나갔어요.
시멘트 운송 열차가 지나가자 철로를 바라봤어요.
"설마 여기서 건너서 마을 안쪽으로 가라고 해놓지는 않았겠지."
철로 중간에 철제 담장이 없는 구간이 있었어요. 무단 출입하면 안 된다는 경고문이 철제 담장에 붙어 있었어요. 가드레일이 이어져 있지 않고 굽어서 끝난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코레일에서 동네 주민들 때문에 철길 건널목까지는 설치하지 않고 대신 경고문 붙이고 담방을 설치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만약 여기에 철길 건널 수 있는 곳이 없다면 오십천쪽 땅과 대평리 안쪽 땅은 영동선 철도 때문에 완전히 단절되어버리거든요. 여기가 없다면 철길 건너가기 불편한 수준을 넘어서 대평리 양쪽 끄트머리까지 가야만 철길을 건너갈 수 있었어요.
오른쪽은 영동선 철도 때문에 철제 담장이 쳐져 있었어요. 왼쪽은 오십천 때문에 철제 담장이 쳐져 있었어요.
평화로운 강원도 산간지역 농경지역 풍경을 감상하며 걸었어요.
"아, 아까 흥전항 직원분께서 말씀해주신 시멘트 공장이다!"
오십천 너머 안의리 쪽에 한라시멘트 신기공장이 보였어요.
도계는 석탄에 웃고 울고, 삼척은 석회석에 울고 웃고.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은 한라시멘트 삼척공장 때문에 웃었고, 울었습니다.
한라시멘트 삼척공장은 원래 홍성산업 삼척공장이었어요. 홍성산업이 어려워지면서 라파즈한라시멘트가 2002년에 홍성산업 삼척공장을 인수했어요. 라파즈한라시멘트는 홍성산업 삼척공장을 인수한 후 이름을 라파즈한라시멘트 제 2공장 신기공장으로 변경했어요.
그러나 한라시멘트가 삼척 신기공장을 인수한 지 불과 2년 후인 2004년, 한라시멘트는 건설경기 침체와 값싼 수입시멘트 유입, 환율급락 등의 원인 때문에 심척 신기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했어요.
한라시멘트는 2016년 3월에 국내 사모펀드 글랜우드PE와 홍콩계 사모펀드인 베어링PEA에 매각되었고, 이때 사명이 라파즈한라시멘트에서 다시 한라시멘트로 변경되었어요. 2017년 5월에 베어링PEA가 한라시멘트의 모든 지분을 인수했어요. 다음해인 2018년 1월에 베어링PEA는 한라시멘트 주식 98.45%를 아세아시멘트에 매각했어요. 이때부터 한라시멘트는 아세아시멘트의 계열사로 편입되었어요. 아세아시멘트는 한라시멘트를 인수했지만 아세아시멘트의 계열사가 된 한라시멘트 사명은 여전히 한라시멘트에요.
한라시멘트가 여러 회사 품에 안기고 이동했던 과정 동안, 그리고 아세아시멘트 계열사로 편입된 이후에도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은 여전히 가동 중단 상태에요.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에 직원은 여전히 몇몇 있지만, 공장이 가동되고 있는 상태는 아니에요. 한라시멘트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사업장 안내 페이지에 삼척 신기공장은 아예 없어요.
과거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은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이 가동중일 때는 사람들이 꽤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한라시멘트가 가동 중단되자 사람들이 다 떠나갔다고 해요. 삼척시 도계읍이 석탄에 웃고 울었다면 신기면은 석회석 - 시멘트에 웃고 울었어요.
만약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이 계속 가동중이었다면 기차역 중 하나는 살아남았을까?
여객 업무가 중단된 기차역 중 하나라도 살아남았다면 운탄고도1330 코스가 바뀌었을까?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이 가동중이었을 때는 이쪽에 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했어요.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신기역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신기터미널이 있어요. 지도로 보나 로드뷰로 보나 터미널이 있게 생긴 동네가 아닌데 터미널이 존재해요. 신기터미널은 심지어 태백에서 삼척, 동해를 거쳐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도계와 더불어 중간에 정차하는 터미널이에요. 보통 인구가 많지 않다면 이 정도로 터미널을 만들어놓지 않아요. 중간에 잠시 정차하더라도 대충 버스 정류장에 정차하고 말죠.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이 만약 지금도 가동중이었다면 도계역부터 시작해서 동해역까지 그 사이에 존재했던 여러 기차역이 다 폐역이 되었을지 궁금해졌어요. 현재 도계역부터 동해역 사이에 사람이 기차에 탑승할 수 있는 기차역은 신기역이 유일해요. 도계역부터 신기역 사이에 있던 고사리역, 하고사리역, 마차리역이 폐역되었어요. 신기역부터 동해역 사이에 있던 상정역, 미로역, 도경리역이 폐역되었어요.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이 지금도 가동중이었다면 이 일대는 여전히 사람들이 꽤 거주하는 지역이었을 거에요. 그러면 신기역을 중심으로 기차역 하나 정도는 더 살아남았을 수도 있어요.
운탄고도1330 8길 코스는 총 17.73km라고 나와 있고, 운탄고도1330 9길 코스는 총 25.15km라고 나와 있어요. 8길은 어려울 것이 전혀 없는데 희안하게 짧고, 9길은 아무리 평지라고 해도 너무 길어요. 만약 신기역 너머 상정역이 사람이 기차에 탑승할 수 있는 기차역으로 여전히 운영중이었다면 운탄고도1330 8길 종점은 신기역이 아니라 상정역이었을 수도 있어요. 카카오맵에서 신기역에서 상정역까지 거리가 도보로 5.5km라고 나와요. 8길에 5.5km를 더해주면 23.23km, 9길에 5.5km를 빼주면 19.65km에요. 9길이 짧아보인다면 도중에 도경리역 찍고 오게 하면 되구요.
그러나 다 부질없는 가정이었어요. 폐역은 폐역이니까요. 미래에 운탄고도1330 8길이 사람들 엄청나게 많이 찾아오는 유명한 길이 되더라도 운탄고도1330 8길과 9길에 있는 여러 폐역들 중 하나라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에요. 그보다는 신기역에 정차하는 열차가 한 대라도 더 늘어나겠죠. 신기역 인근에 숙소가 더 생길 거구요.
밭 가운데에 무덤 3기가 있었어요.
'저거 설마 고사리역, 하고사리역, 마차리역 무덤 아냐?'
참 절묘했어요. 도계역에서 신기역 사이에 있는 폐역은 3곳. 운탄고도1330 8길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 등장한 밭 가운데 있는 무덤도 딱 3기.
뒤를 돌아봤어요.
다시 한 번 이 지역 역사 그 자체인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을 바라봤어요.
누군가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보기 싫은 공장이 있어서 풍경 완전히 망쳐버렸다고 악평을 남길 거에요. 그러나 제게는 아니었어요.
아름다워.
너무 아름다워!
농촌과 자연 속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저 공장이 있기 때문에 이 풍경이 가치가 있고 빛나고 있었어요. 저 공장은 이 지역 모든 것을 아무 소리없이 모두를 향해 쩌렁쩌렁하게 외치고 있었어요.
여기는 석탄 지대가 아니라 석회석 지대다!
여기는 연탄이 아니라 시멘트다!
이 지역의 역사는 바로 이 공장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안 보였지만 한라시멘트 삼척 신기공장이 이 동네의 모든 것을 너무 잘 알려줬어요. 저 공장이 보이기에 이 지역 또한 운탄고도1330에 위치한 석탄산업 몰락으로 쇠락하고 몰락하고 사라진 동네들과 같은 분위기와 큰 서사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이제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와 작별할 때가 왔어요. 오십천을 건너면 드디어 신기역이 있는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신기리였어요.
오십천과도 이것이 마지막이었어요.
다리를 건넌 후 뒤를 돌아봤어요. 영동선 철로도 저와 같이 오십천을 가로질렀어요. 이 철도와 작별하려면 한참 남았어요. 하루 종일 이 영동선 철도와 같이 할 거였으니까요.
"아, 왜 오르막이야!"
쉽게 끝날 줄 알았니?
운탄고도1330 8길이 낄낄 꺄르륵 웃으며 저를 약올렸어요. 마지막 다 와서 또 오르막길이었어요. 경사가 꽤 있는 오르막길이었어요. 이 오르막길을 다 올라가야만 신기역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아오, 힘들어 죽겠네. 발도 너무 아프구. 이 신발 대체 어떻게 하지?'
머리 속에 드는 생각은 딱 두 개였어요. 하나는 막판에 이렇게 힘든 오르막길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힘들었어요. 다른 하나는 이렇게 힘들게 만든 결정적 원인인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대체 어떻게 할지였어요. 신발은 볼이 좁아서 발 뼈가 너무 쑤셨어요. 신발이 발에 잘 맞았다면 이 정도로 고생할 길은 아니었어요. 아무리 중간에 거의 안 쉬고 주구장창 걷다시피 걸었다고 해도요. 신발 문제가 지금 발 아프고 다리 아픈 이유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여행 갈 때는 신발 문제 좀 어떻게 머리 써봐야겠다.'
다음에 여행 갈 때도 일단 이 신발을 신고 갈 거였어요. 그때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평소에 열심히 신고 다니면서 길들이든가 다른 신발을 보조로 들고 가든가요. 새 신발 구입하는 것은 절대 답이 될 수가 없었어요. 요즘 유행하는 신발 디자인은 발 볼이 매우 좁은 거의 칼발 디자인이라서요.
발을 질질 끌며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갔어요.
"너는 거기서 뭐하냐?"
'거대 마시멜로'라고 불리는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 1개가 버스 정류장에 있었어요. 사람은 없는데 하얀 거대 마시멜로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버스정류장은 신기리 버스정류장이었어요.
역시 아무리 봐도 감나무에 열린 감만 없으면 봄 풍경이었어요.
"어? 기차 지나간다!"
무궁화 열차가 신기역을 향해 달려갔어요.
"아, 망했네!"
신기역은 기차가 자주 정차하는 기차역이 아니에요. 기차를 한 번 놓치면 한참 기다려야 해요. 신기역까지 거의 다 왔지만 아직 달려서 순식간에 도착할 거리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무궁화 열차가 신기역으로 달려가버렸어요. 앞으로 기차를 또 한참 기다려야 하게 되었어요.
잠깐만, 저거 내 기차 아니지 않나?
오늘 일정 망했다고 짜증 확 났지만 그건 그거고 기차가 지나가니 기차 사진 찍자고 갤럭시노트10+로 기차 사진을 촬영한 후였어요. 뭔가 이상했어요. 제가 타고 갈 기차는 아직 신기역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어요. 방금 지나간 기차는 저와 상관없는 기차였어요. 제가 타고 갈 기차도 무궁화 열차였고, 방금 신기역을 향해 달려간 기차도 무궁화 열차였어요. 하지만 방금 지나간 열차는 신기역에 정차하지 않는 무궁화 열차일 거였어요.
"깜짝 놀랐네!"
방금 지나간 열차는 저와 상관 없는 열차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다시 평화로워졌어요.
2022년 10월 6일 오후 2시 3분, 운탄고도1330 8길 종점 신기역에 도착했어요.